예수는 누구신가?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오실이,(1:4)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영원성에 관한 그의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구속사와 다시 오실 심판주의 강림에 관한 내용이다. 때로는 계시록의 첫 부분을 소홀하게 다룰 때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함은 첫 부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기대하기로는 세상에 대환난이 언제 있으며 주님의 공중 강림은 언제 있는가? 하는데 초점을 두고서 여기에 관해서는 관심은 많다. 그러면서도 첫 부분인 예수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첫 부분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사람이 집을 지을 때 기초가 튼튼해야 하듯이 계시록을 이해하려 할 때 계시의 말씀을 주신분에 관하여 알아야 되므로 첫 부분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된다.
예수의 본질
전에도 계셨다: 창조이전부터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 님 이시라”(요1:1) 신자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된다. 예수님은 형태도 없고 시작도 마침도 없는 무한하신 존재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의 무한을 ‘말씀이라’ 하신다. 이 말씀이 모든 지혜와 이해와 납득을 초월하시며 신비가 무한히 어울려지는 곳에서 스스로 계신 상태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신다. 이 무한(성부)과 무한(성자)이 발출(성령)하는 영의 위격을 삼위일체라 부른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분으로 교훈하신다. 더 쉽게는 사랑 안에 생명을 살리는 빛이 있다는 뜻을 ‘그 안에 생명이.....그 안에 빛이’ 있었다. 이 무한과 무한이 발출하는 영원한 숨길인 본체를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하시는 예수께서는 전에도 계셨다 하신다.
이제도 계신다: 계시를 주시던 그때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영광의 보좌에 다시 앉으시고,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이 세상이 되어져가는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태복음 24장 36절과 마가복음 13장 32절, 두 곳의 말씀을 여기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두 곳에서는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강림 때를 모른다고 말씀하시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의 하늘 보좌에서 계시기 때문에 지금은 아신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장차 심판하러 오시는 심판주가 당신의 강림 날을 모른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자신의 때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기록 되어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실 때는 땅에서 하신 말씀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올라가 계시므로 위의 두 곳은 바꾸어 해석하여야 될 것이며, “아무도 모르나니”라는 원어에서 이해되어야 된다.
헬라어 ‘오이덴(οiδεν)’은 희구법(optative mood) 현재완료 단수 3인칭이다. 희구법은 강한 우연성 또는 가능성을 나타내며, 확정적인 실현성을 조금도 예상하지 아니하고 다만 상상할 뿐이다. 가정법보다 더 가상적인 것을 나타내며, 현재와 미래에 상반성을 나타낼 때 쓰이는 문법이다. 그러므로 하늘보좌에 앉아계시는 지금은 당신의 강림하실 때를 알고 계신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장차 오실이: 공중 강림을 시점으로 하여서 이 땅에 오시고 천년왕국과 심판이 끝날지라도 예수님은 영원까지 계신다는 말씀이다. 셋을 합해서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인 알파와 오메가라고 예수님의 본질을 말씀하여 주신다. 이렇게 영원하신 예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종말까지 주관하시며 섭리하신다. 예수님에 대하여 8절에서 전능이란 말씀 속에 그 뜻이 담겨있다. 전능은 한 아들이 낳는데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9:6)하신 말씀이 예수님은 누구라는 분임을 알려준다.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알려주신다.
보좌 앞에 일곱 영: 하나님의 보좌가 아니라 예수님의 권세를 말씀하신다.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쓰여 졌다. 이 뜻은 예수에게 일곱 영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통 우리는 이 구절에서 일곱 천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인데 어째서 일곱 영이 되는가? 구구한 해석과 이론이 있으나, 그러한 해석과 이론은 성서적인 해석은 아니다. 첫째 해석은 예수에게는 특별속성이 있음을 말한다.
일곱 가지의 신적속성에 대하여, “여호와의 신이 있으며, 지혜의 신이 있으며, 총명의 신이 있으며, 모략의 신이 있으며, 재능의 신이 있으며, 지식의 신이 있으며, 경외하는 신이 있으며, 등 장차오실 전능하신 영원성을 ‘일곱 영’이라 하였다. 둘째 해석은 셋째하늘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일곱 신들을 말한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모양으로 하나님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 신들이다. 신들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는 신들은, 천국의 모든 존재가 여호와의 속성에서 조금이라도 이탈하는 것을 감시하는 일종의 ‘사법기구’와 같이 감시하는 존재들인데 하늘의 모든 천사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들이다.
이들 일곱 신들은 각기 맡은 임무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한 특징을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자기가 오실 강림 때를 알고 계시는가, 모르고 계시는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아버지라 하셨고 성령님이 예수님 자신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되시는 주님이 자기 때를 모른다면 예수님은 전능하실 수 없고,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성된 증인: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사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는 부활의 예수님으로 알려준다. 구약성도들과 신약성도들 중에서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산자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다 육으로만 살아났기 때문에 예수님보다 먼저 완전하게 살아나지 못하였다.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영원히 살지 못하고 다시 죽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영원히 사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충성된 증인이란 말씀에 대하여 이사야는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자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다” 하셨다.
이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고 다시 부활하셨으므로 영원히 충성된 증인이시고 명령자가 되셨다. 증인이 죽고 없으면 증거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증인은 살아있어야 증거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한 증인이 되시는가? 예수님은 만물을 만드실 때 계획하고 이루어 나아갈 본인이란 말이다. 이렇게 계획하고 주관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아버지와 성령만이 강림 때를 알고,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성자는 모른다고 말하는가? 알아야 증인이 되시고, 알아야 인도자가 되시고, 알아야 명령자가 된다. 모르는 일은 죄인들인 인간이 모를 뿐이지 영이신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고 성경은 증거 한다.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니라.(마24:36.막13:32)
두 구절만을 놓고 예수도 자신의 강림 때를 모른다는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생길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전능성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 타락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논리는 피해야 된다. 그리스도가 자신의 강림시간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잘못은,
첫 번째; 한 구절만 보고 앞 뒷장 전체의 성경을 생각하지 아니한다.
두 번째; 그때는 세상에 있을 때였으나, 지금은 신성으로 하늘 보좌에 계시기 때문에 성자는 당신의 재림하실
시간을 알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데 있다 .
세 번째; 그리스도께서 지금 땅에 있는가? 아니면 하늘나라에 있는가를 구별하지 못하는데 있다.
네 번째; 아들도 모른다고 말한 때와 예수님이 밧모 섬에 있는 요한에게 와서 말씀하실 때와의 모습을 어떻게
다른가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
다섯 번째; 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에 경고하신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행위가 합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도 자신의 강림 때를 모른다고 사탄의 미혹에 빠져서 성자 하나님의 전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전능하고 영존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므로 당신의 강림시간을 아신다는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지로 말하는 행위라는 사실이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던 그 당시에는 인성을 입으셨기에 모르셨다 할지라도, 지금은 인성을 벗어버리시고 하늘보좌에 계시는 그 본체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로 영광에 앉아계신다.
하늘나라에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더 이상 세상에 오셨던 인간적인 예수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며,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므로 아신다. 그러면 우리도 알 수 있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참증인 이시기에 증인이신 그분이 우리에게 증거 하여주실 때는 우리들도 알게 된다. 우리의 인도자가 인도하시면 우리도 알게 되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면 우리가 알게 된다. 그러면 무어라고 명령하시는가?
대환난이 있음을 알려주신다. 누가 이렇게 알려주시는가? 참증인되시고 우리의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13절은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로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 한다” 했다. 주님께서 당신의 성령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신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16:12-15)
그러나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이 말씀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이요, 충성되고 참되신 증인이신 예수님의 증거다.
예수의 구속사역
만왕의 왕이시며 전능하신 그분이 세상에 오신목적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늘 지성소에서 일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또 하나님 이신 성자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섭리가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중요성을 5-6절까지에서 증거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사역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라고 5절은 말한다. 그러면 그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1. 우리가 땅에서 구원받으며 살고 있다.
2. 우리가 땅에서 죄의 용서받으며 살고 있다.
3.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존재로 살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 가실 일곱 절기에 근거하신다. 이 절기에 대하여 간단하게 요약하면, 유월절. 무교절, 초실 절. 네 절기는 다 이루었다. 유월절의 예표에 따라 날자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골고다에서 죽으셨다. 무교절의 예표에 따라서 사흘 동안 무덤에 있을 때 자기 피로서 하늘나라 지성소에 들어가서 단번에 속죄를 드리셨다. 초실절의 예표대로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오순절의 예표대로 부활 후에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승천 후에 약속대로 10일 만에 성령을 보내주셨다.
이제 나팔절과 속죄일과 장막절이 남아있다. 지나간 네 절기를 순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성취시켰다면, 남은 세 절기도 순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이루실 것이다. 모든 것들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셨고, 또 오셔서 천년왕국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결코 그 사랑을 떠나서는 살수 없다. 이 사랑을 말할 때 하나님의 공의가 그의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야한다. 바꾸어 말하면 공의를 이루시기 위해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 받은 것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그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5절은 말한다. 이 말씀은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죽어주지 못하지만, 그리스도만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주고 피를 흘려서 대속하여 주셨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가 철저하게 알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산다는 것을 모르면 마지막 대 환난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사랑이란 단어 속에 공의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바른 이해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분 앞에서 순종 하 지 아니하고, 그 마음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죄에서 떠나지 못한다. 보혈의 피에 대하여 감사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죄에서 떠날 수가 없다. 죄에서 떠나지 못하면 하나님은 버리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못하게 할 것이요.(호4:6)
너를 버리고 제사장이 되지못하게 한다는 말씀은 이 땅에 버려두고 대 환난을 당하게 하고 천년왕국 때 다스리는 왕권도 없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지 못한다는 두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예 수님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죽기까지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다”고 6절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나라와 제사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들은 제사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학자들 간에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근거하여 제사장을 만인 제사장이란 의미로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예배형식에서의 각기 필요한 제사장이지 하늘나라에서는 필요 없다는 해석도 한다. 그래서 땅과 교회의 목사를 말한다고 인신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해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헬라어 원전은 세상 나라로 표기하지 않았으며, 이 내용은 20장 6절에서도 약속하신 나라는 ‘하늘나라 백성’을 말하고 제사장은 하늘나라에서 제사에 참여할 자격’을 말한다. 그래서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사역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을 당신의 아들들이 되고 왕과 같은 칭호를 받게 하고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신다.
이처럼 엄청난 사랑을 받으면서도 헛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첫째 하늘)에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사는 자비를 베푸신다. 그리고 왕국(둘째 하늘)에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지금도 사역하신다. 우리는 시온(셋째 하늘)에서 제사장 직임에 참여하기 위하여 두 가지 사명이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한 제사장의 일
모든 허물과 더러움과 약점과 고통을 제사장이 지고 매일 기도하며 헌신하는 생활이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과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헌신한 것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는 일과 말씀을 전파하는 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하는 직임을 수행하였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오심을 교회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이 제사장의 사명이요 하늘나라 제사장이 되는 사명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자가 되라 하셨지 교인이 되라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뜻을 모르기 때문에 성도들을 교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땅에만 집착하고, 영혼을 위해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을 전하게 되면 비난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제자를 만드는 사람을 핍박하게 한다. 예수님은 제자를 만드는 자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주님의 오심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신부의 믿음을 잃지 않도록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쉬지 않으시고 기도하여 주신다. 은혜는 영적 축복이요, 평강은 마음에 주어지는 육신의 축복이다. 영과 육신에 복 주시는 것은 마지막 때까지 “너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까지”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는 자비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관하여
7절 말씀은 예수님의 공중재림부터 설명하신다. 다니엘은 옛적부터 항상 계신 분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다. 예수께서 직접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했을 때 대제사장들이 자기 옷을 찢으며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다. 그러면 어떤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인가? 생명 강을 타고 오시는 장면을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아와서 광야생활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고 모세와 대면하던 때를 생각하면 된다. 생명 강을 타고오심을 성경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하신다. 무덤이 열리고 산자가 들림을 받으려면 문자적인 구름이 아니라 생명 강을 타고 오셔야 한다. 생명강물은 살리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타고 오시는 생명 강 물방울이 온 지면에 떨어지며 그분이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으로 예수 안에서 삶을 살았다 죽은 자들의 무덤과, 예수 안에서의 삶으로 살아있는 산자에게 떨어질 때, 무덤이 열리고 산자 역시 생명수를 받는 자만이 부활되고 휴거된다는 말씀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여기에서 호령이란 뜻은 심판주로 오실 때 어두움의 권세에게 꾸짖는 호통이다. 친히는 예수께서 직접 오신다는 말씀이다. ‘오실 자’를 1절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셨고, 7절에서는 그리스도라 하셨으므로 우리를 위하여 오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란 말씀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실 때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 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하였다. 그를 찌른 자들과 애곡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실 때 옆구리를 찌른 육신들이 아니라 그들의 영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들림 받을 성도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공중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공중 강림은 심판의 시작인데도 때를 외쳐도 듣지 않았던 자신들이 순종하지 않았음을 애통하며 회개할 것이다. 또 잘못된 신자라고 조롱하고 핍박했던 사람들은 대 환난을 생각할 때 자신들의 무지함을 애통하며 복통을 치고 울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림은 교회사적으로 많은 의문과 문제로 이어져왔다. 반복되는 강림문제도 있었으나 어두움의 권세는 온전치 못한 지도자들과 신자들을 매개체로 사용해서 복음사역에 해를 주어왔다. 또한 주님의 강림을 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비난하고 출교까지 시켰었다. 뿐만 아니라 비난과 핍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교회들을 폐쇄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어두움의 권세가 많이 침투되어 있는 교계 지도자들로 구성된 단체에서 가장 심했다. 그들이 권력이나 위치를 유지하려고 국가권력이나 정치를 악용하기도 했었다. 저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잘못은 성경에 근거하여 볼 때 온전한 신자는 주님의 때를 알리게 되고 온전치 못한 사람은 주님이 오실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계시록 3장 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주의 오심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의 영이 잠들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빛의 자녀들은 주님이 오시는 때를 자세하게 알수 있다하였다.(살전5:1-6)
주님의 강림을 ‘마귀가 가장 싫어한다’ 하시면서 이런 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하셨다. 사탄의 사주를 받고 있는 자들은 ‘Error다’ ‘틀렸다’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심판주로 재림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아버지의 권능으로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할 때도 그러했다. 또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리니 할 때도 예수님을 죽이는데 까지 넘겨준 것은 사탄이 부활을 싫어하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사탄에게는 무저갱으로 들어가는 두렵고 떨리는 형벌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림 때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하속이라고 경고하셨다. 사람들이 가장 큰 잘못을 범하는 첫째가 예언에 관하여 오해한다. 때로는 예언이 ‘맞았다’ ‘틀렸다’ 아니면 ‘Error’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예언이 ‘옳았느냐’ ‘옳지 않았느냐’ 말하기 전에 예언의 성질부터 알아야 된다. 예언이 지니는 성질자체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예언에 대하여 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실 때 ‘계시’라고 부른다. 계시를 받는 사람 편에서는 ‘예언’이라 한다. 이 뜻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고 인간을 향하여 경고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사람은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경고할 때 예언이라고 부른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요나를 통하여 예언하는 날로부터 40일후면 멸망당한다 하였다.
요나는 이 계시를 받고 40일후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니느웨는 망하지 않았다. 왜 요나의 예언이 적중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계시가 잘못인가? 요나의 예언이 틀렸는가? 니느웨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듯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경고 할때 회개하고 돌아서면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언이 맞았느냐 틀렸느냐 논쟁에 앞서 먼저 생각할 점은 예언의 성질부터 알아야 된다.
예언의 성질이란 ‘절대적이냐’ 아니면 ‘조건적이냐’ 하는 것이다. 예언은 절대적이 아니라 조건적이라는 성질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경고를 하실 때는 ‘조건이 요구’된다.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조건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뜻을 충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셨다. 따라서 요나의 예언도 맞지 아니했다. 그것은 예언자체가 조건적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예언문제에 관해서 더 정확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계시에서 답을 주신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이르시되...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할 때에....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그 죄를 사하고....(대하7:12-16)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전달한 예언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켰을 때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계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사람들은 ‘맞지 않았다’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예언에 관하여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하이레시스(αiρεσιs)
이 말은 교계에서 입버릇처럼 쓰는 유행어 ‘이단’ 이란 말이다. 그러면 이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어의 ‘하이레시스(αiρεσιs)’를 우리말로 이단이라 부르고 있다. 이 뜻은 선을 행하여 선택한다는 말에서 파(αiρεσιs )로 지목할 때 쓰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소속으로 지목할 때 쓰이는 말이다.
산헤드린회원들(바리새파, 사두개파)이 정치집권 욕 때문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이용해서 그리스도교를 지목했던 말에서 시작됐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투옥시킬 때에도, 스테반을 죽일 때에도, 모든 사도들을 죽일 때도 그랬다. 사도행전에서 교회를 문을 닫게 하고, 성도들을 죽이면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매도했던 데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을 사탄의 사람들이 즐겨 써먹는 말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αίρεσεωs)’의 괴수라.(행24:5)
저희가 ‘이단(αiρεσιν)’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가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24:14-15)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이단-αiρέσεωs)’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라.(행28:22)
사람들이 말하는 이단이란 뜻이 무엇인가를 헬라어 성경은 자세하게 의미를 말하여주신다. 그러므로 원어를 통하여서 정확한 뜻을 이해하고 바르게 알지 못하는 논리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한다. 예수를 자신의 구원의 주라고 말하면서 바리새파처럼 그리스도를 욕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으며,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는 목자들이 많다고 하셨다.
바울은 원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엄하게 배운 바리새파 사람이었다. 한때는 스테반을 죽이게 했고, 예수를 믿는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핍박하며 체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후에 자신의 잘못된 사상을 깨달았고, 자신의 믿음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항상 정통을 주장하고 의식과 권위주의만 찾는 바리새파 사람들, 영도 없고 천사도 없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파의 사상이 잘못임을 깨닫고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 후에 예수파가 된 바울은 부활복음을 믿고 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나사렛 이단(αiρέσεωs)의 괴수(Ναζωραάων)’로 지목을 받아야 했다. 그때 바울을 죽이려고 쓴 말이 ‘하이레시스(αiρεσιs)’였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에서 이단이란 말을 할지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예수파가 아니라, 자신은 사탄 파(계2:9)라고 시인하게 된다.
이는 성령훼방(βλασφημία-브라스페미아)죄를 지었기 때문에 바깥( ἐξώτρο??-에쵸테로스) 어두운(ξόφο??-죠포스)데로 쫓겨난다. 거기서 슬피울며(κλαυθμό??-크라우데모스)이를 갊이 있게되는 연단장(βήμα-베마)에 가서 고통을 당한다고 경고한다.(막3:28-29,마12: 31-32,눅12:10)이런 사람은 타락되어서 회개될 수 없으므로(히6:4-6, 10:26 ) 그런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해 주지 말라 한다(요일5:16).
그러므로 함부로 이단이란 용어는 사용하면 안 된다. 만일 자신이 사탄의 파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깊이 생각하고 예수를 욕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욕을 한다고 다 욕할 수는 없는 경우가 있다. 세상에서 내가 모시는 윗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욕을 한다고 나도 욕하지는 아니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시켜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욕할 수 있을까? 불신자나 이방종교인들은 예수파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자를 향하여 이단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나 이방종교인을 향하여서 같은 파가 아니므로 이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예수를 믿는 교회나 성도들을 향하여서는 이단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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