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은혜의 수단인 성례 제 1절 성례의 정의 성례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정된 거룩한 제도로서 그리스도 안에 성도들에게 전달되는 감각적 표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각적 표호로서 물과 떡과 포도주를 감각적인 촉감으로 느낀다는 점이다. 그래서 흔히 침례교회는 완전히 물속에 잠긴다. 이렇듯이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각적 물질로 성도들에게 날인되고 적용되는 것이다. 한편 성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회복이므로 성도들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신앙과 순종을 표현한다. 그것은 언약관계가 회복된 백성은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은 특히 피로 연결된 쌍방 관계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는 신앙하며 순종한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결단이 따라야 한다. 만일에 성례를 참석하고도 주를 위해 살기로 하는 작정이 없다면 성례 식을 말씀 없이 집행했든지 아니면 받는 자가 믿음으로 받지 안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도리어 주의 몸을 더럽힌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싸우고 거룩하게 살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떡 한 조각, 즙 한잔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서 말씀을 좇아 행해야 한다. 제 2절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 성례가 은혜의 방편이므로 세례와 성찬이 은혜의 방편이다. 그러나 그 은혜의 방편이 로마 교회처럼 마력적으로 기계적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함께 성례가 집행될 때에 말씀으로 선포된 동일한 은혜가 성령님의 역사로 성도들에게 임하여 온다. 그러므로 설립자의 설립의 의도대로 설립의 말씀을 따라서 성례를 떡만 나누고 잔만 나누지 말고, 분명히 설명하고 바로 말해주어야 한다. 지금은 성찬식을 해도 은혜가 없고, 주님의 살이다. 주님의 피라고 해도 감동과 감격이 없다. 이는 성례가 바로 시행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례는 그 자체로는 부족하니까 말씀과 병행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귀로 확인되어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귀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듣는 종교다. 말씀의 종교는 보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들음이 최고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므로 성례를 통하여 말씀과 함께 시행될 때에 은혜의 역사로서 믿음이 강화된다.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하고 자라게 한다. 성례는 중생한 성도를 바른 믿음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든지 할 수 있지만 성례는 언약 백성에게만 거행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례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은혜의 수단으로서 완성적인 것이지만 성례는 말씀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완성적일 수도 없다. 그리고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시키지만 성례는 그것을 강화할 뿐이다. 또 말씀은 온 세계에 전파되나 성례는 언약 백성에게만 시행된다. 그래서 개신교회는 말씀만 중요시하고 성례는 너무 약화시키는데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성례도 좋은 은혜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로마교회는 성례가 필수적인 은혜의 수단이다. 왜냐하면 성례에 주입은혜가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성례를 베풀면 자동적으로 그리고 마력적으로 죄가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은혜를 성례에 연관시켰는가? 몬타누스의 과격한 성령운동의 역사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은혜를 교회에다가 그리고 성례에다 부착시켰던 것이다. 즉 은혜가 교회의 고유한 분깃으로서 교회가 그것을 배분한다는 것이다. 로마 교회에서는 교회가 성육신의 계속이다. 그러나 최근의 헬베트 뮐렌이라는 카톨릭 교의학자는 교회가 성육신의 계속이 아니라 성령 충만 이고 성령님의 체험이라고 했다. 우리 개혁교단 같으면 당장 이단이라고 정죄하지만 로마교회는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에서는 이미 성령님의 역사를 말씀에 부착시켰다. 그리고 과격파인 재세례파 때문에 말씀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렇게 로마교회는 성례를 개혁교회는 말씀을 구원의 도구로 삼고 있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귀로 듣는 것의 보충이요 기념하라 명하신 뜻의 순종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동반되지 않는 성례는 죽은 성례이다. 성례는 처음부터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음으로 이미 와 있는 은혜를 강화할 뿐이다. 즉 말씀의 은혜와 성례의 은혜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은혜를 가져온다. 또한 세례와 성찬을 분리해서 최소한 한 주 전에 먼저 세례를 주어서 성찬에 대비해서 준비케 해야 한다. 그리고 예식을 거행할 때 참여지 않은 자가 있을지라도 공 예배 때에 집례 해야 한다. 그리고 성례 식을 집행하면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 주일 성수가 교훈하는 것이 6일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예배를 위해서 있다는 고백이며, 십일조는 우리의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례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입었으니 전 생활 영역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헌신된 삶이어야 한다.
제 3절 성례의 구성 부분 1. 성례의 외적 요소 세례는 물을 성찬에는 떡과 포도즙을 사용한다.
2. 성례가 상징하는 내면적 영적 은혜 성례 예물들은 외적으로는 그것 자체만을 지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넘어서서 실체를 지시한다. 특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한다. 성례전이라고 할 때 그 지시 사물과 일치되며 또 그 자신을 넘어서서 실체를 지시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례전 적이다. 즙은 곧 믿음으로 받으면 주의 살이고 주의 피 이다. 떡과 주의 몸을 일치시키고 포도주와 피를 일치시킨다. 그렇지만 그 떡 자체를 몸, 즙의 자체를 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과 일치 형성을 넘어서서 본래의 실체 즉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천상에 계신 그리스도 몸을 지시한다. 그래서 성례전 적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성례에서 제일 강화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묶어진다. 그의 살과 피로 신령한 한 몸을 이룬다. 이 신령함 때문에 가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 몸이 되고 또한 그의 살을 이루고 그의 피를 이룬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 이제 우리는 친척을 찾을 때 예수님을 믿는 형제와 자매를 찾아야 한다. 육체적인 친척은 종말에 가면 의미가 없다. 이제는 새 백성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실제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교회가 연합되었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신학을 잘 공부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과 같이 동일한 생명으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산다는 것은 주의 영으로 산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육의 피보다 더욱 진하고 강하다. 때문에 믿는 자들을 만나면 친족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이요 한 피와 하나의 살을 이루고 함께 살고 자란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찬에 참여하려면 성화생활이 필수적이다. 교회가 거룩하려면 성례 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되므로 목사가 여행을 마친 후 성례 식을 거행함은 바르지 않고 횟수는 1년에 3, 4번 함이 좋을 것 같다.
3. 표호와 의미를 표시하는 사물과의 연합 이 말의 뜻은 은혜와 성례와의 동반관계를 말한다. 성례에 있어서 은혜가 어떻게 오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1) 로마교회의 화체설 화체설에 의하면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더 자세히 말하면 떡과 포도주가 피와 살이 되므로 성례를 행할 때마다 은혜가 필연적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요소가 육체로 변화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실체는 변화되었는데 왜 속성은 그대로인가? 그러므로 맞지 않은 애기이다. 성찬의 외적 요소가 주의 몸과 피로 변한다니까 호소력이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성육신의 반복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변화되고 남은 것을 숭배하니 우상숭배라고 배척했다.
2) 루터교회의 공재 설 그 물질 혹은 그 요소에 항상 은혜가 함께 온다는 것이다. 화체설처럼 그 물질적 요소가 변화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이 편재해서 그 떡과 함께 떡 안에 떡 주위에 그리스도의 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재 설을 받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피조물이어서 편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 개혁교회에서는 기념과 영적 임재를 말한다. 쯔빙글리 계통에서는 주의 죽으심을 기념한다는 기념설만 말했다. 그러나 기념 정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받으면 영으로 그 은혜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로 하신 모든 은혜를 가지고 오신다. 우리와 연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행할 때 놀라운 은혜를 받는다.
제 4절 성례의 필요성 로마교회는 성례가 구원의 방편으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반론을 하면 잃은 것이 많다. 너무 외적인 것을 무시하면 과격파, 재세례파가 되는 것이다. 신령한 것만 추구하면 외적인 것은 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데 우리 개신교에서 상당하게 재세례파적인 면이 있어서 배척한다. 그 길로 들어서면 무교회주의가 되어 성경도 필요 없고 모두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이요 은혜의 방편과 언약의 길로 세우셨으니 성례를 해야 한다.
제 5절 구약성례와 신약성례와의 비교 로마교회는 두 성례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인정할 수 있다. 즉 구약의 성례들은 단순히 예표 적이어서 영적 조건들을 갖추지 못하고 다만 믿는 자의 법적 의치만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성례의 역사는 받는 사람의 믿음에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자유의지를 앞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례들은 단순히 행하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신령한 은혜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성례는 민족적인 단위로 행해졌고 신약의 단위는 보편화되었다. 그리고 구약의 성례하고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하더라도 은혜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이루어져서 그의 은혜가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성령이 직접 우리에게 내주 역사하시므로 구약 백성이 사는 은혜의 양과 질에 있어서 비교할 수가 없다. 그들이 갖는 구원은 은혜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히브리 저자가 말을 했다. 우리가 받는 구원의 은혜 방편은 말할 수 없이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성령님께서 직접 역사하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직접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셔서 구원하시니 우리의 은혜가 말할 수 없이 크다. 구약은 달과 별들의 빛 아래 사는 것과 같다. 그 것은 신약의 태양을 예시하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에게 유월절의 양이 사망을 넘어가게 하고 출애굽으로 가나안을 보였다면 신약에 성도들은 십자가의 구속으로 천국을 보여 준다. 본질적인 면은 같으나 은혜의 풍성함은 구약과 비교할 수 없다.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면 은혜가 임하는데 집례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설립자로부터 온다.
제 6절 성례의 수 구약에서 할례와 유월절로 두 개이며 신약에서도 세례와 성찬이다. 로마교회는 7가지를 성례로 본다. 우리는 신성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식을 하는 것은 좋지만 구원의 질서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성례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세례와 성찬이 합법적인 성례이다.
제 3장 기독교 세례 제 1절 세례의 제도 세례의 제도는 어떤 의미에서 부활 후에 제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로 물로 씻는 것을 가르쳤고 예수님께서 부활 후 그의 충만하신 중보 적 권위로 세례를 재정하시고, 다음에 오는 모든 세대로 하여금 그것을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셨다.
세례의 의미 1) 공적 신앙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리고 그를 위해 살기로 헌신하는 서약의 표를 나타내는 예식이다. 이제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주를 위해 사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주가 바뀌었다. 그래서 공적인 고백을 공중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로 모셔드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백성들 앞에서 행하고 사사로이 세례를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침상이나 병상에서 행할지라도 언약 백성이 있어야 한다.
2) 처음 언약관계가 파괴되었으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언약관계의 회복이다. 세례 받으면 물로 죄를 씻는 다는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자녀의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는 예식이다. 정식 그리스도 교회에 소속하는 한 식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는 자를 세례만 주고 끝나지 않고 축하하는 악수와 잔치를 해야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몸에 가입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는데 얼마나 기쁜 일인가?
제 2절 세례의 바른 양식 세례의 양식이 무엇이냐 할 때 세례는 약식세례와 침수 세례가 있다. 침례교회는 로마서 6장에 기초해서 침수세례를 베푸는데 물속에 들어가므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침수세례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설을 설치하기가 어렵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며 물에 들어갔다 나오므로 세례 복이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어서 시각 상 좋지 않은 점이 있다. 우리는 악식세례를 베푸는데 아무리 약식이라도 물이 흘러 내리도록은 부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노아 홍수를 연상케 될 것도 같다. 초창기에는 침수를 받았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에게 요단강에서 받으셨다. 그렇지만 오순절 날 5천명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을 다 예루살렘에서 요단강으로 인도하여 주었을까? 침례교회는 로마서 6장의 죽음으로 세례 받아졌고 장사되었다는 말씀을 근거하여 침수가 죽음을 상징하고 물에서 나옴으로 중생을 상징한다고 하지만 그렇게 침수함으로 사람이 죽고 나옴으로 중생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침수행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세례식 자체가 옛사람이 죽게 하고 새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으로 그리고 십자가의 권능으로 옛사람이 죽고 부활의 권능으로 살아나는데 이것이 영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침수와 약식세례는 같을 것이며 본인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정통성 시비는 바람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식의 경우는 무릎을 꿇게 하고 장로로 하여금 물그릇을 들게 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해야 한다.
제 3절 세례의 합법적 시행자 세례의 시행자는 복음의 사역자로 합당히 세움을 받은 목사가 시행해야 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필수적이기 때문에 신부가 아니어도 세례 할 수 있다고 한다. 영적자질에 세례가 관계없다고 해도 복음의 사역자로 합당히 세움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한다. 이 때 그 목사가 범죄 한 사실이 분명하면 그 사람에게 세례 받아서도 안 되고 세례를 집행해서도 안 된다. 여자 전도사님들 우리도 다같이 신학 공부를 했는데 왜 우리는 못하느냐? 성례도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요 선포된 말씀이 은혜의 강화이니 목사가 해야 하고, 이 때 시행자에게 성화가 동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에게 성화가 동반해야 은혜의 역사가 있듯이 세례와 성찬 베푸는 자에게도 성화가 동반해야 은혜의 역사가 있듯이 세례와 성찬 베푸는 자에게도 성화가 동반된 목회자가 해야 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으면 어둠에서 빛으로 옮겼으니 또 다시 반복해서 세례 받는 게 아니다. 개신교에서는 로마 교회의 세례를 인정한다.
제 4절 세례 받을 사람들 1. 장년 세례 장년세례가 통상 세례인데 이것은 신앙고백 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으니 장년세례가 세례이다. 어디서 신앙고백을 하는가? 교회 앞에서 언약 백성 앞에서 한다. 사사로운 석상에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언약 백성들 앞에서 주어야 한다. 이는 교회 가입하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언약 백성의 증인들 앞에서 행함이 옳고 병실에서나 집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에도 세례 받아야 한다면 교회에서 행한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을 할 때 그대로 받아야 한다. 속임이라도 그 양심의 문제이니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마음의 비밀을 파고들어서 이러한 고백의 진실성을 판결하는 것은 교회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고백한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법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받을 수 없으면 연기하는 것이 합당하다. 세례는 세상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복음과 함께 고난 받으려고 예식을 하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사람에 대해서 회중에게 물어서 이의가 없으면 세례를 주어야 한다.
2. 영아세례 성경에는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주라고 하는 구체적인 명령이 없다. 그래서 침례교회에서는 반대하는데 이들은 성경을 문자대로만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글자대로 쓰여 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 안에 함유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즉 부모와 맺은 언약관계에서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 언약개념은 항상 언약의 당사자에게뿐 아니라 그 언약의 당사자의 자녀에게까지 미친다. 항상 가족을 대표해서 부모와 언약이 맺어진다. 개혁신학이 이 언약교리 때문에 영아세례를 준다. 영아세례는 구약의 할례의 법대로 하면 좋고 산모를 위해서 1개월 정도에서 양부모가 모두 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 건덕 상 신앙의 격려를 위하여 부모 중 한쪽만 믿어도 유아세례를 베푼다. 그리고 영아 세례는 부모가 요청하면 수시로 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은 아이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세례가 효력을 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아이가 중생했다고 보면 그 세례가 역사할 것이라고 하여 아브람 카이퍼가 중생전제 설을 주장했는데 언약의 자녀이니 이미 중생한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근거를 세우기는 어려운 문제다. 영아세례는 부모의 신앙에 의해서 세례문답을 하는데 부모의 것과 동일한 고백이다. 1. 이 아이도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아이의 유일한 구주가 되는 것을 믿습니까? 2. 약속대로 이 아이가 언약백성이 되도록 진실히 양육하는 책임을 다하겠습니까? 라는 양육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부모는 위에서 고백한대로 자녀교육가 언약백성으로 자라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자녀교육이 가장의 책임이다. 영아세례도 은혜의 수단이 되는데 아이가 중생했다면 세례가 효력이 있게 되어 차츰차츰 영아세례 받을 때 그 마음에 내재하고 있는 시초적인 은혜가 어떤 신비적 방법으로 강화되어 역사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중생하지 않았다면 가정 예배 때에 주님을 영접하고 권고하고 가르쳐야 한다.
제 4장 성찬 제 1절 성찬의 재정 성찬은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유월절 양식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즉 구약의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이스라엘의 구원이요, 구원의 시작이요 미래 완전 구원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과의 완전한 언약은 시내 산에서 설립되었어도 이미 언약의 시작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주시고 자기 피에 기초하고 재정하고 설립한 새 언약의 예식이 옛 언약의 예식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 잡는 날 밤에 성찬을 세우신 것이다. 구약의 유월절 예식과 함께 연결된다. 유월절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큰 구원의 표이며 기념이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구원이 생기기 전에 시행하셨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도 십자가 생기기 전에 세우셨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을 시내 산에서 맺으셨어도 피를 흘리는 유월절 출애굽 전날 밤에 이루셨으니까 그 때부터서 언약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유월절 어린양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예견하고 이스라엘 구원을 출애굽을 되돌아보며 성찬을 지켰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찬을 지킨 것이다.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예표로 그때까지 지켜왔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성찬을 행한다. 즉 바울 사도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죽음을 기념하라는 말이 합당하다. 언약의 피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그 언약으로 생명이 속량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 피로 사람을 속량하신다. 짐승의 피로는 죄가 다 속량되는 것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양, 참 사람의 피가 흘러져야 죄가 속해진다. 그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했다. 이 언약의 기념이 성찬이다. 성찬의 요소는 떡과 포도주인데, 떡은 찢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상징하고 포도주는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뜻한다. 떡과 포도주를 먹음은 믿음으로 그의 몸과 피를 먹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예식은 주와 연합되어 있음을 더욱 강화한다. 유월절 축제는 식사의 대용이었는데 지금은 식사가 아니다. 고린도 교회가 식사까지 하려고 했는데 금했다. 그러나 떡이 씹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주의 몸을 먹는다는 실감은 나야 한다. 유월절 때는 어린아이도 참여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 이를 질서 있게 했다. 신앙고백이 없이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고, 언약의 백성이 참여해야 된다는 것으로 질서를 잡았다.
제 2절 성찬이 의미하고 날인하는 것들 1. 성찬이 의미하는 것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생겼다. 그러므로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뜻하고 성찬에 참여하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먹음으로 주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찬을 믿음으로 먹으면 주의 몸을 먹음이며 믿음으로 받으면 주의 피를 마심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들이다. 성찬 때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축복에로 동참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 구원을 위해서, 모든 구원의 약속들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더욱 강화된다. 주님 몸과 피를 먹음으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비한 연합이어서 막연한 연합이 아니다.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연합이다. 이 신비적 연합은 실제적인 연합이다. 실제로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고 한 뼈를 이루어 자라간다. 그러므로 가장 신비한 연합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선택 받은 사람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택한 사람은 선행을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으니 선행이 자연적인 귀결이다. 학문이나 사업이나 상업 등 모든 자기 분야에서 선행을 한다.
2. 성찬이 날인하는 것이다. 성찬은 표호일 뿐 아니라 인호이기도 한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찬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준다. 더 이상 확증할 다른 방법이 없다. 주님의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셨는데 이 사실을 우리가 먹고 마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받는 것이다.
2)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표로 성찬을 세우게 하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복음의 약속들이 자기 것이 되었음을 성찬은 확증해 준다. 그러므로 성찬에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3) 또 우리가 현재 실제로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
4) 성찬은 참여하는 자의 편에서는 신앙고백의 휘장이다.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세주로 신앙고백하고 왕으로서의 그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고 그의 신적 명령에 대하여 순종의 생활을 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다.
제 3절 성찬과 주의 임재의 문제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인해 이루어진 구속의 은혜가 성찬에 어떻게 임재 하느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으며 지금도 상당한 견해 차이를 가져오는 문제이다.
1. 로마교회의 견해(화체설) 물론 로마교회가 지금 화체설을 말하지만 처음부터 그러지는 안했다. 화체설 이전에는 오히려 기념 설에 가깝도록 했는데 11세기경에 로마교회가 화체설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성만찬의 요소 문제도 동서교회를 나누는데 한 역할을 했다. 정교회는 주님께서 유월절에 성만찬을 베푸셨으니까 무교병을 사용하셨음이 틀림없다하여 무교병을 사용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전통에 맞지 않다고 해서 교회를 나누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성만찬 문제가 종교개혁 교회 간에 열띤 논쟁을 유발한 문제이다. 심지어 루터는 칼빈이 말한 개혁교회의 성만찬 론을 듣고 우리하고 다른 영을 가졌다고까지 말했고 이단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 교회들을 하나로 할여고 노력을 많이 했으나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너무 현격하게 다르기 때문에 교회들을 합치지 못했다. 그 때 일치하지 못한 문제가 오늘까지 이르렀다. 주요한 문제는 성만찬을 행하면 그리스도의 은혜가 몸을 찢으시고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구원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느냐 하는 은혜의 전달의 문제이었다. 그런데 루터 교회와 로마교회는 임재를 아주 가깝고 밀접하게 온다고 했는데 개혁교회는 그렇지가 않았다. 개혁교회도 두 견해이다. 은혜가 확실하게 오게 하기 위해서 로마교회는 화체설을 세웠다. 떡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다. 혹은 속성은 변화가 없어도 그 실제가 변화되므로 주의 살과 피를 직접 먹게 되므로 은혜가 분명하게 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직접 변화되니 그리스도의 몸이 직접 와 있는 것이다. 여기의 성찬의 요소와 은혜의 임재를 완전히 일치시켰다. 식사 발언, 즉 신부가 떡을 들고 이것이 주의 살이요 주의 피라고 선포하면 주의 살과 피로 변화한다. 신부가 술을 먹는 요인이 미사주를 많이 마셔도 흠이 없으나 평신도들에게는 주의 피와 몸이니 경홀히 여길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숭배했다. 로마교회를 우상숭배라 함은 이 때문이다. 이 교리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는 교회가 바로 성육신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미사 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피로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 우상숭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화체설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화체설을 반대할 수 있는 많은 연구는 없다. 결코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것을 자연의 이치로서 반대한다. 어떻게 속성의 변화 없이 실체의 변화를 말 할 수 있느냐? 여기에 로마교회는 그렇게 주장한다. 속성은 변화 없어도 그 실체는 주님의 몸으로 변화된다. 자기들의 문제점을 실체하고 속성하고 구분 한다. 문제는 실체되게 하는데 속성이 있어야 실체가 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재료의 속성들, 떡의 속성, 포도주의 속성이 변하지 않아도 떡은 살로 포도주는 피로 변한다고 말한다. 그들이 먹으면 떡이고 포도주이어도 실체에 관한한 주님의 몸이요 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므로 주의 은혜의 임재를 더 없이 확실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은혜가 예식을 베풀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마력적으로 온다. 일을 하기만 하면 은혜가 직접 온다. 그러나 은혜의 전달은 성령을 통해서만 온다. 즉 교회가 은혜의 예식을 행한다고 성령님이 자동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화체설처럼 행하기만 하면 은혜가 자동적으로 온다고 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은혜는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로 오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주거나 받을 수 없고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숯하고 금강석하고는 구성요소가 다 탄소로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속성까지는 같지 않다. 결코 속성의 변화 없이 실체의 변화는 없는 것이다.
2. 루터파의 견해(공재 설) 주의 살과 피가 그 요소와 함께 있다. 그러니 은혜를 가져온다. 성만찬을 집행하면 은혜가 분명히 온다. 살과 피가 성만찬의 요소와 함께 있으니 성만찬의 요소와 함께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주변에, 그 안에, 그 요소와 함께 있다. 어떻게 있느냐? 어떻게 인성이 성찬 시에 성만찬의 요소에 함께 있느냐? 만일 그리스도의 인성이 와 계신다면 은혜가 분명히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냥 살이고 피 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가 구속을 이루셨기 때문에 구속을 이룬 은혜가 그 인성이 오므로 동시에 온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게 인성의 공재나 실체, 화체설을 강조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성이 함께 있을 수 있느냐?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부활시 속성전달로 편재하게 되었다. 그러니 승천의 상태의 변화로 보아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부활 전에는 제한적으로 계셨지만 부활하심으로 부요하게 풍성하게 계시지 않는 곳이 없이 계시게 되었다. 속성전달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갖는 편재성이 인성에 전달되니까 인성도 신성과 함께 편재한다. 그러면 성만찬에도 그 요소와 함께 그리스도의 인성이 살과 피가 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화체설은 편재 때문이 아니라 신부가 기도하는 그 능력으로 교회의 권세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니까 은혜는 완전히 전유물로 주어졌고 그리고 입으로 배분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가 교회에 위탁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은혜를 배분한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 얻는 데 교회가 필수불가결이다. 이것이 교회의 강조이며 교회가 성육신의 연속이다. 승천이 장소의 이동이 아니고 상태의 변화이면 실체 승천이 아니다. 이러한 인성 편재 설은 칼케돈 신경에서 부정되었다. 루터 교회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성육신한 것 자체가 비하가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의 신성의 속성들이 인성에 전달되는 것, 안 쓰고 감추어 둔 것이 비하인데 부활함으로 그 제약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신성으로부터 전달된 모든 속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속성 전달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모두 변화되어버리니 인성으로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루터교회에서 한 인격 내에 어떻게 두 본성이 있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해서 나온 것이 소위 케노시스 이론이다. 이것이 몸을 비운다. 비워낸다. 신성을, 영광을 비워낸다는 뜻이다. 그러니 예수는 성육신이 아니다. 남는 것 인성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케돈 신경이 451년에 좋은 결정을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떻게 있느냐? 그 이전에 소위 네스토리우스파는 양성이 은혜로 연합되었고 둘이 같이 있는 것으로 주장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감독은 이것을 극렬히 반대했다. 그것을 더 발전시켜서 유티코스는 인성과 신성이 결합해서 제 3의 본성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반대해서 칼케돈에서 어떻게 있느냐고 방식을 말하지 않고 그것이 아니라고 한계만 지었다. 신성과 인성이 서로 혼합 없이, 상호 변동 없이 로 유티코스에 반대하고, 분열과 분리 없이는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여 두 본성이 한 인격 내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신성이 인성에도 속성이 전달되면 상호 변화 없다는 신경에 저촉된다. 후기 교리들을 이 초기 교리들에 의해서 시비를 가릴 수 있다. 상호 변동 없이 란 말로 루터교의 속성전달을 막는다. 이 인성은 피조물이니 편재할 수 없다. 편재란 신성인 하나님만의 속성이다. 사탄도 피조물이기에 여기에 있으면 저기에 있지 않아서 두루두루 다닌다. 영육 간에 피조물은 편재하지 못한다. 사방에 사탄이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단이 자기의 왕국으로 조직이 되었기 때문이다. 군대조직을 생각해 보면 된다. 장군이 명령을 내리면 저 말단까지 명령이 하달된다. 귀신들도 거라사 귀신처럼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조금은 덜 악한 귀신이 있다. 그래서 정치계, 문화계, 군사, 등에서 역사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방해할 정도로 큰 왕국이다. 그리스도도 인성에 관한 편재할 수 없으셨다.
3. 쯔빙글리파의 견해(기념 설) 개혁파에서 두 견해인데 순전한 기념으로 바울의 증언을 통해 기념과 죽으심을 회상한다는 것이다. 즉 기념으로 은혜를 받는 것이지 성찬예식 자체가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전한 기념 설, 이것은 바르지 못하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은혜의 방편이어서 합당하게 시행하므로 은혜가 분명히 임한다. 물리적으로 마력적으로 임해 오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임해 오지만 은혜가 분명히 임한다. 한낱 기념만이 아니다. 과거사로 되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며 성만찬을 행하므로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함께 온다. 말씀의 선포의 은혜와 동일한 은혜가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기념과 영적 임재 설을 겸해야 한다. 쯔빙글리는 성찬의 신비적 요소를 제거했다.
4. 개혁파의 견해(영적 임재 설) 기념과 영적 임재 설에 의하면 실제로 그리스도의 육체가 와 있는 것이 아니고 성만찬을 합당하게 말씀대로 시행할 때에 영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의 은혜가 우리에게 전해 온다. 그러니 실제로 모든 은혜를 받는 것이다. 말씀을 통하여 선포한 그 은혜가 성만찬을 함으로 실제로 우리에게 온다. 믿음으로 받으면 영적인 은혜가 온다. 인성이 이룬 그 모든 구속의 은혜를 영으로 우리에게 가져온다. 은혜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성만찬에 임재 하신다. 몸으로가 아니고 영으로 영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으로 오신다. 믿음으로 받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다 받는다. 그러면서 은혜의 방편이니 성만찬을 통하여 신앙이 자란다. 그래서 헌신의 결정을 다시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과의 연합을 더욱 강화한다. 성만찬이 제일 강조하는 진리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모두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루터 교에서는 칭의 만 강조하고 성화는 강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니 는 죄짓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해서 제자리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칭의 는 출발이다. 죄를 지으면 회개해야 되지만 우리의 신앙이 점점 자라가야 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성만찬을 행하므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작정을 다시 하게 한다. 떡만 먹고 그냥 그치는 것이 아니다. 떡만 나눠주고, 포도주만 나눠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죽은 성례가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해야 한다. "내가 떼는 이 떡을 먹음이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 주의 몸에의 동참입니다. 이 떡을 받아먹으면서 주께서 우리의 온전한 구속을 위하여 그 몸을 찢기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주께서 찢기신 살을 직접 먹는다고 할 때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는가? 주님의 살을 먹으니까 주님의 몸으로 같이 자라가는 것이다. 성찬은 신앙을 자라게 한다. 그의 구속의 사건을 기념하므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란다. 그러므로 아주 중요한 은혜의 방편이다. 이렇게 주의 거룩한 몸에의 동참이니 죄 짓는 사람을 동참시키면 안 된다. 그리고 성찬에 참여할 사람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일주일 동안 죄를 짓다가 동참할 수 없다. 사람이 연약해서 너무 자주하면 면역이 생겨나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자주해서 은혜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시니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선을 행해야 한다. 마음을 열고 같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말에 가면 이런 혈육으로 연결되는 것은 모두 그치고 그리스도의 피로 연결된 사람만이 있다. 그런데 왜 친척 만 살펴보고 돕는가? 남을 유익되게 하는 생각과 사고를 해야 한다. 우리가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고 믿음이 자라지만 연약하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에 더 확실하게 날인하셨다. 주님의 구속의 사건을 우리의 손으로 만지고, 혀에 입으로 씹어서 먹고 삼켜 우리의 몸속에 예수님이 죽어주심을 확인하게 하셨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혀로, 몸속에 그 이상 얼마나 확인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성찬은 두루 도는 화영 검으로 지켰던 에덴의 생명나무와 같은 성례전 적이다. 성례전이라 하면 상징하는 정도가 아니다. 이 떡은 주의 몸이요 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받으면 요소와 실재를 일치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큰 영적은혜의 실재가 임한다. 로마교회는 그것이 바로 살과 피라며 그것을 그냥 일치시켜서 더 이상 넘어갈 것이 없으므로 생명나무까지 이르지 못한다.
제 4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효과
성찬은 결코 독립적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받은 은혜를 강화한다. 말씀선포로 받는 은혜하고 성찬으로 받는 은혜하고 동일한 은혜이다. 또 성찬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진리를 강화한다.
성만찬의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정결하고 깨끗한 방식으로 각각의 잔에 참여하는데 바울 사도는 한잔에 의해 마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 잔에 동참해서 다함께 마시므로 한 몸에의 동참을 알게 해야 한다. 떡도 하나의 떡에 동참하고 하나의 잔에 동참하게 하므로 한 형제로서 교제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은혜의 수단으로써 말씀을 받는 은혜와 동일하지만 말씀이 없으면 성만찬을 행해도 큰 의미가 없다.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세례와 성찬을 분리해서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진리가 제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선행을 해야 한다. 윤리적인 선행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교회는 성공회와 비슷하지만 주입 은혜가 동반해서 참여하면 은혜가 내려오는 예식이다. 그 은혜를 받아야 구원에 이른다. 행하기만 하면 마력적으로 기계적으로 온다. 그러나 설립의 법도대로 믿음으로 행하고 동참하면 주의 은혜가 영으로 임재 한다. 영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막연한 임재가 아니고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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