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교회론 정리

하나님아들 2014. 4. 10. 15:18

 

 

 

 

교회론  정리

 

 

<교회론 정리_서철원교수 강의안>

 

제1편 서론적 고찰

 

제 1 장 교회론과 성령론과의 관계

1.오순절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심

2.성령강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

3.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4.현대 신학적 논의의 촛점은 그리스도와 영과의 관계임

 

제 2 장 교회의 형편

 

 

제 2 편 교회

 

제 1 장 교회의 본질

제 1 절 교회의 정의

1.어원적 정의

2.성경적 정의

 

제 2 절 교회론 전개의 기초: 그리스도와의 연합

1.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는 연합, 2.성령에 의한 신비한 연합,

3.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 논의의 기초, 4.성도의 교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

 

제 3 절 본질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로마교회의 두 교회론, 2.비판, 3.구교의 신교화, 신교의 구교화,

4.개신교회의 교회관: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 5.교회의 본질에

관계된 목사의 사명, 6.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문제

 

제 2 장 교회의 특성

 

제 1 절 교회의 속성 

1.통일성, 2.거룩성, 3.보편성, 4.사도성

 

제 2 절 몇가지 관점에서 본 교회의 여러 성격들 

1.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2.유형교회와 무형교회,

3.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제 3 절 교회의 시대적 특징 

1.족장시대의 교회, 2.모세시대의 교회, 3.신약시대의 교회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1.말씀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2.말씀 선포의 내용,

3.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1.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2.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3.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제 4 장 교회의 정치 

 

제 1 절 교회 정치에 관한 이론들 

1.퀘이커파와 달비파, 2.에라스티안파의 제도, 3.감독파의 제도,

4.로마교회의 현 제도, 5.회중파의 제도, 6.국가교회 제도

 

제 2 절 개혁파 혹은 장로파 제도의 근본 원리

1.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모든 권세의 원천이시다

2.그리스도는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권위를 행사하신다

3.왕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에 권세를 주셨다

4.다스리는 권세는 기본적으로 지교회에 있다

 

제 3 절 교회의 직원 

1.비상직원, 2.통상직원, 3.직원의 소명과 취임

 

제 4 절 교회 회의 

1.각종 교회 회의, 2.지교회의 정치, 3.광대 회의

 

제 5 장 교회의 권세

제 1 절 교회 권세의 원천 

제 2 절 이 권세의 본질

1.영적 권세, 2.사역적 권세

제 3 절 여러 종류의 교회 권세

1.교리권 혹은 교훈권, 2.치리권, 3.봉사권

 

제 3 편 은혜의 수단

 

제 1 장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

제 1 절 은혜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말씀

제 2 절 말씀과 성령과의 관계 

제 3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말씀의 두 부분

 

제 2 장 은혜의 수단인 성례

제 1 절 성례의 정의

제 2 절 말씀과 성례와의 관계 

제 3 절 성례의 구성 부분

제 4 절 성례의 필요성

제 5 절 구약성례와 신약성례와의 비교

제 6 절 성례의 수

 

 제 3 장 기독교 세례

제 1 절 세례의 제도

제 2 절 세례의 바른 양식

제 3 절 세례의 합법적 시행자

제 4 절 세례받을 사람들

 

제 4 장 성찬

제 1 절 성찬의 제정

제 2 절 성찬이 의미하고 날인하는 것들

제 3 절 성찬과 주의 임재의 문제

1.로마교회의 견해(화체설), 2.루터파의 견해(공재설),

3.쯔빙글리파의 견해(기념설),

4.개혁파의 견해(영적 임재설)

제 4 절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효과

제 5 절 주의 성찬과 그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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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서론적 고찰

 

제 1 장 교회론과 성령론과의 관계

 

   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발생했다. 그러면 그 전에는 교회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구약의 교회가 있었고 예수님 재세 당시의 교회는 잠재적인 교회라고 말한다. 좀 사변적이지만 잠재적 교회로 창출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정식으로 기독교 혹은 그리스도의 교회로 출발한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한 것이다.

통상 벌코프의 재래 조직신학의 교회론에 의하면 교회란 용어의 정의부터 시작하는데 그래야 맞기는 하지만 교회란 말을 안 쓰다가 처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그렇게 전개해야 맞다고 할 수 없다. 신학은 어느 한 골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이루어진다. 신학 활동은 교회의 한 활동이다. 그러니 처음에 교회가 무엇이냐고 어원을 찾고 정의해야 교회가 무엇인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교회가 발생되도록 되어 있었는데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조직신학은 성령론 아래 교회론을 포함시키거나 성령론과 연관해서 교회론을 연구해야 한다. 성령론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에 교회론 다음에 성령론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교회론을 성령론하고 분리해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발생했기 때문에 성령론 안에 혹은 성령론과 함께 교회론을 논하는 것이 바르다.

 

1. 오순절파에서는 성령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심

 

   그러면 성령은 그리스도와 별개적인 존재로 오셨는가? 그렇게 말하면 우리도 오순절파처럼 오해한 것이 된다.

알미니안파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오순절파에 의하면 Dispensationalism (세대주의)로 생각한다. 그래서 처음 구약은 성부 시대이고 다음 신약은 성자 시대이고 그 다음엔 성령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일 초보적인 신앙 단계가 성부 하나님을 믿는 고넬료와 같은 신앙 단계이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었으나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그때는 성부 하나님 시대니까 그런 신앙 단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래도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같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이 성령 시대로서 성령을 신앙하는 제일 높은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완전해진다. 이것이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제2의 특별은혜의 역사라는 교리이다. 알미니안파만 아니라 현재 오순절파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신학의 배경, 뿌리, 근본이 어디냐 하면 완전주의를 부르짖는 알미니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교회 부흥이 목표여서 그 신학이 어디서 왔든지 간에 성령 충만을 외치고 뜨거워져서 열정적으로 예수 믿어 축복도 받고 교회만 부흥되면 그만이다. 옛말처럼 꿩 잡는 게 매인데 우선 잡고 보자는 식이어서 신학 따질 것이 있느냐고 말한다.

바로 알미니안에서 오순절파가 주장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나왔다. 그러므로 오순절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직 어린아이이고 장성한 그리스도인,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한다. 그래야 사랑에 있어서 완전해진다. 그것이 곧 오순절의 은혜이다.

 

2. 성령 강림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령께서 오시므로 교회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그러면 성령이 오시기만 하면 되느냐? 또 성령이 별개의 독자적 존재로 오시느냐?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순절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분리된, 구분된 독자적인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연장이고 그 사건의 완성과 완결이다.

성령께서 오심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영으로 오심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영하고 바뀌어져서 없어져 버렸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다. 바울의 글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고린도후서 3:17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주는 영이시다는 문장을 주어와 술어를 반대로 바꾸어 해석하여 " 영이 곧 주이시다"고 하는 주석가도 있다. 즉 ho de kyrios to pneuma estin인데 여기서 to pneuma estin으로 되어 있으니 ho de kyrios estin to pneuma로 바꾸어 읽을 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이후에는 영이 그냥 오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또 오시는 영이 독자적으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시는 영이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오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신다. 그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있기 전의 영과 다른 별개의 영이란 말이 그리스도와 같아진 영이다. 기독론적 성령이라고 말해야 옳다. 그래서 베를린 신학교 Otto Dilschneider 교수는 성령론을 가리켜서 정의하기를 " 오순절 이후의 기독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신다 혹은 영 안에서 오신다고 할 것이다. 완전히 그리스도로 인각되어 그리스도의 특성을 지닌 영이 우리에게 오신다. 그 영이 와서 우리에게 나타나면 그리스도로 나타나게 된다. 이런 성령이 강림하셔서 우리에게 오심으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발생하게 하셨다.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이 적용되게 하여 다 죄 아래서 하나님과 적대되어 있는 백성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낸다.

세대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것같이 신약에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3.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그러면 성령이 어떤 분이시냐 할 때 성령을 그리스도와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된다. 영이 그리스도와 별개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신 영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나타나도록 자기의 얼굴을 그리스도로 나타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Raymond Brown이 영을 정의하기를 "그리스도가 지상에 안계실때 그리스도의 현존의 영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계시지 않지만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별개의 존재로 오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오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살려주는 영, 생명을 주는( zoopoioun ) 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 그리스도의 제2의 자아 " 라고 한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냥 하나의 별개의 단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셔서 역사하니까 사람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만든다. 성령께서 오심으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백성들을 새 백성으로 살려서 교회가 되게 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를 연결하고 결합하는 띠이고, 고리 혹은 끈이다. 그러므로 교회론도 성령론과 기독론과 함께 논의해야 바르게 이해된다.

 

4. 현대 신학적 논의의 촛점은 그리스도와 영과의 관계임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논의해 왔던 주요 논의는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관계가 주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의 논의가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곧 삼위일체론적인 논의이다.

 

 

제 2 장 교회의 형편

 

   사실 기독교인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개신교 교인수가 2-3억, 카톨릭 교인수가 7억 정도라고 한다. 87년 3월에 Simon kistmaker와 이야기했는데 화란 인구 45%가 종교를 물으면 개신교도 카톨릭도 아닌 무교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화란에는 교황 물망에까지 올라간 유명한 추기경이 둘이나 있다. 그런데 화란 카톨릭은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왜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냐고 물으면 변명하기를 고해성사 안하는 곳이 우리 화란뿐이냐고 말한다. 전에는 교회 안나가는 사람도 종교란에 카톨릭이라고 썼는데 이제 아무것도 안쓰는 사람이 45%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어떠냐고 물으면서 미국도 같은 계열에 속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키스트막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형편은 40%가 복음주의 교회에 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45%가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화란은 점점 약해지고, 미국은 40% 이상이 복음주의 교회에 속하는데 이것이 미국의 힘이라고 했다. 그들이 T.V. 방송국, 라디오 방송국을 다 가지고 있고, 또 계속 책을 많이 내고 있어서 계속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려고 보통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번 곤두박질 쳤다가 회복 단계에 있으니 미국이 아직 덜 약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은 정치 현실이 저급해도 그래도 기도하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라 할 수 있다. 교회론을 지식으로만 배우지 말고 정말 바른 개혁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배워야 할 것이다.

 

 

제 2 편 교 회

 

제 1 장 교회의 본질

 

제 1 절 교회의 정의

 

1. 어원적 정의

 

   교회를 말할 때 보통 라틴 계통에서는 Ecclesia라고 하는데 이는 그리스어 ekklesia에서 온 말로 ek ( out of )와 kaleo ( call )의 합성어로서 "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셨다 " 는 뜻이다.

그리고 구약에는 qahal (Hebrew)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qadosh 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qadosh의 어원이 qad (cut)이므로 qahal의 뜻은 "세상에서 혹은 이방 종족에게서 분리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교회를 보통 어원적으로는 "불러내서 모여진 단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게르만 계통에서는 Ecclesia를 쓰지않고 Church를 쓴다. 이 Church는 독일말로 Kirche, 화란말로 Kerk인데 이런 말들은 희랍어인 Kyriache에서 나왔다. 그 뜻은 " 주님께 속한 것 혹은 주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Church, Kirche, Kerk는 주께 속해진 자들의 단체가 교회란 뜻으로 썼다.

가장 쉬운 말은" the called out"이다. 그러나 그렇게 글자풀이만 하여 " 세상에서 불러내서, 뽑아 모은 단체가 교회다 " 라는 등의 정의는 바른 정의가 못된다. 어원적 정의로는 미흡한 점이 있다.

 

2. 성경적 정의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시지 않는다. 사람을 부를 때 보통 그 이름을 부르나 이 경우에는 우리의 이름을 불러서 오라 하는 곳에 모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름을 아시지만 우리의 이름으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신다. 그러나 불렀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그래서 부른 그들을 새 사람이 되게 해야 하니까 죄를 씻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으신다. 이것으로 교회가 다 됐느냐? 이제까지의 정통 교회는 여기까지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어서 교회에 들어오면 다 된 줄로 생각한다.

 

3)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

 

   그러나 이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결합시킨다. 그냥 쇠 용접하듯 붙이는 것이 아니고 생명적 연결을 시키는데 그런 자들의 모임이 곧 교회인 것이다.

 

4) 종합적 정의: 그리스도의 몸

 

   이 세가지를 종합하여 교회의 정의를 내린다. 즉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르셔서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심으신 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soma Christou ) 이다. 그러니까 어느 면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가 일치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령을 고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나사렛 이단 종파를 박멸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사울을 부르시면서 하시는 첫마디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다. 그러니 여기서 보면 교회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다.

 

 

제 2 절 교회론 전개의 기초: 그리스도와의 연합

 

1.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는 연합

 

   교회는 다른 곳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성령이 별도의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으려고 애쓰는데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가? 방언, 치병(신유), 투시, 예언, 입신등인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성령이 가져온 은혜는 다른 은혜가 아니라 다 그리스도에게 있는 은혜이다. 다른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게로 가져온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기와 교회를 일치시킨다. 다른 생명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리스도의 동일한 생명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

 

2. 성령에 의한 신비한 연합

 

   그러면 그리스도의 생명과의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백성과 그리스도간에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이 있다. 이 연합은 막연한 공상적인, 추상적인 연합이 아니다. 그렇다고 육체적으로 결합하는 물질적인 연합은 아니지만 가장 실제적이고 (realis) 구체적인 연합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이루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이 연합의 고리(띠)이다. 성령에 의한 연합이니 신령할 뿐만 아니라 변개의 여지도 없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데는 성령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면 성령이 어디 계시느냐? 교회에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령의 거소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거소이기 때문에 성령을 떼어놓고 교회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론을 성령론과 분리할 수 없다. 실질적으로 교회가 발생한 것이 성령의 오심으로 된 것이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 논의의 기초

 

   교회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하며, 그 생명의 연결 때문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하나이다. 그러므로 교회론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비한 연합, 생명의 연합 때문에 자기와 교회를 하나로 일치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이 생명적 관계 때문에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하고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체와 머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교회론의 근본 핵심이다.

이 신비한 연합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 칼빈인데 그가 이 신비한 연합에 대해 보통으로 감격해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이 교회의 통일성을 제일 많이 강조했는데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 칼빈의 마음을 감동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나누었다는 로마교회의 비난에 대해 적절히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칼빈은 "로마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최소한의 바른 말씀의 형태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만 답했던 것이다.

 

4. 성도의 교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가능

 

   또 지체간의 연결 때문에 상호 교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지체간의 상호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과 특히 최근에는 본훼퍼(Bonhoeffer)가 성도들의 교제를 많이 강조하였는데 우리는 성도 상호간의 교제가 가능한 것은 지체와 머리가 연합되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communio sanctorum은 unio cum Christo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연합을 전제하지 않고 교회에 개별적으로 가담한줄 알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유기체라는 의식이 없고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는 것이다. 교회는 다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고,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박고 있는 그런 존재들이지 개별적으로 와서 함께 엉글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심기워져 있고(insertio in Christum),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다(insistio in Christum).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교회의 분열은 불가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나눔은 곧 그리스도를 나눔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론을 잘 알아야 교회 정치를 바로 하여 교회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교회를 잘 모르니 목사들이 정치와 돈에 제일 약하다. 유신 정권 때 목사님들 500만원씩 주어서 잡아라고 했다. 그런데 200씩 먹고 다 타협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 500이나 다 받아먹고 떨어질 일이지 하면서 비웃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일부 목사들의 경우겠지만. 교회론을 정말 잘 배워서 바른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제 3 절 본질적인 교회란 어떤 교회인가?

 

1. 로마교회의 두 교회론

 

   로마교회는 교회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외부적 혹은 유형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에서 찾는다. 로마 교회는 바로 이 외부적 조직체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 (nulla salus extra ecclesiam) 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조직체는 가르치는 교회 (ecclesia docens)로서 사제들, 주교들, 대주교, 추기경, 교황 등 교권자들로 이루어진 단체이다.그래서 ecclesia docens가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과 같은 교회의 영광스러운 속성을 가지고 있고, 반면에 신자들의 단체인 듣는 교회( ecclesia audiens)는 그 속성들을 간접적으로만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나로 조직되어 있으니까 한 교회이고, 그 교회의 조직이 거룩하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예배모범과 윤리적인 결정과 교리적인 결정에 있어서도 거룩성을 귀속시킨다. 말하자면 그들의 거룩성은 성도들의 내적인 거룩이 아니라 그들 교회의 거룩이다.

이렇게 로마교회는 교회를 이원화하여 진정한 교회는 사제들로 이루어진 교회이고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준교회라고 한다. 지금 개신교회도 거의 카톨릭화해서 목사, 장로급 이상에서 교회를 이루고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간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완전하게 가르치는 교회가 진짜 교회라 하여 거기에 교회의 특성과 본질을 부여한다.

준교회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평신도는 상부 조직인 가르치는 교회가 가르치는 전체를 진리의 체계라고 믿으면 그것이 신앙이다.

 

2. 비판

 

   그러니 로마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령을 강조한다. 종교 개혁 시대에도 로마교회가 가장 성령을 강조했다. 그래서 칼빈이 소위 재세례파, 광신파들하고 로마교회를 일치시켰다. "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광신파와 같다. 성령의 역사가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수단으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너희에게 그런 것이 없다. " 성령께서는 성경의 저자이시므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교회는 교회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그대로 믿는, 그냥 그런 것으로 아는 내포적인 신앙( fides implica)의 자세를 가졌다. 개신교회는 진리의 분명한 지식을 가르친다. 그리고 사제와 평신도의 벽을 헐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의 봉사자이다. 그 말씀의 봉사 때문에 목사는 권위가 있고 그 외에는 다 똑같다.

 

3. 구교의 신교화, 신교의 구교화

 

   지금 로마교회도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많이 달라졌다. 로마교회도 개신교를 본따서 수녀들을 보내어 구역 예배를 한다. 로마교회도 이제는 복음을 강론하고 성경을 가르친다. 그런데 오히려 개신교는 모이는 것이 주가 되고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communio sanctorum 으로 교제하는 교회여서 교제만 하니 이제는 반상회처럼 되어버렸다. 지금은 목사도 완전히 귀족 세력으로 정착을 했다. 앞으로 교회론을 하면서 개신 교회의 현상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구교화 현상임을 알게 될 것이다.

 

4. 개신 교회의 교회관: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

 

   개신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교회의 조직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면적 영적 교통에서 찾는다. 교회의 제일 근본되는 것은 거룩이다. 그러니 성도들의 거룩한 교제가 교회의 본질이다. 외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에 교회의 특성이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이곳 외에는 구원이 없다. 조직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그렇다.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으므로 교회가 되고 그러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가 신자들의 어머니라는 말은 키프리아누스가 한 말인데 칼빈이 반복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어머니여서 모든 신자들이 다 교회에 와서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화된 사람이라도 설교가 필요없는 사람은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교회가 생명을 갖고 거룩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 연합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리고 연합이 강화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말씀으로 성도들의 내적인 영적 교통이 이루어진다. 말씀과 함께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5. 교회의 본질에 관계된 목사의 사명

 

   말씀의 선포와 교제가 약화되면 조직을 강화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없어지면 조직화 추세가 우세해진다. 그리고 은혜가 감소하고 영적 역사가 후퇴한다. 성도들의 교제가 잘 되려면 항상 말씀이 있어야 한다. 말씀이 없이 사람만 모이면 안된다. 말씀이 없어지면 곧 세속화이다. 교회는 말씀을 떠나서 존속하지 못한다. 말씀이 없어지면 교회가 곧 사람들의 조직체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때 교회가 기업이 된다. 말씀 없이 모이고 말씀 없이 흩어지면 그것은 완전히 세상단체이며 사교 단체이다. 그냥 모일 수는 없으니까 의식만 남는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만 강조하고 결국 체험으로 되돌아간다. 그런 점에서 신비주의와 자유주의는 다른 점이 없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체험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체험이 말씀에 의해 해석되고, 표준이 말씀이다. 그러니 자기의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개신교의 생명은 말씀의 선포에 있다. 교회가 거룩하고 바른 교회가 될려면 말씀을 바로 선포해야 한다, 그럴려면 목사가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데만 바빠야 한다. 설교를 너무 여러번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설교하는 데 두려움과 긴장이 있어야 한다. 입만 벌리면 잘 나오니까 기도, 성경 읽기, 명상, 참고 독서도 하지 않고 적당히 하면 설교가 세속화되고 은혜가 없게 된다. 많은 교회들이 우리 목사님 제발 그만 돌아다니고 설교준비하고, 기도하고 공부했으면 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재정은 집사에게 맡겨야 한다. 헌금 관리는 사도들도 하지 않았다. 사도들도 구제와 돈 관리를 집사에게 맡겼다. 목사는 주는 사례만 받고 만족해야 한다. 사도들처럼 말씀 연구하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무해야 한다.

 

6. 교회 밖의 구원에 대한 문제

 

   오늘날 로마교회 같은 경우에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로마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인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말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구원이 타종교에도 있다는 말은 한스 큉의 말인데 그는 로마 교황의 무오설을 시비하다가 교황청 교수에서 물러났으나 그 주정부의 교수로 튀빙겐에서 계속 일했다. 그의 저서 " 그리스도인 됨" ( Christ sein )을 보면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을 한다.

종교개혁으로 상당 부분을 상실한 로마교회가 그것을 회복하기 의해 16세기에 동양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중국으로, 인도로, 일본으로 선교사를 보냈다. 그래서 400년 동안 카톨릭을 전했다. 그렇지만 일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발전이 미약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했어도 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만 택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 한다는 것 때문에 선교가 나온다. 그래서 온 인류에게 선교사를 보냈다. 그러나 일본, 중국, 인도에 가서 성공을 못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다. 그러면 그들이 무종교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불교, 선도, 유도, 힌두교, 이슬람교 등 고등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불교도 윤리를 강조한다. 선행과 자비를 강조한다.어느 영국인이 불교를 정의하기를 종교적 윤리주의라고 했다. 이 종교들도 기독교가 가르치는 높은 도덕적인 윤리적인 차원을 제시하고 사랑과 자비를 가르친다. 그러면 이렇게 배운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이 고등한 종교들이 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들이다.

바로 그 원리에서 로마교회가 주장하는 타 종교와의 대화가 나온다. 기독교가 배타적으로 이 길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면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대화 제스쳐를 하고 다른 종교의 지도자를 만난다.

 

제 2 장 교회의 특성

 

제 1 절 교회의 속성 (통일성/거룩성/보편성/사도성)

 

   교회의 정의와 본질에서 교회가 갖는 몇가지 속성을 쉽게 도출해낼 수 있다. 라틴어 신앙고백에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una sancta catholica ecclesia 라는 교회의 성질이 드러난다. 이렇게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교회의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이 나온다. 이 교회의 속성들은 주로 무형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그것들을 거의 결정적으로 유형교회에 속한 것으로 만들었다.

 

1. 통일성(Unity)

 

   여기서 통일성이란 말은 하나(una)란 표현에 있다. 왜 하나인가? 그리스도의 한 머리에 결합되고 그리스도의 한 생명에 연결되었 으니 교회는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하나이다.

로마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해서 그 밑에 전세계에 하나의 조직체로 조직된 자기들의 교회가 통일된 하나의 교회라고 주장한다. 즉, 외부적 조직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 통일성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머리 아래서 신비한 몸으로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하나이다. 그러나 조직에서 하나가 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W.C.C.처럼 외형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통일성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분파가 아니다. 교회하고 분파하고 어떤 면에서는 구분하기 어려워도 잘 구분해야 한다. 항상 나를 따르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분파이다. 또 자기 교회 외에는 모두 이단이라고 하여 시비하는 것도 분파이다.

 

2. 거룩성(Holiness)

 

   교회의 일차적 특성이 거룩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거룩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한다.

 

1) 내면적 원리적 거룩

 

로마교회는 교회의 거룩성을 외부적 형식, 교의, 도덕적 교훈, 예배와 권징에서 찾는다.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니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하다고 말한다. 즉,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도들 안에 와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거룩하며 그러니 교회가 거룩하다.

그런데 우리는 다 실제적으로는 거룩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와 있으므로 원리적으로 다 거룩하니 완전히 거룩한 사람들이다. 곧 내면적 성격에서의 거룩이다.

   성령께서 와 계신다는 말이나 그리스도께서 와 계신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연장으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나타날 때는 그리스도의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성령께서 독자적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을 교회에 갖고 오신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오해된 부분이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거룩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를 중생시키실 때 그리스도의 거룩한 생명을 가져오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거룩이 우리에게 와서 자라도록 성령께서 일하신다. 이것이 교회의 거룩이다.

 

2) 거룩한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을 가지실려고 이처럼 구원의 사역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하신 첫마디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었다. "내가 너희를 거룩한 백성 되게 하기 위해 애굽에서 해방하였다"고 되어 있다(출 19:5-6, 레 11:45).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을 가지실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도 거룩한 백성을 가지시려고 이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것이다.

 

3) 교회의 삶에서 계속되는 거룩하게 하는 역사

 

거룩은 죄를 떠나는 것이다. 원리적으로 예수 믿으면 완전히 새사람이다. 그러나 예수 믿은 후에도 우리 안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같이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이 거룩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역사한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사람을 살리는 일(mortificatio et vivificatio)은 한 일의 양면이며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같은 일이다. 옛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새사람이 살며 새사람이 살므로 옛사람이 죽는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옛사람과 새사람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4)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는 방법

 

(1) 말씀 선포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교회의 거룩 유지 여부를 결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연합)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이니 계속적인 교제가 있어야 한다. 즉 새생명을 공급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도 허공에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되어진다. 외부적인 것으로 거룩을 유지하려고 하면 부작용만 일어날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말씀 선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른 생활로 불도저처럼 막 밀고 올라가야지 가만히 놔두면 껍데기 즉 종교적 습관만 남게 된다. 죄와 적당히 타협하고 핑계하여 억지로 꾸민 거룩은 거룩이 아니다. 죄의 옛사람을 죽이지 않고 새사람이 사는 법이 없다. 그 일이 일어나도록 설교가 밀어야 하는 것이다. 거룩하게 되는 비법이 성령 받아 방언을 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선포로 된다. 말씀 선포도 막연한 소리, 구름을 잡는 소리가 아니라 참 복음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면 사람들이 죄와 투쟁한다. 그러니 목회자는 설교에 전부를 걸어야 한다.

오순절파와 알미니안에 의하면 은혜를 두번째 받으면 완전해져서 옛사람을 다 벗어버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개혁교회는 끝까지 죄와 투쟁해야 하고 결코 완전해지지 못한다고 하니 모두 오순절파나 알미니안파로 가서 쉽게 단번에 되는 길을 택한다. 이것은 하와의 태도이다.

대부분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은 돈 벌 연구부터 하여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다. 그렇다고 우리는 돈을 반대하느냐면 그렇지 않고, 돈을 많이 벌되 댓가를 지불하고 바르게 벌어야 한다. 그리고 잘 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나의 수고를 통해서 위탁되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많이 벌어서 많이 저축하면 부자가 된다고 했다. 그 법이 지금도 제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가 많이 연구된 지금은 꼭 그렇지가 않다. 돈 의식이 많으면 그만큼 돈이 많아진다고 한다. 결국 돈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법이다. 가난한 사람만 돈의 종이 아니라 부자들도 더욱 돈의 종이 되어 있다. 돈이 삶의 목표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기복 종교는 하나의 빠르고 확실한 길로 이용된다.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목표는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사람이다. 여기까지 밀어야 한다.

 

(2) 권 징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권징을 해야 한다. 먼저 윤리적인 권징을 시행해야 하는데 그것이 안되면 교리적인 권징도 안되기 때문이다.

 

5) 거룩한 교회의 특징

 

나는 일차적인 거룩의 특징이 참을 말하는 것, 거짓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면 거짓을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법으로 살아야 한다. 별짓 다하면서 겉으로만 거룩, 거룩하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제 1 계명은 참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3. 보편성(Catholicity)

 

  Catholic Church가 공교회라는 말이다. Catholic, 즉 "공"이란 말이 보편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나쁜 말이 아니다. 로마교회에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니까 우리가 안 쓸 뿐이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 의 공회가 바로 Catholic Church ( 공교회 혹은 보편 교회 )이다. 그런데 로마교회가 지나치게 많이 ecclesia catholica, ecclesia catholica 를 강조하니까 루터가 그것이 싫어가지고 교회를 Gemeinde(공동체)로 고쳐버렸다. 그리고 서양 개신교에서는 Catholic이란 말을 안 쓸려고 Universal 이란 말로 바꾸었다. 여기서 보편이라는 말은 모든 백성을 포용한다는 뜻이다. 즉 우주적이란 말이다.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자기들의 교회가 전세계에 다 흩어져 있고 없는 데가 없다. 그리고 교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 또 장소적으로 부분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다. 남미, 북미,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도 있다. 아직 어떤 교회도 로마교회처럼 되어 보질 못했다. 개신교는 한국에 조금 많고, 일본에 조금, 중국에도 조금, 구라파에 조금, 그러니 보편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또 로마교회는 회원 수도 많다. 이런 점들, 외부적 조직체로서의 교회의 포괄성을 이유로 들어 로마교회는 자기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한다. 로마 교황청을 정점으로 완전히 하나로 조직되어 통일되어 온 세계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2) 개혁파의 견해

 

   그러나 개혁파는 그리스도의 보편성 때문에 교회가 보편하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왕이시고 그가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에 거기에 연결되어 있는 교회가 보편한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우주적이니 거기에 유기적으로 연합된 교회도 보편하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인 모든 사람을 가리켜 공교회라고 한다.

우리가 결코 분파가 아니다. 종교개혁 후에 신경들을 결정할 때 그 교회만 모인 것이 아니라 대륙의 교회들이 거의 다 모여서 항상 공교회의 형식으로 결정되었다. 개혁 교회의 교리들이 결정될 때 그렇게 되었으므로 개혁교회가 분파가 아니다.

니케아 신경에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 즉 한, 거룩한, 공,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로 되어 있다. 교회는 한 교회, 하나의 공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나누면 안된다. 교회가 하나의 교회이고 보편한 교회이고 거룩한 교회이면 교회 분열을 해서 교회를 찢는 일을 하면 안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큰 죄를 범하는 것이다. 교회를 나누는 일을 예사로 하는데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되었음을 모르니까 찢어 나누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분파들은 고집하여 우리와 같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한다.

우리 개신 교회가 소수여도 개교회주의여서는 안된다. 그래서 개신교회가 다 일을 해 놓으면 로마교회가 결국은 다 먹어버린다.

교회의 통일성 때문에 교회는 전체로 하나의 교회이지만 보편성 때문에 각 지교회도 그것대로 하나의 교회로서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연합된 하나의 유기체적 조직이다. 교회를 몸이라고 하는데 몸만큼 완전한 유기체는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완전한 유기체요, 살아있는 조직체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생의 원리가 성령이어서 성령에 의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이 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만 성령께서 교회의 생명으로 역사하신다.

 

3) 보편 교회의 특성

 

   그러면 이런 교회의 존속이 언제까지인가? 이 보편 교회는 마지막 때,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상에 존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찬송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회의 임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니 지상에 인류의 역사가 존속하는 날까지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다.

계시록의 천상 예배를 보면 찬송의 두 주제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이고, 둘째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이다. 우리는 구속의 은혜만을 찬양하는데 하나님의 창조도 찬양해야 한다. 창조가 있으니까 구속이 있다. 창조를 소홀히 하고 구속만을 강조하면 새창조가 되어 새로운 창조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새 창조가 아니라 처음 창조의 회복이다. 그러니 창조가 늘 전제되어 있다. 우리의 예배는 천상 예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해야 한다.

천상에만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도 끝까지 교회가 있어 그 일을 한다. 아무리 지상에 교회가 없는 것 같은 때라도 하나님은 꼭 자기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는 교회를 두셨다.

 

4. 사도성(Catholicity)

 

교회의 사도성에 관한 언급은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에 처음으로 추가되었다. 그래서 Credo unam ecclesi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이 되었다.

 

1) 로마교회의 견해

 

로마교회는 자기 교회의 교황이 예수의 제자 중 수제자인 베드로의 사도권을 계승했기 때문에 자기 교회가 사도적 교회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교황은 사도적 권위의 직접적인 계승자요, 그리스도의 유일한 지상 대리자라고 주장한다.

 

2) 비판

 

우리는 여러 면에서 그것을 시비한다. 첫째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다는 증거가 없다. 아마 바울의 성질로 보아서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주장하고 있으면 로마서를 안 썼을지 모른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로마 감독에게 베드로가 자기의 사도권을 넘겨 줬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할 때 근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배척한다.

또 초대교회의 상황은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교회의 설립자로 일한 것은 사실이다. 첫날 사도들을 대표해서 설교하였다. 그러자 오순절 날 3,000명이 회개했다.베드로가 구제와 재정 관리를 위해 집사들을 세웠다. 그가 실질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 며칠 후 다시 설교해서 5,000명이 회개했다. 교회가 8,000명 이상 약 만명 교회로 커졌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베드로가 옥에 갇혔다. 그러나 천사에 의해 기적적인 구출이 된 후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 뒤로부터는 베드로의 행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이 교회의 초기 단계이다.

그러다가 주의 형제 야고보가 그 대권을 받았다. 12사도에 속하지 않았어도 예루살렘 교회를 지도했다. 바울이 문제를 가지고 와서 사도들이 공회를 열었을 때도 결정을 베드로나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가 했다. 베드로는 약 15년간 은신해 있었다, 어디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후 베드로의 권위가 대폭 약화되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사도성의 계승은 말씀 선포의 계승이지 베드로의 사도직의 계승이 아니다.

 

3) 개혁파의 견해

 

교회의 사도성은 로마교회처럼 베드로에게서 계속 교황에게 연결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사도적 증거를 가지고 있고 또 증거하기 때문이다. 즉, 사도적 증거의 계속 때문에 교회에 사도성이 계속된다. 따라서 우리도 말씀을 잘 선포하면 사도적 권위에 동참하는 것이다.

 

제 2 절 몇가지 관점에서 본 교회의 여러 성격들

 

1.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1) 교회의 거룩성으로 인한 투쟁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은 죄와 악에 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그 근본 본성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거룩하기 때문이다. 거룩이란 죄와 단절하고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의 생명이 거룩하기 때문에 교회의 생명 자체가 죄와 악에 대해 투쟁한다. 이렇게 교회는 거룩하기 때문에 죄와 악에 대해 투쟁하도록 작정되었다.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내지만 우리 안에 죄와 악이 다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리적으로는 완전히 거룩하지만 실제로는 죄와 악을 다 벗어버리지 못했다.

 

2) 말씀의 선포로 일어나는 투쟁

 

   그런데 죄와 악에 대한 예리한 감정이 어디에서 생기느냐 하면 말씀의 선포에서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나면 죄와 악에 대해 회개한다 하지만 말씀의 선포 없이 죄와 악에 대한 경각심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 말씀의 선포가 올 때 죄가 무엇인지 안다. 예수 믿으니까 그냥 내버려둬도 자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단히 가르쳐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권면하여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노력을 해야 한다.

알미니안 교리의 완전주의에 의하면 두번째로 오순절의 성령의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그리스도인의 성화가 완전해져서 사랑이 완전해진다고 한다. 물론 성화 과정이 매우 높이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랑과 윤리면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충만히 받는다 해도 이 지상에 사는 날 동안은 죄의 오염에서 다 벗어나지 못한다. 루터가 말한대로 우리가 다 우리의 옛사람을 장사지내기 위해 무덤을 파는 자들이다.그러나 우리 손으로 우리 옛사람을 장사지내지 못한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한은 성화가 완결되지 않는다.

 

3) 교회적인 투쟁: 말씀 선포와 권징

 

   그래서 우리에게 늘 죄악이 씌워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이나 교회에서 그것과 싸워서 그것을 떼어내야 한다. 그럴려면 교회에서 권징과 말씀의 선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개혁 교회의 강조는 언제나 해석되어 선포된 말씀에 강조가 있다. 말씀의 선포와 함께 죄의식이 생겨나고 예리해진다. 성령의 역사를 아무리 강조해도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으면 자기의 행실을 고치고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말씀의 선포가 약해지면 죄성에 대하여 범연해진다. 그러면 권징이 끝이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도록, 거룩에 이르기까지 투쟁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교회에서는 권징을 하려고도 안하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죄와 투쟁하고 있으므로 교회가 권징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교회가 커도 권징이 없으면 그 교회는 다된 교회이다. 교회가 권징하지 않으면 죄와 악과 투쟁하는 전투하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근본 속성인 거룩을 다 포기하는 것이다. 교회가 거룩하기를 그친 것이요, 일단 세속 단체로 남기로 정한 것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해서, 은혜라는 말로 다 덮어서는 안된다.

 

4) 축복 종교와 권징의 소멸

 

축복 종교에는 죄의식과 윤리적 심각성이 없다. 왜냐하면 복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왜 가나안의 종교가 자녀를 불태워 죽였겠는가? 풍요의 신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피를 바침으로 쇠해진 지력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다. 축복 종교의 눈에는 그것이 바르고 합당하고 좋은 것이다. 선지자들의 눈에만 이런 가증한 죄악이 없다. 한국 교회가 축복만 강조하니까 권징이 없어졌다.

 

5) 사회악과의 투쟁

 

   우리가 직접 거리에 나가서 투쟁하면 그것은 정치를 하는 것이다. 먼저 교회 강단에서 무엇이 잘못인가를 가르쳐야 한다. 개 교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상회가 모일 때에 그런 현행 정치나 경제 정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가르치고 시정 요구를 결의하고 말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잘못된 것에 대해 항의하거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찾아가거나 편지를 할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바른 사람을 생산해냄으로 사회를 고친다. 우리도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 노동에 관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바른 이론 전개를 해야 한다.

이런 것을 안하니까 운동권 학생들이 교회에서 소외된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의 악을 과학적으로 지적하고 전개하여 학생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직접 거리로 뛰쳐나가서 정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와 담을 쌓고 앉아있어 버리면 안된다. 교회가 교회로서 사회에 대하여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영역이 아니라 다 그리스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 영역이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는 일을 교회가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를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 밖에 두면 안된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기반으로 해서 이 나라에서 이루어지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회 영역도 왕으로서 권세를 가지셨다. 우리는 그 권세를 그리스도의 권세로 귀속해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에서 악이 성행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화란의 Van Ruller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정치적이라고 했다. 정치의 근본이 사회의 악을 제거하고 혼돈을 제거해서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혼돈과 무질서의 근원인 죄를 해결하고 이 사회에 질서를 가져왔으니 정치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정치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정부가 그리스도의 봉사자이다.

 

6) 투쟁의 방법

 

   죄와 투쟁하는 것을 그치면 그 사람은 병들었거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늘 회개하는 것이고 늘 기도하는 것이다. 회개란 그냥 죄만 늘어 놓는 것이 아니다. 항상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피에 호소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그 회개가 하나님께 열납되고 용서받는다. 회개란 죄만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피에 호소해서 죄를 고쳐야 한다. 우리의 투쟁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에 호소하여 기도함으로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죄를 고치는 것이다.

 

7) 승리적 교회

 

   한편 하늘에 있는 교회는 개선의 교회다. 하늘의 교회에 있어서는 창검이 승리의 종려 나무와 교체되고 전투의 함성은 개선자로 바뀌어 십자가는 면류관으로 대체된다(L.Berkhof). 승리적 교회는 죄와의 투쟁이 종식되어 고통이 끝나고 완전해진 교회이다.

 

2.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1) 무형교회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는 칼빈주의의 신학, 특히 선택교리 때문에 구분한다. 물론 선택된 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형교회라고 말하지만 꼭 선택교리 가지고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지상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적이어서 또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령한 연합이어서 누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육안으로 볼 수 없으니 모른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로 진정으로 중생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누구인지 다 바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무형교회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형교회가 보편교회이고 모든 성도들을 다 포괄하는 교회이다. 그렇다고 무형교회와 유형교회가 구분되어 둘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 교회 밖의 교회라는 말을 썼다. 혹은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생겼다. 혹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정상적으로 교회를 떠나서는 생활할 수가 없다.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 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만 있다. 진정으로 교회와 연합된 자만이 교회에 속한다.

 

2) 유형교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자들은 밖으로 그 신앙이 표현된다. 이렇게 교회 회원들의 신앙고백과 신앙행위에서 그리고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집행에서, 그리고 교회의 외형적 조직과 정치에서 교회는 유형적이 된다. 즉 신앙이 행동화되어 밖으로 나타나 보이니까 유형교회라고 한다. 여기서 신앙고백을 하면 개별적으로 신앙고백을 한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가 신앙고백을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배 드릴 때마다 신앙고백을 하는데 보편한 신앙고백은 아니어도 사도신경을 고백한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교회로 모이고 모이면 조직이 없을 수 없으니 조직을 한다. 이것이 유형교회이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우리가 어떻게 구별해내겠는가? 물론 우리가 영안이 있어서 겉만 보고도 식별해낼 수 있어야지만 하나님의 비밀 박스 속에 그 사람의 이름이 들어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신앙고백을 한 사람을 다 받아야 한다. 세례 받을 때의 신앙고백을 액면 그대로 받는다. 그러니까 교회에 위선자들이 있다. 또 신자의 자녀들도 다 중생한 게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6개월 학습 문답해서 6개월 후에는 세례를 주는데 이는 잘못이다. 중고등부 6년동안 목사가 직접 기독교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 후에 입교한 사람들을 세례를 주어야 한다. 세례를 빨리 주고 책임을 맡기려고 하지 말라. 세례는 자발적으로 자워해서 받도록 해야지 억지로 밀어가지고 받으라고 해서는 안된다. 자발적인 신앙고백을 기쁨으로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부흥,부흥 해서 수만 많아지면 뭐하겠는가? 차곡차곡 가르쳐서 알갱이를 만드는 것이 쭉정이 많은 것보다 낫다.

 

3) 현재 교회의 고쳐야 할 점들

 

(1) 조직의 최소화

 

외형적인 조직이야 없을 수 없지만 최소한의 조직으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교회가 자유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는 자유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너무 억지로 조직에 얽어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교제와 생활이 좋지 않다. 너무 많이 조직화하면 수는 많이 붙지만 은혜는 없게 된다.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새벽부터 나와 밤중까지 봉사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조직은 최소화하라.

 

(2) 성가대

 

그런 면에서 보면 성가대를 해야 예배답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한 제사장이니까 다 찬양대이다. 음악가가 아닌 한은 성가대 노래나 평신도 노래나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모든 성도가 다 찬양대이다. 예배 직전에 온 교회가 찬양할 수 있다. 왜 어떤 사람은 하고 어떤 사람은 듣고 있는가? 듣는 것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구경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개혁교회의 예배 모범이 아니다. 온 교회가 함께 예배하고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 사실 성가대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것은 카톨릭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온 교회가 힘있게 찬송하는 것이 몇 사람이 찬송하는 것보다 더 좋다. 그 성가대 할려고 몇사람 허리 부러지게 일해 밥 해 먹여 가면서 하면 주일성수를 못하지 않는가? 안식일은 남종이나 여종이나 문안에 거하는 객이라도, 또 동물까지라도 일하지 못하게 하셨다. 주일은 다 쉬어야 한다. 그것이 주일 성수이다.

 

(3) 여러 직분들

 

주일학교 반사도 목회자가 직접 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반사들에게 맡겨서 성경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겠는가? 설교만 우리의 책임이 아니라 교육도 우리의 책임이다. 목사님들도 당회장만 되면 주일 낮 설교만 하고 교육은 저 밑에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데 그런 귀족의식을 버려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이지만 평신도들에게 너무 많은 짐을 맡기는 것은 좋지 않다. 한 사람이 한 책임만 맡도록 해야 한다. 잘 훈련된 교사가 있으면 주일 학교만 하고 성가대는 성가대만 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의 여러 직분이 감투가 아니다. 교회 정치도 교회의 진리의 보전과 건덕을 위해서 하는 보호 행위이다. 교회에는 감투가 없다. 다 봉사직이다.

교회는 귀족이 따로 있지 않고 다 귀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만큼 거룩한 귀족이 없다. 바른 행함을 하는 것이 귀족인데 그리스도인만큼 바르게 행동해야 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교회의 직분을 감투로 생각한다거나 한 사람이 여러 일을 맡으면 바로 행하여 봉사를 이룰 수가 없다.

 

3.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

 

이 구별은 유형교회에만 적용된다. 조직체로서의 교회는 직위에서, 말씀과 성례집행에서, 또는 교회 정치의 일정한 형식에서 교회의 형태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오히려 성도의 교제에서, 신앙고백에서, 죄와의 투쟁에서 유기체적인 교회이다.

 

1) 유기체로서의 교회

 

   교회는 개별 신자들이 하나씩 둘씩 모여와서 그냥 집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한 생명의 유기체요, 생명체로서 한 몸이다. 인간의 몸만큼 완전한 훌륭한 유기체가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몸에다 비유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니까 성도의 교제에서, 신앙고백에서, 죄와의 투쟁에서 유기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교회에서 한 사람이 죄 지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목사가 죄 지으면 목사만 죄 지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온 교회가 상처를 입는다. 교회의 어느 한 지체가 죄를 지으면 그 사람만 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 사람이 제일 먼저 해를 보지만 교회가 전체로 얼마나 욕을 먹고 영적으로 침체되고 상해를 입는가?그것은 교회가 다 한 유기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교회에 죄가 들어와서 말할 수 없이 상처를 입고 타격을 입어도 잘 해체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물론 해체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장난감 교회들은 종종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오늘 여기 섰다가 안되면 다음에는 저리로 가고 하는 교회들이 많은데 그런 것은 진짜 교회가 아니라 돈벌이 교회여서 목사 혼자 마음대로 세우고 허물고 하는 장난감 교회들이다. 교회가 한 교회이면 이사를 가더라도 같이 가야 하는데 대부분 가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와의 수직적 교통 때문에 평행적인 성도의 교제가 가능하다. 교회 전체가 이 교제에 참예할 수 있도록 활성화하는 것이 목사의 책임이다.

 

2) 조직체로서의 교회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로 유지될려면 조직을 해야 한다. 어느 단체든지 조직없이 유지되지 않는다. 유기체인 교회를 봉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목사와 장로들의 당회와 집사들로 구성된 제직회, 집사회 등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조직을 최소화하고 유기화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교회의 조직에서 모든 직위와 직책은 다 봉사하는 직이다. 그 직분의 권위는 은사의 권위요, 봉사의 권위이다. 주장하는 권위가 아니다. 이젠 개신교의 목사들이 신부를 능가한다. 신부는 3년마다 옮겨다니니까 그런 권위가 없다. 그런데 목사는 한번 위임해 놓으면 용접한 것처럼 밀어내도 안나간다.그러니 오죽 권세가 강하겠는가? 이젠 봉사자가 아닌 주장하는 자요, 주권자가 되어버렸다.

그리스도는 봉사하는 자요, 그의 섬김 때문에 교회가 생겼다. 왜 목자라 하면서 양을 후려쳐서 가죽만 남기고 살을 빼먹으려고 하는가? 마음을 바꿔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목사되고 전도사 되기 전에 마음을 바꿔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 조직 교회에서 목사가 가장 큰 봉사자이다. 그러니 음식 먹을 때도 제일 높은 자리에서 에헴 하면서 받지 말고 문간에 서서 그릇 패스하고 그릇을 먼저 씻으라. 처음엔 어색해도 다 훈련하기에 달렸다. 그렇다고 목사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이고 그것을 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목사는 복음을 선포할 때 권위가 있는 것이다. 목사가 강단에 섰다고 다 목사가 아니다.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사람을 누가 존경하겠는가? 목사니까 다 존경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조직적으로 얽어매 놓으면 많이 오기는 하지만, 그런 목적으로 또 헌금을 많이 내게 할 목적으로 조직을 강화하면 구원의 기쁨이 없고, 참 소망과 능력으로 힘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없게 된다. 그러니 말씀의 봉사자인 목사가 겸손하게 말씀을 잘 준비해서 봉사해야 한다. 말씀을 준비하는데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서 성실하게 해야 한다. 입만 벌리면 설교가 나오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면 다 끝난 사람이다.

 

제 3 절 교회의 시대적 특징

 

   교회는 에덴에서 시작하여 세상 마지막까지 존속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찬송하는 백성을 두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덕을 기리는 일이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에는 그치지 않는다. 그 일을 하는 백성의 임무를 맡음이 교회이다. 우리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교회가 없었던 것 같은 때에도 지상의 교회는 없었던 때가 없었다. 언제나 교회는 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지상에 존속하되 항상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달리 나타날 수 있다. 또 다 칼빈주의의 개혁교회가 되면 좋지만 그러지 못한 교회도 많다.

 

1. 족장 시대의 교회

 

   족장 시대의 교회는 경건한 가정에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가장이 제사장의 역활을 하였다. 처음으로 제사한 사람이 아담인데 그는 가족들을 데려다 놓고 제사하였을 것이다. 이 사실은 가인과 아벨이 제사드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 아버지 아담에게서 제사법을 배웠을 것이다. 모세 시대까지는 족장들의 가족에 의해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보존되었다.

종교는 항상 사적인 것이 아니다. 또 마음만의 일도 아니라 전인의 일로 그리고 전사회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인간대사이다.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매이게 하는 것이다. 종교를 사적으로 만든 것은 근본주의적인 영향 때문이다. 종교가 사사로운 개인의 일로서 어느 골방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예배하는 의식과 종교를 혼동하면 안된다. 예배 의식을 종교의 전부로 아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예배가 제일 중요한 종교 행위이다. 그렇지만 종교는 예배 행위만이 아니라 전 사회의 일이어야 한다. 지금은 다 공업화하고 탈교회화해서 사회는 무관하고 교회 와서만 자기 안방에서만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경건이지 종교가 아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일이다.

 

2. 모세 시대의 교회

 

   모세 시대 즉 구약 시대는 교회와 국가가 그 범위에 있어서 일치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외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국가와 교회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 국가 존속은 항상 교회의 존속으로만 가능했다. 여호와의 종교가 존립하지 못할 때 국가도 존립을 그쳤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이 아주 심각할 때 여로보암의 때, 아하스 때, 므낫세 때에는 교회와 국가의 범위가 항상 일치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많이 타락하면 국가의 범위도 줄어든다. 그러니까 국가교회(Church State)이다. 그래서 외국인은 그 국가에 입적함으로써만 교회에 참예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구약학자들의 눈에는 구약의 소위 한 성소에서, 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은 요시야 이후의 일이고 그때 그것을 그 이전으로 확대한 것으로 보는데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배 처소가 순례길의 실로, 라마, 벧엘 등의 여러 곳에 계속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점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구축되어 있느냐 하면 성전에 궁전에 붙어 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왕가의 Chapel이다. 여기에 중요한 구속사적 의의가 있다. 다윗에게서 메시야 나라의 시작을 보이셨으니까 예배하는 중심이 항상 메시야 왕을 대표하는 다윗 왕가에 부속하게 되어있다. 그러니 이 의식의 최고 표현은 중앙 성소에서 행해지는 예배에서 본다. 그러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이 백성들을 이 성전으로 예배하러 보내면 다윗 왕가에로 마음이 다 돌아가 버리는 것이 필연적이므로 기필코 그것을 막았다.

구약 교회에 왜 의식과 법이 많으냐 하면 계시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배 받으실 분이 예배 모범을 다 정하셨다. 그러니까 길고 세밀하다. 그렇게 함으로 영이 오시기 전에 백성들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진짜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원리로만 거룩한 것이다. 마음까지 그리고 죄까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많은 법들이 신약의 눈으로 보면 구약 백성을 얽어매는 것이다. 영이 오기 전이니까 자유함이 없다. 그런데 지금도 율법을 도구로 하여 백성들을 얽어매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3. 신약 시대의 교회

 

   오순절의 교회는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에서 떠나서 독립적 조직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국가 교회는 이제 세계적 성격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국가의 제약과 그 범위에서 벗어나서 보편 교회, 즉 우주적인 교회가 된다. 국가적인 제약을 벗어나므로 이스라엘의 국경의 영역을 벗어난다. 그리고 국가 교회의 형태에서 벗어나 개별화됨으로 전 세계로 확장되어 보편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교회와 국가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 형태와 상관 없이 교회가 존속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정부가 있으면 좋다. 가정생활, 국가생활, 사회생활이 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 있으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보편 교회는 율법의 제약을 받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으로 인도 받는 교회이다.

또 신약 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종교가 아니므로 선교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 선교의 근거이다. 그런데 다른 종교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라고 한 한스 큉의 말이나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변선환 교수의 말이 그 하나님의 작정을 근거로 한 것인지는 모르나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므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작정과 교회의 본질에서 선교의 사명이 나온다.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유형 교회에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여주는 세가지 근본적인 특징 혹은 기호가 있다. 이것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들인데 말씀의 선포와 성례 집행, 권징의 시행이다. 개혁 교회는 항상 이 세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말하는데 이것들은 결국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교훈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말씀 전파로 교회가 발생하고 존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며, 이것이 사도적 증거의 내용이다. 우리의 설교가 마땅히 사도적 증거의 계속이어야 한다. 설교가 약화되면 교회는 후퇴한다. 이 전파는 근본적으로 진실해야 하고, 신앙과 행위에서 지배적인 감화와 평안이 있어야 한다.

 

1. 말씀 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선포하면 그대로 그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설교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안되는가? 그것은 거짓 설교하거나 가짜 복음을 전했거나, 듣기 좋은 소리만 했으니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 그대로 일이 진행되어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고 죄와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 교회가 발생하고 성장하고 존속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선포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혹은 그 후에 말씀과 연관되어서 말씀대로 다 되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은 안 일어나도 내적으로 영적으로 기적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잘못된 기도인지 모르나, 그런 말씀의 권세를 구한다.

 

2. 말씀 선포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도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에 왜 회개가 없는가? 축복 설교만 하니까 교회에 회개가 없다. 복음이 들어가야 회개가 나온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후퇴한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신실하게 신앙으로 감화와 평안을 주어야 한다. 바로 설교하면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친히 오시기 때문에 그렇다. 별 희한한 것이 생겨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그리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우리가 복음을 바로 선포하면 사도들의 계승자이다. 사도적 선포가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우리가 계속 선포하면 우리가 사도적 계승을 하고 있고 사도적 선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사도들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증거를 계속하니까 우리가 사도들이다.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영광이고 특권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찌 사도적 증거에 연결하는가이다. 거기에 설교의 생명이 있다. 사도적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이다.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란 말은 형식이 안맞으니까 맞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친대로 집행하면서 그 성례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1. 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성례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 성례가 주는 은혜를 말씀으로 말해야 한다. 성례가 말씀과 분리된 새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이다. 성경의 종교는 듣는 종교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선포에 이어서 그 구원의 사실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내용에 따라서 성례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집행이다. 항상 보는 것에 선행해서 듣는 것이 앞서 와야 하고 또 보는 것 후에 듣는 것이 와야 한다.

불란서의 개혁교회의 평신도로 유명한 신학자요,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 시장도 했으며 많은 저술을 남긴 Jacques Elull이 쓴 책 중에 "Apocalypse" (계시록)란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그가 지적하기를 " 보는 것의 앞뒤에 반드시 말씀이 선행하고 후속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의 설립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듣는 것없이 성례가 집행되면 죽은 성례이다. 죽은 성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된다. 성례에 대한 설교를 했어도 다시 집행할 때엔 설립의 말을 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떼는(따르는) 이 떡은(이 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흘리신) 그의 몸에의(피에의) 동참입니다. 이것을 받아 먹고(이 잔을 마시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찢으셨음을과(그 피를 흘리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또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왜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고 떡과 피만 나누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설명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먹을려고 하는 이 떡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이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떡과 포도주 그것 자체가 그냥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면 화체설이 된다. 떡을 받아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달콤한 카스테라가 들어오니까 그 맛만 좋다고 생각하거나 떡 씹느라고 다른 생각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는, 그것을 꼭 교리화할 것은 아니지만 무교병은 단 맛이 없으니까 무교병이 좋다. 그것을 먹으면서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말을 해야지 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와야 생각을 한다.

 

2. 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무교병 흰 떡을 앞에 갖다 놓고 목사가 하나씩 떼어주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면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큰 조각으로 떼어 장로들에게 주어 나누도록 한다. 다 한 몸에 동참이니까 한 떡에서 먹어야 한다. 또 떡의 경우에는 씹어 먹으면서 구체적으로 기념해야 한다. 좀 보기에는 흉하지만 주의 살을 먹는 것이니까 먹는 행위를 해야 한다. 잔을 따를 때도 바울 사도의 말대로 다 한 피에 동참했으니까 다 한 잔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 영미 전통을 이어받아 위생적으로 각자 조그만 잔으로 받아 깨끗하게 한 것은 좋지만 한 잔에서 돌려가며 마셔야 한다. 그러면서도 위생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한 형제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동참이라는 말은 함께 먹는다는 말과 같다.

 

3. 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그리고 성례가 공공의 신앙고백의 행위이지 개별자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체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언약의 백성이 모인 공공의 자리에서 이 예식을 집행한다. 그래서 성찬과 성례를 공교회에서, 예배당에서, 예배시에 해야 한다. 이것이 다 신앙고백의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그 찢기심에 동참함이다.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이 교회니까 교회가 전체로 동참한다. 그러니까 성례 집행 하기 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바르다.

성찬만 아니라 세례도 반드시 교회 앞에서 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이미 목사 앞에서 했어도 공공 앞에서 반드시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흔히 모씨는 성경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 라고 묻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신앙고백의 행위에 속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성경을 언제 읽어봤으며 언제 성경을 알았다고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고 묻는가? 거기에 다 진리가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찬동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로마교회와 같은 잘못이다.로마교회의 신앙은 fides implica라고 분명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다 진리로 믿습니다 하면 정말 믿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신앙이다. 그 내용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믿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카톨릭의 내용하고 무엇이 다른가? 개신교판으로 싹 바꾼 것뿐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정확무오한 진리로 믿느뇨?"라는 구교 것을 " 모씨는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라는 개신교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으면 안되고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모씨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그로 인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상실과 죽음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유일한 구주로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 믿는 것인지 세례 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4.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그러면 집행은 누가 하는가? 말씀 선포자로 합당하게 세워진 자들 곧 목사가 집행해야 한다. 장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집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나 여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가 한다. 왜냐하면 성례와 함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을 받은 목사가 하는 것이다. 목사가 무슨 특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또 그것 때문에 어떤 특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뿐이다. 그 외는 다 봉사자이다. 항상 교회 머리가 가신 길을 목사들도 가야 한다. 목사는 봉사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무슨 특권의식 주려고 목사가 집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우신 설립의 법을 말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수녀도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없으면 권찰같은 사람도 하고 성당지기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표지 정도가 아니라 세례받아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 즉 주입 은혜(gratia infusa)가 오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성례는 은혜가 오는 필수적인 통로이다. 또 실제로 은혜 자체이다. 구원이 교회에 의탁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을 나누어 준다. 그러니까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이 세례이다. 그러니 평신도라도 아무나 급하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세례 안 받았다고 천국 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범죄자와 불신자는 제외된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권징은 목사가 그저 칼처럼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성례를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왜 이렇게 권징을 하는가? 교회의 근본 특징이 거룩이요, 아직은 전투교회이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한 죄인이고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한다. 인간적인 자연의 법칙으로야 범죄가 당연하지만 예수 믿어서도 그 법을 행한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에 대해 금치산 선고를 받았는데 그 일을 하면 괜찮을 줄로 아는데 또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권징함으로 금치산 선고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것인가? 다 권징이 안되니까 그렇다. 그러면 권징을 하지 못하는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말씀 선포의 결여에 있다. 복사들이 제대로 못사는데 어떻게 권징을 하겠는가? 목사에게 탐욕이 가득하고 거짓이 가득한데 어찌 권징을 하겠는가?

성화가 완결되지 않았으니까 탈선하는 일이 교회에 있다. 그러니 권징을 해야 한다. 권징에는 권고와 징계와 수찬정지, 출교등 여러가지가 있다. 벌써 수찬정지는 상당히 큰 벌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합당하지 못하다는 선포이다. 화란에 추기경이 둘이어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 권징 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징하지 않고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성례를 더럽히는 것이요, 성례를 더럽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권징은 윤리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로서 윤리와 가르치는 교리의 교훈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윤리 면에서 권징을 못하면 교리적인 문제가 생겨도 권징을 못한다.

 

제 3 장 교회의 기호 혹은 특징적 표지

 

유형 교회에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여주는 세가지 근본적인 특징 혹은 기호가 있다. 이것들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들인데 말씀의 선포와 성례 집행, 권징의 시행이다. 개혁 교회는 항상 이 세가지를 교회의 표지로 말하는데 이것들은 결국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곧 교훈과 실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제 1 절 말씀의 참된 전파

 

말씀 전파로 교회가 발생하고 존속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선포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며, 이것이 사도적 증거의 내용이다. 우리의 설교가 마땅히 사도적 증거의 계속이어야 한다. 설교가 약화되면 교회는 후퇴한다. 이 전파는 근본적으로 진실해야 하고, 신앙과 행위에서 지배적인 감화와 평안이 있어야 한다.

 

1. 말씀 전파와 교회의 발생과 존속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대로 선포하면 그대로 그 결과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설교를 하는데도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교회가 안되는가? 그것은 거짓 설교하거나 가짜 복음을 전했거나, 듣기 좋은 소리만 했으니까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 그대로 일이 진행되어 사람들이 변화되어 새사람이 되고 죄와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면 교회가 발생하고 성장하고 존속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선포해야 한다.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은 그들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혹은 그 후에 말씀과 연관되어서 말씀대로 다 되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선포의 특징이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면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그런 기적은 안 일어나도 내적으로 영적으로 기적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복음을 선포할 때 선지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일이 일어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는데 잘못된 기도인지 모르나, 그런 말씀의 권세를 구한다.

 

2. 말씀 선포의 내용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도를 바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인간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교회에 왜 회개가 없는가? 축복 설교만 하니까 교회에 회개가 없다. 복음이 들어가야 회개가 나온다. 복음 선포를 하지 않으면 교회가 후퇴한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신실하게 신앙으로 감화와 평안을 주어야 한다. 바로 설교하면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이 생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말씀과 함께 친히 오시기 때문에 그렇다. 별 희한한 것이 생겨야 하나님을 만나는 줄로 생각하는데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그리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며 기쁨과 평안이 넘쳐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잘 연구하고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3. 말씀 선포와 사도적 권위의 계승

 

우리가 복음을 바로 선포하면 사도들의 계승자이다. 사도적 선포가 사도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것을 우리가 계속 선포하면 우리가 사도적 계승을 하고 있고 사도적 선포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된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사도들이다.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는 아니어도 사도적 증거를 계속하니까 우리가 사도들이다. 복음을 전파해서 하나님의 나라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 전도자의 영광이고 특권이다.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어찌 사도적 증거에 연결하는가이다. 거기에 설교의 생명이 있다. 사도적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사역이다.

 

제 2 절 성례의 정당한 집행

 

성례의 정당한 집행이란 말은 형식이 안맞으니까 맞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가르친대로 집행하면서 그 성례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다.

 

1. 성례의 내용을 설명함

 

성례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 성례가 주는 은혜를 말씀으로 말해야 한다. 성례레가 말씀과 분리된 새 은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기독교는 보는 종교가 아니라 듣는 종교이다. 성경의 종교는 듣는 종교이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 선포에 이어서 그 구원의 사실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내용에 따라서 성례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한 집행이다. 항상 보는 것에 선행해서 듣는 것이 앞서 와야 하고 또 보는 것 후에 듣는 것이 와야 한다.

불란서의 개혁교회의 평신도로 유명한 신학자요, 보르도 대학의 사회학 교수, 시장도 했으며 많은 저술을 남긴 Jacques Elull이 쓴 책 중에 "Apocalypse" (계시록)란 책이 있는데 거기 보면 그가 지적하기를 " 보는 것의 앞뒤에 반드시 말씀이 선행하고 후속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의 설립 내용을 반복해야 한다. 듣는 것없이 성례가 집행되면 죽은 성례이다. 죽은 성례는 아무 의미가 없다.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된다. 성례에 대한 설교를 했어도 다시 집행할 때엔 설립의 말을 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내가 떼는(따르는) 이 떡은(이 잔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위하여 찢기신(흘리신) 그의 몸에의(피에의) 동참입니다. 이것을 받아 먹고(이 잔을 마시면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찢으셨음을과(그 피를 흘리셨음을) 믿고 기념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고 또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왜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가?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기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고 떡과 피만 나누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러니 말씀을 선포하고 그것과 함께 설립의 말씀을 읽고 그리고 설명을 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먹을려고 하는 이 떡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이 말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떡과 포도주 그것 자체가 그냥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면 화체설이 된다. 떡을 받아 먹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달콤한 카스테라가 들어오니까 그 맛만 좋다고 생각하거나 떡 씹느라고 다른 생각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런 면에서는, 그것을 꼭 교리화할 것은 아니지만 무교병은 단 맛이 없으니까 무교병이 좋다. 그것을 먹으면서 주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말을 해야지 절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와야 생각을 한다.

2. 한 잔과 한 떡을 먹도록 해야 함

무교병 흰 떡을 앞에 갖다 놓고 목사가 하나씩 떼어주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면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큰 조각으로 떼어 장로들에게 주어 나누도록 한다. 다 한 몸에 동참이니까 한 떡에서 먹어야 한다. 또 떡의 경우에는 씹어 먹으면서 구체적으로 기념해야 한다. 좀 보기에는 흉하지만 주의 살을 먹는 것이니까 먹는 행위를 해야 한다. 잔을 따를 때도 바울 사도의 말대로 다 한 피에 동참했으니까 다 한 잔에서 마시는 것이 좋다. 영미 전통을 이어받아 위생적으로 각자 조그만 잔으로 받아 깨끗하게 한 것은 좋지만 한 잔에서 돌려가며 마셔야 한다. 그러면서도 위생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한 몸과 한 피에 동참한 형제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동참이라는 말은 함께 먹는다는 말과 같다.

3. 성례는 교회 앞에서 공적으로 집행해야 함

그리고 성례가 공공의 신앙고백의 행위이지 개별자의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교회가 전체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앞에서 언약의 백성이 모인 공공의 자리에서 이 예식을 집행한다. 그래서 성찬과 성례를 공교회에서, 예배당에서, 예배시에 해야 한다. 이것이 다 신앙고백의 일이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의 몸의 그 찢기심에 동참함이다. 그 때문에 생겨난 것이 교회니까 교회가 전체로 동참한다. 그러니까 성례 집행 하기 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바르다.

성찬만 아니라 세례도 반드시 교회 앞에서 해야 한다. 신앙고백은 이미 목사 앞에서 했어도 공공 앞에서 반드시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흔히 모씨는 성경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 라고 묻는데 여기에 대한 대답을 신앙고백의 행위에 속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성경을 언제 읽어봤으며 언제 성경을 알았다고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고 묻는가? 거기에 다 진리가 들어 있으니까 그것을 찬동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로마교회와 같은 잘못이다.로마교회의 신앙은 fides implica라고 분명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다 진리로 믿습니다 하면 정말 믿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잠재신앙이다. 그 내용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믿는 것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선행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카톨릭의 내용하고 무엇이 다른가? 개신교판으로 싹 바꾼 것뿐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정확무오한 진리로 믿느뇨?"라는 구교 것을 " 모씨는 신구약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뇨?"라는 개신교판으로 각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물으면 안되고 신앙고백을 시켜야 한다.

"모씨는 하나님 앞에 죄인임과 그로 인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상실과 죽음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유일한 구주로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무엇이 예수 믿는 것인지 세례 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4. 성례의 집행자와 대상자들

그러면 집행은 누가 하는가? 말씀 선포자로 합당하게 세워진 자들 곧 목사가 집행해야 한다. 장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집사가 하는 것도 아니고 평신도나 여자가 하는 것도 아니다. 목사가 한다. 왜냐하면 성례와 함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도록 세움을 받은 목사가 하는 것이다. 목사가 무슨 특권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선포자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또 그것 때문에 어떤 특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목사의 권위는 말씀 선포의 권위뿐이다. 그 외는 다 봉사자이다. 항상 교회 머리가 가신 길을 목사들도 가야 한다. 목사는 봉사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무슨 특권의식 주려고 목사가 집행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세우신 설립의 법을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수녀도 세례를 베풀 수 있고 없으면 권찰같은 사람도 하고 성당지기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세례가 구원의 표지 정도가 아니라 세례받아야 구원받는데, 그것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 즉 주입 은혜(gratia infusa)가 오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성례는 은혜가 오는 필수적인 통로이다. 또 실제로 은혜 자체이다. 구원이 교회에 의탁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교회가 성례전을 통해서 구원을 나누어 준다. 그러니까 구원의 필수적인 요건이 세례이다. 그러니 평신도라도 아무나 급하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세례 안 받았다고 천국 갈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우신 제도에 따라 신자와 그 자녀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 그러니 범죄자와 불신자는 제외된다.

제 3 절 권징의 신실한 시행

권징은 목사가 그저 칼처럼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순수하게 유지하고 성례를 거룩하게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왜 이렇게 권징을 하는가? 교회의 근본 특징이 거룩이요, 아직은 전투교회이어서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죄한 죄인이고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한다. 인간적인 자연의 법칙으로야 범죄가 당연하지만 예수 믿어서도 그 법을 행한다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에 대해 금치산 선고를 받았는데 그 일을 하면 괜찮을 줄로 아는데 또 금치산 선고를 받는다. 권징함으로 금치산 선고인 것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지 못하고 문제가 많은 것인가? 다 권징이 안되니까 그렇다. 그러면 권징을 하지 못하는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말씀 선포의 결여에 있다. 복사들이 제대로 못사는데 어떻게 권징을 하겠는가? 목사에게 탐욕이 가득하고 거짓이 가득한데 어찌 권징을 하겠는가?

성화가 완결되지 않았으니까 탈선하는 일이 교회에 있다. 그러니 권징을 해야 한다. 권징에는 권고와 징계와 수찬정지, 출교등 여러가지가 있다. 벌써 수찬정지는 상당히 큰 벌이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합당하지 못하다는 선포이다. 화란에 추기경이 둘이어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다. 우리 권징 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권징하지 않고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성례를 더럽히는 것이요, 성례를 더럽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 권징은 윤리 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로서 윤리와 가르치는 교리의 교훈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까 윤리 면에서 권징을 못하면 교리적인 문제가 생겨도 권징을 못한다.

제 4 장 교회의 정치

제 1 절 교회 정치에 관한 이론들

1. 퀘이커파와 달비파(Quakers and Darbyites)

이 파들은 교회의 모든 정치를 원리상 배척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교회의 모든 외면적인 형식 혹은 조직은 마침내 퇴화하여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배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적 조명을 강조한다. 즉 내적 조명을 통해 오는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을 중요시한다. 이들은 공중 설교 대신 성령으로 고무된 교훈의 말씀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자가 따로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고정된 설교자가 없다는 것은 조직이 전면 부정된다는 것이다. 퀘이커파는 성령의 역사가 오면 몸을 떤다고 하여 진동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성령에 의한 특별 계시의 직접적인 말씀을 강조하고 말씀을 무시하는데 그것은 바울의 말, 글자는 죽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오해한 것이다. 이들의 성령의 조명이라는 것은 실은 소위 인간적인 자각을 말하는 것이어서 인간 정신의 산물이므로 성령의 말씀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을 무시하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말씀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도 없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떠나서는 혹은 선포된 말씀을 떠나서는 역사하시지 않는다.

오순절파의 잘못이 여기 있다. 그들은 말씀과 연관되지 않는 성령의 역사를 기대한다. 그러나 성령이 저자가 되시는 성경계시는 더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성경을 제쳐놓을 만한 새로운 계시는 없다. 성경의 계시는 완성되고 종결되었다. 그리고 찬송도 아닌 복음송을 많이 부러서 고조시킨 감정의 흥분을 성령의 역사로 여기는데 그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의 달비파를 형제단이라고도 하는데 영국 국교회가 너무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데로 흘러가는 것을 반대해서 의식과 조직을 무시하고 성도들의 교제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달비파이다. 그들은 외적 조직을 반대하고, 말씀의 권위를 배척하고 인간의 자각을 성령의 조명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세대론의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있는 것은 이렇게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한 이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이 합리론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한 것은 참 좋은 것같은데 18세기 초엽까지 개신교의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고 자유주의, 근세주의, 합리주의로 넘어가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조명을 강조하는 재세례파들이다. 이런 파들이 빨리 자유주의가 되게 하는 문이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진리가 없다. 성령께서 다 해버리니 그저 은혜, 은혜만 떠든다. 그래서 은혜가 좋은 것같지만 말씀 없이 바른 은혜가 없다.

2. 에라스티안파의 제도(The Erastian System)

이 파는 교회를 정부에 의해 제정된 법칙에서 그 존재와 형식을 받은 하나의 결사로 보았다. 교회의 교직자는 반드시 국가의 위정자로부터 나와야 하고, 국가는 교회를 치리하며 권징하며 필요할 때는 파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파는 교회의 독립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무시하였다. 교회의 본성은 정부의 것과 별개이다. 칼빈이 제네바 시에 가기 전까지는 제네바 시 의회가 교회의 권한을 다 쥐고 있었다. 칼빈의 투쟁은 교회의 권세를 정부로부터 빼앗아내는 것이었다. 즉 시의회에서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3. 감독파의 제도(The Episcopalian System)

이 파의 사람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의 정치를 직접적으로 또는 독점적으로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위임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신자들의 단체는 절대로 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주교들과 감독 이상만 결정권을 갖고 신자에게는 무조건 순종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감독파도 교회의 본질이 사도적 계승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계승권이 주교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데서 교회의 본질을 찾는다. 그래서 교회의 기본 속성을 사도적 선포의 계승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사도적 계승권은 강조한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감독들에게 교회 정치가 위임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정치에 관한 한 로마교회도 감독파이다. 로마교회는 베드로의 감독권이 교황에게 전승되었다고 하고, 영국교회는 사도적 계승권이 감독들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편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때문이어서 그리스도의 보편성에서 교회의 보편성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도성은 사도적 선포의 계속 때문이다.

우리 한국 장로 교회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하는데 완전히 감독정치화되어서 장로 제도가 교회 민주화를 막고 있다.

4. 로마교회의 현 제도

로마교회의 제도는 감독파의 제도를 논리적으로 결론지어 놓은 것이다. 로마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설립권을 베드로에게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 베드로 수제자의 교회의 머리로서의 권한이 로마교황에게 계승되고 있다. 베드로가 로마에 와서 죽으면서 베드로에 의해서 이 계승권이 로마 감독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교회가 5 대교구 중에서 머리 노릇을 했던 것이고, 그래서 로마 교황청의 세력이 가장 세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도 그런 면에서의 무오이다.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대표, 대리자(vicar Fil Dei)로서는 무오하다고 한다. 인간으로서의 교황 자체가 무오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황의 자리에 앉았을 때(exofficio), 즉 그 위에 앉아서 교리와 예배와 윤리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고 칙령을 내릴 때는 오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도 혼자 내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대주교 이상 추기경들의 모임에서 결정해서 교황이 공포한다. 바티칸 제 2 공회의(1963-1965)도 개회는 교황이 했어도 결의 사항은 다 신학자들과 대주교와 추기경들이 하도록 위임해 준다. 그리고 결정이 나면 교황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렇게 교황이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니다. 바티칸 제 2 공회의의 배후에도 Karl Rahner의 신학이 서 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것같이 교황이 독재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한스 큉이 교황도 오류가 있다고 반박함으로 로마 카톨릭이 파송한 교수직에서는 떨어졌지만 그 주정부의 교수로는 계속 일했던 일이 있다.

5. 회중파의 제도(The Congregational System)

이 제도에 의하면 각 교회는 상호 독립된 완전한 교회이다. 이같은 교회의 정치권은 독점적으로 교회의 회원들에게 있다. 회중파의 교회가 제일 민주적이어서 제일 좋은 교회이다. 미국으로 건너간 대부분의 청교도들이 회중파 교회를 이루었다. 그래서 민주화하고, 부흥회 각성운동도 일으켰지만 가장 빨리 자유주의화되어간 교회이다. 가령 하바드라든지 하는 대학들이 목사들을 잘 기르기 위해서 세워졌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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