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5 식도성결교회
박영빈목사
제2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번져 가는?뉴 에이지?운동의 기본 바탕은 범신론(汎神論)으로서, 초월적인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하며 인간 안에서 신적 요소를 발견하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명상이나 참선이나 기도에는 사실상 기도의 대상이 없으며, 자기 스스로의 잠재 능력 개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아버지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언제든지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교통하는 길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곳에 이미 하나님은 임재해 계시며 그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성경은 성령님을 많은 별명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별명들이 아마도 성령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다 확실히 아는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변호자(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 변호하심), 상담자(우리 마음의 문제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심), 위로자(슬픔과 고통에서 참된 평안을 주심), 중보자(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서로의 이해를 도우심), 보호자(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보호하심)로 불리우십니다.
이러한 별명들은 특별히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목적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기도는 반드시 성령님과 함께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도의 성격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뜻을 접어두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하여 기도의 올바른 정신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교회를 섬겼던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입을 통하여 고백되어진 공적인 유일한 기도입니다.
처음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를 받았던 시대에도 신자들은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으로 주기도문을 고백하였으며, 주기도문에 대하여 처음으로 해석을 달았던 주석가 터툴리안(AD155- 220)은 이 주기도문을 가리켜 “전 복음의 요약”이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기도문 안에 성경전체가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주기도문 안에는 심오한 기독교의 사상적 풍부함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의 힘과 겸허하게 하는 깊은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올바른 기도의 한 모범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경계하시고 난 후에 그 대안으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어떠하였습니까? 그들의 기도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외식적(外飾的)인 기도였습니다(마 6:50-5). 곧 그들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화려한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든지, 사람들이 들으라고 설교하듯이 하는 기도 같은 것은 다 잘못된 외식적 기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방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기도였습니다(마 6:7).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반복해서 기도하면 자기의 마음속에 이만하면 됐다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자기의 감정(感情)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도 이처럼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별 생각 없이?주여 주여?를 반복한다든지, 특별한 이유 없이 목소리를 높여서 고함을 지른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시정해야 할 요소들중의 하나입니다.
올바른 기도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나 자기의 감정에 의지하여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을 바라보며?믿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아무리 작은 소리로 말한다 할지라도 다 듣고 계시는 인격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진실하게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고서 그분 앞에 조심스럽게 아뢰는 진실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 주기도문을 함께 살펴가는 동안에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심으로 함께 그 모든 풍요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란 말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초월적 존재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곧 이방인들이 내재적(內在的) 신관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적 능력과 기도 응답을 찾으려는 잘못된 태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선이나 요가나 기(氣) 수련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서 신적인 잠재력을 개발하려는 노력으로서, 여기에는 살아 계신 인격적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세 가지 이해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사람에게 있어 ‘하늘’이라는 것은 미지와 초월의 세계입니다. 지금은 지구의 창공이 인간의 문명 앞에 정복당하여 그렇지 못하지만, 중세기까지만 해도 하늘은 성스러움의 대상이었으며,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또한 아무리 인간이 하늘을 날아 다니는 능력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도 드넓은 우주공간과 무한한 ‘하늘’의 세계는 역시 인간이 경외심을 배우는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는 비교되지 않는, 우리를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 너머에 계시며, 인간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계신 지존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편재(遍在)성을 나타냅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어디에나 하늘이 존재합니다. 하늘은 높은 창공과 우주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마시는 공기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늘은 모든 공간을 포괄하는 이름입니다.
최근에 과학은 물질의 본질이 공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의 가장 작은 알갱이를 원자, 혹은 원소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핵과 그 주위를 떠도는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그 핵을 사과 하나의 크기라고 한다면 전자는 약 3킬로미터나 떨어져서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의 대부분은 어떤 알갱이라기 보다는 공간들의 집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벽을 뚫고 지나가는 등의 공간이동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축구공에게는 골대의 그물이 벽입니다. 지나갈 수 없는 물체입니다. 그러나 탁구공이나 골프공은 쉽게 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물리적인 벽면은 원자의 공간을 조절하는 기술만 습득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뚫고 지날 수 있게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마이크로 하늘이나, 광대한 하늘 모두에 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조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모든 것이 끝났으므로 뒤로 물러나 허리를 두드리는 할아버지 창조주가 아니라, 바로 지금도 우리가 속해 있는 하늘에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조절하시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과 곤경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패한 곳, 황량한 곳, 외로운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스스로 절제하는 생활을 하게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믿는 곳에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공유해야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사랑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만을 위하여 세상을 만드시지 않았으며, 나만을 위하여 세상을 움직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앙을 옳게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만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있으며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세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오만은 마치 자기가 세상의 주인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잘못된 태도로 기도를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사람도 귀중한 한 생명으로 사랑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은 양의 비와 똑같은 양의 햇빛을 주십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든지, 모르든지, 감사하든지, 아니하든지... 하나님은 한결같이 좋은 것으로 똑같이 주시고 기회를 공평하게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거나 적대시 하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적개심을 품고 인생을 반듯하게 살아갈 수 없는 것은 그러한 마음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전도해야할 필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하나님이시기 보다는 ‘우리’라는 복수(複數)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내게도 하나님이 되시지만, 내 아내의 하나님도 되시고, 내 부모님의 하나님도 되시고,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에 대하여 전해야 하며,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함께 누릴 축복과 은혜를 기대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만을 생각하지 남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잘못된 가치관에서 돌이켜 남을 용납하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웠던 처음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재산을 공동소유하며, 가난한 자들과 공평이 나누어 갖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가족처럼 변화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믿음의 가족을 이루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람을 귀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과 인격을 담아 ‘나’를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아버지’의 의미보다 더 깊은 사랑과 이해를 담은 말입니다.
육신적인 아버지는 아무리 아들을 사랑해도 그의 모든 것을 알거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대차이가 존재하고, 때로는 가치관이 다르며, 서로의 인격수준이 달라서 사랑에 장애를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직접 손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우리에게 나쁜 습관과 습성이 있다는 사실도 아시고, 우리가 특별히 어떤 점에 있어 약하다는 사실도 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무도 이를 수 없는 지존하신 인격을 가지셨지만, 때때로 우리의 인격과 눈높이를 같이 하시고 대화를 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절대로 그 사랑이 하나님 편에서는 깨뜨려지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아바 아버지’라는 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바’라는 말은 유대인의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우리말로 하면 ‘아빠’라고 하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만나야 하는 분이십니다. 얼굴에 초코렡으로 잔뜩 얼룩이 지고, 손과 발은 흙투성이에, 옷은 걸레와 같이 되었어도 아이가 아빠를 만나면 무조건 해맑은 웃음으로 달려가 그 품에 안깁니다. 아빠는 그런 아이를 번쩍 안아서 넓은 품에 안아주고 자신의 손으로 그 얼룩을 닦아주는 인자함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신적으로 볼품없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손과 발이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죄로 아무리 더럽혀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맞아 주시며 사랑을 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어떤 왕이 나이 많은 노 재상(宰相)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자식이 죽었을 때가 더 슬펐습니까?”
그러자 노 재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대답을 했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어느 쪽이 더 슬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계속 어느쪽이 더 슬펐느냐고 차이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눈물의 안개 속에 가끔 뽀얗게 남산 끝머리가 보일락 말락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죽었을 때는 아무 것도 안보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 부모의 마음을 누가 지으셨습니까? 그 마음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의 인격이 그러한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과 같이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이라도 주실 만큼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어둠이나, 그림자, 혹은 악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결코 죽음을 당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이 되어 태어나신다는 것은 곧 죽음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며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능력을 포기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낮아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와 사랑을 함께 만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셨는데 자기에게 짐지워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대가를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전재산이라도 다 주고, 보태어 목숨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랑이 곧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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