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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택과 예정(Election and Predestination)

하나님아들 2014. 3. 24. 00:22



선택과 예정(Election and Predestination)

Ⅰ. 선택(Election)

말라기-서문

말라기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천사였을 것이라고 상상하는데, 이는 천사가 히브리어로 말락(mala'k)이라고 불려진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탁을 선포하기 위해서 천사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한 일반적인 사역을 이용하신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이름에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처럼 i, yod가 그 이름의 마지막에 덧붙여졌기 때문에 우리는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우리가 망각한 그 이름에 대한 한 이유가 있어왔음을 이미 인정하였다. 게다가 나는 그는 에스라이며 말라기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고 장엄한 그분의 사역을 위해서 그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동의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사실이 어떠하든지, 그는 분명히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그가 마지막 예언자라는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말라기 후반부에서 그는 율법의 순전한 가르침 안에 굳건히 서있어야 함을 사람들에게 역설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한 일이며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하셨던 대로 계속적으로 선지자를 보내시는 일은 하시지 않으셨다. ... 본문 말씀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말1:1).

The burden of the word of the Lord to Israel by the hand of Malachi(Mal. 1:1)

massa'를 단순히 선지자를 의미하는 또 다른 단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내가 이미 여러 곳에서 언급한 것처럼 잘못을 저지는 것이다. 모든 예언이 경고(警告;burden)라고 불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단어가 사용될 때마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가 뒤따랐으며, 예례미아서에서 처럼(렘23:36), 그 단어는 일반적으로 혐오스러운 의미로 사용되었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불경건한 자들이 선지자들을 저주하기 원할 때, 너희는 위협과 두려움 외에는 선지자로부터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이는 엄중한 말씀”이라는 표현을 저들은 한결같이 사용하곤 하였다. 즉, 차라리 귀를 막으며 불길함의 전조로써의 모든 예언들을 회피하는 것이 나았다.

말라기의 가르침은 경고로 적절하게 불려지는데, 이는 다른 곳에서 내가 더욱 충분히 말하고 설명한대로 또다시 창궐하고 반드시 중단되어져야만 하는 죄악(infamy)으로 인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해야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이 저들 위에 임박했음을 선포한 것이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으로(hand)는 섬김(service)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 가르침 중재인으로서의 말라기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그 자신의 것 중 어떤 것도 선포하지 아니하며 충실하게 [예언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전한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어떻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 .??아들은 그의 아비를 공경하며, 그리고 종은 그 상전을 또한 두려워한다.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존경함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내가??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말라기1:2-6 (칼빈의 표현).

나는 이 구절 모두를 함께 읽지 않을 수 없는데, 한편으로 본문의 의미가 분명치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분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권리까지도 부인하는, 그릇되고 배은망덕한 사람들에게 항의하고 계신데, 이는 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경외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하게 아버지와 주인 모두의 이름과 위치를 선언하신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때, 그분은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계신 자신을 부인함으로 인해서 저들을 책망하시며, 저들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회피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경외하지 않았을 때, 또 다시 하나님은 저들이 자신을 주인으로서 여기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질책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자신이 주인이시면서 아버지가 됨을 보여주고 계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근거로해서 유대인들에게 호소하실 수 있으셨다. 심지어 그분께서 저들을 사랑하시지 않으셨을지라도, 저들은 그분의 주권아래 매여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 전체를 향하신 자신의 우주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유대인들을 질책하고 계신데, 이는 저들이 거룩하고 특별한 백성으로 그분에 의해서 자유롭게 채택(adopted)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존경하기를 잊어버렸고 오히려 경멸하였으며 그분의 가르침에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모든 인간들을 다스리는 그분의 우주적 왕국의 권한으로 저들의 유죄를 입증하시기보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이 저들의 배은망덕을 입증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저들이 하나님께서 오직 저들만을 영예롭게 하신 그 둘도 없는 호의를 발로 걷어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나는 너희를 창조하였으며 너희를 먹이는 너희의 아버지이다. 태양은 매일 너희들을 비추고 땅들은 그 소산물을 낸다. 사실 너희는 셀 수 없는 유익으로 나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친절함으로 그것들을 너희들에게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저들을 다루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내가 이미 지적한대로, 그분은 저들 앞에 아브라함의 씨로서의 자유로운 채택(adoption)을 부여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유대인들의 불충은 저들이 비교할 수 없는 호의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가치로움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저들을 모든 나라 위에 세우셨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에 던진 경멸이 그분의 사랑에 대한 최악의 태도이었음을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사랑하셨다라고 그 말씀을 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저들로 하여금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라고 말하게 하심으로써 간접적으로 저들의 배은망덕을 책망하고 계신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만약 너희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너희를 사랑했는가라고 말한다면, 아니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이것이니, 나는 비록 저들이 형제지간이었을 지라도 에서를 미워하고 너희 조상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우리는 선지자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서 저들이 보여준 하나님에 대한 사악함에 대해서 책하시지 않으신 자유로운 언약(free covenant)을 상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저들이 인류의 나머지 사람들과 같이 창조되었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태양빛을 허락하시고 땅으로부터 식물(食物)을 주셨기 때문에 저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만약 저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세움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저들 자신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야곱을 저들의 조상으로 택하시기를 좋게 여기셨다는 점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선지자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 모두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호의가 야곱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만을 택하셨다. 그리고 인류의 나머지 가계(家系)는 제쳐놓으셨다(put aside).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이 한 가족가운데서 한 사람만이 선택되었고 그 나머지는 거절하셨다.

요점은 단순히 에서와 야곱이 형제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모든 자들이. . . 저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선지자가 진술하지 않은 다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모든 유대인들은 에서가 장자이며 따라서 야곱이 장자의 권리. . . 등 을 차지하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고 맏이인 에서는 거절당하였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유를 찾고자 한다면, 근원이나 본원(root or origin)의 차이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형제였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이 어미의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계시를 통해서 야곱이 더 큰 자가 될 것임을 선포하셨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가운데서 우리가 찾는 모든 선함의 제일차적 원천을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free love of God)에서부터 비롯됨을 보게 된다.

참으로 모세는,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거나 수효가 많아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크신 호의로 너희를 영화롭게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너희의 조상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하였다(신7:7). 유대인들은 계속적으로 자신들의 채택이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호의 외에 그 어느 곳에서 찾지 말 것을 경고 받아 왔다. 그분은 저들을 선택하시기를 옳게 여기셨으니 이는 저들의 안전의 유일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수치로 유대인들을 채웠어야 했을 그 유익을 간단하게 회상한 후에, 선지자는 주요한 요점으로 이끌어 가는데, 이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에서 자신으로부터 그분의 권위를 빼앗겼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즉 유대인들은 그분을 아버지로서 공경하지도 않고 주인으로서 경외하지도 않았다.

그분은 참으로 창조자의 권위로 자신을 아버지요 주인이라고 지칭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미 설명한대로 그분은 모든 인류가운데서 자신의 백성이 될 소수의 무리들을 선택할 때 자신의 은혜가 더욱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채택했음을 말씀하고 계시다. ...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선택으로 영예롭게 하신 저들과 가장 거룩한 사슬로 자신을 묶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을 저버린다면, 저들의 배반이 무엇이건 간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선지자의 의도와 전체적인 책망의 목적을 이해하였으므로,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일이 남았다. 우리는 육신적으로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후손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채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허락하셨는데, 이는 우리보다 열등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구별하셨다는 것이다. 명백하게도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이 저지를 죄악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나는 지금 이러한 가르침이 그 때 당시 유대인들에게 못지 않게 오늘날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것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를 채택하신 방식이 한 씨앗이나 가족을 채택하신 방식과 다르지만, 우리의 가치로 인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 위에 들어올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자유롭게 선택하신 것은 저들이나 우리 모두에게 진리인 것이다. 그분께서 그렇게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것이며, 무엇보다도 독생자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통해서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우리를 참여시킴으로써,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과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로서 공경하고 주인으로서 경외하지 않는다면, 저 고대인들에게서처럼 우리 안에서도 동일한 (엄청난) 배은망덕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본문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주요한 요점들을 다루었다. 내일은 본문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처럼 선택(選擇;election)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선지자의 의도를 논의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는 이미 다루었다. 다음으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한 주제를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말라기 선지자의 의도를 설명하였다. ... 그러나 그분의 충고의 정당성을 살피기 위해서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그분이 사람대신에 개나 당나귀로 창조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양과 형상을 따라 사람으로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담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음 받았으며 그로 인해 몸에 있어서는 인간과 말 못하는 짐승사이에 아무런 실제적 차이가 없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비록 이식(transplantation)의 방식으로 인간이 영혼을 받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마니교도들이 상상하는 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식(移植)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저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실재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영혼이 무로부터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대를 통해서 태어나지만 우리의 기원은 진흙이다. 여전히 우리 안에 특별한 무엇이 남아 있어서 무로부터의 창조물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운 호의로 인하여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작정하셨기 때문에 짐승과 다름을 보게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은 목적을 위해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배은망덕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본문은 아브라함의 씨앗을 자신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호의와 관련성이 있다. 모세의 노래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밧줄을 던지셨고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구별하셨다(신32:9)1). 그분의 통치아래 있는 모든 인류가운에서 한 가족을 자신의 것으로 택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이점에 대한 이유를 찾는다면, 우리는 인간 안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무로부터 창조되어 몸안에 불어넣어진 영혼을 가지고 있다.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종보다 한 종에게 우월권을 주셨을 때, 저들간의 구별은 그분의 은혜로운 호의 안에서 그 원점을 갖게 됨이 틀림없다. ...

선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의 한 계보를 따로 떼어놓으심으로써??선택의 세 번째 단계(step)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첫 번째를 염두해 두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인류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저들을 당나귀나 개들로 창조하실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저들을 만드시기로 택하신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비록 그분의 능력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으셨지만, 아브라함의 종족에 대한 그분의 택하심이다.... 세 번째 국면에 있어 말라기가 언급한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으로 다른 사람들을 취하시기를 거절하시고 아브라함의 자손들 사이에 구별하셨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점이 로마서 9장에서 사도 바울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다.

이제 세 번째 단계를 쫓아 네 번째 단계에 이른다. 하나님께서는 의도하신 대로 야곱의 자손을 택하시고 다른 자들은 거절하셨다. 성경은 모세의 말과 같은 진술로 가득차 있다(신9:6). “나는 너희의 가치로움으로 인해서 다른 나라들로부터 너희를 택하지 않았다. 이는 너희는 반역의 무리들이며, 목이 곧고 완고한 백성임을 알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죄악된 정신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들 안에 자신의 놀라운 친절함의 한 예를 드러내시기 위해 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의 채택을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곳에서도 찾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선택이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행위셨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구별하신 각 개인들은 자유롭게 택함을 받은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어야 한다. 그러므로 네 번째 단계에 이른다. ... 육체를 따라서 야곱의 후손된 많은 자들이 에서 못지않게 거절된다면, 하나님께서 개개인을 선택하실 때 그분의 택하심은 그분의 자유로운 호의와 순전한 성정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기록한 사도가 행한 논쟁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은 택하시고 그 나머지는 거절하시며, 인간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으시고, 그리고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자들을 택하시고 게다가 다른 자들은 거절하신다는 생각은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잔혹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명령하며 그 판단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저들의 판단에 하나님을 불러 세우고자하는 욕망이 아니면 이러한 거리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다시 첫 번째 단계로 돌아가야 한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 나머지 한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어 불합리하다면, 당나귀를 만들 것인지 아니면 사람을 만들 것인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판단을 - 만약 항변함이 필요하다면 - 우리가 어떻게 항변할 수 있는가?

이는 내가 당나귀나 인간의 몸이 동일한 진흙으로부터 왔음을 언급한 대로다. 그리고 당나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정력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생명주심의 능력에 의해서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도, 비록 그것이 불사할지라도 그것은 무로부터 온 한 창조에 불과하다. 이제 이러한 훌륭한 비평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 품는 저들의 생각에서 무엇이 잘못인지,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 어떤 이들은 거절하시고 어떤 이들은 택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는 진술에 의해 어떻게 그분이 중상(重傷)을 당하시는지를 설명하게 하자. 이는 저들이 만약 인간의 판단을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저들은 창조의 시점 에서 인간과 짐승의 우주적인 선택에 대해 동일한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오직 저들의 감추어진 선택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실제적인 차이점도 인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신학자들은 선택의 모체를 미리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발상인가.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이들은 선택되고 어떤 이들은 버림을 당하는데 이는 그분 앞에 감추어진 것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각 사람이 어떤 유형이 사람이 될 것인지를 예지(豫知)하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떤 이들에게는 선함이, 어떤 이들에게는 사악함이 나오는가 나는 묻고자 한다. 만약 그들이 “자유로우신 그분의 뜻으로부터”라고 답한다면, 확실히 창조는 자유로우신 그분의 뜻보다 선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인격 안에서 그와 같이 창조되었음을 안다. ... 그리고 이것이 한 뿌리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동일하다는 것 외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특별한 은사(special gifts)”를 논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의 본성이 타락하지 않았고 우리 모두가 축복의 동일한 보장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은사를 부여받았었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 외에는 어떤 것도 인간 안에 찾아볼 수 없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지(豫知)는 우리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없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시고) 살피실 때,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저주아래 있는 죄인들을 보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심 위에서 발견되어져야 할 것을 단순하며 근거 없는 예지에서 그 원인을 찾을 때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떠벌리는 경솔한 자들인가 보게 된다.

모세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깨시지 말 것을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고 응답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이들은 보호하시고 어떤 이들은 내치시는 그 이유가 하나님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서 찾아서는 안될 것을 의미하시는 것이다. “나는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표현의 반복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강조용법이다.... 불쌍히 여기시는 이유는 불쌍히 여기는 그 자체인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주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교회가 너무나 낮고 초라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이 해(害) 당하지 않았을 그들의 유익에 대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셨음이 명백하다. 우리는 늘 화려한 것을 추구하며, 그렇기에 선지자들에 의해 그러한 극찬을 통해 기념되는 영광인 하나님의 독생자의 천국이 찌끼 같은 자들과 낮은 계급의 사람들의 무리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보다 더욱 모순되어 보이는 것은 없다.

그리고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길아래 모든 세상을 두셨을 때 자신들의 우월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욱 크게 빛나게 했을 상류계층의 사람들에서보다는 경멸받는 자들의 무리가운데서 그분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의논(counsel)이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자랑함과 지위와 권력과는 무관하게 하셨고,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 자신께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신 교회의 보잘 것 없고 미천한 상태를 감히 경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마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호기심을 보다 효과적으로 억제하기 위해서, 그분께서는 인과관계의 영역을 초월하시고, 다른 이들을 경이로움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런 심판을 숙고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들의 마음과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예수님께 확실하게 드러내실 지라도, 만약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머리를 숙이시고 존경함을 받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항해 우리가 소리를 높인다면 우리의 자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맹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다음의 진술을 숙고해 보자. 오 아버지, 나는 당신을 압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성정(decree)에 묵종을 나타내시는데, 그 성정은 불편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돌린 칭송과 사악한 비방, 심지어 세상의 오만한 짖어댐 사이에 숨겨진 대조가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시는데, 이는 심지어 자신이 온 세상의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지혜로운 자들보다는 어린아이와 미련한 자들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이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로 부르신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께서는 눈먼 자와 같이 행동하는 지혜로운 자들과 하나님의 의지 외에 그 어떤 것도 의존하지 않는 복음의 비밀을 받아들인, 투박하고 무지한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선포하신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얻은 자들이 그분 자신께서 자유롭게 선택하신 자임을 보여주는 이와 같은 유형의 본문들이 많이 있다. 이는 그분께서 세상의 창조주시며 조성자이시며 모든 나라가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두 가지 점에서 인상적이다.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은 하나님의 무기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데, 그분은 기꺼이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주권에 복속시킬 수 있으신 분이시다.

둘째로, 어떤 자들이 어리석음과 완고함에 머물러 있는 반면에 어떤 이들이 복음이 이르게 된 것은 그분의 자유로우신 선택으로 인한 것이다. 그분은 어떤 자들은 자신에게로 이끄시고 어떤 이들은 지나치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동안에, 본성에 의해서 동일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 가운데서 자신을 구별하신다. 그분께서 지혜로운 자들 대신에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은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육신은 너무나 열성적이어서 육신 자체를 세우지 못한다. 만약 지혜롭고 학식있는 자들이 유리함을 갖는다면, 그때 모든 이들은 믿음이 인간의 솜씨나, 부지런함, 또는 지식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 외에 그 어떤 방식도 인간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서 분명하게 설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무력한(empty-handed) 하나님께로 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혜는 무시되어져야 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모호하지 않도록 하시는 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혜로운 자로, 그리고 어린 아이들로 지칭하신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하고 어떤 이들은 물을 것이다. 경험은 우리에게 무지하며 미개한 자들 모두가 비추임을 받고 그로 인해 믿게 될 수 없으며 신중하거나 교양있는 자들 모두가 눈이 먼 상태로 남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자로 지칭된 그들은 아마 자신의 오만함으로 부풀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높음으로부터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를 견딜 수 없는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맹렬한 열정으로 압도당한 바울의 예에서 배울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언제나 늘 자고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유기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걸음 내려가 미개한 군중들을 보게 될 때, 저들 중 다수는 지독스럽게 미천하고, 그리고 위대하고 고귀한 자들과 함께 멸망에 남게 됨을 알게 된다. ...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자들의 주인이시며, 믿음의 제일의 원리는 “어느 누구도 그분의 눈에 지혜있게 지혜롭지 않도록 하라”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강화(講話)는 연약한 자들에게 내려 가시며, 저들의 불결함에서 가난한 자들을 이끌어 내시기를 무가치하다 생각하지 않으신 아버지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하시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버지(Even so, Father). 이 표현은 언제나 우리들을 만족시키는 여러 가지 불법의 잡음들에 대한 모든 변명을 제거시킨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의심의 여지없이 자신의 뜻을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도록 하게 하시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없다.

하나님은 자주 그분의 판단은 깊은 심연이라고 가르치시며 우리는 여전히 그 깊은 심연으로 곤두박질 칠 정도로 충동적이다. 그리고 어떤 것이 우리에게 적절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분에 대해서 투덜대고 중얼거리며 모독의 언사로 분노를 표출한다.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정당함으로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규례(rule)를 세우셨다.

온건한 지혜는 정확하게 이것을 의미함이니,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천가지의 이유들보다 낫다(one good pleasure of God is more than a thousand reasons).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구분에 대한 많은 이유들을 밝혀놓을 수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으로 만족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구원을 향한 다른 것들보다도 어린이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 안으로 한 걸음 나아가 찾지 않으셨다. 또한 그분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국을 이러한 양무리들과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채우시기를 의도하셨는지도 묻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자유롭게 택하시면서도 어떤 이들은 유기하시것이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들음으로써 사람들이 고함치며 외쳐댔을 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을 대적하는 분노의 증거인 것이다. 이는 저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4

예수님께서 마치 저들이 저들 자신의 공로로 인해 당연한 것처럼 왕국을 소유하도록 신자들을 부르시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주어질 것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계신다. 또한 이러한 표현을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또 다른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 경건한 자들의 삶이 슬픔과 괴로움으로 가득찬 나그네의 삶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 자체는 저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곤궁함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며 수치와 다른 괴로움들로 뒤덮인 자들이기 때문에-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 예비된 왕국이 있음을 증명하신다-, 그들은 강화되고 기쁜 마음으로 그들 앞에 닥친 이러한 따돌림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헛되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사람들이 설득된다는 것이 인내로 통하는 공통적인 귀결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면전에서 의기 양양하는 불경건한 자들의 교만함에 의해 낙담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소망이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로 인하여 절망함으로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우리의 기업을 마음에 되새겨야 하며, 그것은 의심스러운 우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의해서 우리를 위해 예비된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선택된 자들 각자에게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창세로부터, 그리고 다른 곳에서, 하늘과 땅이 창조되기 전에 라는 표현을 대면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상속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정된 정확한 때를 결정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오히려 우리가 심지어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부성적인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상기시키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소란함이 우리의 생명을 멸망함 가운데서 좌지우지 할 힘을 갖지 못할 것임을 우리에게 떠올리심으로써 우리의 소망의 확실성을 확고히 하시는 것이다.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롬11:7).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로 말미암아 선택된 자들만이 멸망함으로부터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그 경우의 본질상, 저들의 무지함(blindness)속에 머물게 되는 결론이 나온다. 거절된 자들에 관련하여, 바울은 하나님에 의해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파멸과 저주의 원리를 갖고 있음을 피력한다.

한 곳에 아닌 여러 곳에서 그가 함께 고려하는 성경적인 증거들이, 그 구절의 적절한 맥락하에서 고찰해 볼 때, 바울의 의도를 지지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는 이 모든 구절에서, 무지함과 완악함과 같은 하나님의 벌들이 이미 사악한 자들에게 찾아왔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이점에 있어서 무지한 자들이 저들의 사악함으로 인해 그리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난제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연결해 보자. 그 자체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사악함의 원천은 하나님께서 홀로 남겨 놓으신 본성의 일탈이다.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면, 나무에서 열매가 나고 수원에서 강이 발원하듯이 하나님의 영원한 거절로부터 그러한 본성이 나왔다는 것은 타당치 않은 것이 아니다.

불경건한 자들이 저들의 사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맹목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진실되다. 그러나 우리가 저들의 멸망하는 근원을 살핀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았다라는 사실에 이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그들이 행하거나 의도하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저주를 진행시키고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유기의 원인은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본 단락의 결론으로부터 비로서 나타나게 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경탄하는 일외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원인이 언급되자마자 이것을 우리의 관점으로부터 감추어진 궁극적인 원인을 부정하려고 하는 노력들에 대한 변명, 즉,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하고 죄된 후손들을 저주하시고 각 개인에게 저들의 상응하는 벌에 따라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시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타락이전에 인류 전체에 대해서 무엇이 그분에게 선하게 보여질 것인지를 자유롭게 정하시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9:30).

그 어떤 것도 의로움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으며 육신의 방탕함에 뒹굴었던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고 의로움을 얻는데 부름을 받았다는 것과 반대로, 전심으로 율법에서 정하고 있는 사역들을 하는데 자신을 받쳤던 유대인들이 그 의로움으로 인하여 모든 보상을 빼앗아야 했던 것보다 모순되고 불합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없다.

바울은 이러한 놀라운 역설을 자신있게 진술하므로해서 그는 매정함과 그가 제시하는 이유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있다. 즉, 이방인들이 얻게 된 의로움은 믿음에 의한 것이며 그것은 인간의 가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한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열성을 바쳤던 열심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인데, 이는 그들이 그들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기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도 다다를 수 없는 것을 추구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은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께서 그들의 걸림돌이 된 것이다.

본 구절의 첫 번째 부분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에 대한 칭송을 의도하고 있다. 그는 이방인들을 부르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가치한 자들에게 주시기로 계획하심 이외의 어떤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보고 있다.

사도는 특별히 구원함이 존재않는 의로움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로움이 믿음 안에 존재함을 언급함으로써, 그는 이방인들의 의로움이 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함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약, 이방인들 자신의 믿음이 성령에 의한 중생을 하기 위해 자신들을 준비시켰다고 어느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바울이 말하는 바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스스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그들 자신들을 자유롭게 붙잡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들이 도저히 추구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얻을 수 없었던 의로움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심지어 찾지도 않았던 것을 얻었을 리가 만무하였을 것인데, 이는 그들은 그것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이방인들에게 믿음을 먼저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에 의해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임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 열망을 품는다면, 믿음으로써 그들은 또한 그 열망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믿음 자체는 은혜의 한 요소인 것이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11:21).

서로 근접하고 있는 두로와 시돈은 그들의 불경건함과 교만, 방탕, 그리고 다른 사악함들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소위와 유대인들의 소위간의 비교를 하셨으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폐부를 깊이 찌르신 것이다. 후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사악한 모독으로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 그 자체보다는 그러한 불경건한 지역에서 회개할 소망이 더욱 큼을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저주를 강조하셨다.

그러나 신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곤란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의 이러한 강화(講話)는 인간의 공통적인 심성을 적용하시려는 의도가 있으셨음을 견지하자. 벳세다와 그 이웃들과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을 비교함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저들이 또는 그들이 무엇을 행하려고 했는지 예지(豫知)하셨음을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후자의 사람들이 행했던 것을 진술하신 것이고,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 성읍의 타락의 길과 그들의 고삐 풀린 방탕함이 무지(ignorance)로 말미암았다고 설명되어질 수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리고 어떠한 기적도 그들이 깨닫도록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 자라신 갈릴리의 성읍들이 쇠보다도 더욱 단단한 목이 곧음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깨달음도 없이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목격하도록 하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악의에 차고 치료불능한 모독면에서 벳새다와 고라신이 두로와 시돈을 능가하였음을 의미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위치에 있을 수 없는데, 이는 (두로와 시돈에서-역자주)행해졌었기를 바라는 어떤 것을 간과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더욱 그리고 전체적으로 소망이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비하심을 받을만하지 못한 자들을 영원한 파멸로 운명지우실 때 정당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들에게서 거두시므로 그들을 멸망되도록 허락하시고, 반면에 다양한 방식으로 어떤 자들을 찾아내시어 도저히 변명할 수 없는 죄악들을 회개하도록 그들을 부르신다고 해서 어느 누가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고 비난하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나약함을 인식하면서, 이러한 지엄한 일들을 경외함으로 묵상하는 것을 배우도록 하자.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신비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외에,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 찬양의 찬사를 돌릴 수 없는 자들과 이유가 분명치 않다고 해서 마땅히 존경해야하는 그러한 신비들을 경멸함으로 걷어차 버리는 자들의 교만함과 사악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롬9:17).

사도는 이제 두 번째 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유기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매우 모순되어 보이기 때문에, 사도는 그것이 버리시기를 작정하심에 있어서 아무런 비난받음이 없으시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그것을 용이하게 설명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공의의 뛰어남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출애굽기 9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바로를 분기(奮起)시키신 자가 바로 자신이시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막강한 능력의 증거로 삼으시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권능에 큰 저항을 하기에 충분하게 완고한 바로를 압도하고 꺼꾸러뜨리심으로써 그리하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어느 인간의 능력도 하나님의 권능에 맞서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항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예로써 바로를 쓰신 것이다.

고려되어야 할 두 가지 일들이 있는데, 첫째로 바로가 멸망되도록 예정하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숨겨진 의논에 그 원인이 돌려져야 한다. 둘째로, 그러한 목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도가 우선적으로 드러내려고 한 의미가 그 후자인 것이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그분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위함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부당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사악한 짓이다. 그 목적을 고려하게될 때, 그것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이 그 의미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본 구절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분기(奮起)시키다(stir up)라는 히브리어의 의미가 정(定)하다(appoint) 임을 주목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고집스러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시고자 하셨음을 드러내시기 원하셨다. 하나님은 바로의 고집을 예지하셨으며 그것을 억제하시는 수단을 준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의 권능의 빛나는 증거를 세우시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정하셨던(ordain) 것이다.

그러나 바로가 하나님으로부터 연유한 평범하고 모호한 자극에 의해 행동했다고 어느 누구도 생각지 말게 하자.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특별한 사용으로 바로의 행위를 예정하셨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분의 도를 행하심에 있어 그 이유를 제시할 의무가 있으시다 할지라도, 그분에게 불평을 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반대를 예상하시고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셨으며 유기된 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나타내심을 선언하시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저들로 인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4).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비밀을 탐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비밀들의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을 허락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게되면, 그분이 멈추는 그곳에서 우리도 멈추어야 하며 우리의 발을 금하시는 곳에서 우리도 금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이상을 알려고 힘쓴다면, 그는 하나님의 접근할 수 없는 빛의 무한한 광명으로 인하여 압도될 것이다.

우리는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논과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뜻 사이에 구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비록 성경의 교리가 인간의 재능에 비해 너무나 높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신자들은 그들이 단아함과 경외심을 가지고 성령의 인도함을 따를 때 그 교리에 다가가는데 차단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추어진 의논은 그와는 다르다. 그것은 너무 깊고 너무 높아서 어떠한 탐구도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奇事)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하게 하리라(마24:24).

신실한 자들에게 두려움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 그래서 그들이 더욱 주의하도록 하기 위해 위 구절을 덧붙인다. 이는 거짓된 선지자들이 방종한 자유를 부여받고 융성하게 될 때, 그리고 그들이 심지어 속이기에 충분할 정도의 능력을 부여받을 때, 부주의한 자들이 쉽게 저들의 거짓의 손아귀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위치에 머물러 있을 것을 상기시키며 고무시키신다.

게다가, 주님은 그들이 그릇됨(error)으로 뒤바뀔 주위의 많은 낯선 광경들을 보게될 때, 저들이 어려움을 당치않도록 훈계하신다. 마치 그분은 그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사탄이 그들을 삼키지 못하도록 제자들을 깨어있게 권하시며, 사탄의 모든 함정으로부터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그들과 약속하심으로써 확신과 평안을 위한 충분한 기반을 제공해 주신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상황이 연약하고 불안정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설 수 있게 하는 굳건한 지원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을 신실하신 보호자로 삼고 있는 자들이 구원으로부터 떨어지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탄의 공격에 저항하기에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누구도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예수님이 양들인 것이다(요10:28). 그러나 우리는 우리 구원의 안정성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추어진 선택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예정(Predestination)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성부로부터 우리의 구원을 돌보도록 주신 명령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제시하시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은 보다 일찍 이것을 언급하셨으며, 이제 그분께서 세상이 알도록 하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계신다.??하나님께서 그분의 택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것임을 뜻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분의 영원한 작정을 비준(批准)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만족하지 않고 영원한 예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자는 하나님의 의논과 거리가 먼 구원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신성(神聖)한 선택은 그 자체로 감추어져 있고 비밀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예롭도록 부르신 소명 안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하신다(The Lord reveals it to us in calling with which he honors us).

예정의 미로 안에서 그들, 또는 다른 이들의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은 제정신이 아닌 자들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 앞에 놓여진 믿음의 방식을 벗어난 것이다. 그러한 모순된 억측으로 인해서, 그들은 심지어 예정의 능력과 그 효과를 떠나려고 노력한다. 이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을 위해 선택하셨다면, 믿음을 제거하게될 때, 선택 그 자체는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이다. 그 기원과 결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논의 연속성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사악한 것이다.

게다가, 선택은 그 자체로 소명을 동반하고 소명으로부터 단절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믿음을 효력있게 하도록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우리 안에 끼어든 그분의 확증이라고 할지라도, 소명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되도록 한다. 성령의 증거가 우리의 양자됨의 확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의 강력하고 충분한 증거가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신성모독(神聖冒瀆)이며, 이는 단순히 성령의 증거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豫定)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4-6).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모든 선한 것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부르시는 소명의 기초와 그 첫 번째 원인을 사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복음에 참예케 했는가, 왜 그분은 우리를 매일매일 수많은 축복으로 영예롭게 하시는가, 왜 우리에게 하늘나라 그 자체를 열어주셨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늘 이와 동일한 원리로 되돌아와야 한다.

즉, 명백하게 창세전에 그분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 그 자체의 시점으로부터, 우리는 그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상 그 자체가 창조되기 전에, 어떻게 우리가 가치로울 수 있었으며, 우리 안에 공로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가치롭게 때문에 우리가 선택받은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치롭게 될 것임을 예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궤변으로써 트집을 잡는 것은 유치한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안에서 모두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 그분 자신이 그분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멸망에서 구속하시지 않으셨다면 멸망을 예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도는 우리의 선택이 그리스도안에서를 덧붙임으로서 자유롭다고 확언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면, 우리의 선택의 원인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몸안으로 포함시키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우리가 그럴 가치가 있음을 예지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양자로 삼으시는 호의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사도가 언급한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된 것이라면, 우리 스스로는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거룩하게 하시다. 여기서 사도는 궁극적이지 않지만 근접하고(proximate) 있는 선택의 목적을 고려하고 있다. 그 동일한 것이 두 가지의 목적을 가졌어야만 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건축의 목적은 그것을 집(house)으로 삼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접한(proximate) 목적이다.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으로 가정(home)으로써 사용되기 위함이다.

바울이 계속적으로 또 다른 이유, 즉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점을 간단하게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성화는 선택의 최고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적인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성화, 순결, 그리고 인간의 모든 미덕이 선택의 열매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본 구절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명백하게 모든 공로 사상을 제거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택을 받을 만한 가치로움을 예지하셨다면, 바울은 거룩하고 순결한 삶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연유한다고 말하는 이 구절에서 나타내고 있는 바의 반대를 말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경건한 삶을 살고, 어떤 이들은 모든 사악함에 자신들을 팔아버리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확실히, 우리가 바울의 말을 믿는다면 후자의 사람들이 그들의 심성을 따르는 반면에 전자들은 거룩함을 위해 선택된 자들이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게 된다. 틀림없이, 그 원인은 결과에 후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이 확증하는 것처럼, 선택 그것은 모든 선행의 원인이며 인간에 의존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구절은 선택이 인간에게 방종함을 부여하지 않는다.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가 기뻐하는 대로 살자. 우리는 안전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받은 자라면 우리는 절대로 유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모독한다. 그러나 바울은 선택의 은혜로부터 삶의 거룩함을 분리시키는 것에 항변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기 때문이다. 한편, 카타리스트(Catharists), 셀레스틴(Celestines), 그리고 도나티스트(Donatists)들2)에 의해서 본 구절로부터, 우리는 이생의 삶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고 추론한 오래된 주장은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완전함은 우리가 이생의 삶 동안 추구해야할 목표이며 그 경주를 마칠 때까지는 획득할 수 없다.??예정을 전혀 유효하지 않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치고, 예정의 교리를 멸시하고 공포의 미로(迷路)로부터 도망치듯이 예정으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이 어디있는가? [있다면 나와보라고 하자!]

반대로, 무한하신 하나님이 선함을 고려하도록 유도하고 감사하도록 자극해준 바울의 방식처럼, 사려있고 진실된 방법으로 우리가 그것을 취급하지 않는다면 우리 교리의 다른 어느 부분도 더욱 유용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의 지식을 퍼올릴 수 있는 참된 샘인 것이다. 심지어 인간이 모든 다른 논쟁들을 회피해야 한다면, 선택은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며, 그러므로 그들 자신들을 위해서 감히 어떤 것을 주장하거나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예정에 대하여 논증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논점에서 논쟁하지 않게 될 것이며 위험스러운 오류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예정하신 이. 이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한층 더하고 큰 칭송이다. 우리는 이미 왜 바울이 그토록 열성적으로 그들의 양자됨의 선물로써, 그리고 그것을 선행하는 영원한 선택을 언급함으로써 에베소서 성도들을 감동시키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자비가 그토록 장엄하게 선언되어진 곳이 어느 곳에서도 표현되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본 구절을 더욱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사도는 우리에게 우리 구원의 세 가지 이유들을 제시하고, 곧바로 네 번째 이유를 덧붙이고 있는데, 즉 유효한 이유가 하나님 뜻의 선한 기뻐하심이 그것이다. 질료적(material)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마지막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다. 이제 이 각각에 대해 사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이유가 이어지는 사고의 복잡성에 속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 안에서, 그분 의지의 선한 기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양자됨으로 예정하셨고,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호의로 받아주셨다.

예정하다(predestine)란 단어에 있어서, 우리는 그 시제의 일치성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예정되었을 때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의 공로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이유는 우리로부터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바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분 자신 안에서(in himself)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으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 밖에서 이유를 찾은 것이 아니고 자신의 뜻으로 인하여 우리를 예정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의 표현, 그 기쁘신 뜻대로(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his will) 으로 더욱 명백해진다. 뜻(will)이란 단어는 사도의 목적을 표현하는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이??하나님의 역사를 유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유들과 대조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했던 단어다. 모든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서, 그는 기쁘신(good pleasure)을 덧붙이는데 그것은 공로의 모든 개념을 노골적으로 폐기시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주님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를 고려하시지 않으시며, 또한 우리의 가치로 인하여 자신과 화목하도록 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화목의 유일한 근거는 그분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예정하심으로 말미암은 그분의 영원한 기뻐하심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기뻐하심 외에 다른 어떤 것에 관심 쏟기를 금하였을 때, 왜 궤변자들이 전혀 걸맞지 않는 생각으로 문제를 혼란스럽게 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그러는 동안에, 사도는 그분 안에서 드러난 사랑뿐만 아니라 영원한 선택의 질료적 원인으로서 “사랑하는 자”라고 칭함받은 예수님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넘쳐 남을 배우게 되며, 이는 매우 사랑받는 자이셨으며, 그럼으로 그분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그리고 즉각 바울은 지고하며 궁극적인 선택의 목적을 언급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경이로운 은혜를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애매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자신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파괴하려고 애쓰는 입장에 처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우리가 알거니와. 사도가 이제 이생의 삶의 고달픔이 우리의 구원을 훼방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고 결론짓고 있다. 바울이 추론적인 접사(接辭 autem)를 사용하였다는 것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는데, 이는 하나의 혼합된 방식으로 부사들을 사용한 것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결론을 가지고 이의를 예기하기도 한다.

육체의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외침을 듣지 아니하시고 동일한 옛 방식으로 영원토록 어려움이 다가오도록 하신다고 외쳐댈 것이다. 이것이 사도가 관심하고 있는 바이다. 그는 말하기를, 심지어 하나님께서 문제들이 발생하자마자 그것을 주의 백성들에게서 없이하지 않으실 지라도, 그분은 실제로 그들을 버리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이 받는 고난을 구원의 수단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수단을 가지고 계시다.

어떤 이가 이 구절을 그 자체로 읽기를, 즉 우리가 실제로 문제를 당하고 우리의 구원에 대해 도움이 되는 고난에 대해서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이 말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좋아한다면, 나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그러나 바울의 의미하는 바를 모호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피택자들과 유기자들이 구별 없이 동일한 악에 처할 입장이라 할지라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받는 고통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즉, 고통을 수단으로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들을 훈련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살피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역경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신자들이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심지어 세상이 여기는 대로 해가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익에 간섭하신다. 그리고 그것이 신자들에게 유익이 되는 결과를 낳는다. 심지어 어거스틴이 말한대로,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죄악까지라도 그들을 해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한 뜻이 된다는 것이 사실이다-이것은 본 구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십자가와 관련이 있다.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 구절은 신실한 자들이 역경으로부터 걷어들이는 좋은 열매가 하나님을 위한 그들의 사랑 안에 있는 어떤 공로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도록, 교정(correction)으로써 덧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될 때,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하며, 그들이 그들 자신을 예비하심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앞서간다고 상상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이 참된 예배자들이라고 불렀던 자들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고 가르치는 이유인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본 구절에서 시간적 순서를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성도들의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모든 것들이 그들의 첫 번째 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분명하게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갈라디아인들이 하나님을 알 기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아시는 바가 되었음을 지적한 것과 같이(갈4:9), 신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고난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들의 구원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참되다. 그러나 동일하게,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우리를 앞설 때에만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 요한의 진술 역시 참이다.??

뜻(purpose)이란 단어는 명백하게 인간에게서 연역되어진 대로 상상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한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 선택의 원인이 하나님의 감추어진 기뻐하심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이것은 에베소서 1장과 디모데후서 1장에서 명백하게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의로움 사이의 대조가 명백하고 분명하게 진술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이 명쾌하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다고 말할 때, 그는 다음의 요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한 것인데 그것을 곧바로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 따르도록 하는 고난이 우리 예정과 같은 동일한 하늘의 작정에 의해서 우리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필연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과 연결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선택의 연속성을 가지고 사도는 신자들의 모든 고통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이끄는 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도는 이미 그러한 따름이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임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생명을 위해 미리 정해짐으로 인해서 주님의 선택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를 하나님의 신적인 영광을 위해서 준비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우리 안에 품고 있다면, 우리는 슬퍼하거나 마음의 짐으로 인하여 고통 받거나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예지가 일부 미련한 자들이 그들의 어리석은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단순히 앞으로 될 일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늘 그분의 자녀들을 유기되는 자들로부터 구별하시는 방식으로 말미암는, 양자로 삼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의미로 베드로 역시 신자들이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위하여 택함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미리 아심으로 선택하셨다고 추론하게 될 때 그것은 어리석은 이유이다.??

마치 신자들 각자가 선택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공로에 빚을 진 것처럼 베드로가 신자들을 우쭐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음을 부인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다른 말로 다른 여러 곳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그가 말한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자들을 아시는 것이 그분 자신의 기뻐하심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는 그분께서 양자로 삼도록 그 뜻을 이끌어 가시는 그분 자신 안에서가 아닌 그 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미리 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택자들을 표해 놓으셨다.

종종 예정하다(to predestine)로 번역되는 동사는 본 구절의 맥락에 따라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양자된 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품어야 하는 것과 단순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살아있고 볼 수 있는 예를 세우셨는데, 그분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 의해 본받음을 받아야 하는 분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구원이 존재하는 자유로운 양자 삼음이 우리가 십자가를 지어야 함을 요구하는 다른 작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따르지 않는 자는 어느 누구도 하늘의 생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And those whom he has predestined{praefinivit}, them he has also called).사도는 이제 서서히 만약 우리가 구원받게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따라야만 한다는 진리를 보다 분명한 논쟁으로 세워 나간다. 우리의 소명, 칭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광이 십자가와의 연합에 속해있으며 어떤 것도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다.

독자들이 사도의 마음을 좀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이전에 진술한 것을 되풀이하고 독자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잘한 것이다. 즉, 예정하다라는 단어가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께서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을 정하심에 의한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인 것이다. 그들이 지금 실제적으로 부름 받고 있음을 가르치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손길 안에 숨기신 부름 받은 자들과 관련된 목적을 유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침착하고 선제(善制)된 영으로 그들에게 부여된 규율에 순응할 것임을 공적으로 드러내신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부르심이 여기서 그것에 후행하는 것으로 숨겨진 선택으로부터 구별되기 때문이다. 이제, 혹자가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서 정해놓으신 것이 어떤 운명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을 부인할 지도 모른다. 사도는 이에 대해 하나님 자신께서 드러나게 우리의 소명을 통해서 그분의 감추어진 의논에 관한 것들을 확증하실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확증이 외적인 설교를 통해서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택자들과 관계하고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실 때 외면상의 소리를 가지고 강제적으로 하시지 않으신다.

칭의는 곧바로 우리의 소명에서부터 죽음까지,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확장된다. 그러나 서신 전반을 통해서, 사도가 의로움의 자유로우신 부여를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단어의 이러한 의미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바울의 실제적인 의도가 우리는 고난을 회피하기 보다는 그 고난을 통해서 더욱 많은 것들을 얻게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통해서 우리의 불행이 더 이상 저주를 낳지 않아야 하며, 또는 파멸로 이끌어져서는 안되는 것보다 더욱 열망할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사도는 곧바로 현금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멸시를 당하는 자들이 영화롭게 될 것이며, 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쓰라린 시험으로 인해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음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셨지만, 우리는 이미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기업이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되며, 그분의 영광이 우리의 소망을 현생의 재산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곧 다가올 우리의 영광의 그러한 보증을 가져다준다.

다음의 히브리어 표현에서, 바울이 현재시제 대신에 과거 시제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살필 것이다. 그러나 확실이 그가 계속되어지는 작용을 말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에 따라서 이제 십자가 아래에서 단련하시는(exercise) 자들이 바로 그 때에 구원의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굴욕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조금의 영광도 잃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현재적 비참함이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 그들의 영광을 손상시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그것은 축소없이 빛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9-10).

사도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이러한 은혜의 선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됨에 의한 예정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이점에 관하여서, 나는 독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주 우리가 은혜의 효력을 감지할 때 그분의 은혜를 주셨다라고 듣게 된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싶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은혜를 주신 것으로써 말하고 있다.

이제는 ... 나타났으니. 사도가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얻게 된 믿음과 하나님의 감추어진 선택을 얼마나 적절하게 결합시키고 그러므로 각각 그것의 적절한 위치를 정하고 있는가에 주목하라. 이제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목적을 위해서 스스로 정하셨으며 이는 갑작스럽게, 그리고 미리 사고함이 없이 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나타나셨으니, 우리를 구원할 능력을 단지 받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세상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에 이러한 은혜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께 주어졌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안다.

사도는 복음을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약속과 연결시키는 지혜로움을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경멸을 신기로움으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율법 하에 살았던 조상들로부터 은혜가 숨겨졌는가? 그것이 단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계시된다면, 앞서서 그것이 감추어진 것이라는 결론이 뒤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누군가가 물을 것이다. 나는 사도가 조상들의 믿음에도 역시 의존하는 은혜의 완전한 계시를 말하고 있다고 답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도??조상들로부터 제외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모든 경건한 자들이 우리와 함께 동일한 구원을 얻었으니, 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러한 나타남을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가 은혜가 그리스도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그러한 은혜와의 교통으로부터 조상들을 배제한 것이 아니며, 그들의 믿음이 우리와 함께 이러한 동일한 나타나심에 그들을 참여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13:8).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부께서 정하신 그 때가 오기 전에 죽음과 부활로써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셨다. 우리의 믿음같이 조상들의 믿음도 이러한 나타나심을 향했으며, 하나의 공통된 맹세와 구원의 충만을 향하였다.

세대들의 시대 전(before the times of the age; ante tempora saecularia)에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소망 안에서(또는, 소망을 따라서) (딛1:2; 칼빈의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어거스틴이 영원성을 시간적 세대를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는 시간의 영원성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는 영원한 시간을 모든 태고(all antiquity)에 선행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비록 내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모든 것을 적절하게 판단해볼 때, 그 문제에 대한 다른 견해들을 갖을 수밖에 없는데, 영원한 시간이 수많은 세대 전에 인간에게 약속되었으며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세대에 약속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2:18)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오게될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디모데 후서 1장에서 또 다른 의미로, 구원이 “영원한 때 전부터(ante tempora saecularia)” 주어졌다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는 양쪽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이제 태초부터 세상의 끝 날이 이를 때까지 서로를 뒤따르게 될 시간의 연속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가 시간이 흐르기 전에 구원이 하나님의 택자들을 위해 주어지고 결정되었다는 점을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모든 세대(all ages)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창조를 초월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세대들이 우리 구원의 약속이 있은 이래로 흘러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혹자가 좋아한다면, 세대들의 시간(the times of the ages)이 세대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도 있다. 구원이 약속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그것이 주어지기 때문에, 디모데 후서의 본 구절에서, 모든 세대 전에 주어진 것으로 표현된 것이다. “모든(all)”이란 단어가 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세대들의 시간”이 약속이 세대들의 긴 연속성보다 더욱 오래된 것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세상의 창조에 앞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바울이 로마서 1장 2절에서, 죽음으로부터의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명백히 공포되었던 복음이 성경 안에서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되어졌던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글쓴이 : 알프스의 눈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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