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에 있어 믿음의 상관성
Ⅰ. 믿음의 개념
1. 믿음의 정의
믿음이란 사전적으로 어떤 신조나 종교에 대한 옳다는 확신이요, 신뢰요, 성실이며, 또 충성이다. 히브리서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의자에 앉거나 침대에 있을 때에 긴장을 풀고 자연스럽게 다른 의심을 갖지 않고 우리의 몸을 올려 놓는다. 즉 믿음으로 우리가 바닥에 넘어지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란 어린아이가 행하기에는 너무 쉽고 간단하지만 성인이 완전히 이해하거나 만족할만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또한 믿음이란 맹목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심할 수 없는 그 말씀에 의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이며 이로써 그를 구세주요 우리의 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써 복종하며 선행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인 것이다(알반 더글라스 2001:201). 뿐만 아니라 믿음이란 그리스도에게 나의 모든 무게를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19). 또한 믿음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다는 것이며(고후 4:18),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알란 스트링펠로우 2002:147).
특별히 성경의 믿음을 기계적인 가능성의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경에서 기술된 믿음은 독특한 것이다. 찰스 웨슬리는 자신의 찬송에서 믿음을 이렇게 쓰고 있다. "믿음이란 주님이 보신 그 능력 안에 있는 제가 소유한 것으로 주님께서 이 믿음을 주셨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무덤으로부터 죽은 영혼들을 부르시고 아무 것도 없음으로부터 또한 말씀하십니다. 모든 인간적인 소망에 대항하는 소망 안에서 자신의 절망을 나는 믿습니다." 믿음이란 바랄 수 없었는데 바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아브라함을 바랄 수 없었지만 바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믿음이다(D.M. 로이든 조슨 2000:202-203).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이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며, 또한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죤 칼빈 2001:17).
2. 믿음의 중요성
신약에서 보통 믿음으로 사용된 동사(시스티스)와 피스튜에인은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인데,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으며(히11:6),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유별난 "행위"로(요 6:2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것이다(요일 13:23).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구원받는 방법이며(롬10:9) 확실한 소망으로 가는 길이며(히 11:1), 부활할 때까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보호를(벧전 1:5) 받는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19-220).
3. 믿음이라는 단어
1) 구약성경의 믿음
(1) 헤에민
헤에민은 아멘의 히필 형태이다. 히필 형태의 헤에민은 "지속을 유지시키다" 혹은 "확립케 하다"의 뜻으로 사람에게 적용시키면 "누구로 하여금 당신을 존속케 하도록 하다"는 것을 뜻하기에 "누군가를 믿거나 신뢰하다"라는 의미가 된다(창 15:6; 사 7:9; 합 2:4; 시78:22).
(2) 빠타크
이 단어는 "신임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를 의미한다(시 25:2). 특별히 이 단어는 지적 승인의 요소보다는 확고한 신뢰의 요소를 강조한다(루이스 벌코프 2000:743).
(3) 차시아
이 단어는 "피난처를 찾다"는 의미(시57:1)로 사용되고 있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0-221)
2) 신약성경의 믿음
(1) 피스티스
이 단어는 먼저 "우리가 믿는 믿음"의 의미로 참된 것에 대한 확신을 나타내는데 사용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그분이 창조주시며 만물의 통치자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섭리하신다는 확신이다.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예수께서 메시야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행11:24; 롬 3:28)을 뜻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1).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루이스 벌코프 2000:744).
(2) 피스튜에인
이 단어는 "침이라고 생각하다"(마 24:23), "하나님의 전도자들에 의해 주어진 소식을 받아들인다"(행 24:14),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에 의해 지명된 영원한 구원의 저자로 받아들인다"(요 3:16)는 뜻이 있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2).
* 레포트를 쓰면서 '믿음'에 대한 용어가 참고문헌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술되고 있다. 두 가지로 기술되고 있는데, 하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다. 특별히 루이스 벌코프의 조직신학과 A. 하지의 조직신학에서는 '신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앞으로는 의미에 대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믿음으로 통일하여 기술할 것이다.
4. 믿음에 관한 역사
1) 종교 개혁 이전
기독교회 초창기부터 믿음은 지도자들의 마음 속에 구원의 위대한 조건으로 자리 잡았다. 믿음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도 없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증언에 의한 진리의 승인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보다 심오한 의미로 사용되어 지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대한 자기 복종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기도 했다. 터툴리안은 믿음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증명된다는 이유가 아니라 권위로써 어떤 일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어거스틴의 시대에도 믿음이 구원을 획득하는데 있어서 명백한 수단이라는 것이 인정되기는 했지만 믿음의 본질에 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그는 복음적 혹은 칭의적 믿음이 자아 양도와 사랑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스콜라주의자들은 무지의 믿음, 즉 교회가 가르치는 진리에 대한 단순한 전적 동의, 즉 사랑에 의해 불어넣어진 신앙을 구분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믿음의 덕목을 "지성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동의하게 하여 영생이 우리 안에서 발단하게 하는 마음의 습성"이라고 정의했다(루이스 벌코프 2000:746-747).
2) 종교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이 칭의적 믿음이 단순히 지적 동의에 불과하며 오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반면, 종교 개혁자들은 믿음을 신뢰로 이해하고 의지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우리가 믿음을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상의 약속의 진리를 기초로 하며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 심정에 인 쳐진 것이라고 말할 때 믿음은 완전하게 정의하게 된다"라고 말하였다. 스콜라주의자들은 신앙 자체가 칭의를 분여하고 획득하고 소유하는데 있어서 실제적 혹은 공로적인 효력을 지닌다고 이해한다. 반면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적 믿음이 그 자신의 공로적 혹은 내재적 효력에 의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받아들이며 포착하는 도구일 뿐이라고 한결같이 가르친다. 그 후 슐라이에르마허와 리출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이란 하늘이 일으키는 경험이 아니라 인간의 업적이요, 선물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공로적 행위요, 교리의 인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시키는 노력에 의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는 것이다고 주장한다(루이스 벌코프 2000:747-748).
5. 믿음의 필요성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하다(히 11:6). 우리는 그가 존재하심을 믿고 완전히 그에게 의하고 맡겨야 한다. 이러한 신비가 바로 "믿음"인 것이다. 특별히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은 구원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행 16:31). 믿음 없이는 신앙행위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알반 더글라스 2002:201). 그러므로 믿음을 통해서만 신앙행위를 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구원은 오직 믿음을 전제로 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믿음은 구원의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6. 믿음의 정도
1) 믿음의 분량
(1) 적은 믿음
적은 믿음은 바다의 광풍을 인하여 제자들이 두려워할 때 바다를 잔잔케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말씀이다(마 8:26). 뿐만 아니라 물위로 걷던 베드로가 무서워하여 의심을 갖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마 14:31).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건져내시고 말씀하시기를 "왜 의심하느냐"(디스타제인)을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나누어진 마음을 갖고 있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즉 간접적으로 예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표현한다(도날드 헤그너 2000:695).
(2) 연약한 믿음
바울은 교회를 향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성경에서 금한 일이 아닐 때는 개개인이 누리는 자유의 문제에 대하 판단치 말아야 한다(롬 14:1-6; 14:1).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야 한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 자유와 평안을 얻지 못한다(강병도 2000:454-455).
(3) 헛된 믿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진리를 믿는 믿음은 절대 필요하다(고전 15:17).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참된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되고 믿음에서 얻어지는 속죄의 사실도 없다(이상근 1998:21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믿음은 헛된 믿음이다.
(4) 죽은 믿음
야고보는 살이 있는 믿음을 강조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을 이룬다. 그러나 행함만으로는 믿음을 이루지 못한다. 야고보는 구약 성경 아브라함과 라합(약 2:21-26)의 예를 든다(알란 스트링펠로우 2002: 148). 야고보는 여러 적대자들에 대하여 "행함 없는 믿음"을 변론하기 위해 전형적으로 아브라함을 인용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창세기 15:6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고 인정하셨노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랄프 P. 마틴 2002:279). 그리고 다시 야고보는 라합에 대하여 순종의 위대한 본보기로 제공하며, 믿음을 소유한 자의 한 예로서 열거된다(랄프 . 마틴 2001:289).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이다.
2) 믿음의 정도
(1) 큰 믿음
예수께서 로마의 관리(백부장)에게 "큰 믿음"이 있음을 아셨다. 그 백부장은 병이 들어 곧 죽어가는 그의 하인을 예수께서 거쳐 주실 것을 믿었다(알란 스트링펠로우 2002:148). 백부장의 체험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에 예수께서는 기이히 여기시고 이스라엘 중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이방인의 신앙이 다 놀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이상근 1998:134).
(2) 충만한 믿음
열두 명의 사도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돌보아 줄 수 있도록 일곱 명의 사람을 선택하도록 했다. 스데반은 선택된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행 6:5에 "그들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을 선택했다"라고 말한다(알란 스트링펠로우 2002:149). 믿음에는 충만함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충만한 믿음이란 성령의 충만함을 나타낸다(강병도 2000:150).
(3) 부요한 믿음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다고 약 2:5에서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야고보에 의해 "부요한" 자들로 묘사된다. 이 메시야 왕국은 믿음의 상속자들인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랄프 P. 마틴 2001:241).
(4) 살아있는 믿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신자의 관심의 초점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에 있다(리처드 N. 롱에네커 2003:317). 육체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가운데 살아 갈 때에 진실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5) 굳센 믿음
베드로는 "너희 염려는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자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지신을 낮추는 자는 또한 그의 모든 염려도 내어 맡겨야 할 것이다. "맡겨 버림"이란 "내어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정과거형 분사는 한꺼번에 내어 던지고 마는 행동을 표시한다(이상근 1999:190).
(6) 거룩한 믿음
거룩한 믿음은 사도들이 전하여 준 단번에 주신 믿음이다(이상근 1999:384).
7. 성경 저자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믿음
1) 구약시대
창 3:15은 최초의 은혜언약의 계시인데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믿음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아벨은 믿음으로 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고(히11:4),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히 11:5), 믿음으로 노아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히 11:7). 족장시대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본으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으며 출애굽해서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도 여전히 믿음은 요구되었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 안에서 피난처를 찾으며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며 그분께 치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2-223). 특별히 율법 시대에 있어서 믿음은 구원론적이며 메시야적 구원을 바라보게 한다. 믿음은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여 미래의 그의 약속에 확고한 의존이다(루이스 벌코프 2000:749-750).
2) 신약시대
(1) 복음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자기를 믿으라고 믿음을 촉구하고 계시며, 요한복음에서는(3;16)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며, 그 분에게 매달리고 그분만을 신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믿음을 통하여 미래의 소망으로써 뿐만 아니라 현재의 소유로써 영생을 획득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3-225).
(2)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에 관한 사도적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구원에 개하여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함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새로운 공동체의 원리가 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0).
(3) 바울서신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여겨지며(롬 3:28),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음을 통해서 체험되며 유지될 뿐만 아니라(엡 3;17), 믿음은 사랑과 경건한 삶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갈 5:6)고 말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4-225).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도구가 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0).
(4)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동력으로 그려지기에 신자들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리스도를 구원적 믿음의 적절한 대상으로 이해했으며 믿음을 통한 의(義) 이외에는 어떠한 의도 없다는 것(10:38; 11:7)을 가르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0). 뿐만 아니라 믿음은 소망을 근거로 하여 나타난다(죤 칼빈 2001:72).
(5)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믿음이란 진리에 대한 단순히 지적인 찬동이라는 점에 반대하여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주장하며(2:26), 특별히 약속되고 소망된 구속주로서 예수님을 믿음을 것을 요구하는 것아 새 시대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루이스 벌코프 2000:750).
(6) 베드로서
베드로는 유대교로 복귀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편지를 써 그들이 처한 환경으로 인해 믿음과 구원의 완성과의 관계를 강조하여 그들의 심령 속에 현재의 고난에서 그들을 감내하게 하는 소망 즉 보이지 않고 영원한 영광에의 소망을 고취시킨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후서는 현존하는 오류에 대한 보호막으로서 신앙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1).
(7) 요한 문서
요한은 그의 서신들에서 참 믿음은 그 속에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3-225).
이런 점에서 보아 구약시대에는 오실 구속주를 기대하는 믿음이었고, 신약시대에는 이미 오신 구속주를 회고하는 믿음이라 할 수 있으며, 양자를 통해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산 믿음을 통해서만 획득됨을 보여주고 있다.
8. 믿음의 개념
1) 역사적 믿음
이는 도덕적·영적 목적 없이 진리를 순전히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인격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어떤 역사를 받아들이듯 이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이 믿음은 전통, 교육, 여론, 성경의 숭고한 도덕성에 대한 통찰 등의 결과요, 성령의 일반 사역에 수반된 것이다. 이는 매우 정통적이며 성경적이긴 하지만 심령에 뿌리 박지는 못한다(마 7:26; 행 26:27; 약 2:19). 인간적 믿음이요, 신적인 믿음이 아니다(루이스 벌코프 2000:752)
2) 이적적 믿음
소위 이적적 믿음은 이적이 어떤 사람에 의해 혹은 그를 위해 행사될 때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확신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사역을 행하도록 이를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이러한 종류의 사역을 수행하려는 모든 시도는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적 도구를 통해 기적을 행하시지만 오직 하나님만이 기적을 행하신다. 이는 능동적 의미에서의 이적적 믿음(막 1720; 막 16:17018)이다(루이스 벌코르 2000:753).
3) 일시적 신앙
이는 양심의 자극이나 감정적인 감동을 일으키지만 중생한 심령에 뿌리 박지 목산 종교적 진리들에 대한 확신이다. 이 믿음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환난이나 핍박의 시대에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믿음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 뿌리가 없다"(마 13:21)고 말씀하신다. 이는 중생에서 이식된 뿌리로부터 발원하는 신앙이 아니며, 따라서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새 생명의 표현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일시적 믿음은 감정적 생활에 기초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개인적 향락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루이스 벌코프 2000:753).
4) 진정한 구원적 믿음
이 믿음은 신령 안에 자리잡고, 중생한 생명에 뿌리박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선 인간의 행위가 아니며, 죄인의 심령 속에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잠재성이다. 하나님의 위해 심형 안에 신앙의 씨앗이 주입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은 신앙을 행사할 수 있다. 구원적 믿음은 성령에 의해 심령 안에 일어나는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한 의존(신뢰)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루이스 벌코프 2000:753-754).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그 속에 갖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과, 복음은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갈 3;3-5; 고후 4:13),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믿음은 결국 인간의 행위가 아닌 성령의 사역이다(장종현·최갑종 2001:513).
9. 믿음의 원천
1)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
(1)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된 열매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의 복음의 거절함에 이방인에게로 발길을 돌렸는데,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믿게 된다(행 13:48). 이방인들의 믿음은 신적 선택의 열매로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이었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6-237).
(2)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는 여전히 중생된 상태로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요일 5:1). 하나님이 중생의 창시자요 오직 중생된 자들만 믿을 수 있기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7).
(3) 믿음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주시다"라는 문장은 분명히 믿음의 고백이기에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그리스도를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7). 즉 믿음은 성령님의 선물인 것이다. 성령님께서 믿음의 열매(갈 5:22)을 주신 것이다(알반 더글라스 2001:202).
(4)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다. 히브리서 12:2의 "주님"으로 번역된 단어는 '아르케곤'으로 이 구분에서는 "기원자" 혹은 "창시자"를 뜻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8)
(5)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독자들에게 값없이 주셨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값없이 주신 것이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8). 또한 엡 2:8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즉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며, 그 선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D.M 로이드 존스 2000:203)
(6) 하나님은 약속을 통해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하지만 그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나타난다. 아버지의 사랑이 그의 안에 머물고, 그리고 그로부터 그 사랑이 우리들 위해 쏟아진다(죤 칼빈 2001:61-62).
2)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
가장 평범한 믿음은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써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9). 그런 행위는 성경을 읽고, 들음에 따라 믿음이 점점 더 커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것을 들음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된다(롬 10:7).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간구하며 믿음 있기(막 9:24)를 주님께 간구해야 한다(알반 더글라스 2001:202).
10. 신약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특징
신약에서는 매우 여러 가지 특징으로 믿음을 묘사하고 있다l 첫째, 믿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된다(요 6:37).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그 분만 의뢰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소망과 가장 깊은 즐거움과 삶의 목적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믿음은 "그리스도를 먹는 일"로 묘사된다(요 6:51). 믿음은 그리스도를 나누어 소유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그분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믿음을 그렇게 절실한 필요에서 생기며 믿음을 통하여 영적 음식물을 받는 것이다. 셋째, 믿음은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으로 묘사된다(요 4:14). 그리스도를 믿음이 삶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 생명의 물을 마시면 영적 갈증은 영원토록 해결된다. 넷째,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묘사한다(요15:5). 열매맺는 가지고 포도나무에 붙어 잇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그 분에게 기댐, 그리고 항상 그 분으로부터 힘을 얻으며 또한 그 분과 계속적인 교제 속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우리 자신 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뢰하며 또한 인식하는 것이라는 면에서 모두가 일치를 이룬다. 믿음이란 순간적인 결정 그 이상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믿음은 또한 지적인 진술들을 받아들이는 것 이사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믿음은 전 인격 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포함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7-228).
11. 스콜라주의의 믿음에 대한 견해
스콜라주의는 11세기부터 14세기까지 중세 유럽에서 가르쳤던 신학과 철학에 대한 이름이다. 믿음에 대한 정의는 트렌트 회의의 규범과 신조(1563년)에 잘 요약되어 있다.
1) 믿음은 항상 지성의 행위이다. 그것이 의지에 의해 존재할지라도 믿음은 지성에 그 자리를 둔다.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라는 인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 정함 없는 믿음으로는 의롭다 칭함을 받기에는 충분치 않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포함하지 않으며 단지 계시된 지식들에 대한 지적인 찬동일 뿐이다.
3) 믿음에는 사랑이 더해져야 한다. 이 사랑을 받는 것과 온전하게 형태를 갖춘 믿음을 받는 것은 세례식을 통해서인데 이러한 믿음만이 칭의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믿음이다.
4) 보통의 신자들은 교회에 의해 제안된 신앙의 모든 조항들을 이해할 수 없기에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단지 수긍하고 찬동하는 정도의 맹목적 믿음이면 족하다.
5) 신자는 개인의 구원에 관하여 절대적인 확신을 소유할 수 없고, 있다면 구원의 상실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추측적인 확신 정도이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28-229).
12. 로마 카톨릭의 믿음에 대한 견해
1) 로마 교회는 믿음이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단순한 지성 승인이라고 가르침으로 역사적 믿음과 구원적 믿음의 구분을 폐기한다. 믿음은 세례시 주어지는 칭의의 7개의 예비 과정 중 하나이며, 따라서 칭의에 선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전히 지적 활동으로서의 믿음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
2) 지적 요소를 믿음에서 제거한다. 실제로 그 내용을 알지 못해도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믿기만 하면 진정한 신자로 간주 될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지식을 포함하는 명시적인 믿음과 구분하여 맹목적 믿음이다(루이스 벌코프 2000:760). 또한 로마 교회에서는 마음에 의해 분명히 이해된 대상에 의거하는 명시적 믿음과 사랑이 그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명제들의 진리 가운데서 실천하는 암시적 믿음 사이를 구별하였다. 그들은 만일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명제 가운데서 명시적 혹은 모르든지 간에 그것에 포함된 매사에서 암시적 믿음을 실천한다고 한다(A. 하지 1991:47). 기렇게 로마 교회는 이런 맹목(맹신)적 믿음은 "교회"라는 딱지를 붙여서 속여넘기면 무지한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신령한 것으로 받는다. 즉 "이것이 교회에 대한 믿음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죤 칼빈 2001:19).
3) 로마 교회의 믿음은 무지의 신앙과 불어넣어진 믿음의 구분이다. 전자는 교회의 교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에 불과한 반면, 후자는 형성적 원리인 사랑을 포함하고 사랑 안에서 완성되는 신앙이다(루이스 벌코르 2000:760).
13. 칼빈의 견해
칼빈은 스콜라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맹비난을 가하였다.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참된 이해 없이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단지 "맹신적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그런 믿음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는 또한 "정함이 없는 믿음"과 "사랑에 의해 단단해진 믿음"을 구분하는 것을 거절한다. 정함이 없는 믿음이란 그가 환언하기를 참된 믿음이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특히 그분의 자비를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위에서도 기록하였지만 그의 정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믿음을 단순히 지적인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루터처럼 신뢰가 믿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로마서 10:10 주석에 서 칼빈은 믿음이란 단지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확실하고 효력 있는 신뢰"라고 단언한다. 칼빈의 주장과 스콜라주의의 주장의 차이는 칼빈은 믿음을 첫째,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둘째, 전혀 알지 못하거나 반쯤 아는 진리들에 대한 단순한 찬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실하게 앎이며, 셋째, 의심에 반대하는 견고한 확신이나 신뢰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에 대한 어떤 공로도 모두 반대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0-231).
14. 믿음의 요소
1) 지적 요소(지식)
(1) 지식의 성격
믿음의 지식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말씀하신 모든 것, 특히 하나님께서 인간과 타락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에 대해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진리에 대한 긍적적 인식을 의미한다.
(2) 지식의 확실성
믿음의 지식은 다른 지식보다 확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확실한 지식"임을 천명한다. 믿음의 지식은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매개되고 분여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을 근거로 우리는 아를 확실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받아들인다. 이 지식의 확실성은 하나님이 자신이 보증이 되며, 따라서 어떤 것도 이보다 더 확실할 수는 없다.
(3) 지식의 분량
구원적 믿음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이 절대적으로 요청되는지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구원적 믿음은 일반적으로 신적 계시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중보자와 그의 은혜로운 사역들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포함해야 한다. 구속의 진리들에 대한 더 많은 실제적인 지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그의 신앙은 더 풍요롭고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구성원들이 진리를 어렴풋하게 이해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4-755). 다시 말해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3).
2) 감정적 요소(동의)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그는 진리와 믿음의 대상의 실재를 깊이 확신하고, 이것이 자신의 생활에서 주요한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깨닫고 믿음에 열려한 관심을 자각한다. 바로 이것이 동의이며, 이 동의는 보다 능동적이고 이행적(移行的) 측면으로 이해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6). 즉 찬동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 찬동은 전 인격 즉 우리의 전 주제가 성경이 가르치는 죄,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고 우리의 생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진리로서 받아들임이 포함되어야 한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34).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 진리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찬동은 깨달음이나 단지 찬동이 아니라 확신하는 확고한 신념이다고 말한다(D.M 로이드 존슨 2000:206).
3) 의지적 요소(신뢰)
이것은 믿음의 정수이다. 믿음은 지성의 문제 혹은 지성과 감정의 복합적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의 방향을 결정하는 의지의 문제요, 대상으로 다가가서 이를 획득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 없이는 죄인이 믿음의 대상이 진리이며 실재하며 자신의 현재적 요구에 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인정할지라도 믿음의 대상은 그 사람 외부에 남게 된다. 이 의지적 요소는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서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며, 허물 많고 타락된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복속하고 그리스도를 용서와 영적인 생활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한다(루이스 벌코프 2000:756). 즉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며 특별히 이 신뢰에는 순종에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즉 믿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순종하는 섬김으로 가야만 하기에 야고보의 말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안토인 A. 후크마 1999:235). 또한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전재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D.M 로이드 존슨 2000:207).
15. 믿음과의 관계성
1) 믿음과 이성
믿음이란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이 믿음 안에 있다. 따라서 믿음은 전적으로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믿음이 이성과 반대되는 것 또한 아니다. 중요한 것은 초이성이다. 즉 우리의 이성은 우리가 이성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그 지점까지, 계시에 복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관계가 없다고 깨닫는 그 지점까지 우리 자신들을 이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이러한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를 같은 수준으로 끌어간다. 그 때 이 계시를 수락하면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과 이성의 관계이다(D.M 로이드 존스 2000:211-213).
2) 믿음과 지식
믿음에는 지식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믿음에 있어서 첫 요소가 진리에 대한 확신이라면, 확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것은 부분적 이해가 아니라 완전한 이해여야 하는 것이다(D.M 로이드 존슨 2000:213). 그때 진실하게 믿어지는 것이다. 즉 지식은 믿음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지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식은 어떤 대상을 참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며 신앙은 그 진리에 대한 동의이다. 또한 약속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이 지식인 반면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의존은 신앙이다(A. 하지 1991:46).
16. 믿음의 대상
1) 일반적 믿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적 믿음을 의미한다. 그 대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신적인 계시 전체이다.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는 것 혹은 성경에서 정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러한 일반적 의미에서의 믿음의 대상에 속한다.
2) 특별한 믿음
이 믿음은 보다 제한적 의미에서의 구원적 믿음이다. 특별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약속이다. 믿음의 특별한 행동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 안에서 제시된 대로 그에게 의존하는 것이다(요 3:15-16; 6:40). 엄격하게 말해서 의롭다 하고 따라서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그러한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이해 영접되는 바로 그 대상이다(루이스 벌코프 2000:757).
17. 믿음의 근거
믿음이 의존하는 궁극적 근거는 복음의 약속과 연관된 하나님의 진실성과 신실성에 놓여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이를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에 궁극적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말씀은 거울과 같고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도움을 사용하시든지 또한 자신의 힘만으로 하시든지간에 자신에게로 끌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항상 말씀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의 말씀에서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죤 칼빈 2001:24). 성경에 나타난 계시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고 인정하는 것은 결국 성령의 증언(요일 5:7)에 의해서이다.
18.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견해
1) 로마 교회
로마 교회는 개인적 확신이 믿음의 본질에 속할 뿐만 아니라 반성된 행동, 혹은 믿음의 열매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로마 교회는 신자에게 특별 게시에 의해 확신이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는 절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2) 종교 개혁 자들은 로마 교회의 불합리하고 유해한 입장을 반대하며 확신을 믿음의 가장 주요한 요소로 강조하였다. 믿음의 신뢰의 요소는 때로 그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았다는 죄인 편에서의 확고한 신뢰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3) 개혁파의 신앙 고백서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로마에 대항하여 믿음의 신뢰가 죄의 용서의 확신에 기인한다고 가르친다. 도르트 신조는 선택된 자의 확신은 특별 게시의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증거, 그리고 선한 양심과 선행에서 발원하며,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향유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믿음의 완전한 확신에 대하 언급하면서 이는 믿음의 본질에 속하지 않고 따라서 진정한 신자가 오랫동안 이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루이스 벌코르 2000:758-759).
19. 성경이 보여주는 믿음의 확실성
1) 이상적으로 믿음은 확신을 수반해야 한다. 히브리서 11;1에 의하면 당연히 되어야 할 것은 영적 실제들에 대하여 확실성을 가지며 소망하는 구원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일서 5;13에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또한 지식을 소유한 자이며 이 지식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지식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신자는 영생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면 알아야 한다.
2) 참 신자들도 때때로 확신이 부족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믿음이 적은 제자들을 보시고 책망하셨다(마 6:30; 8:26; 14:31; 눅 12:28). 그러므로 신자들은 때로는 확신에 대한 부족을 드러낼 수 잇는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가 단번에 구원의 완전한 확신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잠시 동안 즐긴 후에 그 확신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히 3:12).
3) 구원에 대한 더 큰 확신으로 성숙해야 한다. 베드로는 독자들에게 자신이 효과적으로 부름 받았으며 하나님의 의해 구원으로 선택되었다는 확신을 강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벧후 1;10). 또한 바울은 성령의 확증시키는 증거는 오직 단 한번, 홀연히, 극적으로 혹은 어떤 무아경의 감정적 경험이라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증거한다고 한다(롬 8:16). 즉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과 함께 계속해서 증거한다. 이것은 전 생애 동안 계속되는 증거로 말씀을 통해 역사하며 다양한 유형의 경험들과 시련들을 통하여 온다(안토니 A. 후크마 1999:245-246).
성경은 이상적으로 믿음이 구원의 완전한 확신을 가져 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잠시 동안 신자가 그런 확신이 부족할 수도 있음을 가르친다. 이런 경우에 더 큰 구원의 확신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이 보증하며 증거함을 명확하게 분별하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한다.
특별히 죤 칼빈은 믿음의 확신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자기에 대해서 인자하시며 호의를 가지신 아버지시며 그분의 관용을 근거로 삼아 모든 일을 약속하시는 것을 굳게 확신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신자라고 말하고 있다(죤 칼빈 2001:39)
20. 믿음의 결론
믿음은 감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자아가 고통함으로 오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사람을 의존함으로 오는 것도, 죄를 감추어 버림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믿음은 지금 여기에 계신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실상"과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으므로 우리는 믿는 것이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즉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죤 칼빈 2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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