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2일 주일 낮 설교
본 문 : 마 6:12,14,15 마 18: 21- 35
제 목 :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할 때에 우리가 가장 부담스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를 위한 간구의 두 번째는 죄를 용서받는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실질적이고 가장 긴급하고 절실한 양식을 위하여 간구하고 다음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간구하는 것은 참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때마다 우리는 정말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었는가? 하고 스스로 고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과 용서가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는 용서와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외치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교훈도 하셨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비유를 통해서도 용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 17:3-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정말 힘든 용서를 실천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1> 에서입니다.
에서는 야곱 때문에 자신이 받아야 할 축복을 도둑맞았습니다. 아버지께 별미를 해 드리고 축복을 받으려고 했는데 사냥을 간 사이에 야곱이 별미를 해가지고 자기가 마치 에서인 양 꾸미고 들어와서 축복을 가로챈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고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살다가 아내들과 자식들을 이끌고 형 에서 앞에 돌아옵니다. 처음에는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으나 그가 형 에서 앞에 일곱 번이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니 형이 달려가서 야곱을 맞아서 안고 입 맞추고 울면서 야곱이 모든 허물과 잘못을 용서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작업하셨습니다.
2> 요셉입니다.
요셉은 9명이나 되는 이복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져 넣기도 하고 결국에는 요셉을 은 20을 받고 노예상인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는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동생을 팔아먹고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은 형들입니다. 그런데 13년이 지난 후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형들은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그만 자기들이 팔아버린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을 알고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4)고 하면서 요셉이 형들과 입 맞추며 안고 울며 형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주었습니다.
3> 예수님은 친히 용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도무지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고 하시며 용서의 본을 친히 보여주었습니다.
4> 초대교회 스데반집사입니다.
자기를 돌로 치는 핍박자들을 향하여 욕하지 않고 도리어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라고 하며 용서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의 말씀에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하여 용서에 대하여 보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면 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임금이 종들에게 빚을 준 것을 계산할 때에 보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갚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이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고 하면서 울면서 살려 달라고 하니까 주인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금님으로부터 탕감을 받은 종이 나가더니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더니 목을 잡고 말하기를 빚을 갚으라 하자 그 친구가 엎드리어 간구하여 조금만 참아 주면 빠른 시일 내에 다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탕감해주기는커녕, 도리어 자기 친구를 고소하여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종들이 민망하고 괘씸하여 임금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님은 분노하였습니다. “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친구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주기도문과 같은 상관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용서를 받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게 탕감해주지 않는 것은 주기도문의 원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죄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숨기는 것은 멸망의 길로 가는 길이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용서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고 영생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결코 숨길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2. 우리도 형제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잘못한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이것이 미움으로 커지게 되며 내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으면 시기와 질투가 되고 이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과실을 용서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 같이 라고 기도하려면 참으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 키가 작은 아이가 키 큰 아이에게 맞았습니다. 매를 맞고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맞은 것입니다. 화가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키 큰 아이를 찾아가서 대들다가 또다시 맞았습니다. 키 큰 아이가 자기 가슴을 치는데 얼마나 아픈지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키 작은 아이는 안되겠다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지 그래서 그는 자기 가슴에 폭탄을 장치했습니다. 키 큰 아이가 자기의 가슴을 치면 그의 손이 날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키 큰 아이의 손이 날라 가기 전에 폭탄을 장치한 아이의 가슴이 먼저 날라 가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용서해버리면 내 가슴이 시원하고 내 마음속에서 미움이 사라지면 내가 평안할 텐데 용서하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니까 미움과 분노가 끓어오르고 부아가 치밀고 그것이 결국은 심장병이 되고 암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억도 아니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내 마음으로부터 용서해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전쟁 후라 민심이 대단히 흉흉한 때였습니다. 어느 날 밤 한 농장에 약탈을 일삼은 건달들이 침입했습니다. 외딴 농장이라 주위에 도움을 청할 기회도 없이 일가족이 무참히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순찰 중이던 경찰이 총성을 듣고 급하게 달려 왔으나 가족들은 이미 죽도 건달 중 몇 명만을 붙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숨진 희생당한 가족들 중에 큰아들이 아직 숨이 남아 있어 병원으로 옮겨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큰아들은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나 사업에 몰두하여 성공하였고 또한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년 전 자기 가족을 살해한 살인자중 하나가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복역기간이 끝났지만 갈 곳이 없어서 석방이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독일은 후견인이 있어야만 죄수가 석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큰아들은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서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그는 조용히 주기도를 하는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대목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그 죄수의 후견인으로 하여 그 살인자를 석방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을 했습니다. 그가 쓴 청원서에 이렇게 이유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나도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함을 받았으니 나도 형제의 잘못을 용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최용덕 집사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시시하고 별것도 아닌 일도 친구와 말다툼을 벌렸고 그 일로 마음이 상한 채 며칠을 보내게 되었답니다. 내가 먼저 가서 손을 내밀어야지 별것도 아닌 일이니까 사과하고 화해해야지 눈만 감으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고 화해를 청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빨리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며칠 동안 망설이고 주저하고 있는데 어느 날 밤 상대방이 먼저 찾아와서 내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예수를 믿는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는 사람이 주기도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라고 말입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고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용서해주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입니까? 내가 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먼저 용서해주는 것이 내가 먼저 화해하는 것이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입으로만 줄 줄 줄 외우는 주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앵무새처럼 외우는 주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 용서함을 받았으니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3.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불러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사람의 자격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에게 임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이 땅에서의 축복과 천국의 영생을 소유하는 구원과 직접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용서는 남을 용서함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저와 제 동생이야기를 하난 하겠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힘들었을 때 저의 동생과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왜 그런지 서운하고, 속상하고,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런 생각만 들었습니다. 동생도 저에게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음에 용서가 안 되고 그렇게 서로 연락도 잘 하지 않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신학을 하고 부 교역자 시절입니다. 경북대학교 앞에서 전도를 하다가 제 동생을 만났습니다. 뒷모습만 보이는데도 알아보겠더라고요. “광섭아” 불렀더니 제 동생이 잠시 굳은 듯이 서 있는데 어깨가 들썪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야, 우에사노” 그 한 마디에 서로가 마음에 메였던 것이 풀어지고 화해가 되었습니다. 제 동생은 결혼하고 10몇년 만에 자식을 쌍둥이로 낳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목사가 되었고요. 용서하는 것은 상대를 위함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입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함을 받습니다. 그 은혜는 너무나 고귀하여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수많은 세계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예술품들마다 가격이 메겨져 있는데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valueless(값없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값없다는 말과 값싸다는 말은 다릅니다. 값없다는 것은 싸구려라는 뜻이 아니고 워낙 비싸서 값을 지불할 수 없기에 거저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나리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작품이기에 “값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처럼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되 완전히 용서해 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를 남김없이 가져가시고 죄를 제거하여 주십니다. 그의 용서는 시효 만료가 없이 영원한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 무한한 은혜를 우리는 값싸게 여기는 어리석은 인생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음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단12:3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고 하십니다. 아무쪼록 오늘 주신 말씀을 명심하시고 내가 먼저 주님을 본받아 먼저 용서할 줄 아는 제자다운 제자가 되고 또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아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원한 삶을 영원토록 살아가는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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