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와 그 본질
(바울신학)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울의 의인론(義人論)은 그것이 발현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의인론이라는 올바른 사상적 관점을 근거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편에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는 단지 하나님의 속성만을 나타내는 추상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 내적이며 현실 변혁적인 행위명사이며 동작명사이기도 하다. 의(義)는 대상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대상은 세계(世界)이며 우주적이다. 하나님의 의는 의롭지 못한 세계를 향해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는 사건이며 심판의 사건이다. 바울은 의롭게 됨의 근거를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데 여기서 의(義)라는 명사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존재의 신비를 나타내는 정적(靜的)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동적(動的)인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법정적'(法廷的, forensic)인 의미로 사용한다. 구약성서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왜곡된 인간관계를 정상적인 인간관계로 회복시킨다. 이른바 바울의 의인론, 즉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인정받는다는 교설은 바울신학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모든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 서 있는 개신교회들은 의인론을 교회의 존망이 걸려있는 '신앙조항'으로 여기고 있다.
바울의 의인론은 안디옥 사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바울이 그의 최초의 의인론을 안디옥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것은 의인론의 삶의 자리를 밝혀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기록된 안디옥 사건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식탁 예식과 정결법을 주장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한 권리를 상징하는 밥상공동체가 파괴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즉각 침해당한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갈 15-21절을 통해 의인론을 전개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방인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에게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무기로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억압하였다. 바울은 이런 차별기능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로 인해 차별 당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인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특권을 가지고 이방인들을 차별하고 멸시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의 의인론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법이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하나의 인권선언문이다. 또한 바울의 의인론은 모든 불평등과 불의, 착취, 수탈로 점철되는 왜곡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모순된 구조를 해결하려는 인권에 대한 구체적이며 치열한 하나님의 해방사건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긍정적 명제와 부정적 명제로 구성된다. 먼저 긍정적인 면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인 면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는 판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명제는 바울의 적대자들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의 대립관계에 있어서 양쪽의 핵심어를 각각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론의 핵심은 달라진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내용을 분설 하면 다름과 같다.
1. 칭의 바울의 칭의교리(稱義敎理)는 '하나님의 의'를 전제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바울의 칭의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 할 것은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법정적(法廷的)인 개념 이상이라는 것이다. 즉 칭의란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는 것보다 더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를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말과 판단이라는 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대리인, 그리고 구세주(救世主, Saviour)로 믿는 사람들에게 의롭다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의 총체이다.
우리가 이 단어의 용법을 따라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칭의는 사법적(司法的)인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죽음, 즉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또한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은 사망이 아니라 부활이다. 비록 부활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의 그림자를 통하여 도달하는 길이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었으며,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죽음이란 인간이 실존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이르는 두 번째 사건이며 죽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유한성과 필멸의 인간 실존을 초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롬 8:3)하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할 수는 있지만, 그 죄를 사하여 줄 수는 없다. 율법은 우리의 더럽혀진 죄를 거울처럼 비추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깨끗하게 씻어 줄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우리는 너나없이 죄인들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롬 6:23)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죽여왔다. 칭의는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둠'을 뜻하는 데 율법은 그 일을 행할 수 없다.
둘째, 율법은 전혀 자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엄격한 규범이다.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지켜야만 한다. 결국 율법은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초래하였다.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행하지 아니한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셋째 이유는, 율법이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오염시킨 내적인 죄성을 정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고 율법을 흠 없이 지켜나간다고 하여 지나간 삶의 여정이 바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정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새 삶을 시작한 이후의 한 부분의 삶이 아닌 그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교정이어야 한다. 설령 그의 전 생애동안에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본성의 내재적인 근본적인 죄성은 제거하지 못한다. 다윗이 그 안에 정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창조해 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바로 그의 내부적인 결핍 때문이었다(시 51:10).
사실상 율법은 어느 누구도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고 주어졌다(롬 7:13). 그렇다고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cf 롬 7:12). 악함은 인간에게 있을 뿐이다. 다만 율법은 인간에게 악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의 칭의가 불가함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율법으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cf. 롬 3:20),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개인교사로 표현하였다.
2. 기독교에서 이신칭의의 교리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실존상황에 침투하여 우리에게 의롭다하심을 선물로 주심으로 인하여 인간의 실존상황은 인간의 외적 행위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 자신은 무능력하여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변화 받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복음은 타락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선물로서 진정한 존재가 주어지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진정한 존재란 우리가 선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현존재를 판단함에 있어서 진정하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질책하고, 우리 인간의 진정한 존재 방법으로부터의 우리 소외됨을 없이 해 주는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자기 만족적 추구를 포기하고 일시적인 세상 물질에 의존함을 버리게 하며 대신에 우리의 존재를 영원무궁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약속에 기초를 두도록 초대받는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부정 즉 노력에 의한 칭의(稱義)나 자기 칭의의 입장을 거부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 상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의 역사에 친히 개입하신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칭의 율법이 없이 하나님의 의가 가장 밀접한 관계 하에 놓여지게 된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나타나게 하나니"(롬 1:17)라고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의와 그 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가 갖는 현재적 종말론적 성격만큼이나 특징적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중심이며, 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다. 이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단어의 뜻을 간단히 말하면, '의롭게 되다'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바로 삶, 참 생명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갈 3: 26)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구원사건(cf. 갈 3:25-27)을 의미함은 물론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사도 바울의 무차별 의식은 믿음에 의한 義의 완성이다.
이신칭의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인간은 원죄의 결과로서 모든 인류는 그들의 신분이나 시대나 또는 어느 곳에 살든 막론하고 칭의를 필요로 한다.
2) 크리스챤은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선물로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최종적 구원에 이를 희망이나 칭의를 위한 근거를 전혀 갖지 못한다.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전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들과 복음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놓여 있다.
3) 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값없는 사역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우리 칭의의 근거나 토대가 된다고 말할 수 없다. 믿음조차도 신적 선물이며 우리 속에서의 신적 역사로서 인식되어져야 한다.
4) 칭의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며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그의 면전에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 칭의에서 우리가 복음에 인격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력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또 성경과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통해서 우리가 복음을 만남으로써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다.
5) 의롭다 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뒤따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어지며, 선행을 행하도록 자극 받고 또한 가능하게 되어진다. 이것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이 선행들에 의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니 이는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된 선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본성의 회복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상적인 자기 충족성에 기초를 둔 모든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역사를 초월하는 자에 의하여 인간의 실제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변화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역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 힘으로 결코 누릴 수 없는 자유를 얻었다. 칭의는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환상을 드러내어 파괴하며, 우리 인간이 죄악으로 인하여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온당치 못한 산물들임을 폭로해 준다. 칭의라는 말은 그것이 죽음, 곧 유한한 인간실존의 한계이며 마지막 사건에 이르렀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극복되어졌음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을 제공한다. 믿어 구원받은 인간존재의 마지막 사건과 경계는 이제 사망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다.
3. 칭의에 의한 은택
칭의란 그리스도의 은택(恩澤)이 무엇과 관계되는가의 포괄적 모습을 형성하기 위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 몇 가지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칭의의 개념은 우리에게 정죄의 제거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및 신분의 확립에 간하여 말해 준다(롬 3:22-27, 4:5, 5:1-5). 양자됨의 사상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새로운 신분을 가리킨다. 화해와 용서의 개념은 깨어진 관계의 회복을 지적해 준다(고후 5:18-21, 엡 2:13-18). 구속과 해방의 개념은 속박과 노예상태로부터의 구출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하여 지불된 값임을 가리킨다(막 10:45, 엡 1:7). 여기서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에 대한 중요하기는 하나 철저하지 못한 기술이다. 즉 죄가 없이는 칭의를 받을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은혜 없이는 칭의의 가능성도 없다. 이신칭의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적, 변화적 임재가 믿는 자들 속에 선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칭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이 문제에의 신약성경의 진술들을 초월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그 교리의 중요성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칭의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 통찰을 확증 시켜주는 하나의 슬로건이요 암호이며 속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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