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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장 목회와 균형 목회

하나님아들 2012. 8. 16. 18:20

성장 목회와 균형 목회

강사/박종순 목사(충신 교회)

 

서론/ 목회를 시작한 지 대체로 5년까지는 겸손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0년쯤 되어서 교인이 한 500, 600명쯤 모이기 시작하면 이제 더 이상 배울 것도 또 전할 말씀도 없다고 해서 세상 말로 건방져지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미나 참석도 잘 안 하고 남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근자에 이르러 한국 교회에 신선한 바람이 일고 있습니다. 이런 모임에 가보면 많은 분들이 오셔서 진지하고 학구적이고 영적인 힘을 갈망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저도 같은 동역자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까지는 굉장한 성장 속도를 보이며 올라서다가 1980년대 말, 1990년대 들어서면서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성장이 침체되었다든지 정체되었다든지 마이너스 성장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설교하면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 성장이 정체되었습니다. 둔화되고 있습니다. 마이너스 성장입니다.” 이런 말들은 목회자들끼리는 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설교할 때는 절대 하지마십시오. 자기 얼굴에 침 뱉기입니다. 우리들 책임이지 교인은 아무 책임이 없습니다. 이건 다 우리 책임인데 자기 책임을 교인들 앞에 놓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성장이 정체되었습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뭘 압니까? 아니, 교인들이 무슨 죄입니까?

 

침체, 성장, 둔화 이런 말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어쨌든 교회성장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구라파의 경우와 한국은 문화가 다르고 교회 체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한국 교회와 미국 교회를 비교해 볼 때 한국 교회는 기도가 있고 말씀이 있고 순교의 피가 있습니다. 구라파 교회나 미국 교회가 가지지 못한 한국 교회만의 독특한 영적인 자산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 이런 것은 있습니다. 세계 교회나 한국 교회나 할 것 없이 성장의 속도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올라가다가 내려가고 또 올라가다가 내려갑니다.

 

어떤 신학적인 이슈나 세상의 패션, 유행이 그러한 것처럼 30년 사이클, 20년 사이클이 있습니다. 교회 성장도 계속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올라가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재충전해서 또 올라가기 때문에 아마 우리가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한국 교회는 얼마든지 재도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성장 목회와 균형 목회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한마디로 말해서 잘 하는 목회란 균형 잡힌 목회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신체 구조를 전부 균형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지난 주 〈뉴스위크〉를 보니까 여자의 얼굴그림이 실려 있는데 얼굴 전체에 7~8mm 정도의 선을 그어 놓았습니다. 표준 미인을 산출한 것인데 턱과 입술 아래 사이에도 정확한 간격이 있고, 머리에서 이마 간격도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을 중심으로 해서 이마, 눈, 코, 입 할 것 없이 간격이 딱 맞는 것입니다. 정말로 균형 잡힌 미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균형 잡힌 목회가 아름다운 목회입니다. 그것을 밸런스 미니스트리(Valance Ministry)라고 하는데 이것이 저의 목회 철학이기도 합니다.

 

교회 성장

 

이러니 저러니해도 교회 성장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파는 풀러 학파입니다. 지금은 은퇴를 한 맥가브란 박사, 또 피터 와그너 박사를 중심으로 한 풀러 학파가 교회 성장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였는데 피터 와그너 같은 분은 영성 목회, 소위 말해서 영감(feeling), 치유, 신유 쪽에 특별한 은사가 있는 분입니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도 좀 건강이 안 좋은 학생이 있으면 수업이 끝난 후 불러서 안수하고 병을 고쳐 줍니다. 그분은 아직도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대단한 은사를 가진 분인데 그런 분들이 대두가 되어 교회성장학을 학문으로 정립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 고전적인 냄새가 나긴 해도 역시 교회 성장학을 이야기하려면 맥가브란 박사가 쓴 책이나 와그너 박사가 쓴 책을 안 볼 도리가 없습니다.

 

1. 교회 성장학의 이론

 

와그너나 맥가브란 박사의 교회 성장학의 주된 이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제자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람직한 교회 성장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성장을 말할 때도 양적인 성장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양적인 성장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미 경험을 하고 계시겠지만 교회의 성장이란 목회자 자신의 의식구조, 목회자 자신의 신학이나 신앙이 어떠하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됩니다.

 

교단의 신학교도 신학 동향이 성장 지향적이고 은사 지향적이고 발전 지향적이면 성장을 합니다. 하지만 교단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신학 교육의 방향이나 신학의 색깔이 성장에 대해 부정적이고 공격적이면 교단은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 교실에서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무당의 푸닥거리 정도로나 취급을 하고 대신 종교 다윈주의에 대해서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서나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 나온 젊은 지도자들이 나와서 무슨 전도를 하며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키겠습니까? 그런 신학교 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하는 목회자가 교회 성장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교회 성장의 어떤 이론을 공격하면 그 교회가 성장하겠습니까?

 

어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사람이 사슴 사냥을 하기 위해 사냥개를 훈련시켰답니다. 사슴만 보면 공격하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훈련이 끝난 다음 어느 날 사냥꾼이 그 사냥개를 데리고 산으로 사슴을 사냥하러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냥꾼이 그 산을 지키는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만 사슴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사냥개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웬 사슴 한 마리가 앞에서 얼씬거리고 있었습니다. 보니까 자기가 배운 실력을 발휘할 때가 됐다 싶어 주인한테 배운 그 방법 그대로 달려들어 할퀴고 물어뜯고 급소를 물어 결국 자기 주인을 죽여 버렸습니다.

 

여러분, 교인들을 사냥개로 훈련시키지 마십시오. 자기가 물어 뜯깁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언제나 긍정적인 신앙, 긍정적인 태도, 긍정적인 언어 표현, 긍정적인 가치관, 긍정적인 교회 성장관을 가져야 교회가 성장합니다.

 

여러분, 큰 교회에 대해 비판하지 마십시오. 그 교회가 그만큼 크고 성장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강아지 새끼 한 마리를 키워도 주인이 온갖 정성을 다해야 강아지가 크는 법인데 어떻게 교회가 저절로 큽니까? 다른 사람은 흉내내지 못하는 독특한 달란트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걸 보고 배울 생각을 해야지, 그걸 내 것으로 용해시키고 소화시킬 생각을 해야지 왜 비판하고 공격합니까? 남의 것만 커보이고 내것을 없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따로 주셨는데 개발을 할 생각을 않고 남의 것만 흉내 내려고 하는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을 위해서는 목회자의 가치관, 목회자의 인생관, 목회자의 철학 등이 어떠하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교회 성장을 균형 있게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함께 볼 줄 아는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어떤 교회의 목회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양적 성장을 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질적인 성장만 추구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영성 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안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입니다. 왜냐 하면 양 없는 질은 결코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질 없는 양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원래 양이란 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예를 들어 달걀을 놓고 이야기합니다. 달걀 속에서 생명이 잉태되어 나오는 생명의 핵에너지는 노른자입니다. 그러나 그 노른자를 감싸 주는 흰자와 껍질이 없다면 그 노른자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냥 썩어 냄새가 날 뿐이며, 곯아 버리고 맙니다.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은 동시적이고 사건으로 보면 동시적 사건입니다. 만약에 양과 질을 나누자고 해서 노른자만 따로 떼어 생명을 잉태시키려고 한다면 그게 됩니까? 아니면 우리는 양만 중요하다 해서 흰자와 껍질만 떼어 놓는다고 생명이 잉태됩니까? 절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양과 질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질적 성숙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영성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교회도 안 짓고, 개척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하고 전도훈련 프로그렘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오직 영적 성숙에만 치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이 자꾸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줄어들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지금 우리의 시대 상황이나 문화적인 조건들은 교회를 담임한 목회자들이 온갖 노력과 눈물과 땀과 피를 바쳐도 교회 성장이 안 되는 힘든 시점에 와 있습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성장을 그만 두고 이단에게 먹히는 성도가 얼마나 많습니까?

 

2. 교회 성장의 유형

 

1)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 유형

① 생물학적 성장/ 교인이 시집 장가 가서 그 자녀들이 다시 교인이 되는 교회를 말합니다.

② 이동 성장/신흥 개발도시의 경우 교인들이 많이 몰리는 교회를 말합니다.

③ 회심 성장/ 전도하여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어떤 목사님에 의하면 전도해서 성장하는 교회가 바람직한 성장이라고 하는데, 맥가브란의 말에 의하면, 생물학적인 성장도 성장이고 이동해서 오는 성장도 성장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신흥 개발지역이나 아파트라고 해서 교회가 다 성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화려하게 문을 열어도 될 만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교회가 성장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령 목회자의 자질 문제도 있고 교회의 구성요원의 문제도 있고 모인 사람들의 철학이나 신앙도 문제가 되긴 합니다. 하지만 교회 성장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성령이지만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그 힘은 결국 목회자입니다. 이미 성령은 임재하셔서 어느 교회에나 계십니다. 그러면 어느 교회나 성령께서 계시는데 왜 성장하는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목회자 책임입니다.

 

2) 랄프 윈터의 교회 성장 유형

① 내적 성장/영적, 숫자적인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고 질적인 성장, 영적인 성장을 포함한 것을 말합니다.

② 팽창 성장/새로운 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장으로서 맥가브란의 말에 의하면 생물학적 성장, 이동 성장, 회심 성장이 이에 속합니다.

③ 확장 성장/지리적인 문제나 문화적인 거리감 때문에 교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를 개척하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④ 가교 성장/ 문화나 언어가 전혀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문화적 접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성장하지 못하는 교회

 

제가 성장이 되는 교회와 성장이 안 되는 교회를 비교, 연구해 본 결과 몇 가지 기준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컨대 성장이 멈춘 교회는 교회 성장을 바라는 지도자의 열망, 교회 성장에 대한 목표, 교회 성장에 대한 신앙이 약합니다. 그저 현상 유지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본인 자신도 일찌감치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교회 성장이 안 됩니다.

 

제가 충신교회에 부임한 지 20년 되었는데 20년 동안 계속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이 꿈을 한 순간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저는 제 사무실에 한 7천 평 되는 교회를 하나 그려 놓고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를 지으면 7천 평 정도는 되게 지으려고 합니다. 꿈을 꾸는데 돈은 한 푼도 안 듭니다. 다만 그림 그리는 데 조금 들어갔을 뿐입니다. 기도할 때도 돈이 듭니까? 교회가 성장하려면 꿈을 꾸어야 합니다. 성장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제가 처음에 충신교회에 부임했던 20년 전에는 교인이 130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200명 넘게 해주시옵소서. 400명 넘게 해주십시오. 1천 명만 넘게 해주십시오.” 1천 명이 가까웠을 때는 “주님, 1천 명만 채워지면 다시는 이 기도 안 하겠으니 1천 명만 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때 130명 교회로서는 1천 명이 모인다는 것이 굉장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천 명이 넘기에 재빨리 회개했습니다. 그리고선 2천 명, 4천 명, 1만 명 계속 성장했습니다. 기도하는 데는 돈이 안 듭니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은 ‘성장 철학’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성장목회를 지켜보고 도전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교회가 성장하는 디딤돌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통합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저는 성장이라는 말과 성숙이라는 말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성장은 생물학적인 용어이고 성숙은 정신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숙해 간다는 말은 엄격하게 말하면 철이 들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조심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 자신도 지금 그병에서 완전히 자유함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그림 그려 놓고 기도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병은 바로 ‘성장 콤플렉스’입니다. 저도 병에 걸려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아니 충신교회가 여의도 순복음교회만큼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우리가 소망교회나 명성교회만큼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어, 이렇게 생각하니까 밤에 잠이 안옵니다. 이것이 소위 ‘성장 콤플렉스’입니다. 우리는 이 병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장에 대한 목표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콤플렉스에 걸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장과 성숙을 구분해야 됩니다.

우선 성장을 말하려면 통합적인 성장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저는 삼남매를 키우는데 딸 둘, 아들 하나입니다. 제 아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키가 185cm입니다. 그 키는 고등학교 때 다 커버렸습니다. 눈에 보인는 외적 성장은 고등학교 때 거의 다 끝나버립니다. 그 다음에는 속으로 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장가를 가더니 부모의 고생을 이해하고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또 아들 딸 낳아보니까 부모의 사랑을 깨닫더란 말입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지난 주일 어느 교회에서 70주년 설교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로 우리 아이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대부분의 키와 몸무게가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철이 들어야 됩니다. 성숙해야 됩니다.” 앞으로 계속 이 교회가 명성교회나 여의도 순복음교회처럼 계속 30만, 60만이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질 않습니다. 한 교회에 1백만 명이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리 성장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질적인 성장만 추구해서 영성 훈련만 하면 교인들은 다 떨어집니다. 질적 성장 운운하는 교회치고 교인 불어난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성장이 멈춘 교회의 특징은 교회 지도자들이 현상 유지에만 급급해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가 또 있겠지만, 그 중 빚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로버트 슐러의 성장 이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됩니다.

 

미국은 그 교회가 은행과 신용 관계만 성립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3백만 달러짜리 교회를 짓는데 현재 내가 돈이 50만 달러밖에 없으면 나머지 250만 달러는 은행에서 빌려 줍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은행 융자를 받는 게 어려워졌습니다만, 그래도 신용거래가 확실하고 그 교회가 생활할 능력이 있다는 평가만 받으면 1백만 달러 정도는 문제가 없습니다. 다 지어 놓고 나중에 갚으면 됩니다. 그래서 미국 교회들이 2백만 달러, 3백만 달러 들여 교회를 많이 짓습니다. 어떤 교회는 5백만 달러짜리 교회를 짓는데 거의 다 은행돈으로 지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은 현찰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큰 건설회사가 1백억짜리 건물을 짓는다고 할 때 50억은 교회가 내가로 하고 나머지 50억은 5년 안에 갚는다든지 할 경우는 가능하겠지만 미국처럼 은행에서 돈을 빌려다가 교회 짓는 곳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현찰 다 챙겨 놓고 지으려면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어떤 집약된 의견만 모아져 있고 목회자의 강력한 믿음과 성장철학만 확립되어 있다면 강하게 밀고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모험을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반대로 전혀 상환할 능력도 없는데 교회를 지어 교회가 빚 속에 빠지면 목회자만 힘이 듭니다. 너무 무모한 모험은 목회자가 고달픕니다. 이걸 잘 판단해야 됩니다.

 

교회 짓다가 30억 빚을 졌다고 하면 빚쟁이나 건축업자가 장로님을 찾아갈 줄 아십니까? 안 그렇습니다. 목사한테 찾아가 돈 달라고 괴롭힙니다. 그 점을 잘 알아야 됩니다. 너무 재지 말고 또 너무 앞서지도 않는 그것이 바로 균형입니다. 제가 11년째 기독교 방송국에서 신앙 상담, 성경 상담, 생활 상담을 하고 있는데 방송하면서 내린 결론은 딱 한 가지, 모든 대답은 예수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도 궁극적인 목표가 예수면 다됩니다. 목사가 예수한테 미치고, 장로가 예수한테 미치고, 교인이 예수한테 미치면 교회는 삽니다. 예수가 바로 해답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아닌 외적인 것 때문에 예수를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이 안 됩니다.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소리가 날마다 커서 확장되어야 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설교의 마지만 결론은 항상 예수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가로서 큰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제가 가진 약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제가 가진 신앙철학이나 목회철학, 아니 모든 삶의 궁극적인 해답은 예수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성경 본문을 구약으로 해도 결론은 예수로 끌어당기는 버릇이 있습니다.또한 저는 논리학을 공부한 사람이기 때문에 설교는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강해 논리의 노예로 설교할 때가 많습니다. 제 나름대로 몇 가지 약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해답은 예수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자신이 얼마나 복음적인 사람이냐, 얼마나 주님의 손에 사로잡힌 사람이냐,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냐, 얼마나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냐, 더 쉽게 말하면 예수에게 얼마나 미쳤느냐가 중요합니다. 목회자의 신뢰도는 얼마나 예수에게 미쳤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 우리 전도사님이 얼마나 예수에게 미쳤느냐 그걸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적인 교회란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바라보는 교회, 예수와 더불어 사는 교회를 말합니다.

 

금년 제81회 총회 주제는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정했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 우리는 샬롬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회마다 갈등, 분당을 일으키고, 교파간에 분열되거나 노회 안에서도 지역간에 정치를 합니다. 토막토막 나누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평화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회가 평안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내가 죽고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교회를 평화롭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초까지는 가출하는 아이들이 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었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고 공부하기 힘들고 등록금 대기 힘들고 집에 있기가 힘드니까 집을 뛰쳐나와 도둑질이나 하고 깡패질이나 하여 불량 청소년이 되었는데 지금은 잘사는 집 아이들이 다 뛰쳐 나온다고 합니다.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오렌지 족은 다 부잣집 자식들입니다. 그들은 부모가 이혼했거나 별거한 집 자식들로 정상적인 사랑을 못 받은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싸우고, 장로끼리 싸우고, 권사끼리 싸우고, 집사끼리 싸우는 교회에 주님이 계시려면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평화 목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4.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

 

1)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이 확고한 교회

어느 젊은 목사님이 담임 목회를 시작하게 되어 나이 많은 원로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는 “목사님 제가 오늘 교회에 부임해서 새로 목회를 시작하게 됐는데 제게 꼭 충고하시고 싶은 말씀 몇 가지만 해주시지요” 했더니 몇 가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중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안수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 젊은 목사님은 “제가 어떻게 안수기도를 합니까?” 했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젊은 목사가 어느 세월에 나이 많은 장로 무릎 꿇게 하고 볼 일을 보겠느냐. 그러나 안수기도를 하면 다 무릎 꿇는다. 그러니 안수기도를 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말씀하기를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 여기저기서 이말저말 들린다고 주저앉지 말고 그냥 가거라. 기차가 어디 서더냐”라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리더십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대학 교수들 앞에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교인들이 저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외국어도 잘하고, 저보다 외국에 대한 정보도 더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우직스럽게 나만의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관해서는 내가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 권위와 통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영적 리더십이 흔들리는 교회는 성장도 흔들립니다. 목회자의 영적 리더십이 확고한 교회는 교회 성장도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장하는 교회를 지켜 보십시오. 다 영적 지도력이 확고한 교회입니다.

 

2) 평신도들이 헌신하는 교회

특별히 세계 교회 가운데 한국 교회는 그 자원이 엄청나게 묻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지하자원은 없습니다만, 영적 자원은 무궁 무진합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 지원자만 해도 엄청납니다. 지금 불교는 불교대학이 있지만 스님이 되겠다고 거기 가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 대학도 신부 되겠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시집, 장가 안 가고 사제나 수녀 되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개신교는 특별히 한국 교회는 인적자원이 엄청납니다.

 

제가 3년 전에 일본에 갔다가 오사카, 동경의 신학교 교장 몇 사람과 점심을 같이 먹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 중 한 분이 하는 소리가 “근래 우리 신학교에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해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복을 그렇게 많이 받았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번 학기에 신학생이 많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수가 얼마나 되기에 많다고 하느냐 했더니 17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반은 한국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신학교에 가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학교는 초만원입니다. 그것도 입학하기 위해 3:1, 4:1의 경쟁을 뚫어야 됩니다. 이처럼 인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단에서도 한 500여 명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는데 선교사 지원이 계속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에 인도네시아에 갔다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나 칼리만단의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면 원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귀빈이 오면 구렁이를 잡아서 뱀탕을 해줍니다. 전 세계 민족 가운데 뱀탕 먹는 민족은 딱 하나 있습니다. 미국 사람은 못 먹고 일본 사람도 못 먹는데, 한국 사람은 없어서 못 먹습니다. 이처럼 한국 사람들은 어느 나라, 어느 장소에 가도 적응을 잘 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동남아, 아프리카, 남미 어느 쪽에서도 환영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남미 쪽 선교사로 가려고 하니까 그쪽에서 “우리는 미국 사람 안 받는다. 한국에 가서 한국 교단의 파송을 받아서 오라”고 해서 우리 교단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은 백인이 아닌데도 미국 시민권을 갖고 오지 말고 한국 선교사 자격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또 평신도 자원도 엄청납니다. 물량적 자원 또한 엄청납니다. 지금 평신도 가운데 선교사로 나가겠다는 사람, 목사 되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평신도 자원을 잘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인가 요한계시록 21장, 22장을 놓고 설교 준비를 하다가 한국의 도시 발달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도시행정학을 전공한 서울대학교 교수 한 분이 집사로 계시므로 그분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가 지금 설교 준비중인데 우리 나라 도시 발달 사항이 당신 전공 아닙니까? 설교에 필요해서 그러는데 한 쪽만 타이핑해서 갖다 주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내일 오후 퇴근길에 갖다 드리겠다며 전화해 주어서 고맙다는 것입니다.

 

가지고 온 것을 보니까 전부 타이핑한 것이 열 쪽이나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몇 줄 인용을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설교에 누가 제일 은혜 받은 줄 아십니까?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열심히 들었습니다. 여러분, 평신도 자원을 사장시키지 마십시오.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십시오. 평신도들이 다양하게 헌신하는 교회는 성장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3) 목표가 뚜렷한 교회

 

4) 적절한 전도 전략을 가진 교회

개교회는 개교회별로 전도 전략을 짜서 전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단이 한 4년 전에 ‘일만교회 4백만신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2백10만에 6천 교회가 됩니다만 2010년까지 20년 동안 배가운동을 하자고 해서 총회에서 기립 박수로 가결을 했습니다. 그것은 말로만은 안 됩니다. 그래서 전도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전도 교제까지 만들어 목사님들 40~50명을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분들이 자격증을 가지고 자기 교회로 돌아가 교회에서 전도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전도는 뒤에서 민다고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 자신이 영혼 구원과 전도에 대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앞에서 견인차가 되어야 교인들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앞장 서서 선도해야 훈련이 됩니다. 교인들에게 전도 훈련을 시키려면 목사님이 앞장을 서야 합니다. 목회자가 먼저 훈련을 받고 현장 경험을 한 후에야 교인들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5) 적당한 시설을 가진 교회

 

6) 새신자를 믿음의 가족으로 인도하는 교회

새신자 관리를 잘 하셔야 되는데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일단 새신자가 교회에 들어오면 그물이 찢어져서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인구 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좋은 조건이 있다면 다른 교회로 가는 버릇이 있으므로 그물을 많이 쳐서 절대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교회가 매력을 주고, 강단도 튼튼하게 만들고, 또 인간관계에서도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계속 새신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현상 유지가 안 됩니다. 왜냐 하면 빠져 나가는 수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 교인들도 엄청나게 옮겨다닙니다. 저희 동네 아파트를 고층 아파트로 재개발하는 바람에 한 교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교인이 줄지 않고 현상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7) 지역 사회를 섬기는 교회

8)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진 교회

9) 복음 전도에 우선 순위를 두는 교회

 

5. 성장한 목회 철학

 

1)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2) 동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3) 긍정적이어야 한다. 4) 모험적이어야 한다.

5) 영적으로 뜨거워야 한다. 6)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목회이어야 한다.

7) 화평 지향적이어야 한다. 8) 균형 목회이어야 한다.

 

목회의 균형

 

요즈음에는 서커스 구경을 할 기회가 없습니다만 제가 어렸을 때는 서커스 구경하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높은 곳에 줄을 달아 놓고 줄타는 사람이 줄을 탑니다. 자전거를 타고도 줄을 타고 두 발로도 줄을 타는데 제 몸 하나 줄 타고 지나가는 것도 힘들 텐데 저 사람은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줄을 탈까 항상 그것이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막대를 가지고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불편한 막대기 집어 던지고 손으로 붙잡고 가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제 옆에 있던 어른이 그 막대를 잡아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막대로 높은 곳에서 몸의 균형을 잡는 것입니다. 저는 그걸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전부 균형 있게 만드셨습니다. 눈도 둘, 콧구멍도 둘, 귀도 둘, 손과 발도 둘, 또 뇌도 좌우로 해서 한쪽은 생각하게 하고 한 쪽은 행동하게 하고 매사에 균형을 이룰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회도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균형 목회가 중요합니다.

 

1. 관계의 균형

 

목회는 크게 사역과 관계로 나눌 수 있는데 설교를 잘 못하거나 심방을 잘 못하거나 해도 이런 것으로는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교가 항상 같다든지 행정이 서툴다든지 하는 것으로는 크게 문제가 안 되는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관계 때문입니다. 장로님과의 관계, 집사님과의 관계, 교인들과의 관계, 이 관계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몇 가지 관계를 주시해야 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말하자면 영성 관리입니다. 둘째는 동역자와의 관계입니다. 여기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을 데리고 동역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분들이 다른 곳에 가서도 내가 어느 교회 어느 목사님은 참으로 잊을 수 없다고, 그 어른이 나를 잘 지도해 주셔서 내가 성공할 수 있었다고, 나는 평생 그분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석사나 박사 학위 논문 쓸 때도, 나는 아무개 목사님의 은혜로 오늘 이 논문을 쓰게 되었다고 그 책 서두에 쓸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 혹시 여기에 부목사님이나 전도사로 있는 분은 담임 목사님을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결국 자기를 위한 길입니다. 남의 밑에서 못되게 굴면 나가서 밑의 사람이 자기에게 못되게 굴게 마련입니다. 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이 20여 명 있는데 그들에게 늘 여기에서 점수를 잘 받아야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만약에 누가 와서 부교역자를 청빙할 경우 누구한테 물어봅니까? 목사인 저한테 물어봅니다. 그때 제가 “글쎄올시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책임지겠으니 마음놓고 데려가십시오 하면 그들의 길은 열립니다. 그러니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교회에서 잘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같은 지역, 같은 노회, 같은 교단과의 관계입니다. 어차피 목회란 것은 외로운 싸움입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서로 사귀시고 목회 정보도 교환하시며 친하게 지내십시오. 넷째는 교인과의 관계입니다. 교인과의 관계는 참으로 조심해야 합니다. 너무 멀면 차갑다 하고, 너무 가까우면 속 보인다 합니다. 하지만 너무 가까워서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다는 약간 거리를 두고 관계를 맺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가까운 사람이 그 집의 장맛을 이야기하는 법이지 먼 사람은 장맛 이야기 안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사랑은 많지만 거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습니다. 사랑은 많아야 됩니다. 그러나 교인과 너무 밀착해서 사역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섯째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목사님이나 사모님이 이웃하고 싸운다든지 옆집 아파트 사람하고 싸운다면 전도가 되겠습니까?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2. 신앙과 이성의 균형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뜨겁고, 이성적이면서도 신앙적이며,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성이 확실하고,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희 교인들은 철야 기도나 혹은 가끔 기도원에 올라가서 통성기도를 시키면 꼭 오순절 교파 같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소리내어 크게 울부짖으며 기도를 합니다. 그러다가도 종을 땡 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싶게 조용합니다.

 

확실한 연도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암스테르담에서 빌리 그레이엄이 크로스웨이를 할 때 통성 기도를 시켰는데 분위기가 무척 뜨거웠습니다. 한참 기도를 시키더니 빌리 그레이엄이 종을 치면서 “여러분, 이성으로 돌아갑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여러분, 이성으로 돌아갑시다. 이성과 감성, 신비와 그렇지 않은 것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균형과 자유로움이 있어야 됩니다. 기도중에 이성과 감성, 신비는 있지만 주의자가 되도록 인도하면 안됩니다.

 

3. 신앙과 신학의 균형

 

신학 없는 신앙은 흔들리기 쉽고 신앙 없는 신학은 하나님을 죽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 없는 사람은 신학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학자들 가운데는 신앙 없는 사람이 많습니다. 신학은 있는데 신앙이 없습니다. 교회 다 파괴해 놓고 교회 성장의 문 다 닫아 놓는 것이 신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과 신앙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말씀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말씀의 역사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4. 예배의 균형

 

대 예배가 경직화되어 ‘할렐루야’나 ‘아멘’도 안 하고 낮예배나 밤예배 할 것 없이 “다같이 묵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하니 사람들이 ‘묵’ 자만 나오면 좁니다. 어떤 교회는 찬송은 안 부르고 복음성가만 부릅니다. 이 모두 다 한쪽으로만 치우쳤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도 전통과 갱신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정통적인 예배를 70%이상 나머지 신세대를 위한 예배를 편성하되 예배를 예배답게 인도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한다고 복음성가만 부르지말고 젊은이들 예배에 나이많은 분들이 들어가서 예배를 하여도 같이 찬송하고 예배하게 해야 합니다.

 

5. 설교의 목적과 현장 적용에의 균형, 또는 성경공부와 삶의 균형

 

지금 우리 나라는 성경공부를 엄청나게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삶에 적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도 훈련과 현장 적용도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절대적으로 균형 있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지적인 목회를 하는가 하면 영적인 목회를 할 수 있고, 지적인 설교를 하는가 하면 영적인 설교를 할 수 있고, 교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가 하면 정의와 공의로 인도할 수 있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물론 정확한 의미의 균형이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정상은 없다고 합니다. 자기네 생각으로는 정상적인 사람이지만 정신분석학적인 입장에서 그 사람을 진단해 보면 다 비정상이라고 합니다. 남들이 봤을 때 저 사람 비뚤어졌어. 저 사람 이상해. 저 사람은 사시현상을 가지고 있어, 그런 평을 듣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공부와 삶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이단만 좋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결론

숱한 역사의 변동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지속적인 성장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군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의 각성과 체질 개선, 그리고 변신이 요청됩니다. 우리 모두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인식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목회 전략과 선교 전략을 세워야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정착시키는 성장의 일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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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예수가좋다오
글쓴이 : (일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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