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의 역할
1. 사모의 사명과 본분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전10:10)라고 기록돼 있다.
보다 성공적으로 사모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사모는 본분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뿐 아니라 사명 수행의 기술적인 방법도 구체적으로 이해해야만 될 것이다. “무딘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했거니와 사모가 사모로서 일하는데도 무턱대고 뛰어 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사명을 바로 알고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1) 사명을 인식할 것
1938년 2월 8일 산정현 교회의 헌당식전에 주기철 목사가 일찌감치 검거되었다. 교회의 교섭으로 “주목사의 몸이 쇠약하다.”는 이유로 석방되었다.
부인 오정모 사모는 “혹시 신앙을 저버리고 굴복한 것이 아닌가?” 해서 경찰에 가서 확인하고서 안심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자 <기도무장>을 권고하고 또 다시 의복과 기타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목사님! 때를 잃지 맙시다!” 라고 하면서 순교의 각오로 기도해 영력을 기르며 순교를 준비했던 것이다.
목사는 부름받은 사실을 자각하고 주의 종으로 나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명확한 동기가 그에게 있었다.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 되기까지는 많은 과정, 특수한 체험을 비롯해서 신학적 학문을 연마 하면서 수련을 쌓고 사명자로서의 소명감을 가지고 자기 훈련을 마치고 목회일선에서 나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모는 목사의 경우와 입장이 다르다. 대개 사모들이 소명을 받지 못하고 한 남성과 단순한 결혼을 하는 경우가 미국의 한 통계로 증명되고 있다. 피상적인 이유만으로 <꼭 마음에 들어서, 인물이 좋아서, 그냥 좋아서, 위엄이 있어서> 목사를 남편으로 선택했다면 사모가 되는 결혼의 동기는 합당치 않다. 인간 중심의 이유 때문에 사모가 됐다면 큰문제가 아닐 수 없다.
행복한 가정생활이 중요하지만 남편인 목사를 자기와 가족을 위한 가장으로만 충실해 달라고 붙들어 매어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결혼이란 결합(joined)을 뜻하는데 남녀가 결합되어 한몸을 이루어 일치된다는 것은 몸과 마음뿐 아니라 일생을 통하여 지향해 나아가야할 생의 뚜렷한 목표와 사명을 따라서 살아나가는 삶의 과정과 방법론까지 하나하나 일치해야 한다.
특히 사모는 목사를 남편으로 택한 이상 오로지 복음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남편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모든 재능을 개발해서 받치지 않으면 안된다. 목사에게 시집온 이유를 똑바로 알아야 한다. 소명 받은 목사를 남편으로 택한 이상 택한 목적이 뚜렷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결심과 각오가 분명히 서 있어야 한다. 남편 못지않게 사명감에 불타야만 한다. 천직을 망각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꿈은 대단히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있어야 할 보화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직면한 현실이다. 현실을 외면한 꿈은 하나의 공상일 뿐이다. 꿈의 선입주견 때문에 천직을 망각한 사모가 많다. 꿈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지는 자신의 천직을 따라서 살아가게 될 것 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한다. 그래서 천직을 거부하거나 유보시켜놓고 기다린다. 사모는 일단 목사에게 시집온 후로는 그 꿈을 모두 깨어버려야 한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 천직은 내가 원해서 갖게 되고 싫어서 저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모가 되기 전까지는 자유다. 무슨 공상을 해도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목사에게 시집을 온 후에는 모든 것이 자유일 수 없다. 속으로 후회를 해도 별도리가 없다. 취소할 수 없게 된 이상 속이 상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체념해라!
(2) 성직(ministry)를 이해할 것
사모는 자기 남편을 천직을 맡게 된 자기의 대선배로 알면 좋을 것이다.
삼하 7:8-14을 보라 하나님은 강권을 발동해서라도 택하신 자를 세워 놓고야 마신다. 사모는 남편이 소명의 사람인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목사로서의 성직이 무엇임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천직(Ter Ministry)은 직업(pro-fession)이 아니다. 그것은 철두철미한 소명에의 길인 까닭이다. 보수나 대우를 초월해서 오로지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보살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려야한다. 오로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할 뿐이다. 목회생활을 철저히 하나님의 본위로 하고 살아야한다. 자기 인간본위는 차선으로 돌려야 한다.
단지 전할뿐 아니라 구원을 위하여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빚진자로서 중매자로서 적극적인 삶이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바울은 “저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하는 수고‘에 비유하기도 했다.(갈4:19)
(3) 본분을 알 것
본질적으로 목사와 사모의 사명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엄밀히 따져서 각각 다르다. 사모는 자기의 본질이 어떻게 다른지 그 근본되는 차이점을 명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에 사모의 본분이 남편과 엄밀히 구별된다는 것을 명백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모는 자기의 커다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사모의 위치가 목사와 다르듯 본분이 다르다. 피차의 본분에는 뚜렷한 한계선이 그어져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극성파에 속하는 사모는 자기의 본체의 위치와 본분을 곧잘 떠난다. 그래서 목사의 본분과 그 영역에 함부로 침해하는 수가 있다. 월권으로 인한 목회의 역효과는 뻔한 것이다. 사모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위치를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사모가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남편의 본분에 더욱 신경을 쓴다면 그것 자체부터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의 몫을 염려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몫부터 잘 감당하려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모가 자기본분을 철저히 감당할 때에만 남편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자기의 본분을 잘 지켜나갈 줄 모르는 사모일수록 남편의 본분에 적지 않은 참견을 하려는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본분은 감당하지 못하면서 남편의 일에 대해서 왈가왈부 한다면 이는 엄청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속담에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핸들을 둘이 잡아보라 그 자동차가 어디로 가겠는가? 어디까지나 핸들을 잡는 것은 목사의 특권이다. 사모는 어디까지나 조수인 것이다. 조수로서 남편이 피하지 않도록 차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고 알릴 줄 알아야 한다. 모름지기 내조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남편을 내조하는 일 이것이 사모의 바람직한 본분이다.
2. 목회의 내조자로서의 사모
6년여 동안 전주 예수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1994년 9월 10일 기적적으로 깨어난 사람이 있어 화제였었다.
그는 전기룡씨, 아침 조깅을 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부인 성정식씨는 아침이 되면 목에서 호스를 빼고 가래를 제거하고 침대에 뉘워 간단한 운동을 시키고 밤이면 듣지 못하는 남편에게 찬송을 불러주고 성경책을 읽어 주었으며 남편의 뺨에 얼굴을 부벼대고 귀를 깨물어 주면서 부인이 곁에 있음을 확인한 남편이 빨리 깨어나 주기를 기도했던 것이다. 욕창을 제거하기 위해 2시간마다 한 번씩 몸을 돌려 뉘워야 했다. 남편을 위한 부인의 이같은 정성이 결국 남편을 깨어나게 만든 것은 희망을 준 부인의 끈질긴 정성이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고전 11:8-9) 이것이 아내가 필연적으로 남편을 내조해야만 하는 성서적 중요한 윤리이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와를 일컬어 “그를 돕는 배필(on help meet for him)”이라고 창2:18에 말씀했으니 이는 분명 여자를 지으신 목적이다.
이런 고로 사모는 의당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내조의 효과적인 방법과 기술을 익히도록 해야 하고 내조의 비결을 구제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사모가 지혜롭게 목사를 내조하면 목사인 남편의 면류관이 되나 유익은 고사하고 오히려 거치장꺼리나 괴롭히는 존재가 되어 목회에 지장을 주게 되면 목사는 불가불 뼈가 썩는듯한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목사를 내조하는 태도나 공적에 따라서 사모는 천사도 되고 또 마귀도 될 수 있다. 목회의 성공실패, 교회의 부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1) 목회의 직무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이고 적절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남편의 목회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남편의 맡은 직책의 내용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① 기도와 성경 연구하는 일(행6:2-4)
② 말씀을 증거하는일(고전9:16)
③ 가르치는 일(마4:23)
④ 상담하는 일
⑤ 심방하는일
⑥ 찬송하는 일
⑦ 성례를 시행하는 일
⑧ 봉사하는일
⑨ 행정하는 일
⑩ 치리하는 일
간단히 요약한 10가지 목사의 직무를 내조하기 전에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2) 내조의 큰몫인 기도, 기도하는 일
기도는 축복과 능력과 성장을 위한 유일한 비결이다. 아마도 사모가 직접할 수 있는 목회의 중요한 내조는 기도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도 이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7-29)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다.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채워지고 영력도 강해지는 싱싱한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고로 기도 없이는 내조는 고사하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기도 없이는 헌신도, 봉사도, 전도도, 다 헛것이 되어 버린다. 기도 없이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졸렬한 자리에 빠지게 되는 법이다. 이런 기도는 새벽기도와 같이 정한 시간에만 하고 말아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무시로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힘써야 한다.
(3) 즐거움으로 일하도록 도울 것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는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다. 교인들이 많이 나오면 흐뭇하고 적게 나오면 우울해 진다. 더욱이 어떤 시험이 닥쳐올 때 목사의 마음은 아프다 못해 고통을 씹으며 견디느라고 차라리 태연해야 하고 침착해져야 한다. 짓눌려 있는 감정을 맘대로 해소하지 못하고 냉가슴을 앓아야 한다.
때때로 사모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목사에게 누를 끼칠 때가 없지 않다. 주부로서 한 아내로서 이따금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는 일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혈기까지 내면서 남편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남편을 괴롭히는 일은 사모의 할 일이 아니다. 사모는 자기 때문에 남편이 고통을 겪는 일이 털끝만큼이라도 없는지 엄밀히 자신을 살펴야 한다. 사모는 목사에게 적은 부담이라도 주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최소한 자기 까닭에 남편이 추호도 마음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사모는 남편으로 하여금 가벼운 마음으로 즐겁게 목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국 미시건 주내에 디트로이트 신의 전구회사가 한 젊은 기술자를 11달러의 주급으로 고용했다. 그는 매일 10시간을 근무하고 집에 돌아와서 낡은 창고에 틀어박혀 새로운 엔진의 제작에 밤을 새우며 몰두하는 것이었다.
농부인 부친은 자식이 쓸데 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웃들도 이 젊은 기술자를 ‘엉뚱한 사람’ 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예외였다. 하루일이 끝나면 반드시 창고로 가서 남편을 거들었다. 남편이 그녀를 「나의 신자」라고 할 정도로 남편이 만드는 엔진이 머지않아 성공할 것 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
이렇게 하기를 3년, 이 미치광이 같은 연구는 마침내 성공을 했다. 이 청년이 30세 생일을 눈앞에 둔 1893년의 일이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자동차왕 헨리 포드였던 것이다. 성공은 이와 같은 아내의 내조에 힘입는 것이다.
(4) 소신을 다하도록 격려자가 될 것
말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 할 때 그의 부인이 그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루터의 부인 케리 폰. 보라는 조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절망 중에 있는 남편 앞에 찾아왔다. “아니 누가 죽었소?” “그래요” “아니 누가 죽었단 말이요?” 그때 부인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죽었어요”고 정중히 대답했다. 루터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하나님이 죽으실 수 있는가?” 라고 되물으면서 “당신은 하나님이 죽으신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으니 그 부인은 “실의에 잠긴 자기 남편의 태도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것을 발견했다” 고 대답했다고 말틴 루터가 말했다고 한다.
사모는 소극적으로는 남편이 즐거움으로 목회하도록 남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데 노력하는 한편, 보다 적극적으로는 남편에게 용기와 담력을 얻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려면 사모가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심을 다 버려야 한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서 움직여야만 한다. 근심하는 빛도 근심과 염려를 표면에 나타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음속 깊이에서 확신의 샘이 항상 힘차게 콸콸 솟아올라야 한다.
남편의 확신있는 목회는 사모 자신의 적극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남편에게 어떤 압력을 가하거나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고자세를 취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사모가 목사를 좌우하려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다. 지나친 잔소리를 한다든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는 등 교훈을 한다든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로 전혀 무관심하여 도대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좋지 않다. 사모가 나서서 간섭하는 일은 여간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모가 목사에게 구태여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목사에게 한 평신도가 되데 가장 훌륭한 평신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자기가 무슨 제언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될 수 있는 대로 전문적인 목회적 자세에서 떠나서 평신도로 머물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남편을 내조하는 자로서 미덕이 되는 자세인 까닭이다.
(5) 남편에 깊은 관심을
사모는 남편보다 지나치게 앞질러가도 안되겠거니와 남편에게 멀리 떨어져도 안된다. 즉 지나친 목회의 참견도 나쁘지만 아예 무관심한 것도 또한 나쁘다. 사모는 언제나 남편의 목회에 사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깊은 관심은 기도와 상관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뜨거운 마음으로 위하여 기도하지 않고 평소에 무단한 관심이 없으면서도 이따금 자기 판단에 의하여 남편에게 한 두마디의 잔소리로 접근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의 뿔을 박지 않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역사를 따라 범사에 남편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지 못한 채 객관적인 입장에서 남의 일처럼 여기면서 이따금 불쑥 나서는 것은 대단히 해로운 행동임에 틀림없다. 이런 식의 태도는 무성의한 단면을 들어내어 무익한 것이다.
깊은 관심은 깊은 이해를 수반하는 법이다. 이해조차도 못하고서 한 두마디 내뱉는 말이 어찌 찌르는 가시가 아닐 수 있으랴? 따라서 마음과 마음이 상통할 수 있는 이해의 세계에서는 잔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6) 피곤하여 지치지 않도록
사람은 모든 것에 한계가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비롯해서 일에도 능률에도 한계가 있다. 능력과 건강에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이 한계를 무시하고 초인간처럼 기계처럼 뛰어 다니다가 보면 목사는 흔히 과로에 지치게 된다. 기계도 무리하면 고장이 생기는 법인데 하물며 인간이랴!
사모는 남편으로 하여금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항상 건강을 유지해야 무슨 일이건 지속적으로 감당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친 후에 쉬는 시간을 마련하기 보다는 피로를 예방 해야만 꾸준하게 목회를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식사 때가 지났어도 도무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이 바쁘기만 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곳에 가서 잠깐 쉬라”고 말씀 하셨다. 피곤한 제자들에게 휴식도 필요했지만 예수님 자신도 휴식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쉼’(하나 파우에스데)이란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원어 속에 세가지 귀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첫째, 일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여 겹쳤던 피로를 풀라는 뜻이다. 둘째, 복잡한 마음을 가라 앉이라는 뜻이다. 셋째 새로운 삶의 기초를 찾으라는 뜻이다.
(7) 지혜로운 조언을 할 것
속담에 “개똥도 쓸데가 있다.” 했는데 사모의 지혜로운 조언이 어찌 무가치 하기만 하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장식 이니라.”(잠25:11-12) 때로는 사모의 조언이 크게 도움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사모가 목사에게 조언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첫째로, 남편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에는 비판하는 말을 삼가야 한다.
아무소리 말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남편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남편 스스로가 그것을 시정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로, 잘못으로 인하여 감정이 상할 때에는 결코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도 말을 많이 하거나 과장 하거나 어떠한 논쟁도 하려들면 안된다.
셋째로, 남편이 시장할 때나 피곤할 때 또는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할 때에는 말을 꺼내지 말아야 한다. 시급한 진언이 아니면 뒤로 미루는 것이 좋다.
그 외의 행동은 그를 귀찮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넷째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남편을 결단코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남편이 제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손 치더라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무슨 말을 한다면 남편이 받는 치욕은 씻을 길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남편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우선 얼마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남편 자신이 깊이 생각할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틈이 생기면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한 뒤 그간의 느낌과 상황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면 유익한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3. 사모의 역할
목회자 부인으로서 실제적인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1) 설교자의 아내로서
케네디 박사는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만일 목사가 그의 힘을 너무 소비하거나 다른 일에 시간을 낭비한 탓으로 예배에 충실을 기하지 못하면 그 비극의 여파는 클 것이며, 손실은 압도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조직기관을 움직이는 영적 힘의 산실이다. 그리고 이 설교에 대치할만한 다른 아무것도 없다.” 라고 했다.
설교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모든 목회자는 고백한다. 설교의 어려움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동시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데 있다. 더욱이 큰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행함에 있어서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있다.
① 설교 준비하는 동안
- 그가 설교 준비하는 동안에 무엇을 도와줄 것인가. 설교는 하기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어려운 준비과정에 대해 그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인 그의 부인이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사모는 목사가 골방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조용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 잡다한 일이 그의 영성을 흐리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라도 주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과 능력을 맛보고자 하는 수다한 회중을 위해 한적한 서재와 골방을 제공해야 한다.
사모는 할 수만 있다면 교우들의 영적인 상태나 결여된 부분을 통찰하여 정보를 제공해야 할 것이며 남편에게 설교자료나 예화까지도 도와줄 때가 있어야한다. 설교 준비하는 동안 당신의 골방은 당신의 뜨거운 기도의 입김으로 가득차게 해야 한다.
② 그가 설교하는 동안
-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당신은 계속적으로 중심을 묶어 하나님께 호소해야 한다. 다른 것에 관여하지 말라. 그저 기도하고 기도하라. 일주일 동안 농축 해왔던 그의 노고가 승리로 장식되도록 해야 한다.
③ 설교가 끝나고 돌아올 때
- 그는 설교의 평가에 대한 강한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것을 사모에게 기대한다. 그때 “오늘은 은혜 받았어요.” 라고 한다면 그의 가슴은 또 한 번 감사로 넘칠 것이다.
2) 목회자의 아내로서
목회는 어렵다. 일주일 동안 강력한 세상 풍조의 영향 속에서 물들여온 온갖 종류의 청중을 20-30분 동안의 설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이뿐 아니라 저들의 영․육간의 생활을 늘 다스려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탄이 왕 노릇하는 모든 거리, 모든 분위기에서 온갖 종류의 유혹 속에서 일주일을 방목되어진 채 그들의 영적, 육적 생활을 통제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양떼를 돌봄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전체를 다스림이요 또 하나는 개개인을 다스림이라면 전자는 당회장으로서 후자는 심방자로서 감당하게 될 것이다.
① 당회실에서 일할 때
- 목회는 양떼를 다스리는 것이다. 다스림은 정치다. 그런데 목회정치의 어려움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데 있다. 바로 영적인 면에 있다. 모든 교우들은 영적이며 도덕적인 감화를 통해서 다스려야 한다는데 더욱 어려움이 크다.
사모는 당회실에서 언제나 자만과 낙심이 들어오는 것을 금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그의 조수로서 비서로서 보좌관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수호해야 한다. 어떤 의논을 할 때 철딱서니 없이 좁은 소견을 앞세우지 않고 경청하고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라. 어떤 생각이 있거든 더 다듬고 더 깊이 기도한 후 그에게 암시하라. 즉흥적이어서는 더욱 아니 된다. 당회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종용하는 태도는 금물이다.
② 소외된 양떼를 찾고 있을 때
- 목회에서 심방은 중요하다. 찾아오게 하는 면담도 중요하다. 그러나 잃어버린 자를 찾아가야 되는 심방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당신의 남편이 언제나 심방에 부지런히 나서도록 당신은 도와야 할 것이다. 그로 하여금 자발적인 심방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
사모는 교인의 동태를 끝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사모의 마음이 사랑으로 넘쳐야 한다.
③ 봉사자의 아내로서
- 많은 목회자의 실패는 그가 섬김을 받으려 하고, 섬기려 하지 않는데 있다.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적인 역행이다. 분명 주의 종이라 함은 주님의 뜻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자이다. 주님의 뜻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되고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는 자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역자요 교회에서 가장 으뜸가는 자이다.
오늘의 교계 풍토는 봉급의 액수와 지위의 높이가 바로 으뜸가는 목회자요 큰 목회자인양 선전되어지는 것은 모순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 주님의 판단은 오직 섬기는 자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금 시류는 어쨌든 자격 이상으로 평가 받기를 원하고 있음에도 굳이 스스로를 천하게도 낮추어 고난의 길을 찾아가는 남편의 모습을 어느 부인인들 희망하랴. 남편이 십자가를 지려고 할 때 베드로처럼 “그리 마옵소서” 만류할 것이 틀림없다. 매스컴의 씨엠 송처럼 끊임없이 들려지는 불평의 소리는 일주일 동안 천사의 환대를 받으면서 “할말”은 다하는 부흥사들의 대우정도에 이를 때까지 그 불편을 계속할지 모르는 것이다.
사모는 남편으로 하여금 섬기는 자로 살도록 도와야 한다. 결코 그런 자세를 비난하거나 낙심하게 하거나 힘을 잃게 해서는 안되며 사모 자신부터가 대접을 하려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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