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득의(以信得義)
1. 이신득의의 원리
이신득의는 전적 부패로 말미암아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 대해 전적 무능으로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원리입니다.
스스로는 전혀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가 믿음을 통하여 전달됨으로써
의인이 되어 마침내 구원을 얻게 하신 은혜의 방법인 것입니다.
인간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믿음마저도 성령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집니다(고전 12:3).
2. 이신득의의 필요성
인간은 스스로의 선한 행위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습니다(롬 5:12).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의를 행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3. 이신득의의 결과
1) 죄사함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이 된 성도는 예수님의 구속의 공로로 인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완전히 면제받게 되었습니다(롬 5:21; 히 10:14).
2) 영생과 상급 : 성도는 의인의 법적 신분을 얻는 순간
범죄 이전의 아담에게 주어졌던 영생과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상급을 받게 되는데, 이 상급은 각자의 공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게 됩니다(고전 3:10~15).
출처: 다국어성경 HolyBible
이신득의(以信得義)
이신득의가 종교개혁 교리의 핵심이라는 점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것이 핵심이라고 해서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면 선한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때로는 이신득의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서 "용감하게 죄를 범해라"고 말하는 부류도 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루터의 이 경구는 하나의 교리조항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황을 바로 파악하지 않으면, 이것을 마치 새로운 교리조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루터도 이신득의를 역설한 후, 바로 선행론(善行論)를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선한 행위를 망각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보충한 것이 아니었다. 여하튼 신앙의인(信仰義認)의 가르침과 선한 행위의 가르침이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양자의 관계가 불안정한 것 또한 사실이다. 즉 이쪽을 강조하면 저쪽이 가벼워지고 저쪽을 강조하면 이쪽이 가벼워진다. 말하자면 시소게임과 같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라고 한 다음에는 또 반드시 선한 행위에 힘쓰라고 권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관해 영원히 회전운동을 하듯이 양자에 대한 강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르치는 순서를 잘 생각하면, 이 점은 보다 확실해진다. 즉 거듭남의 일환으로 이신득의를 내세워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기독교강요]에서는 이신득의 교리가 11장에 처음 언급된 이래 18장까지 계속된다. 이 교리를 거론하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성화론이다. 성화는 현실 속에서 이미 시작된 것이다.
'믿음으로'라는 것은 앞서 말했듯이 신앙을 통해서라는 뜻이지 신앙을 공로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점에 대해 루터는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명하는 방식은 애매했다. 사실 경건주의는 신앙을 공로로 생각하는 주의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때,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덮는다는 뜻이다.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과 의롭게 된다는 것과의 혼동이 오랫동안 교회에서 뿌리를 내렸다. 이 혼동을 없앤 이가 루터인데, 그는 죄인이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인정되는 상황을 정확이 지적했다. 루터가 이렇게 파악하지 전까지,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은총을 강조하긴 했지만, 펠라기우스파는 자력주의를 극복하면서 의인(義認)과 의화(義化) 혹은 성화(聖化)와 거듭남의 구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거듭난 인간의 행위가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공적(功積)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물론 믿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표현이 성경에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행위는 어떻게 되는가? 칼빈은 믿음으로 수행한 행위도 의로 인정된다고 이해했다. 물론 공로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의롭지 않은 자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 안에는 의롭지 않은 행동도 의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의롭다는 인정은 죄사함과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지만, 신앙 안에서의 행위는 그 자체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은혜 가운데에서 받아들여진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 같지만, 칼빈 이전에는 이렇게 설명한 사람이 없었다. 이 교리가 개혁파 신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게 하고, 나아가 특색 있는 교회의 기풍을 만들었던 것이다.
의인(義認)을 논하는 장 다음에는 값없이 의롭게 됨을 확신하기 위해 우리들 마음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 두어야 한다는 장이 나온다. 이것은 확인을 위한 논의에 해당한다. 의롭지 않은 자가 의롭게 된다는 것이 공허한 논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정에 서서 이것을 논해야 한다. 이것은 자기 인식 또는 인간의 죄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의롭다고 판단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의인의 교리를 통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이신득의(以信得義)
내용 '이신득의'란 믿음으로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얻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의가 되시는
예수를 믿어야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롬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롬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은 신약성경의 근본적 진리에 대한 웅변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변증서인 셈이다. 즉 사람은 그 이상과 그 이하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는 것과, 사람은 율법적인 행위로써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와 권능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 안에서, 그 사람을 통해서 일하심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성화된다는 진리이다. 종교개혁을 가능케 한 것도 바로 이 갈라디아서의 근본적인 메시지를 재발견함으로써 되어진 것이었다. 갈라디아서는 흔히 '루터의 책'이라고 일컬어지는데,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본서를 그토록 강력히 신뢰함으로써 당시의 일반적인 신학을 반대하는 그의 저서와 논문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본서의 요절은 2장16절이다.
[개역개정]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NIV] know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observing the law, but by faith in Jesus Christ. So we, too, have put our faith in Christ Jesus that we may be justified by faith in Christ and not by observing the law, because by observing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이신득의(以信得義 )의 이해
1. ‘행함이냐 믿음이냐’와 ‘율법이냐 복음이냐’
사람들은 흔히 두 문제를 같은 문제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 속성상 인간의 자기 의(義), 곧 행함을 요구하고 있고, 복음은 그 속성상 예수의 십자가 구속의 복음을 강조하며 믿음을 먼저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은 구속사의 전개에 따른 계시의 내용과 형식의 변화, 발전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기본적 차이를 보여 준다. 반면 행함과 믿음은 신 ․ 구약의 시대 변화와는 상관없는 인류 구원의 근 거를 보여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에 따라 율법은 복음으로 대치되었지만 신 ․ 구약을 막론하고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는 전혀 변함이 없다. 곧 구약 시대에 멸망 받은 자도 율법을 다 안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 아서이고, 신약 시대에 멸망당한 자도 복음이 말하는 명령을 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복음의 가르침을 믿지 않아서이다.
2. 이신득의의 정의
문자 그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 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을 뜻한다.
3. 이신득의의 중요성
① 성도들로 하여금 외적 업적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즉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내면과 인격을 중요시하기보다는 외 적으로 드러나는 업적과 공로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낳아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헌신이 무시될 수밖에 없다.
② 인간으로 하여금 자랑치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 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 구원은 단순히 행위에 대한 하나의 대가로 전략하게 되며 하 나님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4. 이신득의와 교회사
이신득의는 A. D. 16세기 종교 개혁자 루터가 ‘오직 믿음’(sola fide)이라 는 기치를 내세우고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사면 죄가 사해진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던 당시 카 톨릭의 불의에 대항함으로써 기독교 태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프로테스탄티즘 (protestantism)의 대강령이 되었다. 이신득의의 근본 정신은 구약의 하박국→바울 →루터→ 개신교로 그 신앙의 대맥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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