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일곱 기둥(1)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잠9:1-4)
성경의 지혜의 말씀은 집의 일곱 기둥 말합니다. 또한 집과 관련해 2절 에는 제물, 상이 나오고 3절 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제물 은 갈보리 십자가이며 하나님의 집의 상은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관련한 메시지의 내용은 8절부터 나옵니다. 즉 초청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집과 관련된 일곱 기둥을 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1-42).
이 두 구절 안에 교회의 일곱 기둥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41절 에 구원, 침례, 더해짐 이 있고 42절에는 교회 안의 네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일곱 가지가 나오면 항상 3+4로 나누어집니다. 이같은 원리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하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우선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음 세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장에서는 주님의 승천이 나오고, 2장에서는 성령강림, 3장에서 성도들이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중 사도행정 2장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 1-13절까지는 구약의 성취입니다. "오순절이 이르매." 이는 레위기 23장에 나오는 오순절에 관한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안식후 첫날"이며 유월절 50일 이후입니다. 하나님은 일 년에 세 차례 모든 이스라엘 남자로 예루살렘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십자가에 달린 유월절에 전 세계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가 어디에 살든지 간에 갈보리 십자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님에 대해서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오순절에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2:36-37).
이에 대해 41절은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이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첫 기둥은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이 말씀을 받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은 개인입니다. 교회는 우주적 교회와 지역모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주적 교회와 지역모임 둘 다 개인이 믿고 들어와야 합니다. 구원 없이 몸의 지체가 될 수 없고 지역모임에도 영접될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가 지역모임에 영접되는 것은 사고여야지 느슨함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그들의이 질문에는 죄에 대해 고통하는 모습이 나타나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여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압니다. 이와 같은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전한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 이는 주님의 인격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은 기쁘게 받았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 때 사람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스스로 이를 해결할 수 없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주님이 죄인을 위해 피 흘리고 죽었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소망을 줍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 "받았다"는 말에는 그들이 너무 행복했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말씀이 그들의 삶을, 운명과 길을 바꾸고 변화시킨 것입니다. 교회의 첫 기둥은 구원입니다.
교회의 두 번째 기둥은 침례입니다. 구원받은 분명한 증거가 침례로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침례는 이정표가 됩니다. 침례는 주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침례는 주님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침례 요한의 침례도 동일시를 의미했습니다. 믿는 자의 침례는 주님과 하나 되었으며 주님께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모든 믿는 신자는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때 침례는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수를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의 장사, 부활을 상징합니다. 물에 들어가고 물 안에 들아가 있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죽은 것이며, 새 생명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죽음을 피부로 느끼는 핍박받는 시기였습니다. 오늘날 침례 받은 자가 정말 이같은 구원을 받았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행8:36). 그에게는 침례 받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두 사람이 물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들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행8:38-39). 이들은 광야 길을 여행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일 침례가 물을 뿌리는 것이라면 병거 안에서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례가 물에 들어가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의미의 침례가 나옵니다. 이 중 넷은 물과 관련되고 셋은 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7은 4와 3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침례는 침례 요한의 침례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이 준 침례이며, 세 번째는 주님이 침례 요한에세 받은 침례(이는 매우 독특한 침례입니다.)입니다. 네 번째는 믿는 자의 침례, 다섯 번재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침례(이는 물과 관련되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는 (심판을 의미하는)불 침례, 일곱 번째는 성령 침례입니다. 이 중 넷은 복음서와 연관 되며 셋은 서신서와 연관됩니다.
교회의 세 번째 기둥은 영접입니다. 그 날 3천명이 더해졌습니다. 새로 구원받은 자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사람들로 나타났습니다. 구원받고 새롭게 모인 그들은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 사회에서 살아갈 때 받아야 할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은 개개인 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서신서로 갈 때 어떤 사람을 영접하는가 하는 주제가 나옵니다. 이같이 조심해서 영접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기꺼이 댓가를 지불하고 있는가 살펴보고 영접해야 합니다
교회의 일곱기둥(3)
42절에는 지역모임과 관련해 네 가지 가 나옵니다.
우선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이는 사도들이 그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도신경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도들을 통해 가르쳐주신 것으로 신약성경 안에 있는 교훈을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신실하게 붙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가르쳐준 말씀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따랐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잠깐 동안, 혹은 어느 기간 동안이 아닌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따라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구원받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교회가 갖고 있는 전통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감동하심으로 사도들에게 넣어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그들은 신실하고 중단 없이 그리고 열심히 따랐습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행20:32)에 부탁하십니다. 항상 지역모임은 말씀을 성실히 따라야 합니다.
두 번째는 "교제"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사귐입니다. 교제는 하나님이 사도를 통해 주신 진리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7가지에는 순서 가 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 후에 교제가 있습니다. 진리 없이 교제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순서를 임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 전에 침례를 줄 수 없습니다. 침례를 받기 전에 지역교회에 더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지역모임의 교제는 진리를 토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영적인 교제와 사회적인 교제를 구분해야 합니다. 사교도 좋은 것입니다. 어제 어떤 가정에서 초청을 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오늘도 그럴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모이며 그 가운데 찬송을 잘 하시는 분, 음식을 잘 만드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 요리 전문가는 세상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모임 안에서 교제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찬송을 잘하기 때문입니까? 요리가 훌륭하기 때문입니까? 혹은 좋은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이유로 교제하고 있다면 언젠가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모임 안에 있는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지역모임 안에서 교제하는 이유는 영적 진리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원칙인 "사도의 가르침'을 배워 성실하게 따라갈 때 교제가 있게 됩니다.
교제 다음에 따라오는 세 번째 것은 떡 떼기입니다. 만찬은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뗍니다. 누가 떡을 뗍니까? 지역모임의 교제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만찬은 신약교회 7 집회 중 하나입니다. 이는 교회적 교제의 핵심입니다. 사도행전 20장 7절에는 떡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모임의 목적이 만찬인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입니다. 떡 떼기는 단순함 과 성실함을 나타냅니다. 단순성은 떡과 잔 두 가지 상징만으로 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성실성(신실함)은 주님을 기억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또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데서도 나타납니다.
네 번째는 기도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이 진리의 행심이며, 교제는 그 핵심 위에 서있습니다. 떡은 그같은 교제가 외적 증거로 나타난 것입니다. 기도는 신약교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지역 모임에 강력한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행전을 계속 살펴보면 모임은 기도에 힘쓰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마다 모여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모든 지역모임에서 이같은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놀랍습니다.
사도행전 2장 41-42절에서 이 땅 최초의 지역 모임에 나타난 일곱 기둥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지역모임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구원 얻는 사람을 교회에 더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속한 지역모임이 이같이 하나님이 주신 기본진리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각 지역모임에서 전해지는 말씀과 수고를 축복해주셔서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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