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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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3. 9. 18. 18:33

하나님의 언약

  


1. 고대 근동의 조약들

(1) 후기 청동기 시대 조약들의 구조

* 대다수의 조약들은 종주권 조약이다. 그 기본 사상은 위대하고 강력한 왕이 약자에게 은혜의 관계를 수여하고 있음을 말한다.
* 고대 이스라엘의 고대 계약 전승들에서, 과거는 앞으로의 순종을 위한 기반과 근거들로서 감사의 의미를 주입하고자 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술되었다.
* 종종 조건법 형식으로 말해지는 후기 청동기 시대의 조약들의 이 부분은 종속자가 계약 관계 아래 서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위대한 왕의 이익들을 묘사하고 있다.  성전 안에 조약 사본을 기탁하는 행위는 지방 신들의 이해 관계와 그의 보호 아래에 그 조약을 맡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낭독함으로서 그가 지배하는 백성 위에서 체결된 것이었음을 가리킨다.
* 이 조약들은 전형적으로 조약 체결을 증거 삼는 그 증인들이 오로지 신들 또는 자연 세계의 신성시 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하늘과 바다와, 땅과 산이 포함된다.  이 집행자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라는 사실은 고차원적 원리들(신들)에 대한 양심적 관심 위에 기초한 자기 단속이어야 한다는 희망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 조약의 이 축복과 저주의 부분들은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들을 자세하게 묘사했는데, 이것으로 인해 그 조약의 증인들은 종속자에게 보답하거나 벌을 내렸다.  후기 청동기 조약 양식은 초자연적 세력에 의해 수행되는 보복 위협뿐만 아니라 또한 동일한 기원에 의한 적극적 보답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국제 조약들은 철기 시대에 대체로 잃어버린 세련되고 정교한 개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에 비하여, 철기 시대의 조약들은 대체로 강화된 단순한 군사적 힘 위에 근거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약들은 종속자가 계약 아래서 조건부 항복을 선택하든지 아니면 전멸을 선택할 자유를 갖는 관계였다.  그러므로, 후기 청동기 시대 조약들은 선전 도구들이었으며, 실제로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2) 계약의 유형
계약은 개인들 간에 (창21:22 이하, 31:44 이하) 국가들 혹은 대표들간에 (왕하3:13,왕상 5:26, 20:34), 왕들과 신하들간에 (왕하 5:3 ; 왕하 11:4,17) 남편과 아내간에(겔 16:8; 2:14)맺어졌으며 특히 인간과 동물사이(욥 5:23 ; 40:28)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계약의 유형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1) 동등권적 계약
동등권적 계약이란 당사자간의 동등한 쌍무계약으로 똑같은 특권과 책임을 가지고 계약을 맺는 것이다.  이때에는 계약 당사자들이 서로 동등한 입장을 인정하거나 동의하게되며두 당사자는 서로 맹세로 묶이게 된다.  이러한 계약은 특정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과 의무 조건 없이 쌍방간의 평화를 보전하는 것으로 나뉜다.  또 계약은 참여 당사자들에게 부과하는 권리와 의무를 다같이 지니는 상호관계이므로 계약 당사자간에 상호 동등한 구속력이 작용한다.
이와같이 평등한 입장에 있는 집단들 혹은 개인들의 협정을 동등권적 쌍무 계약이라 하며 평화계약 (창 14:13; 21-23; 창 21:25-32; 26:27-31; 31:44-46) 형제계약 (암 1:9),우호협약(삼상 23:18), 결혼( 말2:14)등이 이에 속한다.  기브온 거민들과의 계약(수 9:3-27)은 동등권적 평화계약 이었으나 후에 종주권적 계약으로 변질된다.

2) 종주권적 계약
당사자가 동등한 위치가 아닐 때 계약은 우월한 당사자가 스스로 규정한 의무에 열등한 자를 묶는다.  이를 종주권적 계약이라(suzeraminty)이라 한다.  이런 전형적인 예는 사무엘상 11:1 이며 야베스 길르앗이 나하스에게 계약 관계에 따라 섬기겠다고 제의하며 에스겔 17:13은 바벨론과 시드기야 사이에 체결한 표준형 종주권 조약을 제시하고 있다.  호세아 12: 1(앗스르와의 계약)도 사용된 낱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꼭 그렇지는 않지만 위에서 지적한 종주권 조약의 유형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종주권 계약은 세력이 강한 자편에서 약한 자를 묶기도 하지만 우월한 자도 자신의 자유를 다소간 포기한다.
이와같이 종주권자와 종속자와의 관계는 일단 계약이 성립되고 난 뒤에는 힘만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고 그는 종속자에게 요구하는 사실을 성문법화 하였고 그 이상의 독단적 실력 행사를 하지 않았다.

3) 보호계약
보호계약은 우월한 지위에 있는 당사자가 열등한 자의 이익을 위하여 스스로 어떤 의무에 묶이는 유형이다. 또 계약에는 아브라함 계약과 다윗 계약이 포함된다.  아브라함 계약에서 행동하는 편은 오직 여호와뿐이다.  또한 지상의 상대자는 받아들이는 자로서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완전히 무의식 상태에 빠지고 여호와 홀로 계약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여호와가 스스로 맺은 계약 중에는 다윗계약이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상하 23:5)로부터 약간 다를 맥락에 등장하는 아브넬의 말(상하 3:9)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시편의 여러 대목 (시 89:3, 28-29; 110:4)등 몇 가지 자료에서 증명되고 있다.

4) 약속계약
약속계약의 일차적인 의도는 두 당사자간에 새로운 관계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규정된 의무를 미래에 이행하겠다는 보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유형의 계약에는 일방의 당사자 밖에 없다.  이 약속계약은 맹세를 통하여 미래의 규약된 행동을 신의 처벌에 맡겨 이행하게 하려던 다른 유형과는 다르다.  약속의 맹세라고 이름지어 부르는 이 계약은 약속의 이행을 위해서 신의 처벌에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레미아 34:8이 좋은 실례인데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었으나 얼마 뒤에 포위가 일시 풀리자 그러한 맹세를 가볍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일반의 계약인 이 계약으로 당사자간에 새로운 관계가 창출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고찰로 볼 때 계약에 대한 요소들이 구약전체를 흐르나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끄시기 위하여 죽으실 수도 있을 것인가에 대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2. 하나님의 계약

(1) 하나님의 계약의 속성

정의: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1) 계약은 약정이다.
①    의 의미: 어원적 의미-·"먹다"의 뜻을 가진 동사 barah
                           ·히브리어 전치사    에 해당하는 아카디아어 "birit"
                           ·"속박하다"의 아카디아어 "baru"→(n)"biritu"(속박, 구속)
②계약: 사람들을 한데 묶는 것이다(약정). "약정" "관계"의 개념을 나타냄.
③계약에 있어서 서약의 다양한 형태: 구두서약(창21:23,24,26,31; 출6:8; 19:8; 24:3 etc). 구두서약에 상징적인 요소가 첨가됨-선물 증여(창21:28-32), 음식(창26:28-30,31; 출24:11), 기념비를 세움(창31:44이하; 수24:27), 피를 뿌림(출24:8), 제물 받침(시50:5),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함(겔20:37), 동물을 잘라 쪼갬(창15:10,18).
④계약에 대한 서약의 총괄적인 관계는 대응관계이다(신29:12; 왕하11:4; 대상16:16 etc).
⑤성경적 계약에 있어서 표적(sign)은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이 인간들을 한데 묶는다는 점을 강조함 ex)무지개, 할례-이런 표적들은 계약의 구속적인 특성을 강조함.

2) 계약은 피로 맺은 약정이다.
①        : "계약을 자른다". 행15:18; 21:27; 수9:6이하; 시50:5 etc.
  ·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계약(행21:27,32; 삼하3:12,13).
  ·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인간과의 계약(창15:18; 출24:8; 신5:2; 시89:3).
  · 인간에 의해 주도되는 하나님과 맺은 계약: 이 계약 관계는 계약 갱신의 문맥에서 이해됨(왕하11:17; 23:3).
②"절단"의 과정과 계약수립과의 연관은 중동이 고대 언어와 문화에 잘 나타나 있다. cf)창15장
  ·"계약을 자른다"는 성경적 구절은 계약을 수립하는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관계를 수립하는데 표현되는 숙어의 전체적인 개념은 삶과 죽음에의 서원(pledge)이다. 즉, 계약이란 "피로 세운 약정"또는 "삶과 죽음의 약정"인 것이다. cf)히9:22; 레17:11.
③"계약"과 "마지막 유언"의 차이  
  ·계약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은 약정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격: 성경의 하나님의 계약에는 흥정이나 교환 또는 교섭이 있을       수 없다. 천지의 절대적인 주가 계약의 말을 명령하는 것이다.
※특정한 계약의 내용이 어떻든간에, 계약이 이루어지는 형태는 마찬가지이다. 계약은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의 약정이다.

(2) 하나님의 계약의 범위

노아 이전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창6:18 이전에 "계약"이란 용어가 없음.
①"계약"이란 단어가 없이도 계약의 관계를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히 표현한 성경적인 전례가 있다(삼하7장; 대상17장).
②렘33:20,21,25,26; 호6:7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렘33:20. cf)창1:14.
  ·"해를 낮에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한 여호와가 말하노라..."렘 31:35. cf)왕상11:11; 왕하17:15; 창1:16.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6:7. 본문은 창조시에 세워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계약적인 술어를 적용하고 있다.
③창세기 처음 몇 장에 "계약"이란 용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약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노아 이전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ex)창2:15-17; cf)창3:15.
※창조부터 종말까지 계약적 결속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결정지어왔다. 하나님 계약의 범위는 세상시작부터 세상끝까지 이르게 된다.

(3) 하나님의 계약의 필요성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일련의 계약관계를 제시한다. 주요계약들을 보면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맺어진 것과 새 계약 등이 있다.
성경의 증거들은 계약의 통일된 성격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특정한 내용은 다를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일 뿐이다. 통일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구조, 주제).

(4) 하나님의 계약의 통일성
1) 하나님계약의 구조적 통일성.
가. 아브라함, 모세, 다윗계약의 통일성
  잇따른 계약은 먼저 세워진 계약관계에 기초를 두고 그 기본 중심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통일성은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 경험과 성경이 강조하는 연대기에 잘 나타난다.
역사 경험에서의 통일성: 각 계약의 배경 역사에서의 통일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
a. 계약수립의 내용이 통일성을 나타냄.
  ·잇따른 계약은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보다 높은 실현의 단계로 이끈다.ex)출2:24; 6:4-8
  ·아브라함의 언약에 주어진 약속이야말로 모세오경이 세워지는 역사적인 동기를 제공해 준다.
  ·다윗과 계약을 맺은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러내신"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삼7:6,23; 왕하2:3ff).
※이스라엘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을 때마다 하나님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특별히 연결되도록 인도하셨다.
b. 계약아래서의 삶과 역사는 통일성을 나타낸다.
  ·모세 계약이 성립된 후에도 아브라함 계약이 "묵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내산 이후의 역사는 아브라함과의 최초의 약속을 중심으로 계속된다(출32:13,14).
  ·여호수아의 정복(창15:18; 출23:31; 수1:3참조).
  ·모세 계약의 역사를 배경으로 아브라함 계약은 성취를 보게되며, 이후의 역사에서 다윗의 계약도 통일성을 보인다.
  ·다윗과 그의 아들들의 성공 사례와 비극은 모세 계약의 규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ⅰ)이스라엘 왕권이 예배와 통치의 중심지인 한 성역을 중심으로 발전한다.(모세율법, 모세계약에 근거함)
    ⅱ)예루살렘으로 법궤 이동시 다윗의 노래(대상16:15-18).
    ⅲ)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은 모세계약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왕하17:13ff).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역사는 그 계약들이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계약들은 서로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보충한다. 즉, 기본적인 통일성이 서로를 연합하는 것이다.

나. 혈통적인 사역에서의 통일성
  ·신명기5:2,3; 29:14ff
  ·영원한 계승: 신7:9; 출20:5-6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영(The Spirit)의 선물: 사59:21
  ·하나님 언약의 혈통적 차원의 두가지 원리
a. 접붙임의 원리: 아브라함 시대부터 이스라엘 태생이 아닌 사람들의 "접붙임"이 가능했다(창17:12,13). 신약에서 이방인의 "접붙임"을 이야기할 때 이 원칙을 주지할 수 있다(롬 11:17,19; 갈3:29).
b. 가지치기의 원리: 본래의 아브라함 후손이 이 특권의 자리에서 제거될 수도 있다(롬 9:6,13; 말1:2,3; 창25:23 참조).
※계약의 혈통적 원리로 계약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세대를 통한 이 이행은 각 계약들을 서로 연합하게 한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계약들은 실제적으로 한 계약의 잇따른 단계들이다.

② 새 계약을 연합시키는 통일성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 의해 약속된 새 계약은 하나님의 앞선 사역과 무관한, 구별된 언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새 언약은 먼저 수립된 계약의 완성을 나타낸다.
·새 계약을 모세계약과 연관시키는 예레미야의 예언(렘3:31ff). 다음 장에서 예레미야는 새 계약과 아브라함의 고대의 계약을 한데 묶는다(렘32:41 cf, 32:39,40).
·에스겔 또한 새 계약과 하나님의 이런 계약들을 연관시킨다(겔34:20,23-26).
·세개의 옛 언약들은 한 개의 하나님의 질서 속에 연합되어 있다. 즉, 새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이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것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대신 장차 성취되리라고 말하는 구약의 옛 언약과 합치하고 있다.
·새 계약이 공식적으로 수립된 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였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에 의해서 새 계약은 마침내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계약의 열매를 가져오게 되었다(cf. 눅22:20; 고전11:25; 히8:6-13; 10:15-18).
※결국, 아브라함, 모세, 다윗의 계약은 새 계약의 실재 안에서 성취를 보게 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③ 아담 그리고 노아의 계약까지 연장되는 통일성.
·노아와의 계약은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될 수 있도록 보존적인 구성을 제공한다(창8:22).
·아담의 타락 이후에 저주가 선포됨과 동시에 인간을 구원할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한 약속이 있다(cf, 롬16:20; 창3:15).
※창조자에 대한 피조물의 이 계속적 관계를 볼 때, 인간에 대한 최초의 하나님의 관계는 계속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창조로 세워진 계약관계는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전체 역사에 퍼져있다.

④ 결론
·성경 계약적인 구성의 놀라운 통일성.
·백성을 자신과 결속시키시는데 있어서 변함없으신 하나님.
·아담에서 그리스도까지 계약적 사역의 통일성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나타내준다.

2) 하나님의 계약의 주제적 통일성.
계약의 "임마누엘 원리":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 즉, 계약의 핵심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다.
① 이 주제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새 계약과의 관계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아브라함의 계약의 표적: 할례(창17:7).
·모세계약, 구원(출6:6,7; 19:4,5; 레11:45; 신4:20; 29:13).
·다윗의 계약(왕하11:17; 대하23:16).
·겔34:24
·새 계약(렘24:7; 31:33; 32:37), 슥2:11; 8:8,16
·신약(엡4:25; 고후6:16).
※계약의 공식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그리고 새 계약에 적용되며, 이 단독 주제의 통일적인 적용이 계약을 서로 연합하고 있다.
② 이 주제는 특히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거하신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전개된다.
·장막(출25:8; 29:42-45; 레26:9-13), 성전, 하나님의 나라, 성육화된 그리스도(요1:14), 그리스도의 교회, 성도(엡2:21ff)의 최후의 영광(계9:15; 21:3)
·신정(Theocracy)의 핵심은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원리이다.
※계약의 주제와 관련된 창조질서의 묘사는(계21:2) 임마누엘 원리가 성경 전체를 하나로 연합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계약의 핵심 속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거하는 긴 역사가 통일을 이루고 있다.
③ 이 주제는 한 사람에 의해 실현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주제는 완전한 성취를 보게 된다.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약들은 구체적인 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의 머리이며 계약의 실현자이다.
·사42:6; 49:8; 55:3,4.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이다. 이는 계약의 핵심이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은 계약의 통일성을 보증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다양한 계약 사역들의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계약의 다양성.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여러 가지 계약들은 서로 단조로운 반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가 진전됨에 따라서 계약 사역의 찬란한 다양성이 나타난다.

1) 창조 이전의 계약/창조 이후의 계약.
·하나님의 영원한 협의의 수수께끼를 계약적인 용어로 하는 것은 다소 인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규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 행위의 계약/은혜의 계약
·보통 "행위의 계약"이라는 말은 타락이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사용되었으며, "은혜의 계약"이라는 말은 타락 이후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용어들의 제한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전체는 은혜이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창조질서 안에서의 결속은 은혜로운 것이다.
·"은혜의 계약" 안에서도 "행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그러나 성격적 관점에서 보면 행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엡2:10).
※창조의 계약/구속의 계약

3) 옛 계약/새 계약
·옛 계약: 그리스도 이전의 하나님의 인간의 유대관계. "약속", "그림자", "예언"
·새 계약: 그리스도 이후의 유대관계. "성취". "실재", "실현"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바울의 궁극적 목적은 당시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새 계약의 은혜를 대조시키는 것이었다(2:14-16; 3:1; 4:31-5:2):
① 바울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역사와 새 시대를 대조하고 있다→유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옴으로써 이루어진 이 근본적인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다.
② 바울은 아브라함 세대와 모세의 시대를 대조시키고 있다→바울은 유대주의자의 율법주의와 대조해서 아브라함과 모세 계약의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다(cf, 갈3:17).
※옛 계약과 새 계약은 근본적인 조화 속에서 합쳐진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계약은 하나님의 은혜의 목적 안에서 연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유대주의자들의 메시지 사이에는 어떤 통합의 요소가 있을 수 없다.
※다양성은 시대를 일관하는 하나의 목적 속에서 궁극적으로 합치된다. 구속계약의 역사적인 여러 양상들은 그것들의 구체적인 강조점에 따라 분류될 수 있다.
    아담: 시작의 계약
    노아: 보존의 계약
    아브라함: 약속의 계약
    모세: 율법의 계약
    다윗: 왕국의 계약
    예수: 완성의 계약.

그림 삽입(계약신학


창조계약의 궁극적 목적은  구속의 계약에서 실현을 본다. 이 계약들은 시대 순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먼저의 것을 기반으로 확대되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약의 목적들이 달성된다.


3.  창조의 계약

(1) 창조의 계약: 일반적인 면

안식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기억되는 방식을 세우셨다는 것이며, 안식년, 희년, 70년 포로, 종말론적 기대 등은 안식원리와 연관되어 있다.

결혼-  결혼에 대한 창조 질서는 구원 목적에서 연속적인 의미를 가진다.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가장 중요한데 이는 구원 받은 사람에게 구속력을 가진다.

노동-  의미 있는 안식 개념은 노동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노동은 옛 계약의 법적인 면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필수적인 역할이다.

(2) 창조의 계약: 특수한 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구체적인 창조 계약은 인간을 시험하는데 초점이 있었으며, 이러한 인간 책임의 전체적 통일성을 인식함이 없으면 인간의 책임을 이중주의적으로 나누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즉 절대 복종이 창조의 계약 밑에서 축복 받는 열쇠가 되었으며, 절대 순종만이 절대 불순종의 죄를 지은 인간을 구원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단 이 처음 계약을 어기면 피로 대신하는 것 외에는 죽음의 저주로부터 피할 길이 없게 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창조의 궁극적인 저주를 스스로 지게 됨으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4.  구속의 계약

구속의 계약은 창조의 계약 아래 인간의 실패와 함께 곧 세워진다. 즉 창조계약에서의 저주 말씀은 동시에 구속의 계약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구속 계약의 충분한 의미가 명백해지고 있다.


(1) 아담: 시작의 계약

1) 사단에게 하신 말씀(창 3:14, 15)
심판의 저주는 사단에게 처음으로 내려지며 하나님에 의해 생긴 이 적대감은 세 가지 면에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은 사단과 여자가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한다. 또한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 관계가 놓여지며, 마지막으로  그 가 사단과 대립한다는 것이다. 사단의 후손을 정복함으로 구원이 성취된다는 이미지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은 항상 하나님의 적을 궤멸시키므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다.

2) 여자에게 하신 말씀(창 3:16)
여자에게 하신 말씀은 저주와 축복을 모두 포함한다. 아이를 낳음으로 구원계획 속에 포함되는 축복을 받지만, 고통 속에 그 아이를 낳으며 남편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저주와 남편은 이에 대해 지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3) 남자에게 하신 말씀(창 3:17~19)
남자에게 하신 말씀도 저주와 축복을 모두 포함한다. 축복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이 주어진다는 사실이고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에게 비를 내리시는 일관된 은혜를 통해 증명된다. 그러나 심한 노동을 통해 양식을 얻으며, 최종적으로 흙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는 저주를 맞게 된다. 아담의 노동은 온 땅을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되게 하는 책임과 창조시의 문화명령을 반영한다.

(2) 노아: 보존의 계약

노아의 계약에서 창조 계약이 갱신되고 있으며 동시에 구속의 계약이 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 계절의 질서에 대한 규정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 이해

노아 계약은 하나님의 계약의 특이성을 말하는데, 즉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 계획의 특이성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노아 계약은 하나님은 계약 관계에서 가족을 다루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한 개인의 의로움은 그의 후손까지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또한 노아 계약은 보존의 계약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은 종말의 때까지 지구를 현재의 세계 질서대로 보존할 것을 약속하신다. 종족 보존의 법은 여기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노아 계약은 명확히 보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즉 노아나 그 후손뿐만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무지개의 표적 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아 계약은 계약의 은혜로운 특징을 강조한다. 아름다운 무지개를 통해 명령의 불변성을 나타내시며 치우치지 않는 은혜의 목적을 표현하신다.


(3) 아브라함: 약속의 계약

1) 아브라함 계약의 공식적 수립
하나님은 계약적 유대를 공식적으로 세우시고 아브라함에게 확인시켜 주시는 과정에서 쪼개진 동물 사이를 지나시는 피의 약정을 세우시고 인간과 자신의 결속을 이루신다. 이제 계약의 쌍방은 계약 관계에서 자신들의 생과 사를 걸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2) 아브라함 계약 수립 예식에 대한 계속적인 언급
1400년이 지난 후 유다가 포로로 들어가기 전에 예레미야 34장에 있는 시드기야의 언약갱신에서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계약 수립 예식 형태가 나타나는데, 이는 아브라함의 계약 형태가 생명력이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모세 하에서 피뿌리는 의식이 쪼갠 조각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러한 형식의 공백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비록 모세의 예식에서 그 형태가 조금 바뀌었으나 아브라함의 약속 내용을 구체화시켰다.  

3) 신약성경에 나타난 아브라함 계약 수립 예식
히브리서 9장 15-20절에서 계약 수립과 관계된 피흘림의 과정이라는 의미가 나타나고 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의 성찬은 계약의 저주가 대속물 위에 얹어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몸이 찢기는 과정을 통해서 옛 계약의 저주를 지워버리는 동시에 새 계약의 축복된 상태로 인도하고 있다.

4) 아브라함 계약의 표적
1. 할례의 최초의 의미
할례는 계약적 유대의 실재에 대하여 영원한 증거를 제공하며, 어린 아이 때부터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강한 유대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할례는 신학적 의미에서 순결을 얻기 위해 더러움을 제거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 민족이 죄가 있음을 나타내고,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2. 구약 역사와 신학에 있어서의 할례
할례는 본질상 이스라엘과 그의 하나님 사이의 계약적 표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깨끗하게 하는 외부의 표적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생활에 필요한 내부의 정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3. 구약성경의 상징이 신약에서 성취됨
예수의 할례로 인한 깨끗케 됨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할 죄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옛 계약의 할례로서 아브라함과 연결된 사람들은 외부적인 할례를 경험하지 않았지만, 할례가 상징하는 핵심을 경험한 사람들과 함께 믿음으로써 그리스도에게 속함을 바울은 롬4장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11절에서 할례는 믿음으로 의를 인친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할례의 표적과 성령의 표적 사이의 상호 관계는 신구계약의 같은 정화예식이 서로 연결되는 기반을 제공한다. 즉, 바울은 할례와 세례를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묶으면서 새 계약의 세례는 옛 계약의 할례가 상징하는 모든 것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4) 모세: 율법의 계약

1) 현대성경 비판에서의 모세 계약의 위치
히타이트 조약의 고전 형태와 신명기의 전체 내용이 유사하다는 사실은 신명기가 모세 시대의 것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2) 모세계약의 신학적 의미
모세 계약은 분명히 법적인 관계보다는 계약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고통소리를 듣고 계약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계약은 항상 율법보다 우선하는 넓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모세 계약의 특징은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형식적으로 제정된 하나님 뜻의 최종 요약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목적에 대한 계시를 한걸음 진보 시키고 있다. 율법은 구속역사 전체에 걸쳐 존재했으며, 모세 아래서 단지 탁월하게 되었을 뿐이다. 십계명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구체화되고 성문화된 율법이 아브라함 하에서 구체화된 믿음의 원칙과 다른 생명의 길을 제공하는 것으로 오해 되었던 것이다. 바울 시대의 유대주의에 있어 비극적인 일은 바로 모새 율법의 일시적인 성격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항상 반영해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밖에 있는 비인격적인 법인 그 율법과는 관계가 없다. 대신 하나님의 성령이 끊임없이 신자의 마음속에서 율법을 돕고 있다. 그러나 새 계약의 내적인 실제가 모세 계약의 구체적인 핵심을 능가하고 있지만, 율법 계약의 주요 핵심은 오늘날 신자들의 생활 속에 생생하게 들어온다. 율법을 지키는 데서 축복상태가 나타나며,  그들의 행적을 따라 판단 받게 되는 것이다. 모세 계약은 백성을 국가화 하였고 하나님의 뜻이 포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무지 속에서 죄를 계속 짓기보다는 특별한 죄의 본성을 충분히 인식하는 것이 더 낫다. 이로써 겸손하게 하는 능력과 예표론적인 의미를 가진다. 새 계약에서의 법의 특징은 내부적 성격에 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저주하는 율법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력을 다하였으니, 모든 면에서 율법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의 뼈대가 되는 것은 계약인가, 세대인가?

1. 창조의 계약
계약신학은 창조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약적 관점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책임은 창조에 의해 세워진 책임의 넓은 영역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대주의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초 관계를 무죄세대라고 분석하고 있다.

2. 구속의 계약
아담(계시의 시작)-계약신학은 인간 타락 후의 역사 전체를 구속의 계약(또는 은혜의 계약)이라는 규정 아래서 통일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스코필드 성경은 인간타락 이후의 다음 시대를 양심의 세대로 특정 짓고 있다. 즉 이 세대 아래에서 인간은 선하다고 알려진 모든 것을 행하고 죄라는 것을 멀리하고 희생제를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아 홍수의 심판에서 끝났다고 선언하였다.

노아(보존의 계약)-계약신학은 창조 계약과 노아 계약과의 완전한 관계를 강조한다. 노아의 계약에서 하나님의 주된 약속으로 구원이 달성될 때 까지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 통치 세대로 인간의 옳게 다스림이 강조되고 통치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한다.
아브라함(약속의 계약)-구 스코필드 성경에서 약속의 세대는 전적으로 은혜롭고 무조건적으로 주어지지만, 팔레스틴 땅에 남는 것을 조건화하고 있는 모순을 가진다. 그러나 약속의 세대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성급하게 받아들였을 때 끝났으며, 시내산에서 그들은 은혜와 율법을 교환하였다라고 한다. 계약신학은 창조의 관점으로부터 구원을 보기 때문 때문에 결과적으로 영적 영역에서의 구원과 육적 영역에서의 구원 사이에 이중성이 존재하지 않지만, 세대주의는 육체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하는 하나님의 활동과 영적으로 신약시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이 있는 하나님의 활동을 떼어 놓기를 강조하는 실제로 형이상학적인 구분을 주장하고 있는 플라토니즘의 한 형태가 그 뿌리에 있는 것이다.
모세(율법의 계약)-계약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세 계약 하에서 그의 백성과 하나님과 관계는 구원 목적의 진보에 의미 있게 공헌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율법의 세대에서 율법은 전형적인 피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마련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고 제시된다.
다윗(왕국의 계약)-계약적 관점에서 보면, 구약에서 다윗 계약의 수립은 그리스도 자신이 실제로 나타나기 이전의 구속 역사에서 최고의 완성적인 면을 나타내었으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왕권을 전형적으로 예언하였다. 그러나 세대주의 신학에서 다윗 계통의 집권과 대응하는 왕국의 세대가 없다는 것은 과히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없기에 세대주의적 사고에는 메시야 왕국에 대한 구약의 해석과 구원의 진행과의 관계를 정확히 결정하기가 어렵다.
새 계약(완성의 계약)-계약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구속 역사의 큰 부분은 예언, 그림자로서의 옛 계약과 성취, 실체로서의 새 계약으로 나뉜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은 이 새 계약의 공식적 수립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주의에서는 은혜의 세대라고 하면서 이 시대가 구체적인 시작과 끝을 가진 형태로 독특하게 서있다. 즉 유대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시작해서 천년왕국의 수립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구원의 조건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 하느냐 인 것이며 구원의 열매는 선한 행적에 있다고 본다. 세대주의에 의하면 마지막 시대는 완전한 시대의 세대 혹은  왕국의 세대라고 나타나는데, 놀랍게도 세대주의는 영원한 상태의 세대를 갖고 있지 않으며 이 세상은 천년왕국과 함께 끝날 것이므로 다른 세대가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의 문제점은 성경해석에 대한 방법에서 하나님의 목적의 이중성, 즉 하나님은 지상의 육적인 목적과 하늘의 영적인 목적을 각각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대주의는 역사의 이중구조를 수반하는데, 시대를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함에 있어서 계약적 방법과 세대주의적 방법이 사용되며 이 두 가지 구조는 빈번하게 서로 대결한다. 마지막으로 다윗 속에 나타난 메시야에 관한 구약의 약속의 관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현재 통치를 제외시킴으로 현시대에 대한 신약의 분석과 불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의 뼈대는 계약인가? 아니면 세대인가? 구속역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성경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계약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대주의는 대신 성경질서에서 임의적인 과제를 나타낸다. 결국 성경을 구성하는 것은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5) 다윗: 왕국의 계약

1) 사무엘하 7장에 기초한 서론적인 논평
다윗 계약의 수립에서 압박하는 원수로부터의 안식의 상황은 종말론적인 평화의 왕국을 적절히 예견해준다. 다윗 계약의 핵심 속에는 임마누엘 원칙이 있는데, 이는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고 말하심 에서 보이고 있다. 그리고 거할 집으로서의 성전의 건축을 기초로 면밀한 상호교환의 왕으로서 그의 영원히 거할 집을 이스라엘에 유지시킬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 본문은 역시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련을 강조하는데, 다윗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 사이에 세워진 관계는 메시야가 올 때 완성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아들 직분의 최종 성취로서 다윗의 아들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2) 다윗 계약에 관계되는 독특한 질문들
솔로몬 나라를 빼앗는 하나님의 징계는 다윗과 예루살렘을 위하여 세운 계약적 약속을 끊지 않는데 사악한 왕들의 거듭된 출현으로 유다 전체의 운명은 다윗에게 한 약속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몹시 징계하면서도 다윗과 예루살렘과는 은혜롭게 관계하신다. 다윗의 계약에서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 죄인을 이끌어 그의 은혜로운 영역 속에 두려는 그의 의도에서 결코 방해 받지 않으신다. 다윗을 통해 메시야적인 왕의 혈통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방해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확실성은 계약의 규정들이 주는 책임으로부터 개개인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최종적으로는, 다윗 계약은 조건적으로 다윗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약 의무에 책임 있는 성취에 달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약속의 최종 성취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로 나타난다.

3) 다윗 계약의 역사적 연구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계약의 말씀은 구체적인 역사 사건을 통해 증명되는데,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라고 하는 특수 문구가 열왕기서에 퍼져있으며 심지어 여호와의 말씀 하심과 같이 바벨론 왕은 여호와의 집에서 모든 보화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조의 전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의 엄숙한 증명으로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다윗의 마지막 혈통이 옥에서 괴로워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의 계약의 자비를 잊지 않으신다.


(6) 그리스도: 완성의 계약

1) 예언에 대한 광범위한 배경
새 계약의 개념들은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나타난 일단의 예언들 안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발전되는데, 몇 가지의 주요 주제들은 추방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과 약속의 땅에서의 하나님 축복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전 계약 약속의 성취를 새 언약을 통해서 강조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령 역사에 의한 내적인 소생이 일어나 마음 속으로부터 변형하는 독특한 양상과 모든 죄에 대하여 완전한 용서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과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의 병합으로 새 계명들이 증명될 것이다. 즉 백성이 하나님과 묶여지는 것처럼 그들도 불가불 묶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두 막대기의 재통합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영원한 성격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2) 예례미야서 31장의 구체적 배경
이 부분은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대찬송으로 불리며 희망에 대한 성경의 예언에서 고조된 무늬들 중의 하나를 나타내고 있다. 유다의 피할 수 없는 포로생활이 주는 멸망의 고통을 뛰어넘어 백성에게 희망을 주는 말을 했으리라 상상할 수고 있을 것이다.

3) 해석적 관찰
예레미야서의 새 계약 예언에 대한 해석에는 몇 가지 긴장이 특징을 이룬다.

새 계약에서의 연속성 대 새로움  돌 판에 새긴 옛 계약 대 마음에 새긴 새 계약, 그러나 새기는 내용은 근본적으로 같은 하나님의 율법일 것이다. 그리고 죄 용서의 주제는 새 계약에서 기대되는 죄 용서의 새로운 면이 그 죄의 용서가 영원히 이루어진다는 것과 옛 계약하에서의 죄 용서에 대한 끊임없는 예표론적인 표현에서 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새 계약에서의 협동성 대 독자성  계약의 약속은 백성의 공동체를 말하며 그것은 참가자 자신뿐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포함한다. 혈통적 원칙은 성경적 협동성의 중요한 면이며, 그것은 독자성에 대하여 보조적 현상으로 작용한다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어느 하나가 배제될 때 계약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는데, 협동성만 주장하면 억측이 생기고, 독자성만 주장하면 분리주의가 생기는 것이다. 협동성과 독자성은 서로 배타적인 원칙들이 아닌 것이다.

새 계약에서의 내부적 실재 대 외부적 요소  새 계약 관계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내부 변화의 직접성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체감을 통함으로 여기에 외부적인 중재자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즉 백성들과 하나님 자신과의 실재적 일체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어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의 경험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외부적 요소 또한 강조를 받는데, 새 계약의 축복에서 순수한 영적 해석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물질적 축복의 요소가 예언자들의 말에 많이 포함되며, 땅으로의 이스라엘 복귀, 황폐된 성의 재건설, 나라의 재 건립, 죽은 자의 부활까지도 새 계약의 예언적 형식에서 중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새 계약의 참가자들 역시 육체의 부활과 전 지구의 회복 때의 그 완성적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5. 세대주의와  계약신학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위대함을 입증할 때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성경은 약 40여 명의 각각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약 1600년의 기간동안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66권의 모든 성경이 한 주제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의 영감성을 믿는 사람들이나, 성경을 연구하는 성경학도는 모두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관된 주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두 개의 커다란 상반된 주장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의 주제가 구속이냐, 아니면 왕국이냐 하는 문제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신학체계가 계약신학(契約神學)이나 세대주의로 구분되는 주된 논점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신학체계 모두를 "보수주의"라는 틀 안에서 받아들이고 상호보완하며 발전된 신학을 향해 나아가자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 다른 이 주장들은 결코 서로 일치할 수 없으며, 나머지 하나가 맞다면 분명히 둘 중의 하나는 틀린 이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하는 가운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여 틀린 이론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계시된 진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온전하신 뜻을 행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어야 한다.(딤후 2:15)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의 주제는 왕국(kingdom)이다. 이 왕국은 하나님께서 태초 이래로 꾸준하게 관심을 갖고 계시던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왕국을 이룩하시고자 일하셨고, 사탄의 끊임없는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그 계획하신 왕국을 이룩하실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역사하시어 각 시대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도 하시고 벌하기도 하시며 하나님의 섭리적 계획을 나타내신다. 이것이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이 왕국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통치의 왕국"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구약에서 지속적으로 예언된 왕국이며, 이 왕국은 마태복음에서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제시되었고, 그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된 것이다.


1. 성경의 주제를 구속으로 보면...

계약신학자들이 성경의 주제를 "구속"으로 볼 때, 성경 전체에 대해 갖는 관점은 "창조-타락-구속"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모든 만물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타락으로 모든 것이 망가졌고. 이 타락의 모습은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으며,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분을 통해 만물을 구속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이 성경의 핵심이 된다면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이 구원 계획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예표"였을 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들의 역사관은 "창조-타락-구속"이며, "구속"은 완성이기 때문에 그 이후에 더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두 개, 곧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나누는데, 타락 이후에 주어진 은혜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계약이다. 그 언약은 창세기 3장에서 "그녀의 씨"를 언급한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후에 주어진 모든 언약과 모든 사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위한 언약과 예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구속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인간뿐 아니라 모든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약신학자들이 그 구속을 "십자가"에서 이루신 인간 구속을 중심으로만 생각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의 모든 부분을 십자가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또한 크게 부상하게 된다. 그 분의 구속받은 성도인 교회는 예수님과 더불어 성경의 큰 주제가 되어 성경의 모든 부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들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성도들이 이미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에 만물은 바로 그 성도들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는 후천년주의적 사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이 구속 받았으므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형대로의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 된다. 재림이라는 것은 "구속"을 위한 또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으며, 모든 문제의 해답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그 말씀 안에서 발견된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위한 예표일 뿐이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약속과 축복은 교회를 통해 성취되므로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구속"이라는 성경의 전체 주제 속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모든 시대에 걸쳐 구원받는 방법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갖는 교회시대의 구원관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행 15:11) 여기에는 어떠한 행위도 필요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엡 2:8) 성도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정결케 되어 구원받으며, 한 번 구원받은 상도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이것은 신약시대의 올바른 구원교리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구원방법을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적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많은 사건은 이 십자가의 "모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형"이 그들을 "구원해" 준 것은 아니다. 구약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 "모형"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받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는 "여자의 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받았다. 그 씨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씨가 어떻게 그들을 구원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언약"만 받았을 뿐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알지 못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받고 방주를 지어 구원받았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히 11:7), 그가 가진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구원 받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을 두려움으로 믿고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구원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도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원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고향으로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복을 받았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것은 더욱 분명하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제사법이나 신명기의 여러 규율들에서 십자가의 은혜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모세도, 그 이후의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 있었고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만 했다. 율법을 모두 지키지 못하여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들은 속죄하는 짐승의 피로 자신들의 죄를 용서 받아야 했다. 이 짐승의 피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했을지라도 그것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아니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았고 율법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는 것은 오직 교회시대에 한정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고, 또 몸이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 속에서 움직인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하지만 교회시대는 곧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다른 경륜으로 다른 세대들을 경영하실 것이며, 그에 따라 구원받는 방법 역시 달라진다. 앞으로 있을 환란시대에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며(계 12:7), 천년왕국시대에는 구약의 율법보다 더 엄격한 왕국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마 5:20)


6. 성경의 주제를 왕국으로 보면...

구약의 많은 부분들은 그리스도와 그 분의 교회에 해당하는 모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은 대환란을 직간접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적그리스도를 말하기도 하며, 어떤 부분은 신약성도가 아니라 환란성도를 예표하며, 어떤 부분은 천년왕국을 에표한다. 오히려 십자가보다는 재림과 영광이 더욱 두드러지며, 교회라는 유기체보다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부각된다. 오히려 교회는 성경전체의 맥락으로 볼 때 일부분일 뿐이다.

(1) 고대 근동 지역에 있었던 왕권 사상

1)고대 애굽의 왕권 사상
애굽의 초기 부터 바로는 단순한 왕 이상으로 신같은 존재가 아니라 바로 신으로 이해되었다.  곧 호루스(Horus)신, 셑(Seth)신, 오시리스(Osiris)신들이 지상에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왕은 Horus가 성육신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애굽의 모든 왕은 Horus이다.  왕은 출생때부터 신으로 태어나고 또 출생이전에 벌써 선재해 있었던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왕이 위(位)에 오르는 대관식은 신에 의하여 거행된다고 보았다.
또 애굽 사람들은 신 레(Re) 숭배의 발달로 왕을 태양신 레(Re)가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신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Horus 신은 Osiris 신의 아들이며 계승자이다.  즉 살아있는 왕은 모두가 Horus 신이고 죽은 왕은 모두가 Osiris신이다.  이와같은 생각으로는 단순히 정의를 보장하는 임무를 감당할 뿐 아니라 자기 나라의 법을 제정하는 절대권을 가지고 계율(戒律)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다.  왕의 건강과 안녕은 곧 백성과 국가의 부와 안녕이다.  또 바로는 Osiris신 처럼 생명을 부여하는 자요 번영을 지키는 자요 흡족한 복을 부여하는 자였다.  같은 국가에만 영향을 미칠뿐만 아니라 그의 왕권은 농작물의 풍작과도 밀접히 관계된 것이다.  그는 행복과 풍작을 들여오는 기관이다.  애굽의 월력 6째달에 승리의 축제가 열린다.  이 드라마의 목적은 Horus가 그의 적을 물리친 승리 전 애굽의 왕으로서 즉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극적 의식을 통하여 신의 죽음과 부활이 수행되고 거룩한 결혼(Sacred Marriage) 이 행해진다.  이 거룩한 결혼은 풍작을 위한 종교 의식의 일부로 행해진다.
종교적으로 제사의식에서는 왕이 또한 대제사장과 같이 행사한다.  일반적으로 제사의식에서 왕은 제사장의 일을 대행해야 하므로 때로는 제사장으로 대치되기도 하지만 제사장은 원칙적으로 왕과 동일하다고 보았다.  보통 왕은 종교의식에서 인간 앞에서 신을 대표하고 동시에 신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지만 애굽에서는 전자에 강조가 있다.  그는 유일자이며 통치자로서 제사장 왕이다.  그는 그들 선조의 본질이며 선조의 영으로 충만한 자이다.  그 영으로 왕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행하고 일반적으로 성전 건축자로서 또한 성전 건축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Osiris신에 대한 예배나 기념식에서 왕 자신과 그의 일가들은 주역을 맡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다.  따라서 애굽의 왕 개념은 신-왕(God-King)이며 제사장-왕(Priest-King)이었다.
애굽의 바로를 지상의 신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왕에 대한 관념 때문에 이와같이 표현을 한 것으로 본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든 질서와 진리의 주인공이다.  이 사실은 그가 모든 외부적인 대적들을 정복하는 승리의 용사임을 암시한다.  또 왕은 대대적으로 국가의 완전한 통치자요 무엇보다도 넓은 의미로는 정의의 집행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에서 그는 자기 나라를 위하여 선한 목자요 요새가 되고 과부나 고아에게는 아버지가 되며 집없는 자에게는 피난처가 된다.  그러므로 그 왕의 주요 의무는 지상적 행정만을 맡은 왕이 아니라 법을 맡은 왕이요 하늘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2)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권사상
원시 유목민들이 살던 시대에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제국들이 생각한 왕의 개념도 신적인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원시 유목민들은 흔히 그들의 왕을 타인에 의하여 탁월성이 있다고 인정하였으나 역시 하나의 인간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고대 바벨론 제국과 앗수르 제국에 있었던 왕권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한다.

a.바벨론 제국의 왕권사상
유목민의 왕은 신의 대변자로서 백성을 통치한다는 이상이 있었으나 고대 바벨론 제국의 국민들은 왕들에게 흔히 '신'이라는 칭호를 붙여 사용했다.  그러나 바벨론의 왕은 신의 통치를 지탱하기 위하여 선택된 신의 종이었다. 그래서 바벨론의 왕은 신과의 관계를 신의 아들의 자격으로 이해한다.  그 아들의 자격은 본성에 있어서가 아니고 양자로 취급되는 한계에 있다.  또한 그 신의 선택이 왕으로 하여금 신적인 초인적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기 보다 기능적인 의미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개념으로 미루어서 본래 바벨론의 왕은 애굽의 왕처럼 결코 예배의 대상이 아니었다고 본다.
바벨론 왕의 임무는 한마디로 말해서 신과 백성간의 중개역할을 담당한 것이므로 왕의 주요기능 중의 하나는 신에게 대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식에 동참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특히 신년 축제에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곧 창조신화를 재연하는 예식의 연극에서 왕은 연중의 우주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 신들을 도와주는 일을 담당한다.
즉 왕의 임무는 신들에게 예배하고 신의 뜻을 지상에 전달하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왕은 신들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비록 직업적인 제사장들이 있다 할지라도 왕도 역시 원칙적으로 제사장이었다.  그리하여 사원에서 꿈으로 신탁을 받으며 또한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의식을 집행해야 했다.  이상과 같이 바벨론의 왕권은 애굽의 그것과 같이 신적 존재의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라 휼륭한 제사장의 기능을 가진 것이다.  이 기능을 가지고 신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 그 왕은 백성들에게 자연의 축복과 좋은 수확과 풍요와 평화를 안겨줄 수 있다.  그가 신은 아니나 신과 같은 존재요 시적 표현으로 말하면 '태양' 이라고 일컬을 수 있고 '생명나무' 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바벨론은 기능적인 의미만을 지녔을 뿐이며 왕 자신이 복을 창조해 내지는 못하나 신들에게 복을 요청하는 기도를 할 자격을 가진 자이다.

b.앗수르 제국의 왕권사상
앗수르의 왕권은 메소포타미아의 일반적인 경향을 따라 바벨론의 왕권과 대동소이 하다.  앗수르에 있어서 왕은 니누르타(Niurta)신을 상징한다.  니누르타는 마르둑의 아들 나부(Nabu)가 차지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왕이 니누르타 즉 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왕은 제사의식에서 가시적 신의 대변자요 옹호자로써 인간들 앞에서 신을 상징하는 자이다.  앗수르의 왕은 때로 주신(主神) 아슈르(Ashur)자신이나 전차를 타고 있는 야슈르의 아들 니누르타를 상징한다.  말하자면 왕은 전쟁에서 신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이라 할수 있다.
그리고 왕은 역시 혼돈과 파멸의 세력을 대항하여 싸우는 신들의 전쟁에서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와같이 앗수르의 왕은 역시 신의 위치에 처하여 있으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왕은 나의 생명이요, 왕은 나의 신이라고 불리어 진다.  또한 백성들은 신을 두고 맹세하기도 하고 왕을 두고 맹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왕이 죽은 후에는 숭배의 대상으로 신격화 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만한다.  이러한 사건은 죽은 선조나 추장이 권력과 축복의 원천이 된다는 원시적 관념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동방종교의 예배의식에서 왕의 신성과 신의 대리자로써의 왕의 의식에 대한 일반적인 가정에 대하여 최근의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왕이 고난을 받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신과 동등한 존재로서의 왕이 성격상 그리고 왕의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본래 타고난 특성이다.  그리고 이 고난의 모습을 왕 관념(Royal ideology)에 있어서 불변의 요소' 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왕이 신과 절대적으로 동일하다는 이론적 전제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c.헽(Hittite)제국의 왕권사상
헽제국(Hittite Empire)은 1,600년경(B.C) 소아시아를 통일하고 1,500년(B.C) 에 바벨론 성을 함락시켰으나 내란으로 인해 국세가 약화되어 약 150년간 소아시아 지방에 국한하여 국세를 유지하여 왔다.  문화와 종교는 근방제국의 여러가지 다른 요소들을 받아드렸으므로 왕권에 대한 이상도 다양성을 지니고 있음이 당연하다.
헽제국의 왕은 전쟁에서는 유능한 지휘관이요 최고 재판장 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의식의 대제사장도 된다.  그래서 왕위와 제사장직의 임무가 분리되지 않고 겸직되는 형편이었다.  헽제국의 왕도 역시 신에 의해 초인적 재능으로 무장한 영웅이었다.  이 왕국이 점차 확장됨에 따라 판도를 넓혔고 이에 따라 고대 근동제국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으므로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호리 족속 (Hurrian)과 소아시아 지방의 앗수르 문화에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과의 정치적 교섭을 가졌으므로 애굽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헽 왕은 '나의 태양'이라는 공식적 칭호를 가졌다.   한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처럼 폭풍우와 전쟁의 신인 테슈브(Teshub)의 아들이라 칭했다.  또한 왕의 모친은 신의 어머니라 칭했다.    왕이 죽은 후에는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신이 된다고 하여 왕의 죽음을 단적으로 표현하였다.  이 사실은 아마도 애굽왕에 대한 관념과 고대 조상숭배 사상이 결합된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영향들이 애굽왕의 관념보다 오히려 개별적으로 영향을 받아 빌려온 요소임을 밝혀둔다.  그러나 헽왕 역시 신의 재능과 자격을 부여받은 초인이요 신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헽 족속은 살아 있는 왕을 신으로 모시거나 예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왕의 신성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애굽과 고대 근동지역의 왕권개념의 차이가 있으나 동시에 일반적인 공통점이 있다.  즉 왕은 신으로 경배되지 아니했다는 사실이다.  즉 왕은 신의 소명으로 초인적인 능력과 성격을 가진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들과 같은 정도에 까지 높여진다.  그는 다분히 신성을 부여하여 금기적(Taboo) 존재이다.  그는 신을 대표한다.  그러나 신에 대한 백성의 대표적인 성격이 짙다.  근동에 공통된 왕 개념은 성스러운 성격을 가지며 백성의 제사장으로 이해된다.  더욱이 왕은 군사, 정치 및 제사적인 면에 있어서 책임적인 위치를 가진다.  이러한 왕의 지위는 그들이 섬기는 신 개념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권위는 해마다 신년제 (New Year Festival)에서 거행되는 종교의식에서 되풀이 되어 강화되며 인정되었다.  이처럼 근동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왕권 개념은 왕권의 신성을 믿는 신앙이 있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2) 이스라엘의 왕권사상

1) 야웨의 왕권사상
이미 살펴본 것 처럼 고대근동의 모든 종교에 있어 신의 왕권사상은 공통적인 관념이었는데 이러한 신화적 표현들은 지상의 왕에게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구약성서는 이러한 고대근동의 왕권사상을 채용함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특히 야훼의 왕권에 대한 연구는 근래에 들어와서 신의 왕권(Divine Kingship)문제로서 구약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부버(M. Buber)는 이스라엘의 야웨 하나님을 왕이란 칭호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야웨의 왕권개념의 기원이 이스라엘에 있다는 견해를 개진하였다.  그러나 베커는 (J. Becker)는 사회적 측면에서 그의 견해를 비판하였는 바 이스라엘 사회구조가 원래 사막 문화권의 반 유목민족인 부족체제였기 때문에 농경 문화권의 정착된 도시문명 즉 모든 사회기구와 왕권까지도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표현하게 된 것은 왕국시대부터 였음을 전제로 할때 왕 개념은 다분히 이교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이스라엘 내에서의 신의 왕권개념은 이스라엘 자체의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부터 채용된 것이라 하겠다.
한편 노트는 왕정이전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신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에 정착 후 가나안 문화를 이어받아 왕권 개념을 채택하게 되었다고 보았으며 알트(Alt)역시 야웨 왕권의 기원 문제에 있어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이방신전 사상에 접하게 되면서 야웨의 통치권이 신적 존재-야웨와 비교됨으로서 천사적인 존재로 격하된-의 영역에 까지 미침을 주장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신의 왕권 사상은 고대 근동 여러나라의 사상과 비교해 볼때 유사점과 상이한 특징이 있는 바 전자는 야웨가 이스라엘의 주인이요 이스라엘을 돕고 구원하며 정의와 행복을 가져오는 능력을 가졌다는 신앙고백으로서 이스라엘 왕국은 곧 야웨의 왕국이라는 사상이다.  그러나 후자는 고대 근동의 신관이 다신교적인 내용을 가진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왕은 철저하게 유일신 야웨와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2) 인간의 왕권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기인하는 주권 개념이 없었으며 이스라엘 역사가들은 정치이념에서 보다 야웨가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신앙적 관점에서 왕이 가진 주권의 출처 기원을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께 두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왕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양자 관계로 표현되고 있는데 고대 근동의 예들과의 비교는 이스라엘 왕의 양자됨의 의미를 잘 드러내 주게 된다.

a.양자관계
고대 근동에서는 임금들을 신의 아들로 존경하였는데 그것은 항상 군주의 인격이 신화(神化)되었다는 신화적 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바 있는 근동의 왕권개념에 비추어 요약해 보면 에집트의 파라오는 신의 피를 받은 신의 소생으로서 혈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는 곧 신이었다.  그러나 바벨론에 있어서 왕은 신이 아니라 신의 아들로 인정되는 양자삼기(Adoption)의 의미로 이해되었다.  즉 왕은 인간 중에서 최고의 존재로서 백성들의 신과 가장 가까우며 신이 가진 능력과 신성함을 받은 자였다.  따라서 왕을 신적 존재라 할수 있지만 신이라고 부르기를 꺼리며 단지 신의 대리인으로 (Divine Agent)로 생각했다.
구약성서는 이러한 고대근동의 신화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왕 역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서 동일한 신법에 종속되어 있고 같은 법률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했다.  따라서 왕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아들로 인정받는 것이며 이 인정은 전적으로 신의 의사에 달려 있는 바 하나님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왕을 양자로 삼는다.
이스라엘에 있어 이러한 양자관계는 다윗시대에 처음 나타나는데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시 89:27-28)라는 언급을 통해 야웨와 왕사이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서 규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구체적으로 다윗과 그 후손들이 선택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백성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왕은 하나의 대표자나 중개자 일뿐 아니라 실제로 그의 인격안에 이스라엘 전체성을 통합하고 있으며 야웨는 그 왕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b.왕의 역할
이처럼 왕은 야웨와의 양자관계에 의해 그 존재에 있어 특수성이 확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왕에게 고유한 여러 특권들과 역할들이주어지게 되었다.
     ① 왕은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의 중개자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야웨의 뜻이 이스라엘에 전달되도록 하는 신적 신탁의 수령인 이었으며 백성들의 요구와 호소를 야웨께 전달하였다.
     ② 왕은 신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특권을 가졌다.
그는 양자관계에 의해 상속자가 되며 야웨는 그에게 백성들을 맡겨 소유를 삼게 한다.  나아가 그는 열방을 유업으로 받는 통치의 특권과 그의 소유를 땅 끝까지 이르게 한다는 소유의 특권을 받는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어떤 지도자들에게도 이렇게 크고 광범위한 특권이 주어진 적이 없었으며 다만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만이 가지는 특권이었다.
     ③ 외부를 향한 왕의 직책은 전쟁을 지휘하는 것이다.
왕은 외부의 적들에 대한 승리를 통해 백성의 번영을 확보해야 하는데(시 20:21)그는 백성의 적들과 싸우며 야웨 자신이 그로 하여금 이것을 위해 나서게 한다.(시 18:40)
     ④ 왕은 내부를 향해 법과 정의의 수호자로서 보장자로서 활동한다.  이를 위한 전제는 야웨에 대한 그 자신의 자세이다.  왕은 자신이 야웨의 뜻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음을 안다.  그는 의로운 자  (         ) 로서 야웨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고 (삼하 23:3-5;시 101:2-4;18:23) 이에 따라 정의로 백성을 다스릴 의무를 지고 있다(시 45:4-8;72:1-7,12-24). 그러므로 왕의 현세적 임무는 계약과 율법의 기본적인 목표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의 왕권과 야웨의 관계는 양자 결연에 의해 맺어졌으며 또한 신의 왕권에 철저히 복종했고 왕의 신권을 철저히 거부한 것이 이스라엘 왕권사상의 특징이라 하겠다.

3) 다윗에게 나타난 이상적 왕권
이스라엘 왕국의 이상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속에 깃들여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상적 왕국을 세우기 위하여 맺은 이 영원한 계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조로 되어 있다.  일찌기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이 계약의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합법적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이 계약은 본 논문의 주제 본문인 사무엘하 7장에서 나타나는 바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만드셨고
둘째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세째   다윗의 왕권으로 말미암아 평안을 주고
네째   다윗의 가문을 축복하여 다윗의 집을 세우고 대대로 왕이 나서 나라를 다스리게 할 것이며
다섯째  야웨는 아버지가 되고 다윗은 야웨의 아들로서 양자관계를 맺게 되며
여섯째  다윗의 집과 나라는 영원히 보전될 것이다.
이러한 계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왕권에 의한 이상형을 묘사하고 있다.  다윗과 그의 후손을 통하여 나타난 이스라엘의 왕도는 역사적 성격의 왕권을 명백히 하고 있고 하나님이 택하시고 기름 부으신 왕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왕권을 역사적으로 구현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에 대한 사상은 다윗의 영원한 왕국의 허락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은 다윗 왕조가 망한 후인 바벨론 포로 기간에도 사라지지 않고 이스라엘의 종말론으로 계승되고 위대한 다윗의 후손인 메시야의 출현을 기다리게 되었다.

(3) 메시야 왕권

1) 왕의 칭호로서의 메시야
메시야(Messiah)란 말은 히브리어로          인데 그 뜻은 기름부음 받은자 (The anointed)란 뜻이다.  이 어근은 셈족어로       로 원래는 칠을 입힌다.  또는 기름으로 단장 한다란 뜻이다.  곧 "기름부음 받은자"란 표현만이 마지막 때의 인물인 왕을 지칭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메시야 칭호가 등장하고 있지 않거나 다른 이름으로 대치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메시야 기대사상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에서는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을 야웨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불렀다.
구약에 39번 나오는 이 용어는 대부분의 경우 당시 통치하던 유다나 이스라엘의 왕을 우선적으로 지칭하는 것이었다(29회) 또  페르시아의 고레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사 45:1) 포로후기 문헌에서는 가끔 왕의 기능을 일부 담당했던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 (단 9:25-26) 마지막으로 선지자로 이해되었던 족장들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시 105:15;대상 16:22) 특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자의 형태는 그 상황에 따라서 여러가지 다른 표현을 하고 있다.  즉 나의기름 부음 받은자라고 했고 또한 당신의 기름 부음 받은자 라는 표현으로 다윗과 솔로몬을 지적하기도 했다.  또 다른 곳에는 그의 기름 부음 받은자 라는 말로 사무엘이 사울과 다윗과 다윗의 후손에 대해서 지적한 곳이 있다.  그리고 한번은 야곱의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표현으로 다윗을 지적했다(삼하 23:1).
왕에게 베푸는 기름부음 의식은 매우 중요한 뜻을 가진다.  아마르나 문서 (Amarna Letter)가운데 한편을 보면 주전 14세기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왕에게 기름 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른바 요담의 우화에도 왕들의 기름부음이 언급되고 있다 (삿 9:15). 왕에게 기름부음은 단순히 대관식의 일부에 그치지 않고 왕의 권세를 행사하는 권력 이양의 표상이었으므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름부음을 받음으로써 그 왕은 사무엘상 9:16이 밝혀주듯 하나님의 신정적 신하가 되었다.  사울(삼상 10:1), 다윗(삼상 16:3), 솔로몬 (왕상 1:39), 예후(왕하 9:6) 그리고 유다의 요아스(왕하 11:12)의 기름부음은 아주 상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반면 압살롬(삼하 19:10)의 기름부음은 여호아하스의 경우(왕하 23:30)처럼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왕에게 기름 붓는 것은 원래 선지자가 집행했다.  선지자 나단 역시 솔로몬의 기름부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1:45) 그 뒤에 와서 왕에게 기름붓는 권리는 전적으로 제사장들의 특권이 된 것이 분명하다.(왕상 1:39; 왕하 11:12)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또는 선지자가 집권하는 신정적 의미의 왕에게 기름붓는 것 외에도 민주적인 기름부음이 행해졌으며 이때 백성들이 그들의 대표인 장로들을 통해서 왕에게 기름부었다고 어떤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유랑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선출된 특정 개인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기름부음으로 족장에 임명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슬람교 이전의 아랍유목민들이 행하던 것과 꼭 같은 의식이라고 한다.  또한 이스라엘 왕의 기름부음 역시 초기 왕국 시대에는 그와 비슷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서에는 이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다.
기름부음의 신정적인 성격은 왕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자(삼상 24:6 ; 26:16)였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신하였다는 사실에도 그 예증을 찾을수 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자 라는 호칭은 뒷날 기름부음 받은자 로 축소되어 히브리어와 아람어로는 메시야로 표기되고 헬라어로는 그리스도(Christ)로 옮겨졌다.  예수 역시 성령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였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 중에는 주로 왕을 가리켜서 기름부음을 받은자라고 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야웨와 왕 사이의 긴밀한 관련성을 지적해 준다.  이스라엘의 신앙속에는 야웨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호칭하기가 일쑤였으나 이와 구별하여 세상 나라와 그 백성들을 다스리도록 통치권을 부여받은 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2) 다윗의 왕권과 메시야의 관계
메시야라는 낱말은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자 라는 표현에 대한 약칭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사실은 종말론적 의미로 쓰이는 메시야란 이름이 고대 이스라엘 왕들의 성별된 칭호에서 이끌어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메시야 사상은 역사적 다윗왕조에 나타나 있다.  즉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다윗의 집에 나타나리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윗을 통하여 나타난 이스라엘 왕권 사상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준 약속은 다윗왕을 모든 왕의 표준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그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미래 왕국의 성격과 운명을 밝히 말씀하신 것이다.  구약 예언자들과 시인들은 이 역사적 너머에 나타날 미래의 왕국이 첫째 정치적 카테고리를 벗어난 형태의 왕국일 것이며, 둘째 이 왕국은 다윗왕과 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한 메시야로 말미암아 임할 것을 말했고, 세째 그 왕은 반드시 다윗왕의 후손에서 나타날 것을 예언했고 또 그 확신을 전했다.  구약에 나타날 메시야 예언은 장차 오실 한 분에 대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왕국 그 자체보다 그 왕국을 다스릴 왕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가진 것을 본다.  이것은 다윗을 통하여 나타나 여기서는 왕으로써의 메시야를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메시야 왕은 다윗의 집안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하여 메시야의 역사적 존재가 다윗 집안과 관계되었음을 밝힌다.  또 9장에는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리라"(7절)했다.  예레미야서에도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23:5)했다.  그리고 제왕시인 89편(4,20,35절), 132편에도(1,1,11절)다윗의 집안에 약속된 메시야를 말하고 있다.
둘째  이 메시야의 직분이 왕으로 임할 것임을 밝혔다.  이사야 9장에는 "평강의 왕이라"했으며(6절), 예레미야 23장에도 "그가 왕이 되어 지헤롭게 행사하며"라고 했으며(5절), 제왕시 중에서 특히 제2편, 72편, 89편, 132편 등은 왕의 위신과 왕의 권위를 행사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왕위의 영원성과 견고성에 대하여 시편 89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그 위는 해같이 내앞에 항상 있으며 또 궁창에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케 되리라."(36-37절).
세째  이 메시야 왕이 행사하는 정치는 공평과 정의임을 보여준다.  이사야 9장에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보전할 것이라" 했고(7절) 11장에는 "공의롤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라고 했다(5절) 예레미야 23장에는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5절)라고 했으며 또한 제왕시 중에서 특히 72편은 이 공평과 정의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라는 첫 기도에서 왕이 공평과 의를 소유할 것을 말하며 그 공평과 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가난한자와 궁핍한 자를 긍훌히 여기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라고 했다.(1,2,3,13,14절)이런 공의를 행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열방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 찬송하고 있다.(17절)
네째  메시야 왕은 구원을 행하시는 분이다.  예레미야 23장에는 "그의 나라에 유다는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16절)라고 했다.  이 구원의 행사는 제왕시에 더 확실히 나타나 있다.  18편이 그 대표적이다.  "야웨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부음 받은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영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50절) 이 구원의 사상이 이사야 40-55장에는 더 강조되어 고난의 종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예언했다.
다윗에게 보여주신 이상적인 왕권은 현실 왕들에게는 성취될 수 없음을 알게된 예언자들은 미래에서 그 이상적인 왕을 모색하고 대망하고 있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왕국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그 곳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서 아름다웠다. 그러나 사탄의 타락으로 피조세계는 흔들렸으며, 그 때부터 사탄은 하나님과 분리된 또 하나의 세력을 갖기 시작했고, 하나님과 사탄의 길고 긴 전쟁이 시작된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이 전쟁은 사실 전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사탄이 방해하다가 마지막에 멸망당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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