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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국열쇠 독후감1, 2

하나님아들 2012. 7. 25. 14:49

- 인생의 성공과 실패 참의미


의사이자 문학가인 A J 크로닌의 대표작으로 ‘고전’의 반열에 올라있는 책. 인생의 성공이나 행복은 지금 이 순간,눈앞을 가로막은 세상적인 기준에 있지 않다는 것을 치셤 신부의 일생을 통해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을 추천한 김인혜 교수는 “중학생 때 이 책을 처음 읽고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며 “하나님의 기준과 세상 기준은 같지 않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 책”이라고 설명했다.

주인공 치셤은 불우한 소년기를 겪고 실연의 아픔까지 지닌 채 사제의 길로 들어선다. 사제가 된 후에도 강직한 성격과 성실성으로 도리어 주변의 오해와 질시에 시달린다. 여러 시련 끝에 중국의 톈진(天津)에서도 1000마일이나 떨어진 산골지역으로 파견돼 20년간을 질병과 내전, 기근 등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쓸쓸히 빈 손으로 돌아온 치셤의 모습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특히 교황청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해 노년에 이르렀을 때는 수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선 동료들과 비교할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삶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김 교수는 “요즘도 이 책을 가끔 읽으며 인생의 기준을 하나님께로 바로잡고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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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열쇠」에서는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과 '안셀모 밀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같은 성직자로서 헌신한 동료였지만 그 삶은 판이하게 달랐다. 프랜치스 치셤은 화려해 보이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외형적으로는 볼품없는 생을 살았던 인물이며, 반면에 안셀모 밀리는 소위 종교적인 성공을 거두고 높은 성직의 반열에 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삶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가 과연 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생을 살았는지는 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프랜치스는 성직을 준비할 때도 순수한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였으며, 이후 중국선교사로서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영혼들을 보듬어주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랑하는 삶을 감당하였다. 결국 그 삶의 여정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참 사랑을 사람들과 함께 절절히 나눔으로써 그의 생은 참으로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생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삶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면서 사회적인 명성이나 성공 자체만을 추구하는 그 삶은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있게 느끼게 되었다. 프랜치스는 명예나 부를 누리는 것에는 욕심도 없었으며 그가 추구하는 삶은 오직 다른 영혼들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그 삶을 그의 마음중심으로 진실되게 실천함으로써 생의 소임을 다한 그 자체로 가치있는 삶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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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에서 안셀모와 프랜치스의 만남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어린 시절 그들의 만남,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안셀모는 늘 위엄있고 의젓한 행동을 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한 안셀모를 프랜치스가 흙탕물에 빠뜨린다. 성인이 되었을 때, 중국에서의 그들의 만남. 프랜치스는 새 주교가 된 안셀모의 방문을 위해 새로 성전을 정비하고 준비하느라 정성을 다했지만 홍수 때문에 다 허사가 되고 만다. 화려한 치장과 멋진 말만 하는 안셀모와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 프랜치스. 그 둘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아마도 세상에 대한 처세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한다.


주위를 둘러 보면 남이 자신을 알아 줄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자신을 알게 하고, 마음에 들게끔 아첨하는 사람도 있다. 안셀모는 바로 처세술이 좋은 사람이고 그와 반대로 프랜치스는 처세술이 약간 부족한 사람이 아닐까? 세상을 살아가려면 처세술이 필요할 테지만 너무 얍삽하고 비열한 아첨이나... 등등 그런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본다. 언젠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겉과 속의 다름을 알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약간 우둔하지만 강직한 프랜치스의 인간형이 더 좋다. 그리고 프랜치스는 남은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기를 희망하여 안셀모에게 신부직을 그만 두는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냥 기다리는데 재미있는 건 안셀모의 마차 때문에 프랜치스가 진흙탕을 뒤집어 쓴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미 안셀모와 인간적인 프랜치스. 어쩌면 이 두 요소는 우리가 항상 비교하면서 고민하고 시샘하며 생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과연 사회적인 부가 중요한 것일까, 따스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보람있는 것일까?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순 없을까? 프랜치스는 사회적인 명예나 부를 누리는 것에는 소질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다. 단지 그가 추구하는 생활, 사람들간의 화목, 사랑만을 위하여 살아 왔다. 늘 사람들은 사회적인 면을 외면하는 그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그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바꾸려 하지 않았다. 보용하고 묵묵한 행동으로서 그의 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안셀모와 같은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r그렇지만 어느 누구나 그 길에 빠지긴 쉽다. 편안하고 안락한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랜치스와 같은 이상과 생활에의 실천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정말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바로 작가 자신도 사회적인 욕심에 반해 청렴하게 살고 싶었던 한 가닥의 미련에 프랜치스와 같은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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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쓰는 독후감의 형태는 대가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책의 줄거리를 먼저 소개하고 다음에 감상을 적는 형태


이 방법은 독후감을 쓰는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쓰는 방법이다. 이런 방법으로 원고지 10장 분량의 독후감을 쓸 경우 다음과 같은 형태가 나올 수 있다.

 

<책에 대한 소개와 읽은 동기> 1~2장 

<줄거리를 소개하는 부분> 8~9장 

 <느낌이나 감상> 1~2장

 

이런 방식은 그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줄거리를 안내하는 효과가 있고, 글을 쓰는 학생에게는 긴 글을 압축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책의 줄거리를 소개한 다음 느낌이나 감상을 꼬리처럼 조금 붙이는 방법은 독후감의 초보적 단계이다. 특히 <춘향전>이나 <햄릿>같이 널리 알려진 작품에 대해 줄거리를 쓰는 것은 불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쓴 학생들의 독후감을 보면, 줄거리가 대부분이고 정작 써야 할 느낌은 조금밖에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결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굳이 이 형태로 쓰려면 느낌이나 감상이 원고지 10장 중에 3~4장 이상이 되도록 써야 할 것이다.

 

 

2)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때 그 때 자기의 느낌을 적는 형태

 

이것은 책을 내용에 따라 서너 개 문단으로 나눈 뒤에 독후감을 쓰는 형태이다. 우선 첫 문단을 소개한 뒤 거기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적고, 다음에 2문단을 소개한 뒤 느낌을 쓰는 식으로 써 가는 방법이다. 마지막에 가서 작품 전체의 느낌이나 감상으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이런 방식의 구체적인 형태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책에 대한 소개나 읽은 동기>

<1문단의 내용> + <1문단의 느낌>

<2문단의 내용> + <2문단의 느낌> +… +

<작품 전체의 느낌이나 감상>

 

이와 같이 독후감을 쓰면 줄거리 위주의 단조로운 글이 되지 않아서 좋다. 위와 같은 형태에서 내용과 느낌을 꼭 구분하지 않고, 줄거리나 느낌이 뒤섞이게 쓸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쓰려면 책을 서너 번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한 뒤,  그 때그 때 느낌을 메모해 가면서 써야 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글쓴이의 느낌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비교할 수 있으니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 중고등학생의 경우 최소한 이 정도의 형태는 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책의 줄거리나 내용은 소개함이 없이 느낌만을 살려서 쓰는 형태

 

가장 바람직한 독후감  형태다. 적어도 중학생이라면 책의 줄거리나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간추려 적을 능력을 갖춰야 한다.

책의 줄거리나 내용을 소개하지 않고 느낌만을 살려서 쓰려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깊은 감동을 느꼈을 때 가능하다. 이런 방법으로 쓴 독후감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장에 자신이 있는 학생에게 이 형태의 독후감을 권하고 싶다. 그러나 이 방법은 자칫하면 지나친 자기 도취에 빠져서 독후감이 아니라 감상문으로 흐를 수도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다음은 필자가 두 번째 형태(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때 그 때 자기의 느낌을 적는 형태)로 써 본 독후감이다. 전국적인 독후감 대회에서 입상을 한 작품으로, 1999년 원주여중 교지에 실었었다.

 

 

치셈 신부와의 만남


 

치셈 신부는 A. J 크로닌 박사(1896~1981)가 지은 소설인 <천국의 열쇠>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 책을 중학 시절에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되었다. 지은이는 카톨릭 사제인 치셈을 이상적인 인격을 지닌 완성된 인간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 장을 펼칠 때는 <천국의 열쇠>라는 제목이 풍기는 종교적인 색채 때문인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10여장을 넘기면서부터는 도저히 책을 놓을 수 없을 만큼 흠뻑 빠져들었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때로는 뭉클한 감동의 바다에 빠져 가슴을 흠뻑 적시기도 했다. 진흙 속에서도 맑게 꽃핀 연꽃인 양, 속세의 먼지에 더럽혀지지 않은 치셈의 순결한 영혼은 너무나 아름다운 신비였다.


 

고아가 된 치셈은 불우한 소년기를 거치면서도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면서 성장한다. 아마 기독교 선교사이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 않은 다니엘 외조부나 사심 없는 폴리 아주머니의 따스한 인간미에 말미암았을 것이다. 그들의 교화는 치셈으로 하여금 티없이 맑은 영혼으로 성장하게 만든 힘의 원천이었다.

 

치셈은 신부가 된 뒤에도 순수한 인간미를 간직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는 카톨릭의 엄격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갖가지 도전에 부딪친다. 우여곡절을 겪던 치셈은 끝내 중국 두메의 선교 신부로 쫓기다시피 파견된다. 타의에 의한 중국에서의 사제 생활 20년! 이 기간이 이 소설의 중심 대목이다.

 

이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는 치셈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이 닥친다. 그 때마다 좌절하지 않는 그의 인내와 신앙심에도 감탄했지만, 유교나 개신교에 대한 포용심에 더 큰 감동을 받았다. 타종파인 피크스 목사를 대할 때의 우호적이고 관대한 처신, 임종을 앞둔 친구 윌리에게 주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강요하지 않는 인간적인 태도 등에서 오히려 참 믿음을 발견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는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광적일 만치 열성적인 일부 신앙인들을 연상하며 신선한 충격과 함께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수많은 종교의 대상 중에 어느 분이 절대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은 아마 치셈 신부 같은 눈길로 인간을 대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에서 얻은 가장 흐뭇했던 보람은 세상이 결국은 착한 사람 편임을 확인한 것이다. 너무나 고지식하여 답답하기까지 한 치셈 신부가 착함으로 인해 글레이나 가족에게 천대를 당할 때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또, 그의 선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원장수녀, 어려서부터 길러준 은정을 끝내 배반하는 안나의 가증함 등을 대할 때는 마치 내가 당하듯 울분이 치솟았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신의 손길이 치셈에게 닿고 있음을 느끼면서 마치 내가 창조의 섭리에 참여한 듯 기쁨을 체험했다.

 

치셈 신부가 벽지에서 갖가지 고생을 겪는 동안, 신학교 동급생인 밀리 신부는 뱀 같은 슬기와 비둘기 같은 웃음으로 치장하며 출세의 길을 달린다. 운동에는 만능이고 저명인사들과 교분 쌓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처세술을 바탕으로 주교의 지위까지 오른 밀리! 요즘의 우리 사회도 이런 사람들이 성공을 해서 사회를 주름잡은 뒤에 고결하고 지엄한 체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사람들이 결국은 사회를 병들게 하지 않았나 싶어서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지막 순간에 치셈 신부의 옆에 서시리라고 믿는다. 천국의 열쇠는 결코 밀리 신부 같은 사람의 손에는 쥐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일 것이다. 이 소설은 참 신앙의 길 뿐 아니라 올바른 삶의 방향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대목은 밀리 주교가 교회를 확장시키지 못한 치셈 신부를 속세의 기준에 의해 무능하다고 판단하는 내용이다. 주교는 치셈을 조사하기 위해 비서인 슬리브 신부를 파견한다. 사제관에서 치셈을 기다리는 동안 우연히 그의 일기장(‘천국의 열쇠’의 내용. 그래서 이 소설은 치셈의 일기 형태임)을 읽은 슬리브 신부는 무의식적으로 부르짖는다.

 

“주여, 저 노인에게서 바른 교훈을 얻게 해 주십시오. 내가 결코 그를 해치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그 탄원이 책장을 덮고서도 한동안 온갖 감동에서 헤어나지 못한 내 입에서도 흘러 나왔다. 나도 치셈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의 무능함을 업신여기지 않았을까? 밀리 신부 같은 삶을 부러워하며 그런 명리를 꿈꾸지는 않았는지…. 늘 반성을 하며 남은 나날이나마 바른 삶을 살도록 힘써야겠다.

 

치셈 신부와 만난 지도 어언 30여 년이 흘렀다. 지나온 내 생활은 그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러나 치셈 신부를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희망이 아닐까. 나의 친구이자 스승인 치셈 신부와 만날 수 있다면 원여인에게도 뜻깊은 추억이 되리라고 확신하며 그를 소개한다

 

 

 

 

 

 

천국의 열쇠 독후감 (1)

살면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모순에 부딪힌다. 나 또한 그런 모순들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항상 그런 모순에 부딪히면 어느 것이 더 옳은지, 그 해답을 찾고자 하지만 항상 실패한다. 그 모순이 무엇이냐 하면 윤리 책에서 흔히 나오는 일화가 그것이다.

회사의 부정을 아는 한 회사원이 정의를 위해 그것을 폭로하느냐 아니면 그 사실을 은폐한 채 회사의 이익을 돕느냐... 따위의 문제 말이다. 나는 항상 정의를 위하는 편에 손을 들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과연 그것이 옳은지 확신할 수 있으며 정말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천국의 열쇠"를 통해서 조금은 이 의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소설 속에서 이런 모순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고 그저 이런 모순이 있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 해답을, 즉, 어느 쪽이 더 옳은 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또 그밖에도 주인공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프랜치스 치셤으로 그는 신부이다. 그는 종교계의 유명한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너무나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나 제목 그대로 최후에 천국의 열쇠를 거머쥐는 사람은 바로 치셤이다.

치셤은 소설 속에서 그의 친구인, 종교계에서 크게 성공한, 안셀모 밀리와 계속 비교된다.

 이 두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가 확연히 드러난 부분은 치셤이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을 때 주교좌 성당 참사 위원인 밀리 신부가 그의 선교 활동 및 실적을 보러 왔을 때이다.

 그런데 그 때, 밀리 신부가 오기 바로 전날, 치셤의 꿈이자 희망인 성당이 무너져 버린다.

 중국에서의 그의 노력과 사랑을 모르는 밀리 신부는 크게 실망하며 준비한 연설을 하지 못할 것을 불평하고 그에게 왜 이 곳의 세력가들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느냐 하며 그를 다그친다.

 그러나 치셤이 중국에 와서 제일로 내세운 것은 돈으로 신자를 모으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력가 또한 필요치 않았고 사랑으로, 그들로 하여금 직접 그의 곁으로 오게끔 했다. 치셤이 세운 성당-그 무너져 버린 성당-은 절대 밀리 신부와 같은 방법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 성당도 그 지방의 세력가가 그의 신앙에 감동하여 지어 준 것이었다. 프랜치스 치셤은 그러한 방법으로,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된, '양적'이 아닌 '질적'으로 훌륭한 성당을 지은 것이다.

밀리 신부는 계속해서 치셤에게 자신의 설교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를 떠벌리고 치셤의 미련한 행동에 실망한다.

《천국의 열쇠》는 1942년 7월에 그 초판을 발행하여, 같은 달에 계속 6회에 걸쳐 중판을 거듭했으며. 8월에 3판, 이어서 9월에 2판, 10월과 11월에 각각  3판씩의 증판이 행해졌을 정도로 많이 팔린 책이다. 약 반년 동안에 60만 부가 매진됐으며 계속 10여 년 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점령해 올 정도로 유명하고 재미나는 책이다. 내용은 카톨릭 교회의 한 신부를 중심으로 한 것이지만, 그 소재나 줄거리는 굳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 된다.

주인공 치셤 신부의 회고담으로 시작된 이 책은, 여러 가지 인간관계를 비롯해서 인간이 요구하는 참다운 인간상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치셤은 어린 시절의 사랑이 사별(死別)이라는 형태로 실연에 이르게 되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신학교로 들어간다. 하지만 단순하며, 격분을 잘하고 감수성이 강하며 완고하리만큼 정직한 혼을 가진 자유사상가인 치셤은 카톨릭 신학교의 획일적인 분위기에 대항해 여러 가지 반항적 언행을 하여 주위의 냉대를 받으며 고초를 당한다. 그의 반항은 사실 성실과 야심의 문제에 있어서 일보의 양보도 없는 독실한 생활과 자유스러운 사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출이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런 자유사상 때문에 배척당하는 것이다.

동급생인 안셀모 밀리는 치셤과는 대조적인 인물로 그는 사교적인 성격으로 반장 노릇을 하며 신부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또한 그는 졸업 후에도 출세의 계단을 요령 있게 밟고 올라가 주교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치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개신교와 융화된 사상 때문에 신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불화를 일으켜 본국의 성당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가 결국은 해외로 나가게 된다. 즉 치셤은 중국의 천진에서 1천 마일이나 떨어진 벽지인 절강성 파이탄에 로마 해외포교단의 중국 최초 선교사로서 파견된다. 그는 종교상의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이렇게 외친다.

"하느님, 당신은 저에게 무(無)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원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당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전도 사업은 고투의 세월로 점철된다. 페스트가 유행하자 치셤 신부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전과 무서운 기근이 몰아닥치자 그는 강인한 인내력으로 사람들을 돌본다. 금욕주의적인 인내력과 내면의 용기로 말없이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는 치셤 신부의 모습은 가히 성자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성자로서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즉 그는 카톨릭 전도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었지만 그곳의 높은 도덕률을 지닌 문화를 배척하지 않는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의 사상까지도 흡수하여 독자적인 참 신앙을 확립시키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럼으로써 타종교와 기독교의 대립상태를 지양하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신앙의 기쁨을 되찾아 준다.

그의 고난은 줄곧 계속되어, 겨우 세운 성당이 홍수로 일시에 붕괴되어 버린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개종률 최하인 치셤의 교구에 성당을 재건하여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임한 지 10년 동안에 치셤이 얻은 신자는 겨우 2백명이 넘지 않았다. 하지만 성직자로서의 그의 고결함에 감동한 독일인 수녀가 고국의 오빠에게 이야기하여 성당 재건 자금을 마련한다. 하느님은 홀로 분투하는 그를 버리지 않았지만 치셤 신부는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라고 의심의 소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치셤은 산적떼에게 잡혔다가 불구의 몸이 되어 간신히 도망쳐 나오나 곧 은퇴할 것을 명령받는다.

인내와 청빈과 용기 있는 삶으로 일관되게 지속되었던 치셤의 생애, 신과 이웃에게 끊임없이 베풀었던 치셤의 뜨거운 사랑, 치셤은 성실하고 충성된 하느님의 사제(司祭)였으나 교회라는 조직 속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백안시되고 이단시되고 만다. 치셤은 외견상으로는 실패의 연속, 고난의 연속인 삶을 살았다. 로마 교구청에 붙어 출세의 계단을 요령 있게 밟던 안셀모 밀리와는 대조적인 삶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길은 '성실한 마음으로 자기 양심의 명령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의 것이며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가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혹은 자유사상가이건, 나아가서는 무신론자이건 반드시 천국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열쇠'는 안셀모 밀리와 같은 출세주의자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은 암시하고 있다.

크로닌이 이 소설을 쓸 때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참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인류상잔의 전쟁을 과연 막을 수 없는 것일까 생각하며, 인간과 세계의 참다운 이상의 상을 이 책에서 추구해 본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인류가 한 형제라는 전제하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 한 형제가 되기 위해서는 한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즉 전인류는 한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형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다르다거나 종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대립 내지 적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인종이나 국가의 차이 없이, 인류는 한 형제임을 깨달을 때 참사랑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 《천국의 열쇠》는 바로 이러한 점을 재미있는 줄거리의 전개와 함께 역설하고 있다. 대부분의 크로닌 소설이 그렇듯이 이 작품의 문체도 평이하지만 변화 있는 스토리 전개로 소설 본래의 재미를 자아낸다. 그러나 이런 재미보다도 이 작품이 널리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의 사해동포주의적인 신앙심과 그를 바탕으로 세계의 평화와 사랑을 회복하려 한 숭고한 정신에 감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는 독자들일지라도 이 작품을 읽음으로써 주인공의 인간적인 사상과 행동, 그의 말들에 크게 공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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