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로이드 존스의 생애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남 웨일즈 카디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1981년 3월 1일에 81년간의 순례자의 길을 마치었다.
그는 본래 내과 의사로 수업을 받고 그는 왕실주치의였던 호오더경의 조수로서 미래가 보장된 의료계의 경력을 1927년에 포기하고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채 같은 내과 의사였던 아내 베단과 함께 그의 고향인 남 웨일즈 탈보트 항구의 아베라본에 있는 한 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1938년에 그는 버킹엄 게이트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에 켐벨 모르간 박사와 동사로서 초청을 받았다. 1943년 단독 사역을 시작했고 1968년 8월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하기까지 거기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그 다음 그는 순회 설교자로서, 저술가로서 여생을 주를 위하여 섬겼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1)
설교자로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고 특히 한국에서 많은 목회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다. 그의 저서들의 계속하여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그 분의 책들을 참고하시면 여러분에게 깊은 감동과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II. 로이드 존스의 성령사역과 성령세례
1.들어가는 말
현대 21세기의 영성과 성령에 많은 관심이 대두되는 시기에 이렇게 중요한 사람들의 성령론을 고찰하며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빛과 소금교회 그리고 문설연과 새벽이슬에게 또한 감사 드린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더욱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렇게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에 관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문설연의 신목사님과 그 밖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먼저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중에서 성령의 세례라는 부분은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적인 생각과 신학을 가지고 또한 개혁주의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분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개혁주의 적인 길을 벗어나 조금 그 사역에서 문을 열어 놓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개혁주의 성령론에서는 조금 나아가고 그렇다고 오순절적인 성령론에는 다른 그런 견해를 필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많은 독서와 목회에서 경험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세운 듯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웨일즈의 부흥을 보고 자랐다고 할 수 있고 자신이 하는 목회사역에서 큰 부흥은 없었지만 개인적인 그리고 지엽적인 부흥을 보고 갈망한 사람이다. 이것들이 그의 목회와 사역에 그리고 신학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번 발제에서 전체적인 성령론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논쟁이 되는 부분에 집중을 하도록 한다. 성령론에서 그는 성경의 논리와 교회사속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논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필역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그 안에서 목회자로서 성도로서 우리에 유익을 주는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2. 성령의 중생의 사역
1> 성령의 중생의 은밀한 사역
로이드 존스에게 성령의 사역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역은 중생의 사역이다. 그러나 이것은 체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에게 그 일이 발생했을 때에만 알게 된다.1)
그가 중생한 증거들로 그는 롬8:7,9절을 통해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로마서를 인용하면서 성령의 사역으로 자연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된다.2)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과 12절과 고린도전서 2:14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일을 받을 수 있고 믿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다3) 라고 말한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믿을 수가 없으며, 모든 성도들 안에는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내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성령의 중생의 사역은 은밀한 사역으로 보고 있다.
2> 중생한 사람의 증거들
중생은 은밀한 사역이지만 우리가 내주의 사역으로 중생한 사람들에게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 사고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시게 하며, 규정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싶어지고, 그리고 언제나 자기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그리고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주님, 내 사랑이 약하고 연약해서 늘 걱정입니다 고 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그리고 죄를 짓는데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에서 자기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워하게 된다. 더불어 그는 점점 갈수록 죄와 알과 유혹이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해 진다.
결론적으로 자기 속에서 의와 거룩을 사모하여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들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면서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없는 지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4)고 로이드 존스는 말을 한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으로 성령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중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 즉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다”5)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성령의 세례를 별개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내주로 인한 중생의 사역은 죄를 깨닫게 하시며, 빛을 비추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 사람 안에서 내주함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은밀한 사역이다. 그리고 은밀한 사역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알 수 없는 사역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결과들은 분명히 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다
3. 성령세례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의 사역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고 보면서 성령의 세례는 세례 요한이 증언했던 “그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로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행동이고 특권이다1)고 말한다. 그러면서 성령 세례는“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2) 라고 말한다. 그럼으로 로이드 존스 성령의 세례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특수하게 성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령 세례에 대한 그 나름대로 이론은 사도들이 중생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이 계신 당시에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였으고 예수가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면서 이 성령 세례는 중심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역임을 증거한다.
1) 성령 세례의 성경적 증거들
1> 사도들의 성령 세례: (행1-2),
여기에 나오는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다. 그런 증거로 요한복음 7:37-38을 증거 하면서 여기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를 말하면서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에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요 15:3,17:6-9) 이것으로 볼 때 사도들이 오순절 이전에 모두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22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이 부음 바 된 사람들이지만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3) 라고 말한다. 그러나 행1:4-8을 통해서 이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똑같은 사람들이 이미 신자들이고 거듭난 사람들이며 어떤 의미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얼마 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사람은 주 예수님을 믿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고 있는 것이다.
2> 사마리아의 성령 세례 (행8장)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6-8)
여기서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행8:12 )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빌립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오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 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8:14-17)
이들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믿은 참된 신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를 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4)
3> 바울의 성령 세례(행9장)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7-18)
여기서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주님을 믿었다고 보며 더불어 후에 아나니아를 통해서 보냄을 받고 그가 안수함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후에 물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울을 고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행9장18절을 보면서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이것으로 물세례와 성령의 세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다5)고 말합니다.
4> 고넬료 가정의 성령세례 ( 행10장)
고넬료 가정의 사건은 믿음과 동시에 성령의 세례가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믿음과 성령 세례가 같이 올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5> 에베소의 12제자의 성령세례 (행19장)
그리고 행 19장을 통해서 그는 더욱 자신의 논증을 분명히 밝혀나갑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 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행19:1-7)
여기서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으면서 그들이 복음을 믿었지만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성령세례 없이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한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를 함으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6) 고 말하면서 분명히 중생과 믿음과 연관되고 그 이후에 성령세례를 별개의 것임을 주장한다.
6> 에베소 교회의 성령 세례 (엡1:13-14)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회상시키며 그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그리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하면서 신자만이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 순서적으로 믿는 일이 먼저이고 그 후에 성령으로 인치는 것이 온다고 말한다.7) 그러면서 그는 성령의 세례는 동시에 일어날 수 도 있고 또는 다르게 일어날 수 도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생과 성령의 세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이다. 고 주장하는 것이다.
2) 성령 세례의 결과들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의 직접적인 결과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체험적인 증거라고 말합니다. 중생은 신비한 것이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와 중심부에서 이뤄진 기적적인 행동으로 어느 누구도 그리고 아무것도 여러분에게 그가 중생한 그 순간에 관해서 말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의식적이며 체험적이며 분명하며 명백하고 선명하여 받는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것이 인식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1) 체험적인 것에 관하여 그는 주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으로 구분을 한다.
1> 주관적인 체험
주관적인 체험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조나단 에드워드는 하나님( 성부하나님, 성자 그리스도, 성령)의 영광에 대한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고 말하면서 그는 이것을 믿었지만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즉각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들로 20세기 웨일즈의 대학 총장인 토머스 찰스 에드워드가 1859년 그가 학생 때 체험한 것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을 때에 어느 집회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가 떠날 때에 “...그가 심지어 육안으로 불수 있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는 것입니다.”그는 하나님과 만났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D.L.무디의 체험을 더불어 말하면서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이례적인 자각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2)
그러면서 개인적인 체험의 부분에서 성령의 세례가 임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색다른 확신을 갖는다고 말합니다.3) 그러나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일시 여기면 모두가 자동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확신을 가진다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4)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2장을 통해서나 그 밖의 성경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듯하다 고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가 오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기쁨과 행복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한 부분을 통해서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확신사이에 뚜렷한 차이를 끌어내는데 매우 신중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5) 말한다 .
다음으로 성령세례는 가장 높은 형태의 확신을 준다고 한다. 첫 번째 확신의 유형은 성경에서 추론하여 얻는 확신입니다. 두 번째 확신의 유형은 요한 1서 5장13절의 말씀과 같이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세 번째 유형은 친히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확신이다. (롬8장15-16절) 이것을 토마스 굳윈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버지와 아이가 길을 가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를 들어올려 안아주면 귀여워해 주는 사랑을 듬뿍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6)
성령으로 세례가 임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서 체험적인 것이 된다. 이것으로 영적 마음이 자극하게 된다고 증거 하면서 그는 청교도인 존 플라벨과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체험적인 것들을 증거합니다. “이것들은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7).
출처..창골산..글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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