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4과, 구원의 확신 (마 16:15-17)

하나님아들 2013. 8. 14. 17:12

4과, 구원의 확신 (마 16:15-17)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톨스토이가 쓴 글에 인생을 풍자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나그네가 숲에서 호랑이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쫓기다가 때마침 깊은 웅덩이가 보이자 나그네는 칡넝쿨을 붙잡고 그 속으로 간신히 피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웅덩이의 아래를 내려다보니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밑에서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그 때에 웅덩이 중간쯤에서는 하얀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서 나그네가 붙잡고 있는 생명 줄과 같은 칡넝쿨을 갉아먹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웅덩이밖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고 웅덩이 밑에는 구렁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은 서서히 끊어져 가고 있는 아주 급박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꿀벌들이 쳐 놓은 꿀 집에서 맛좋은 꿀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나그네는 그 달콤한 꿀을 받아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글은 세상을 풍자한 것인데 촌각을 다투며 다가오는 죽음 앞에도 당장 눈앞에 있는 일시적인 향락에만 도취되어 중요한 것을 망각하면서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의 소설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일 오늘 죽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구원은 참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영원한 삶과 죽음을 구별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대해서 개념을 정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구원은 실재이지 결코 추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병들었을 때 병이 낫듯, 문제가 있을 때 문제를 해결 받듯, 내 영혼이 생명을 얻고 성령 안에서 죄와 멸망에서 자유함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실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실재보다는 교리만 가지고 다툼하는데 이론도 중요하나 어떤 이론이 확실한 실재를 누리고 더욱 풍성한 실재를 누리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참된 진리가 아니라면 실재성도 없을 것입니다. 사8:20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 상당히 설명하기 복잡합니다. 뼈대만 알아가지고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뼈대가 맞다 해도 구체적 적용을 모른다면 그 실재를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를 안다 해도 단숨에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나의 믿음과 자세와 순종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영적체험이 나란히 가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은 부르나 주님답게 해드리지 못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리가 분명하고 신앙고백이 분명해도 입으로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난감하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렇다는 개념부터 정리하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실재를 위하여  일단은 우리가 서야 할 터전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실과를 맺듯이 진리 안에서 우리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말씀의 확신에 서는 데서 시작한다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말씀을 일단은 잘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1.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나의 주님이심을 믿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지방에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대답하기를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신앙을 바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가 복이 있도다”고 하시면서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라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롬10:9-10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사실을 믿고 또 믿어져야 합니다. 믿어진다면 구원을 받은 것인데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신 것을 시인하는 것만으로 구원의 전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냉대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구원이신 예수님과 생명적 인격적 친교적 사역적 더 깊은 연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나대로 행함에서 벗어나 주님이 나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생명의 예수님과 생명적 인격적 관계의 발전입니다. 부부가 하나 됨을 목표로 나아가듯이 매사의 삶이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매사에 보이는 것처럼 주님을 인정하고 대화하고 예배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며 그의 기쁘신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 때 생명의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더욱 풍성히 나타나시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풍성함인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죽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면 영원한 멸망밖에는 없습니다. 이제 살아도 죽어도 예수밖에는 다른 희망이 없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생명으로 연합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순종하는 관계발전을 통해 예수의 생명이 여러분의 삶 속에 더욱 충만한 구원의 실재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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