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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배, 미사, 평신도(글 이인규)

하나님아들 2013. 7. 17. 11:37

예배, 미사, 평신도(글 이인규)

 

 

▶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worship)라고 한다.
그 정확한 개념은 "존경을 나타내다" 혹은 "최상의 가치를 돌리다"라는 뜻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존경을 나타내는 경건과 의식을 뜻하며, 최상의 가치를 하나님께 돌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수가라는 곳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다음과 같은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사마리아사람들은 예배의 장소를 그리심산에서 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직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하는 것으로 알았으므로,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를 얼핏 보면, 여인과 예수님이 서로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인은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예배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리심 산이 옳은가(신11:29) 혹은 선택한 장소, 예루살렘이 옳은가(신12:5)에 대해서 여인은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소에 대해서 전혀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예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in spirit and in truth> 라고 영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성령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는 뜻이다.
그러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이다. 즉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방법이 중요한 문제라는 뜻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예배란 것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예배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물론 구약에게 참예배의 실상이 오기 전까지, 우리에게 그림자적인 예표로서 예배의 형식과 패턴을 주셨다. 다시 말하여 구약의 성전예배는 우리가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그리스를 만났을 때에 그 여인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았더라면, 이젠 신령과 진정의 참 예배를 드릴 때가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여야만 했다.
즉 예배는 주일날에 교회에서 국한된 장소적,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 자체가 모두 예배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성전이라는 건물에서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곧 예배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주일에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가치를 돌리는 삶자체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몸이 곧 성전이기에, 우리의 예배도 곧 우리의 전인적인 몸이 존재하고 활동하는 삶 전체가 예배의 장(章)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롬12:1-5에서 언급되는 "영적(靈的) 예배"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경건적이며 의식적(儀式的)인 것을 포함하는 행위가 예배일까?
언어적으로 살펴보면 "영적"이란 말은 헬라어 "로기코스"라는 말인데 "합리적인, 논리적인, 이성적인" 것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로는 'Reasonable'이란 말로 사용된다.
롬12:1의 본문에서 "예배"란 헬라어로 "라트레이아"라는 용단어인데 이것은 조금 의미를 달리 해서 "봉사"(to serve)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킹제임스영어성경은 직역하여 reasonable service라고 번역하였고, NIV 영어성경은 의역하여 spiritual act of worship 이라고 번역하였다.
어원적으로도 예배란 "이성적 봉사"를 가르킨다.

즉 헬라어적인 "영적 예배"란 성도들의 합리적인 봉사 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인격을 다한 희생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12:1)고 권면 하는 것이다.



혹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을 할 것이다
우리가 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예배라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의식(儀式)적인 예배의 필요가 없다는 소위 예배무용론을 말하는 것인가?
물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예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배란 개념은 주일, 교회에서 드리는 개념에서 더욱 확장 내지는 연장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고 꾸짖었으며, 사무엘 선지자는 성경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로 꾸짖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구약에서 하나님은 결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신 적은 없다.
하나님은 그 제사의 형식과 외면적인 형태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내면적인 자세와 마음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시51:17)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장소적이며 외면적인 의식으로만 치루어진다면, 하나님은 그 예배자를 찾지 아니하실 것이 분명하다.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전5:1)



▶ 미사



카톨릭과 개신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카톨릭은 제사의 종교이며, 우리 개신교회는 예배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카톨릭이 제사의 종교라는 뜻은 카톨릭은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 미사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곧 "제사"를 의미한다.
그 제사의 핵심은 죄의 용서에 있다. 그래서 카톨릭의 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신부님께서 떡을 주시고 그 떡을 받아먹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미사를 드리는 핵심은, 죄의 용서를 받는 제사를 매주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는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거나 상징한다고 한다.
그런데 카톨릭은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실제로 변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을 화체설이라고 한다. 만일 그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과 살과 피로 변화된다면, 카톨릭이 드리는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실제로 매주마다 반복하여 드리는 것이 되고만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희생제사(피와 살)는 단 한번의 온전한 제사가 아니고, 매주마다 반복해야만 하는 온전하지 못한 제사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문제점이 종교개혁자들의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이다.



▶ 평신도



"평신도"란 말은 헬라어 "라오스"(laos:백성)에서 유래되었다.
본래적인 의미로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일컫지만, 교회의 직분적인 용어로서는 성직자와 대비되는 일반 성도를 나타낸다.

교회사에서는 2세기경부터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된 것으로 밝혀졌다.
클레멘스가 고린도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 기록에 평신도, 집사, 장로라는 직책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초대교회 때에는 장로와 집사를 성직자로 간주했으며, 일반 교인을 평신도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카톨릭의 시대에서는 성직자의 권한이 강조되고, 반면에 평신도의 권한은 점차 축소되어, 중세에는 가르침을 받고 헌금을 내는 의무만 강조되었다.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가 개념상으로나 직책상으로 엄연하게 구별되어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직자는 사제이며, 그들의 예배는 "미사"라고 불려지는데, 그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사"를 가르키며, 성직자들은 곧 제사장이 되어지므로서, 평신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사이에는 교회의 본질에서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카톨릭에서의 교회란 조직은 평신도가 제외되며, 주교, 대주교, 교황등의 교권자들의 구성원으로 되어있으며, 평신도는 간접적으로 소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평신도와 목회자를 구별하지만, 단지 직책상으로 구별할 뿐이다.
직책적으로 구별할 때에도, 카톨릭과 달리, 평신도는 교회에 직접적으로 소속되어있으며 구성원이 되어진다.


또 개신교에서의 교회라는 개념은 카톨릭과 같이 가시적(可視的)이며 유형적(有形的)인 조직이 아니라, 비가시적(非可視的)이고 무형적(無形的)인 개념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며, 주님이 머리가 되시는 유기체적인 조직을 의미하며, 그 구성원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가 성도(聖徒)가 된다.
개신교에서 목회자란 제사장의 개념이 결코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부터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그것은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에 근거한다.
즉 모든 신자는 제사장이 되어 하느님에게 직접 기도하고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27:51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직후에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성소의 휘장은 성전내부의 성소와 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의 사이의 휘장을 말한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히9:3)



이 사건은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전에서의 제사같은 종교적인 의식이 소멸되고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음을 상징한다.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예표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20)



또한 신약성경은 성도를 제사장이라고 언급하는데(벧전2:5, 9. 계1:6, 5:10, 20:6) 그것은 다음 출19:5-6의 구약말씀에 대한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19:5-6)



일반적으로 개신교(프로테스탄트교회)에서 "평신도"라는 용어는 계급으로서의 직책이 아니라, 봉사하는 기능적인 면에서 일반 성도를 나타낼 뿐이며, 그러한 의미로서 "성도"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개신교에 비해 엄격하며, 물론 이러한 직분적인 의미로 볼 때에는 평신도라는 용어는 성도와 혼동되어지기도 한다.

"성도"라는 단어는 헬라어로는 "하기오스"(거룩한 자)이며, 히브리어로는 "하시딤"(신실하며 헌신하는 자들), 혹은 "케도쉼"(거룩하게 구별되는 자)이 사용되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고전1:2)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1:7)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고후1:1)



즉 위의 성경구절이 "성도"의 정의가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총체적인 사람들"을 가르킨다.
즉 교회의 구성원을 모두 "성도"라고 부른다.



거룩이라는 용례는 "하나님께 속한"이라는 개념이며 "구별되다"를 의미이다.
거룩이란 말은 영어로 "Holly"(성) 이다.
히브리어 카도쉬,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자르다, 구별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성경, 성가, 성전, 성령, 성부, 성령....이 모든 "성"의 개념은 "거룩"이라는 뜻이며, 이 말의 뜻은 구별되다는 뜻이다.
성경은 일반 책과 구별된 책이며, 성가는 일반 노래와 구별되는 구별된 책인 것이다.
이 단어의 용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개념에 사용되어 진다.
신약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하게 구별되어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특히 평신도의 참여문제가 많이 강조되고 또 논의되고 있다. 교회의 개혁은 평신도가 이루어야한다고 말한다.
또 평신도신학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하는데, 그동안 신학은 교수와 신학자들 위주로 이루어졌지만, 평신도를 위한, 평신도의 눈높이의 신학이 되어야만 실제 신앙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학문연구를 위한 특수한 신학이 아니라, 현실적인 신앙에 도움이 되는 신학을 평신도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교회와 분리되는 신학이 아니라, 교회와 일치되는 신학을 말한다.
그래서 교회의 주도세력은 평신도중심이어야만 한다고 한다. 좋은 견해이며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러나 가장 문제점은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되는 것은 정말 가슴아픈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분열하는 것을 원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최근에는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등 전반적인 문제가 양극화되어있으며 이원화되어 대립되어지고 있으며,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즉 개혁적인 목회자와 보수적인 평신도, 또 보수적인 목회자와 개혁적인 평신도의 서로 다른 시각의 차이점이 최근의 교회의 당면한 문제점으로 지적 되어진다.
평신도가 교회를 개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러한 분리적, 구별적인 의미로서 평신도의 권리와 목회자의 권리를 각각 주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는 주님이 머리가 되는 교회의 같은 지체가 되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함께 합력하여 나아가는 자세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성령께서 각 지체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며, 그런즉 각양 각색의 은사를 각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7-11)



성경은 말씀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함께 하다"는 헬라어로 "코이노네오"로서 "나누다 교통하다, 교제하다"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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