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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떻게 믿는 것이 진실로 믿는 것인가?

하나님아들 2012. 8. 9. 15:49

어떻게 믿는 것이 진실로 믿는 것인가?


길 거리나 지하철 역에서, 그리고 상점들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분들이 쉽게 눈에 뜨인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믿고 천당 가세요!” 미국에서는 큰 길이나 하이웨이를 달려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간판의 글씨들을 종종 보게 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저 믿기만 하시오! 오늘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 드리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믿으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 드렸으면, 같은 성경이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까지도 받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또 그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위의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여전히 좋지못한 감화를 변함없이 끼치며 살고 있는가?

우리 주위에서 교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 수많은 십자가의 야광들이 밤거리들을 밝혀 주고 있지만, 정말 우리 주위의

삶이 더 깨끗하게 달라져 있는가? 더 정직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인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간혹 접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내뱉는 말들을 가끔 듣게 된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믿을 때는 우리 마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 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변화가 수반되게 되는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침 받지 못한 신자들의 경우에, 자신의 생활에 진정한 변화없이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순에서 발생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마는 행함의 열매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한번은 가장 순수했던 초대 교회에 신학적인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일부 교인들 가운데

오해가 발생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께서 베드로 후서 3장 14절에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강조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필자 주)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5,16,17

오해된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예로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4.

위의 말씀들은 사도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거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책망하는 의미에서 기록한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말씀 때문에 잘못된 오해가 빚어질까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섞어가면서 기록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5, 1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 5:5,6,13. 초대 사도

교회 당시에 위와 같은 가르침의 위기가 왔을 때에 예루살렘 총회의 지도자로서 위치하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는 자기의 편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된 오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고 격려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14, 17-24

야고보의 말씀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오해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균형지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는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인정과 동의를 지나서 우리의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바꾸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 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의 삼각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아들 이삭을 낳기 이전에 자신과 자기의 아내 사라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다른 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늙은 자기의 본처 사라를 통하여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서 택함 받은 한 나라를 이루시고 그를 통하여서 메시야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겠다는 약속, 자기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수가 하늘의 별 처럼 바다의 모래 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는 굳게 믿었다. 그것을 믿는 일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어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인정하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 드린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을 때에 자기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높아진 자”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다닌 사실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다.

자기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죽여 제사로 바치라는 것이었다.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몹시 고민하여 떨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을 아침 일찍 깨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처럼 들릴 때에라도 믿고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 아시고 당신의 사랑과 뜻을 따라 행하신다는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그 분을 우리는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과 진리와 그 분의 모든 계명을 다 받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멈추도록 명하시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후 세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 주셨던 것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바로 이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믿음이란 무었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믿음만 가지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까지 강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삼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배를 저을 때에 한 쪽 노만 저으면 배가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 처럼 믿음과 행함이 함께 병행하여야 구원의 배가 하늘 포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가 아니지마는 동시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행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 마태복음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로마서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 후서 5:10)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3

여기에서 한가지 살피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한가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악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 마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전서 5:17. 우리는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경험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지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이 강권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4:15).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순종이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지 우리의 행함의 쌓은 공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깨끗하고 진실된 변화받은 생활을 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낳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순종과 존경이 없는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도 동시에 적고 있는데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비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당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를 몰랐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우상의 땅을 떠나 나갔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 했다고 믿음 장은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말틴 루터나 요한 웨슬레나 롸저 윌리암스, 리챠드 백스터, 요한 칼빈, 진센돌프 같은 훌륭한 종교 개혁자들이 살고 가르쳐 온 기별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믿기만하면 된다는 이상한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들어 와 꽤 판을 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진짜 믿음을 가진 자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어떤 사람은 자신의 회개한 과정에 대하여 정확한 시간이나 장소나 그 경로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가 회개하지 않은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그리스도께로 나온 단계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신으로 난 사람은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나 그 영향은 분명히 볼 수 있고, 감촉할 수도 있는 바람과 같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이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사람의 마음 안에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며, 또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 사람을 만들어 낸다. 비록 성령의 역사가 소리가 없고, 감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 영향과 결과는 현저하게 드러난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로와졌다면, 우리의 실제 생활이 그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고,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는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이 행하였던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의 날마다의 생애는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우리와 현재의 우리 사이에 있는 차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새로 태어나는 변화의 경험은 우리의 품성과 습관과 직장 생활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품성은 한 순간의 선행이나 일시적인 악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적인 말과 행실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이 없이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덕망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생애의 겉 모습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자존심이 우리로 하여금 누추하고 옹졸한 모습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는 우리의 친구들의 눈에 선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악을 피할 수도 있다. 이기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도 너그럽고 선하게 행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느 편에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누구에게 가 있는가? 우리가 누구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는가? 우리의 가장 열정적인 애정과 최대의 정력을 누구에게 쏟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분께 가 있을 것이요, 그분과 그분의 사업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몸을 다 그분께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닮을 것이며, 그분의 정신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인“사랑과 희락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맺힐 것이다(갈라디아서 5:22).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행하던 것처럼 정욕을 따라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될 것이며, 그분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에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전에 사랑하던 것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던 자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될 것이다. 허영심이 많고 거만하던 자가 침착하여지고, 근신하게 될 것이다. 술을 마시던 자가 절제하고, 방탕하던 자가 순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세상의 허영적인 습관과 유행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모와 의복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자 하지 않을 것이며,“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게 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마음을 단장할 것이다(베드로전서 3:3).


참된 회개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켜 준다. 우리는 도적질한 것들을 되돌려 줄 것이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워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가서 그분의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이 싹트게 된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모든 의무와 책임이 어렵게 보이지 않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메워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드디어, 의무는 즐거움이 되고, 희생은 기쁨이 된다. 전에는 흑암으로 어두웠던 길이 이제는 의로운 태양에 의해서 환하게 밝아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아름다운 특징들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가장 큰 즐거움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열성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끌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 사랑을 조작하여 만들어 낼 수 없다.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마음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한일서 4:19.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새롭게 된 마음에는 사랑이 모든 행위의 원칙이 된다. 사랑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감정을 지배하며, 정욕을 제어하고, 증오심을 사라지게 하며, 정신을 고상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에 품으면, 우리의 생애는 즐겁고 유쾌한 것이 될 것이며,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감화를 끼치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두가지 위험이 있다. 그 하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방법으로서, 자신의 행위와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지키는 일을 자신의 힘으로 행함으로써, 경건하고 거룩하여지려고 하는 자는 전혀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다. 먼저,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 자신의 열심으로 행하는 모든 일은 이기적이고 더러운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에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행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행위마다 이기심과 불순한 죄로 더럽혀지게 된다.


두번째는 위에서 말했던 위험과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오늘날 기독교계에 매우 편만한 믿음인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벗어난다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 즉,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이요, 우리의 행하는 바는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든지 지키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상이다.


이 문제를 말하는데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순종”이라는 것은 단지 외모적으로 행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행하는 봉사과 충성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표현이며, 사랑의 대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늘과 땅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하나님의 마음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에 심어진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지 않겠는가?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져서, 우리가 창조주의 형상대로 새로워지면,“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고 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히브리서 10:16). 그리하여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생애 가운데서 실천되고, 또한 생애를 꼴지워가지 않겠는가? 순종 - 사랑으로 하는 봉사와 충성 - 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참된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경에는“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라는 말씀과,“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한일서 5:3, 요한일서 2:4). 믿음은 사람을 순종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종하므로 구원받는다고 말해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구원은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되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종은 믿음의 열매이다.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느니라.”요한일서 3:5-6. 이것이 참된 증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면, 우리의 감정과 사상과 목적과 행동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한일서 3:7. 의(righteousness)는 십계명에 표현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표준에 따라 판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고 참람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에베소서 2:8. 그러나“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7. 우리는 이 두 성경절에서 은혜, 믿음, 행함, 그리고 구원에 관한 균형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오래 전에 말씀하시기를“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하였다(시편 40:8). 그리고 그분께서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5:10). 또한 성경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르라고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한일서 1:3-6

 

 

믿음과 행함의 함수관계

 

 

믿음과 행함의 노를 함께 젓지 못하면, 우리가 타고 있는 신앙의 배는 균형을 잃고 제자리를 맴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16.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행함은 중요한 것이 아니죠. 믿음만이 구원을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있는 진리입니까?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말은 우리 모두에게 믿음과 행함의 균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3:18.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말씀을 행(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만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행하고, 진리 안에서 그분과 함께 동행할 때에만, 우리는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그분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게 행(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데,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우리의 간구에 대해서 응답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믿음, 믿음, 오직 믿음만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 허탄한 사람들아,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야고보서 2:19-20.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생명력을 잃어버린“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우리 자신의 몫을 신실하게 행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게으름 속에 눌러 앉아 있어서는 안되며, 어떤 굉장한 기적을 막연하게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길 가운데 분명하게 놓여 있는 의무와 책임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투쟁, 노력, 그리고 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디모데전서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서, 투쟁하고 노력하며 수고해야 하며, 영생으로 향하여 있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깨끗한 생활과 순결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강하신 손을 뻗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의 원칙과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행하는 자들에게 깨끗한 마음과 순결한 동기를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과 사도들의 믿음을 볼 때에, 우리는 죽음의 순간까지 계속되는 그들의 투쟁과 노력과 수고를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간증을 최후의 순간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후서 4:7-8. 믿음을 고수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싸움이 있고, 기울여야 할 노력과 수고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을 사용하여 싸워야 할 투쟁의 심각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브리서 12:3-4. 우리의 믿음은 죄와 더불어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우리 자신을 격려해 주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함께 가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애 속에는 이 둘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함이 죽은 것인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행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선한 행위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은 사랑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행함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행)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한복음 14:15.

진리 밖에 있는 믿음의 위험성

우리의 믿음은 성경의 원칙과 진리 위에 세워져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진리 말씀의 토대 위에 올바로 세워지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은 인간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 될 것입니다. 믿음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의 간증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으니”사도행전 26:9. 바울은 자신이 잘못된 믿음을 근거로 해서 열심을 내어 일을 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일에까지 동조하게 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기 전의 바울의 믿음은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믿음과 소신은 성경으로 증명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강력한 소신과 열심을 다하여 행하였지만, 그의 그러한 믿음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향한 핍박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잔인한 박해 행위에 앞장서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는 알지 못하고 행하였더니”디모데전서 1:13. 믿음이 진리 밖에 있을 때에는“알지 못하고 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만 합니다. 어떤 것을 믿음으로 행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믿음이 진리 위에 올바로 세워져 있는가를 성경으로 확인해야만 합니다. 믿음이 진리 위에 세워져 있는가 또는 진리 밖에 세워져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믿음을 진리 위에 세우게 되었는데, 그때에야 비로서 그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핍박자에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믿음을 진리 위에 세움으로써, 이 세상이나 죽음이라도 흔들 수 없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행함의 완전한 균형

그리스도인의 신앙 속에는 믿음과 행함이 반드시 균형지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선한 행위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성품과 생애를 완전하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하늘 아버지의 뜻(성경 말씀)과 그것에 대한 순종(행함)에 대한 설명없이,“믿으라, 믿으라,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고 외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가르침 입니다. 믿음에 대한 오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가르침 속에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생활 속에서 편히 안주하게 만드는 위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동의하기만 하면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사도 바울의 지적을 경시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로마서 2:12.

믿음을 설명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절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0.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절을 말하면서“믿으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복음 3:36. 이 말씀은 믿음과 행함에 대한 균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지만, 그분의 말씀을 순종(행함)치 않을 때,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이 오해할 수 없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만 진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진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진리를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생활과 성품을 통해서 증거될 만큼 활동적인 것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여러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예수께서 그대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라”라는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께서 동일한 질문을 받으셨는데, 그분께서는,“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때 예수께 질문 했던 사람은“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누가복음10:25-28).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마음과 정신의 법칙 입니다.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우리의 애정의 표현을 어떻게 막을 수 있습니까?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져 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진리에 대한 동의 뿐만 아니라 순종을 동반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믿음의 결과로서 따라오는 행함과 순종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 행함을 통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지만, 참된 믿음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경건한 행실과 순종을 열매로 맺는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 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4.

믿음과 행함의 함수 관계를 증명하는 성경절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디도서 1:16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야고보서 3:14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야고보서 3:21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한일서 2:3-4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야고보서 1:22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요한계시록 22:14(영어성경 번역)

 

출처: http://cafe.daum.net/chang6254

 

출처 : 오네시모의 블로그
글쓴이 : 이상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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