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신앙관!

[스크랩] 헌신과 변화와 개혁(롬12:1-2)

하나님아들 2013. 5. 1. 17:06
(이글은 성서마당 52호[2002년 1월호] `설교를 위한 성서연구`[신약]에 실렸다) -심상법 교수-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서 1장 8절로부터 시작되어 15장 13절에 끝나는 로마서의 몸말(main body)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졌는데, 전반부인 1-11장이 교리부분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후반부인 로마서 12장 1절-15장 13절은 윤리적 부분이다. 이 둘은 바울 신학(복음)에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이제 바울은 로마서 12장 1-2절을 통해 복음의 윤리적인 면 곧 실천적인 삶의 모습을 소개한다. 1-11장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긍휼)를 설명한 다음 이제 그 은혜(긍휼)를 받은 신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11장 33-36절에서 신학의 종결로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반응을 예배의 삶(영광송)으로 서술하였는데 이 예배의 삶은 12장 1절-15장 13절에서 헌신과 하나님의 뜻에 따른 내적 변화와 봉사의 삶으로 귀결된다.

어느 시인은 미래의 희망은 (변질이 아니라) 변화라고 하였다. `변화`와 `개혁`은 21세기의 화두(話頭)이다. 경제계와 정치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는 변화와 개혁 없이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만이 21세기의 무한경쟁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이러한 급변의 세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변화의 의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상고할 로마서 12장 1-2절의 주제도 `[내적] 변화`와 `[삶의] 개혁`이다. 변화와 개혁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1세기의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한 화두였다. 1세기 로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은 세속의 중심국가인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내적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삶의 중심에는 예배의 변화가 있다. 교회역사를 보면 한 시대의 개혁에는 예배의 개혁이 그 중심에 서 있음을 본다. 이제 본문에 대한 설교를 위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1절을 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절)

"그러므로"(oun)로 시작된 바울의 권면은 하나님의 자비(긍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로워진 그리스도인의 삶은 헌신과 변혁의 삶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삶의 견고한 기초는 하나님의 자비(긍휼/은혜)이다. 바울은 이 자비(긍휼)에 대해서 이미 1-11장을 통해 잘 설명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유래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권면을 이 자비를 통해 호소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자비`(mercies)를 복수로 표현함으로써 그것의 다양한 면을 강조하고 있다(한글 개역성경에는 "모든"으로 강조하였다).

바울이 하나님의 자비(`복음`)에 근거하여 권면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으로서의 이 헌신은 본문의 표현대로 `전체적인` 헌신("너희의 몸")이며, `살아있는`(living) 헌신이며, `거룩한`(holy) 헌신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을 말한다.

이 헌신은 무엇보다도 삶의 예배(life worship)를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예배는 구약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배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죽은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을 산 제물(living sacrifice), 즉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이미 서신의 앞 부분(특히 6장)에서 권면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은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의 죄의 몸이 죽었고,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살았다. 너희의 몸은 더 이상 죽을 몸이 아니라 살 몸(부활할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산 너희는 너희의 거룩한(구별된)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살아있는 예배자, 즉 삶의 예배자(영적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이러한 예배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영적 예배"(벧전 2:5)라고 하였다.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이 권면하는 이 `삶의 예배`는 유대적(구약적)이고 이교적인 예배와는 완전히 다르다.

1) 유대적 예배(구약적 예배)와는 달리 바울이 말하는 이 예배는 더 이상 죽은 제물이 필요 없다(contra Jewish worship). 이 예배는 우리 자신, 즉 우리의 몸이 살아있는 제물(`산 제사`)이다. 그 이유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속죄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위에 우리의 삶(몸)으로 드려야 할 예배이다.

2) 뿐만 아니라 이 예배는 이해할 수 없이 비밀스럽고 은밀히 드려지는 이교적 예배와 다르다(contra pagan worship). 1절 마지막에 이 예배를 `영적 예배`(spiritual worship)로 표현한 것은 의미상 소위 `신령한` 혹은 `신비한` 예배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여기 한글로 번역된 `영적`이란 헬라어 단어(logiken)는 그 의미가 다소 논란을 야기하는데 NIV, NRSV, NASB는 "spiritual"로 번역하고 있고, KJV는 "reasonable"로, TEV는 "true"로, 그리고 REB는 "offered by mind and heart"로, Philips는 "intelligent"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지각 있는", "이해할 수 있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삶으로 드리는 이 예배는 이교의 예배처럼 더 이상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없게 은밀히 드리는 폐쇄적인 비밀 예배가 아니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예배로 세상사람들의 눈에 삶(의 모습)으로 공개되는 (알려지고 맛보는) 열린 예배이다.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등경 위에 두어진 등불`처럼 세상의 빛으로 우리의 삶이 세상 속에 드러나는 예배를 말한다. 어둡고 더러운 채로 세상에 은폐되거나, 세상에 숨길 수 없는 철저히 공개되는 투명한 예배를 말한다. 그리고 `세상의 소금`으로서 세상의 사람들이 맛보아 알 수 있는 삶의 예배이다(마 5:13-15). 한 마디로 삶의 모습으로 꽃피워지는 예배이다(롬 12:2c- 15:13).

이 삶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예배이기 때문에 그 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사는 삶을 말한다(2절). 이러한 삶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내적 변화를 추구하는 삶이다. 2절 말씀을 보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2절).

1.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변질되지 말라→세상과의 관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상의 중심 국가(로마제국)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로마제국의 세속적 가치를 따라 살지 말 것을 촉구한다. 로마제국이 말하는(노래하는/깃발을 드는/외치는/유혹하는) 공약(空約)과 환영(幻影)을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한다. 모든 것이 로마로 통하는 시대에 로마 제국의 가치를 따라 살지 말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는 가는 곳곳마다 길을 닦고 경기장, 극장, 공중 목욕탕을 지었다. 로마가 가는 곳에 새로운 도시가 생기는 붐(boom)이 일어났다. 모든 세속적 가치의 중심이 로마를 향하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로마 하에서의 평화`(PAX ROMANA)를 부르짖는다. 로마제국의 기치는 로마화(romanization)만 되면, 행복과 평안과 즐거움과 번영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환영(幻影)이고 우상(偶像)이다.

여기에 바울은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화(christianization)되면, 즉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면`이라고 말한다. 복음만이, 믿음만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킨다(롬 1:15-17).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로마에 사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의 가치로 변화되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복음)으로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면`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절대적 진리나 참된 가치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는다. 번영, 행복, 즐거움(쾌락), 편리함, 건강, 장수, 아름다움(美)만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로마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와는 달리 참된 가치(진리)에 대하여 말한다(롬 1:18-32를 보라). 그리고 믿음만이 이러한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히 11장), 참된 가치를 본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 1:17). 우리는 과연 이 복음을 받았는가? 이 복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는가?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는가?

지금도 이와 유사하다. 21세기는 우리에게 첨단 기술문명을 통하여 장미빛 복지국가, 번영국가를 제공하는 것처럼 말한다. 새천년이 시작되었을 때 매스컴은 디지털 시대, 지놈 과학, 나노기술, 꿈의 가상국가 `e-유토피아` 등을 언급하면서 축제, 호황, 안전성장, 회복, 대박 등의 낙관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후에 우리는 새로운 전쟁의 소문으로 세계가 경악하게 되었고 경제는 바닥을 치며 정치는 오리무중이며 교육은 방황의 늪에서 벗어나올 줄을 모른다. 이처럼 21세기에 들어선 우리는 가치변화의 혼돈 속에, 가치변화의 빅뱅 속에 살고 있다. 여기에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고 말한다. 어떤 변화를 말할까? 새 천년의 시작에 이 세상, 이 세대만 따라가면(본받으면) 참다운 유토피아는 오는 것일까? 옛 말이 "남이 [시]장에 가면 거름 지고(거름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간다"는 말이 있다. 21세기의 첨단 기술문명(물질문명)이 말하는 대로 가면, 말하는 것을 따라서 행동하면 참된 행복이 우리에게 찾아올까? 과연 허기지고 목마르지 않는 삶,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삶이 주어질까? 과연 이것이 i세대(1994년 이후에 태어난 세대)의 보장된 미래일까? 본문(2절)에서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경고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본받지 말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scheimatizomai`로 표현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의 행동을 이 세대의 표준[가치체계]에 맞추어 살지 말라"(Louw-Nida), 혹은 "너희의 행동을 이 세대와 같이 바꾸지 말라"(Friberg), 혹은 "이 세대가 추구하는 양식을 따라 살지 말라"이다. 세상의 형적(form, 껍데기)을 따르는 삶(고전 7:31,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 즉 가치의 변질(變質)을 경고한 말씀이다. 도래한 새 천년은 어쩌면 과거(의 이념)보다도 더 이념적이다. 눈에 보이는 흑과 백으로 나누어지는 세계가 아니라,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칼라(colour)의 시대이다. 모든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시대이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 놓으면 `절대적 가치`가 없는 무가치(無價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에는 절대적 진리(眞理)란 없고 오직 하나의 견해, 즉 일리(一理)만 존재할 뿐이며, 절대적 진리(眞理)를 주장하면 그 사람은 무리(無理)한 사람으로 간주한다. 세상(가치)의 변화(상대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세상의 껍질들이 마구잡이로 바꾸어지기 때문에, 가치에 대한 논란을 하지 못한 채(상고 없이) 우리는 무가치와 상대주의의 블랙홀 속에 빠져서 살아간다. 이런 세대에 우리는 바울이 경고한 것처럼 "형적처럼 지나가 버릴"(고전 7:31) 이 세대(의 가치)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2.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라: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라→하나님과의 관계
여기서 말하는 변화(transform)란 질적 변화를 말한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metamorphoomai`라고 표현되었다. 이 단어(morfh|, [빌 2:6, 7])는 신약에서 변모기사(마 17:2; 막 9:2)와 고린도후서 3장 18절("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에 나타난다. 즉 근본적 변화 혹은 본질적 변화를 말한다. 마음의 변화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에 걸맞는 변화를 말한다. 때론 성경에서 이 단어가 속 사람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변화는 이 세상의 변혁자로서 크리스천의 삶의 근본이다. 내적 변화 없는 개혁은 구호(口號)와 공약(空約)에 불과하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개혁을 외치는 개인과 공동체의 문제는 바로 이 내적 개혁이 없기 때문이다. 개혁(갱신)의 대상에 있는 사람들이 개혁(갱신)을 외치는 것이 문제이다.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세상의 개혁이 이루어진다. 마음의 변화, 내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만이 세상의 변혁자가 될 수 있다. 쓰임 받는 일군이 될 수 있다. 교회가 요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다. 조그마한 일에서 세속에 물들기보다는, 변질(變質)되기보다는 변화(變化)의 삶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마음의 심지를 굳게 하라. 점수에 연연하는 사람보다는 정직한 사람, 요령을 피우는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 육체의 욕심을 따르지 아니하고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행 13:22)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와 같은 사람을 찾고 계신다(대하 16:9). 그(녀)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순결한 양심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롬 12: 2) 사람 말이다.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새해에 다시 한 번 우리는 항상 마음이 하나님께 열려있도록(눅 24:45). `미련한 마음`(롬 1:21), `정욕의 마음`(1:24), `상실한 마음`(롬 1:28)을 갖지 않도록. 둔한 마음, 어두운 마음, 강퍅한 마음(롬 2:5)을 갖지 않도록 기도하자. 마음이 부패해지지 않도록(고후 11:3,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부드러운 마음, 가난한 마음, 깨끗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자.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우리의 예배도, 삶도 무너진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변화 앞에 서 있다.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도태되어 버린다. 변화의 파고가 무섭게 몰아친다.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변화해야 할 것인가? 변화와 변절 혹은 변질(맛이 갔다?)은 다르다. 시대의 물결을 따라 마냥 흘러 갈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혁자가 될 것인가? 새 천년의 시작을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이 시간은 정말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우리는 어떤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다시 한 번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자. 로마화(romanization) - ­우리에겐 세계화­ - 의 거센 파고에서 그의 이 권면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