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중생 사상의 구약 성서적인 배경

하나님아들 2013. 3. 19. 14:54

중생 사상의 구약 성서적인 배경


     
배재욱

 

 




중생 개념은 이교 세계에도 유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중생 개념이 “밀의종교의 제의” (Mysterienkulten)와 관련되어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1) 대부분의 밀의종교의 증거들은 신약성경의 본문들보다도 시기적으로 늦다.2) 더 나아가 중생을 단지 요한이나 바울의 신학적인 진술로만 보고자 하는 시도도 역시 중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있다.
중생은 구약 성서적-유대교적 배경에서 유래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올바른 중생 이해를 위해 구약 성경과 고대 유대교의 문헌에서 중생의 배경을 찾아 그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특히 에스겔의 예언과 시편의 기도자가 올바른 중생 이해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 역할을 밝히고자 한다.3)


1. 구약성경에서의 중생 사상의 배경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은 죽음을 통해 영생으로부터 분리되었다(창 3:22-24).4) 창  3:1-19에 따르면 인간은 그의 죄 때문에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므로 죽음이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형벌로서 오게 되었다(창 2:16f.; 3:17ff.). 바울도 역시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롬 5:12-14). 모든 사람이 죄의 본성 속에서 태어나므로 죽음과 만날 수밖에 없다(창 2:17; 3:19; 비교. 잠 8:36).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땅에 쏟아져 누구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존재이다(삼하 14:14a). 그 누구도 죽음의 날을 거부할 수 없다(전 8:8). 하나님은 죄인들에게서 생명을 영원히 치워버리기를 원치 않으시고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어긋나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비교. 삼하 14:14b).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주시기를 원하신다.5) 그는 생명의 샘(םייח רוקמ 시36:10)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생사상과 관련되어 진다.
구약에서 생명의 부여자는 항상 하나님 혼자이다. “중생 개념”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되어 진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주제에 대한 구약성서적인 입장은 이러한 전제 아래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 죄 용서, 씻음 그리고 성령수여는 생명개념과 관계되고 있고 이 생명개념은 “중생”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중생 개념이 하나님의 구원동과 만나게 된다. 왜냐하면 이 구원행동은 인간의 중생과 함께 성취되기 때문이다.
시 116:8에서 기도자는 죽음의 곤궁으로부터 구원되었음을 말한다.: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 하셨도다.” 여기서 곤궁은 죽음의 한 종류, 즉 죽음과 같은 고통을 의미한다. 그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으로 묘사되고 있다.6) 시30:3도 이와 비슷한 시각으로 인식되어 진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기도자가 곤궁함 때문에 잃어버리고 또 그것으로부터 풀려남을 통해 다시 얻게 되는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 어떻게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는가?
“생명”이란 말은 독일 말에서 하나의 광범위한 의미세계를 포함하고 있다.7) 이 말은 실체가 있는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 앞에 있는) 상태와 계속됨을 (하나의 긴 생명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각각의 비밀스런 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힘은 단순한 존재(Dasein)로부터 실제적인 생명을 만드는 살아 있는 존재로 어떤 본질을 만드는 것이다. 구약은 그 생명의 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8)  구약의 증언에 따르면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창 2:7).
그러나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창 3:22-24); 비교. 겔 18:20). 죽은 자들은 더 이상 살수 없고 죽은 자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억누르고 그들에게서 생명을 취했기 때문이다 (사 26:14; 그러나 26:19과도 비교하라).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때(시 51:9,11), 인간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생명의 힘을 다시 얻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의 샘(시 36:9)이고 구원의 즐거움(시 51:12)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편의 기도자는 하나님의 씻음을 간구하고 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고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게 되리이다” (시 51:7). 하나님은 씻음을 통해 인간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신다 (시 51:12; 겔 36:25f.).
겔 36:17,19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적인 행동 때문에 땅이 더럽혀졌다. 그래서 땅이 “속죄”되어야만 한다.9) 이스라엘의 새롭게 됨에 대한 약속이 겔 36:16-38에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갱신(Erneueung)이 겔 36:25에서 하나님의 씻음으로 시작된다. 이것이 신약의 중생 개념의 중요한 이치이고 근거가 되고 있다(겔 36:25-28). 베츠 (O. Betz)는 구약에서 말하는 정결을 “내면적이고 표면적인 정결이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10)라고 표현하고 있다.
겔 36:25-27은 미래적인 정결과 백성의 구원에 대한 예언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정결을 위한 본보기를 만들고 있다.11)
겔 20:9,14,22이 이미 증거하듯이 에스겔은 36:25-27에서 여호와가 이것을 지금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행할 것이라고 말한다.12) 겔 36:25-27에 의하면 백성이 새롭게 되기 위한 3가지 단계가 있다. 그것은 1) 더럽혀진 행위들을 하나님이 정결하게 하는 단계,13) 2) 인간의 마음속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선물하는 단계와 3) 여호와의 영의 작용에 의해 마음속에 새로운 본질이 만들어 지기 위한 충분한 힘을 선물 받는 단계이다. 하나님은 정결케 하는 행동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물을 뿌려(קרז) 그들을 소생(蘇生)시키고 그들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창조한다.
겔 36:25에 따르면 물이라는 상징 언어로 표현되는 성령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정결케 한다(רהט).14) 정결에서 “뿌림”이란 뜻을 가진 קרז 동사를 이용하고 있다. 이 동사가 출 24:6과 레 1:5,11 등등에서는 피를 뿌림과 관련되고 있다. 피를 뿌림에서 그 동사는 제의적-제식적 행동(kultisch-rituellen Akt)에 초점이 주어진다. 겔 36:25f에서는 그 제의적인 정결이 물을 뿌림과 관련되어 인식되고 있다.
칠십인 역에서 רהט와 그것의 파생어(派生語)들의 대부분은 καθαρός와 καθαρίζειν으로 번역되어 진다. 하나님의 정결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인 정결이 일어나게 된다.15) 그 후에 인간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적인 정결로 중생을 경험할 것이다.
겔 36:25의 정결케 하는 물이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16)과 관련된다고 보고 있는 비덴그렌(G. Widengren)의 가정을17)짐멀리(W. Zimmerli)는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18)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비덴그렌의 가정은 설득력 있게 보여진다.
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 물은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다(겔 47:1). 이 물은 생명을 주는 물이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다시 살아난다 (47:9). 이러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겔 47:12는 그 물이 성소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겔 36:25의 정결케 하는 물이 새롭게 한다는 관점과 그 물이 생명을 준다는 관점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일치하고 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왕상 8:13; 시 5:8; 79:1; 138:2; 겔 43:7f).19) 그러므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겔 47:1-12)이라는 상징을 통해 에스겔은 이 물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1QS 4:21에서 정결케 하는 물이 성령으로 나타난다. 1QS 4:21에서 보이듯이 겔 36:25의 물은 성령의 상징 언어로 생각된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들을 제거한다. 그는 죄악을 용서한다. 사람들은 이런 죄들을 자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다.20) 겔 36:25와 렘 33:8을 비교하면 두 구절 사이의 뚜렷한 구별이 인식되어 진다.

겔 36:25  렘 33:8
겔 36:25a
םירוהט םימ םכילע תקרזו
“그리고 나는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릴 것이다.”
렘 33:8a
                  יל־ואטח רשא םנוע־לכמ םיתרהטו
“그리고 나는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할 것이다.”21)
겔 36:25b.c

׃םכתא רהטא םכילולג־לכמו םכיתואמט לכמ םתרהטו
“그리고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다. 너희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숭배에서 나는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다.”22)렘 33:8b

    ׃יב עשפ רשאו יל־ואטח רשא םהיתונוע־לוכל יתחלסו
“그리고 나는 그들이 내게 범하여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다.”
                              
  렘 33:8에서 רהט와 חלס이 “정결하게 하다”란 의미와 나란히 사용되고 있다. רהט란 단어는 겔 36:25에서 “죄들을”이란 목적어를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רהט에 대한 구약성서적인 증거들에서 “제의적인 정결”과 관련되어 인식되고 있다.23) 하지만 게세니우스 (W. Gesenius)24)는 겔 36:25에서의 רהט를 도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רהט에 대하여 말하고 표현한 곳에서 רהט의 뜻의 도덕적인 의미는 단지 제의적인 의미에서의 정결에 대한 파생어 (派生語)임을 알 수 있다.25) 종종 רהט가 제의적인 의미에서 어근 אמט와 함께 같이 사용되어 진다. 히브리어 אמט는 “더러운 것에”, 즉 “제의적인 무능력에” 관련된다. 민 9:13에 따르면 정한 사람은 유월절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므로 대하 30:17f.에 따르면 누구든지 불결하면 유월절 양을 먹으면 안 되었다 (스 6:20).
민 8:5-22에서 정결에 대한 특별한 방식이 레위인 임직예식과 관련된다. 레위인은 백성들로부터 먼저 구별되어 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이다(민 8:14). 그들은 먼저 그렇게 함으로써 거룩한 직무를 행할 수 있었다. “정결”은 일반적으로 죄 용서와 관련된다.
겔 36:26에서 여호와가 홀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즉 새롭게 창조한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줄 것이다. 그리고 새 영을 너희의 속에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의 육신으로부터 돌과 같은 마음을 빼어낸 것이다. 그리고 너희에게 살과 같은(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26)

이러한 일을 인간이 스스로 야기할 수는 없다. 겔 36:26은 렘 31:31-34의 약속에 일치하고 있다. 겔 36:26에서 핵심어(Stichwort)는 “새로운”이란 말인데, 겔 36,26에서는 “새로운”이 “여호와가 바꾼 마음”과 함께 나타나는데 반해 의미하는데 반하여, 렘 31:31에서는 “계약”과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겔 11:19에서도 역시 “새롭게 됨”에 대한 같은 표현이 이미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새롭게 됨이란 표현을 통해 말해지는 “새 창조”는 여호와에 의해 사람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 돌과 같은 마음과 살과 같은 마음이란 이 두 가지의 마음에 대한 그림언어를 통해 겔 11:19가 36:26에서 설명되고 있다. 여호와는 추방된 자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기를 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금의 마음은 돌과 같이 차갑고 무정하지만 그들 스스로 그러한 마음을 변화시키기에는 그들이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슴 속에 살과 같은 마음, 즉 다정다감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새 마음이고 지금의 마음과는 반대의 종류이다.”27) 여기서 새 마음과 새 영은 여호와의 선물이다.28) 영은 여기서 인간의 내면적인 본성을 바꾸는 하나님의 의지를 실행하는 추진력 있는 힘으로 다가온다(비교. 37:14). 그 이유는 사람은 아무것도 자기 스스로 발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29) 겔 36:26에서 인간의 내면적인 갱신 (更新)이 육체의 제의적인 정결(겔 36:25)의 결과로 일어나고 있다.
짐멀리 (W. Zimmerli)에 따르면 “돌과 같은 마음”은 순종으로 부르는 외침에 대하여 닫혀 있다.30) 그는 불순종에 대한 판결을 포로로의 추방과 관련하여 보고 있다. 계약을 맺는 유일한 이는 하나님 자신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기초자 역시 하나님 자신이다(비교. 창 17:2,10,13f; 출 34:10,27).
신 4:13; 5:2f 에 따르면 이 계약은 십계명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이 계약은 배타성을 요구하는 십계명의 첫 계명으로부터 설명되어 진다. “그래서 첫째 계명을- 그리고 둘째 계명도- 위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계약파기에 해당한다.”31) 이러한 불순종은 이스라엘이 자기의 하나님께 소속됨으로써 맺어진 계약법규를 파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약법규를 파괴했고 계약명령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러한 옛 계약과는 다른 계약이 겔 16:60; 37:26과 사 55:3에서 명백히 강조되고 있는데 이 새 계약은 영원히 지속되는 계약이다(םלוע תירב).32)
겔 36:27에서 말해지고 있는 새로움의 세 번째 변화는 - 돌로 된(굳은) 마음이 살로 만들어진(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 여호와가 인간에게 새 영을 주기 위한 기초가 되고 있다. 그는 여호와의 계명에 대해 순종할 수가 있고 그에게 새로운 본질이 주어진다면 그는 그 새로운 변화에 대해 적응할 수 있다. 레 26:3에서도 순종이 계명요구의 테두리 안에서 비슷한 낱말로 묘사되고 있다: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
예레미야는 인간의 마음속에 법도를 주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31:31-34). 겔 11:20에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말하지는 않고 있다. 그런데 겔 36:27은 하나님이 영을 선물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고 렘 31:31-34의 진술을 능가하여 인간의 순종에 대해서도 새롭게 나타내고 있다.33)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하고 있는 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씻음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죄 용서를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정결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취되고 있고 이 신적인 정결은 인간에게 새로움을 가져온다. 하나님의 영을 통해 성취되는 인간의 정결이 인간에게서 “중생”을 이루게 된다. 즉 인간의 내적인 정결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때 사람은 성령을 통해 “중생”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근거로 사람에게 성령을 주게 되는지를 질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 11:24f.에 따르면 여호와가 회막(Offenbarungszelt)에서 70인의 남자에게 하나님의 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러한 일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막에 나아가지 않고 진에 머물고 있는 두 남자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들도 예언하고 있다.34) 하나님이 자기의 영을 주는 동안 그들도 “새로운 존재”로 새롭게 된다. 민 11:24f.에 따르면 이 성령부여는 단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 밝혀진다 (비교. 삼상 10:5-13; 19:20-24; 아울러 비교. 요 3:8; 롬 9:16ff). 요 3:1f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의 영을 만민에게 주기를 원하고 있고, 행 2:17f에 따르면 이 예언이 오순절 날에 성취되고 있다. 이러한 사건이 요 3:8(τὸ πνεῦμα ὄπου θέλει πνεῖ)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즉 바람은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불듯이 하나님은 영을 하나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므로 생명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다.35) 오순절 사건은 새 창조와 중생이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만 성취되어짐을 가리키고 있다.
시 51편에 인간의 갱신에 대한 표상(表象)이 나타난다. 시 51:10-13에서 기도자는 자신의 갱신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전체의 고유한 자아 (Ich)의 극기(Selbstüberwindung)로는 조금도 의미가 없기 때문”36)에 사람은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하나님이여 나에게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그리고 항구적이고 새로운 영을 내 속에 가져오소서”(시 51:10). 인간적인 본성을 깊게 깨닫는 데서 새 마음에 대한 간구가 일어나고 있다(51:5-10). 하나님이 그의 의지에 따라 인간 속에 새로운 본성을 창조할 때  비로소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고유한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한 영으로만 이 일을 이룰 수가 있다. 그래서 시 51:12에서 기도자는 “주의 도움으로 나를 다시 즐거워하게 하시고 너그러운 영(הבידנ חור)으로 나를 부축해 주소서”라고 탄원하고 있다.
겔 36:25ff. 에 하나님이 장래를 위한 토대로 백성들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비교. 렘 31:31ff; 겔 11:17ff.). 시 51:10-12은 겔 36:25ff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으며, 새 마음에 대한 간구(시 51:10a; 비교. 겔 36:27)와 순종하는 영에 대한 간구37) (시 51:12-13; 비교. 겔 36:27; 렘 24:7; 31:33; 32:39)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겔 36:25-27과 시 51:5-13에 나타난 표현법과 구절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겔 36:25-27
        시 51:5-13 I. 정결
I. 정결
25a
םירוהט םימ םכילע תקרזו
“그리고 나는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릴 것이다.”  1b
                         ׃יעשפ החמ ךימחר ברכ
“주의 큰 자비를 따라 나의 죄악된 행위를 제거해 주소서.”
25b.c
   ׃םכתא רהטא םכילולג־לכמו םכיתואמט לכמ םתרהטו
“그리고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


이다.너희의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숭배에서 나는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다.” 2
               ׃ינרהט יתאטחמו ינועמ ינסבכ הברה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어주소서 그리고 나의 죄로부터 나를 정결케 하소서.”7
׃ןיבלא גלשמו ינסבכת רהטאו בוזאב ינאטחת              
“우슬초로 나를 죄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그러면 내가 정결케 되리이다. 나를 씻어 주소서! 그러면 나는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입니다.”
9b
                               ׃החמ יתנוע־לכו
“그리고 나의 모든 죄악을 제거해 주소서!”
II. 새 마음
II. “새 마음” 26a
                           שדח בל םכל יתתנו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새 마음을 줄 것이다.”10a
                        םיהלא יל־ארב רוהט בל
“하나님이여 나에게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26c
                  םכרשבמ ןבאה בל־תא יתרסהו
“그리고 나는 돌로 된(굳은) 마음을 너희의 육신에서 빼어낼 것이다.” 26d
                         ׃רשב בל םכל יתתנו
“그리고 너희에게 살로 된(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다.”
III. “새 영”

26b
                      םכברכב ןתא השדח חורו
“그리고 나는 너희 속에 새 영을 줄 것이다.”


   27a                   םכברקב ןתא יחור־תאו
“그리고 나는 나의 영을 너희 속에 줄 것이다.”

III. “새 영”

10b
                       ׃יברקב שדח ןוכנ חורו
“나의 [가슴] 속에 견실하고, 새로운 영을  주소서”38)

12b                      ׃ינכמסת הבידנ חורו
“그리고 너그러운 영을 통하여 나를 부축해 주소서!

IV. “계명의 성취”

27b
    ׃םתישעו ורמשת יטפשמו וכלת יקחב־רשא תא יתשעו
“너희는 나의 율례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규례를 존중하고 그것을 실행할 것이다”39)
IV. “계명의 성취”

13
          ׃ובושי ךילא םיאטחו ךיכרד םיעשפ הדמלא
“그러면 내가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범죄자 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겠나이다.”40)


H. -J. Kraus에 따르면 시 51편은 겔 36장보다 늦게 편집되었다.41) 시 51:10-12에서 부패한 속마음의 새 창조를 위한 간구가 나타난다(비교. 시 51:5). 10절은 ארב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ארב는 절대적으로 엄격하게 오직 하나님의 창조를 위해서 자리를 비워두고 있고 이 ארב의 주어는 항상 오직 하나님만이다.42) 이렇게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속을 새롭게 한다.43) 겔 36:25ff.에서 보면 마음의 정결이 예언적인 말 속에 공포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하나님은 이 마음을 정결케 하는 주체자이다. 시 51:10절에서는 이것과는 반대로 정한 마음이 시편기도자의 간구의 제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שדח가 “새롭게 하다”란 의미(비교. 시 104:30; 사 61:4; 애 5:21)를 가지지만, 영적인 자질의 회복은 영의 창조 활동에 의해 가능하므로, שדח는 ארב의 “창조하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 에스겔 36장 2-27과의 대조에서 보다시피 “뿌리고 정하게” 하는 제의적인 용어들을 통해 하나님의 새롭게 하는 창조 역사가 성전 의식과 관련되어 나타난다. 씻고 정결케 하는 행위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예언자들의 선포 속에서도 보인다 (비교. 렘 33:8; 겔 24:13; 36:25.33; 37:23; 말 3:3).
시편의 기도자는 단지 자기 마음의 정결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견실하고, 새로운 영”을 간구하고 있다. 10절에서 ןוכנ은 ןוכ (콘)의 니팔 분사인데 분사로써 “견고하게 굳건함”을 나타내고 있고 이 말은 일관성과 충성을 의미하고 있다. חור와 함께 영속적으로 항구적인 영을 의미한다. יברקב는 일반적으로 “내 속에”라는 말인데, 이 말을 통해 기도자가 자기의 가슴 속에 확고한 결단을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전치사 “버” (ב)를 통해 하나님의 영이 어떤 사람위에 부어 지는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고 본다.44)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은 외적인 연합이 아니라, 역동적인 하나님의 일로써의 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ןוכנ חור이 인간의 내면에 주어진 인간의 속성으로서의 영이 아니라 어떤 사람 위에 임한 견실한 하나님의 영일 것이다.45) 그러므로 이 일은 인간의 조건이 먼저 규정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되고 은혜로 이루어 질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의 본성위에 있다(비교. 시 51:5). 그러므로 인간을 정결케 하는(겔 26:25) 하나님의 성령(שדק חור)이 필요하다(비교. 시 51:10; 겔 36:26). 시 51편에서 성령은 인간을 정결케 하고 그의 속에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힘으로 나타난다(겔 36:25). 그러므로 정결은 성령을 통해 일어난다. 이 정결은 중생관념을 위한 광의의 배경을 이룬다.
겔 36:26에서 새로운 마음의 선물과 새 영의 선물은 렘 31:31-34의 약속에 해당된다. 렘 31:31에서 표제어 “새로운”이란 단어가 계약과 결합되어 있다. 겔 36:27에서 חור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사람의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에스겔은 여호와가 스스로 자기의 חור를 사람의 마음에 둘 것을 예고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의 성령을 통해 인간이 순종할 수 있도록 한다(겔 36:25-27; 렘 24:7; 31:33; 32:39).46) 시 51:12b에 나오는 הבידנ חור는 ‘기꺼이 하는 순종의 부축해 주는 영’의 뜻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영이 시 51:10b에서는 “항구적인 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히브리어 여성 형용사 הבידנ는 동사 בדנ (강권하다/재촉하다/관대하게 대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강권하는/재촉하는/자원하는/자발적인/너그러운/관대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1절에서  שדק חור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뚜렷이 드러나지만 10절과 과 12절에서 חור (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 대두된다. 여기서 대두되는 질문은 ןוכנ חור과 הבידנ חור가 과연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인가 하는데 있다. 테이트 (M. E. Tate)는 당신의 “구원” (ךעשי)에 붙은 접미어를 앞 부분 ךעשי ןושש (당신의 구원의 즐거움)과도 연관해서 보지만 뒷 부분 הבידנ חור에도 관련짓는 해석 (주의 너그러운 영)에 동의 하면서 이 구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동사 ךמס (사마크)를 도우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동사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14절의 הבידנ חור에 대해서 이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주의 인도하시는 영’ (your guiding spirit)으로 번역하는 칠십인역의 읽기는 이러한 해석을 지지 한다”고 말하고 있다.47) 그러므로 시 51:10-12에 나오는  ןוכנ חור (10절), ך4שדק חור (11절) 그리고 הבידנ חור (12절)는 하나님의 영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고, 이 세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서 하나님의 영의 역할이 밝혀진다. 이 시 51:10-12의 기도자의 탄원은 겔 36:25-26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모습과 흡사하다. 에스겔의 예언에 따르면 하나님이 물을 뿌려 죄를 씻어 정결케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신다는 예고와 시편 51편에서의 기도자가 자기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인간성을 직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하여 “견실하고, 새로운 영”(שדח ןוכנ חור)과 “너그러운 영”(הבידנ חורו)을, 즉 하나님의 “거룩한 영” (당신의 거룩한 영: שדק חור)을 탄원하고 있다.
에스겔 36장과 시 51편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회복과 하나님이 영을 부여하신 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데 대한 언급이 평행을 이룬다. 즉 이 계명 실행에 대한 언급이 겔 36:27에는 예고로 나오고, 시 51:13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탄원자의 약속과 다짐으로 나온다:  “그러면 내가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도록 범죄자들에게 주의 길을 가르치겠나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정결케 함과 새 영과 새 마음을 부여한 뒤에 하나님의 영을 사람의 속에 두어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도록 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겔 36:27). 시 51편에도 보면 시편의 기도자가 자기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과 그의 영을 탄원하면서 주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길을 다짐 하고 있는데 그 평행이 다음과 같다:  
                                 ׃םתישעו ורמשת יטפשמו וכלת יקחב־רשא תא יתשעו 겔 36:27b
                                         ׃ובושי ךילא םיאטחו ךיכרד םיעשפ הדמלא 시 51:13

  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과 시편의 탄원은 신약 중생 사상의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적나라한 죄악된 인간 본성을 바르게 하고 정하게 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영을 통해 활동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영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 종말론적인 신약의 중생사상의 한 전형(vorbild)으로 보인다(겔 36:25ff; 시 51:10-12; 비교. 요 3:5-8). 겔 36:25ff.와 시 51:10ff.에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나타난다. 겔 36:25-27과 시 51:10-13은 새 마음이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이루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바이서 (A. Weiser)는 여기서 “중생에 대한 신약 성서적 사상의 구약 성서적인 뿌리”를 보고 있는데48) 그의 견해가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신약의 중생도 성령을 통해 성취된다.49)  구약성경에서 사람의 갱신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요 3:3-8에서 보면 이 갱신이 성령에 의해 성취되는 중생이란 용어로 성격지어지고 있다.

2.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아이가 모태로부터 태어나듯이 셔올(לאש)로부터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고 있다.50) 사 26:19에 이러한 모습이 그림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동시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היח와 םוק동사와 함께 말해진다.51) 이사야가 명백하게 말했듯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종말론적인 새 창조사상으로부터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새 창조사상과 중생이 출생시간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의 인간 창조에 관련되고 있다.52) 사 26:19에서 땅이 모태와 비유적으로 비교되고 있다: “땅이 죽은 자들을 낳을 것이다(내어주리로다).”
또한 비슷한 표현이 랍비유대교에서 발견되고 있다(b Ber 156). 이 고대 유대문헌에도 모태와 셔올(לאש)이 함께 분류되어 있고 서로 비교되어지고 있다. 여기서도 לאש이 그림 언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לאש은 모태가 신생아를 출생하듯이 죽은 자를 내어놓는다.53) 낳음과 태어남의 표상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 새 창조의 동기가 아담의 창조(창 1:26f.)나 겔 37(죽은 뼈들의 소생)에 방향을 두게 된다. 이러한 그림언어에서 중생사상과 부활의 표상이 근접하지만 양자는 개념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진다.
사 26:19은 티끌 (רפע)속에서 죽은 자의 부활과 그들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רפע는 ץרא와 비슷하게 가끔씩 “음부”의 의미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54) 사 26:19에서 땅이 모태로 묘사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소생하는 자들이 생명세계 안으로 태어나고 있다. 빌트베르거(H. Wildberger)는 사 26:19에서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에 관해 말한다: “그의 죽은 자들이 살아날 것이고, 부활할 것이고 그리고 소생할 것이다. 그리고 티끌에 거하는 자들이 환호할 것이다.”55) 여기서 비록 부활이 출생과 어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에 대한 부활이(또는 시체가 다시 살아남이) 모태에서 이미 살고 있는 어린아이의 출생에 대한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
היח와 םוק (호 6:2)56)와 ץיקה (렘 51:39.57: 헤키츠 - ץיק의 히필형으로 “깨어나다”)57)의 은유에서 죽은 자들이 다시 살게 되는 관념이 전제되어 질 수 있다.58)
ץיקה 동사의 뜻을 위해 빌트베르거 (H. Wildberger)는 죽음에 대한 그림이 잠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9) 이러한 그림언어를 통해 죽음 후에 일어나게 되는 실제적인 소생에 관한 이스라엘의 부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헬라어 “중생(παλιγγενεσία)”이란 단어에 해당되는 히브리어가 구약이나 고대 유대교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 26:19에도 부활 사상을 통해 “새 창조”(השדח האירב)는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으나 히브리어에서는 중생에 대한 말이 명백하게 개념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도 중생사상에 대한 암시는 볼 수 있다.

3. 구약의 배경 위에서 본 신약의 중생 사상

신약의 중생사상은 성령을 통한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한 전형(vorbild)으로 보인다(요 3:5-8; 딛 3:5ff.; 비교. 겔 36:25ff; 시 51;10ff.). 요한복음의 중생은 요 3:1-21에 나타나고 있다. 요 3:3에서 중생이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60) 이란 말로 나타난다. 이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은 이중의 의미, 즉 “1. 위로부터의 태어남’또는‘새롭게 태어남’ 2. 다시 태어남’”으로 이해된다.61) “위로부터 난 태어남” “새로운 탄생”이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요 3:3.7의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의 의미가 요 3:5에서 γεννηθῆναι ἐξ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와 관련되어 밝혀진다. 즉 중생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서 물은 성령을 상징하므로 γεννηθῆναι ἐξ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는 성령의 활동으로 태어남을 말하고 있다.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의 뜻이 요 1:13에서는 ἐκ θεοῦ γεννηθῆναι로 나타난다. 딛 3:5ff에도 중생의 의미가 “하나님의 긍휼하심”, “성령의 새롭게 하심” (ἀνακαίνωσις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과 관련되어 “중생의 목욕” (λουτρόν παλιγγεσίας)이란 말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행동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중생은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의해 일어나므로 땅에 속한 일 (ἐπίγεια: 요 3:12a)이 아닌 하늘의 일 (ἐπουράνια: 3:12b)이다. 요한은 γεννῆθηναι ἄνωθεν이란 말을 통해 중생을 종말론적인 현상으로 말한다. 성령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이 중생은 성령의 기적적이며 창조적인 활동(또는 기적적인 창조활동)에 의해 성취된다.62)
그러므로 신약의 중생은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사건으로 ‘근본적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전환을 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되어 있다. 인자는 유일하고 참된 중보자로서 자신의 높아짐을 통해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한다 (요 7:39). 민 21:4-9과의 유비 속에서 요 3:13-14는 인자의 높아짐을 구원론적인 의미로 나타낸다.

4. 결  론

창 3:22-24에 따르면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되어 영생에서 분리되었다.63) 전 8:8에 따르면 사람은 아무도 자기의 죽는 날을 주장하지 못한다. 단지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다(삼상 2:6; 시 104:30; 비교. 요 10:10; 행 17:25). 시 116:8에는 죽음에서의 구원이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짐을 언급하고 있다(비교. 시 30:3).64)
“생명”은 한 존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능력이 된다. 구약에 의하면 이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기원되고(창 2:7) “생명”의 능력은 긍정적이지만 인간의 범죄 때문에 죽음이 사람들을 지배하게 된다(창 2:17; 3:19).65)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를 씻어 주실 때라야 인간은 신적인 구원의 기쁨을 다시 얻을 수 있다 (시 51:10ff.). 시 51:10과 겔 36:25f에 따르면 사람은 하나님의 정결케 함을 통해 새 마음을 얻게 된다. 여기에 새 창조에 대한 약속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결케 함에 해당한다(겔 36:25). 이 정결은 중생의 관념에 대한 중요한 뿌리도 된다.
겔 36:25의 정결케 하는 물은 겔 47:1-12에 나오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과 동일한 물로66) 성령을 상징하고 있다. 겔 36:25에 따르면 하나님이 물이라는 그림언어로 그려지는 성령으로 정결케 함으로써(비교. 1QS 4:21) 사람은 내적인 정결의 상태를 이룰 수 있다.67) 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내적인 정결은 사람에게서 “중생”을 이룬다. 겔 36:25은 물, 즉 성령은 정결을 통해 죄인의 갱신, 즉 신약의 중생을 가능하게 함에 대한 구약성경적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여호와 홀로 사람을 개조(改造)할 수 있다(겔 11:29; 36:25; 렘 31:31-34). 갱신 (更新)된 인간에게 주어지는 새 마음과 새 영은 여호와에 의해 선물되어지는 것이다(비교. 겔 37:14).68) 구약에서 “영”은 새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시 51은 중생사상에 대한 더욱 광범위한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기도자는 시 51:10-12에서 자기의 갱신과 허물어진 자기 내면의 새 창조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여기서 ארב라는 동사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하는 힘이 회상되고 있다.69) 시 51:10은 특히 기도자의 정결한 마음에 대한 간구가 표현되고 있다. 하나님을 통해 사람의 내면이 새로워진다. 겔 36:25ff.에서는 하나님이 ‘마음을 정결케 하는 주체자’로 묘사되고 있고, 시 51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정결케 하는 “항구적인 영”70) (비교. 시 51:10)의 부여자로 나타나고 있다.
겔 36:25는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위에 물을 뿌리는지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갱신시키기를 원한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정결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물로 씻는 외적인 정결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새 영을 주고 그것으로 인간의 내면도 아울러 씻어줌으로써 정결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새 영을 가진 마음은 새 마음이다. 그것이 겔 36:26에서는 살로 만들어진(부드러운) 마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겔 36:27에 따르면 חור는 여호와의 뜻에 순종하여 그것을 실현하도록 마음속에서 사람을 충동질한다.71) 하나님의 “정결케함”을 인하여 사람에게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이 새 영의 선물로 사람에게 주어진다.
겔 36:25ff.와 시 51:1ff.에서 중생이 새로운 영을 통해 성취되어짐을 예고하고 있다. 이 새로운 영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말론적인 새 창조는 중생의 전형(Vorbild)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구약성서적인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되어 있고(비교. 요 3:13-15),72) 겔 36:25-27과 시 51:10-12는 하나님의 은혜로 새 마음이 창조되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의 영”, “씻음”, “정결”, “하나님의 구원 행동” 그리고 “새창조” 사상 등은 신약성서의 “중생”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구약적인 배경이다.

장신대 초빙교수


요약

신약의 중생사상은 “밀의 종교의 제의” (Mysterienkulten)의 배경이나 밀의 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유래 된 것도 아니고 희랍 철학이나 종교와의 관련 속에서 유래 된 것도 아니다. 신약의 중생사상은 구약과 유대교의 배경 위에서 유래 되었다. 이 글은 신약의 중생사상의 이해를 위해 그 배경을 어떻게 구약 속에서 찾는지 또 어떻게 연관 시키는 지를 밝히고 있다.  

1) 중생 개념을 밀의종교의 제의 (Mysterienkulten)와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R. Reitzenstein, Die Vorgeschichte der christlichen Taufe, Leipzig/Berlin 1929; Nachdr. Darmstadt 1967;  F. Wieland, Wiedergeburt in der Mithrasmystagogie und in der christlichen Taufe, in: A. Knönfler (Hg.), Veröffentlichungen aus dem Kirchenhistorischen Seminar München, III,1, FS A. Knöffler, München 1907, 329-348; Th. Söding, Wiedergeburt aus Wasser und Geist. Anmerkungen zur Symbolsprache des Johannesevangeliums am Beispiel des Nikodemusgesprächs (Joh 3,1-21), in: K. Kertelge (Hg.), Metaphorik und Mythos im Neuen Testament, QD 126, Freiburg/Basel/Wien 1990, 168-219를 참조하라.
2) H. Lichtenberger, Neuschöpfung und Wiedergeburt. Üerlegung zu ihrer eschatologischen Bedeutung im Neuen Testament, Öffentliche Antritts-Vorlesung (unveröffentlichte Arbeit), Tübingen 14.5.1986, 13.
3) 구약성서적-유대교적 배경과 함께 원시교회가 처한 환경과 신약성서 저자들의 신학도 함께 중생 개념을 위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구약성서적인 배경만을 다루기로 한다.
4) 비교. 겔 18:20: “범죄하는 영혼은 죽을 것이다” (תומת איה תאטחה שפנה).
5) 비교. 창 2:7; 삼상 2:6; 욥 27:3; 시 19:7; 30:4; 104:30; 비교. 요 10:10; 행 17:25.
6) Ch. Barth, Die Errettung vom Tode. Leben und Tod in den Klage- und Dankliedern des Alten Testaments, neu hg. v. B. Janowski, Stuttgart 1997 (Errettung, neu hg. v. B. Janowski), 11.
7) 한국말에서도 마찬가지로 생명은 하나의 광의의 의미세계를 가지고 있다.
8) Ch. Barth, Ibid. 19를 보라.
9) 쿰란공동체에서도 역시 이러한 사상을 인식할 수 있다. 땅이 불신앙 때문에 더럽혀 지게 되었다는 것이 1QS 8:6에 언급된다(비교. 1QS 9:4).
10) O. Betz, Die Proselytentanfe der Qumrangemeinde und die Taufe im Neuen Testament, in: ders., Jesus. Der Herr der Kirche. Aufsätze zur biblischen Theologie II, Tübingen 1990, 21-48 (21). 아울러 이것에 대하여 시 24:4와 사 1:10-17도 보라.
11) Ibid.와 비교하라.
12) W. Zimmerli, Ezechiel 2, BK.AT XIII/2, Neukirchen-Vluyn 1969, 21979, 878을 보라.
13) W. Gesenius, Hebräisches und aramäisches Handwörterbuch über das Alte Testament, bearb. F. Buhl; Nachdr. der 17. Aufl. 1915, Berlin/Göttingen/Heidelberg 1962, 271f. 에 따르면 רהט란 단어는 피엘(Piel)에서 “정결하게 하다”: 1) 말 3; 욥 37:21 2) 레위기적인 뜻에서는 a) “정하다고 하다” 레 13:6,13,17,23,28,34,37,59; 14:48; b) “정결하게 하다” 14:7,11; 땅을 정결하게 하다 겔 39:12,14,16.  3) 도덕적인 뜻에서 레 16:30; 겔 24:13; 37:23; 말 3:3; 렘 33:3; 겔 36:25,33; 시 51:4; 시락 38:10: “잘못됨이 없이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에서 모든 죄를 씻어 버려라”. 이 벤시라의 지혜의 본문은 외경위경전서 상, 서울: 기독교문화사 1993, 1419쪽의 번역을 인용하다.  이것에 대해서는 H. Ringgren, Art. רהט, ThWAT III (1982), 306-315도 아울러 보라.          
14) 1QS 4:21f.와 비교하라. 일반적인 레위기의 정결법에 대해서는 fp 17-26장을 보라.
15) W. Zimmerli, Ezechiel 2, 878f.
16) 겔 47:1-12과 비교하라. 그것에 대해 W. Zwickel, Der Salomonische Tempel, Kaw 83, Mainz 1999, 133f. 와도 비교하라.
17) G. Widengren, The King and the Tree of Life in Ancient Near Eastern Religion (King and Saviour IV. UUA 1951,4), Uppsala/Leipzig/Wiesbaden, 1951, 36 Ann 2: "It would seem that the purification water mentioned Ez 36:25 is thought of as faken from this temple well."
18) W. Zimmerli, Ezechiel 2, 879.
19) 성전과 하나님의 관련에 대해서는 겔 43:1-5에서도 볼수 있는데 그곳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의 동문문을 통해 들어가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환상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비교. 겔 10:18).
20) G. Fohrer, Ezechiel, HAT 13, Tübing 1955, 204와 비교하라.
21) 번역은 나의 사역에 따른 번역임.
22) 번역은 나의 사역에 따른 번역임.
23) H. Ringgren. ThWAT III, 309와 비교하라.
24) W. Gesenius, Handwörterbuch, 271f. 와 비교하라.
25) H. Ringgren, Th WAT III, 309와 비교하라.
26) 번역은 나의 사역에 따른 번역임.
27) G. Fohrer, Ezechiel, 204와 비교하라.
28) W. Zimmerli, Ezechiel 2, 879와 비교하라.
29) G. Fohrer, Ezechiel, 204f와 비교하라.
30) W. Zimmerli, Ibid. 379와 비교하라.
31) 신 4:23; 17:2f; 29:8ff; 31:16,20; 수 23:16; 사 2:19f; 왕하 17:15,35ff. 등들과 비교하라. 위의 글의 인용은 W. H. Schmidt, Alttestamentlicher Glaube in seiner Geschichte, Neukirchen-Vluyn 1966; 61987; 81996, 161-166. תירב에 대한 구약성서의 개념은 “계약”이란 단어를 통하여 단지 불완전하게 묘사되고 있다.
   히브리어 תירב 는 확고하고 엄숙한 확언, 약속 또는 책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תירב는 맹세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시 89:3; 105:9; 수 9:15 등등).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은 하나님에 의해 과해진 약속이다(출 19:5; 24:7; 수 24:25; 왕하 23:3 등등). W. Gesenius, Handwörterbuch, 116f.에 따르면 תירב는 1) 어떤 축제의 예식을 통해 어떤 특별하고 인상적인 그리고 의무적인 특징을 얻게 되는 결정을 의미한다:        תירב תרכ (비교. 렘 34:18; 창 15:18).  2) (종교적인 언어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의무를 부과하거나 또는 하나님이 스스로 약속을 하거나 또는 양자가 함께 약속하는 것을 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한 개인과 함께 또는 이스라엘과 함께 맺는 계약을 의미한다(창 15:18; 신 4:31; 7:12; 8:18; 창 17:2ff. 등등). 3. 유대종교(신 11:28; 말 3:1; 2:14 등등). 4. “계약중매인(Bundesmittler)”(렘 42:6; 49:8); 계약에 대해서 W. H. Schmidt, Glaube, 81996, 161-166도 아울러 비교하라.
32) W. Zimmerli, Ezechiel 2, 878을 보라.
33) Ibid와 비교하라.
34) 이 70명의 남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속에 엄습한 영적인 과제들을 처리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다시 평화를 얻도록 일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영을 주었다.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대항하여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이끌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해야 했다. 민 21:24-30에서는 하나님이 70인의 남자에게 백성들을 위한 대표로 성령이 내리는데 반하여 욜 2:28-32에는 만민에게 성령이 부어짐이 나타나고 있다.
35) Ch. Barth, Erretung, 36f.와 비교하라.
36) A. Weiser, Die Psalmen, ATD. 14/15, Göttingen 61963; 71966, 275. 예레미야도 인간의 부패한 마음에 대해 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렘 17:9). 존 칼빈, 구약 성경주석, 서울: 성서주석간행사 1980, 468도 시 51:10절 해석에서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대해 말한다: 기도자는 “자기의 마음과 영이 약해져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마음과 영이 위로부터 무엇인가가 임하지 않으면 순결과 정직을 갖지 못한채로 남아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때 우리의 본성이 완전히 썩었음이 분명하다”.
37) H-J. Kraus, Psalmen 1. BK.AT XV/1, Neukirchen-Vluyn 61989, 541과 비교하라.
38) 히브리어 יברקב שדח ןוכנ חורו의 번역을 위해서 W. Gesenius, Hebräisches und Aramäisches Handwörterbuch über das Alte Testament, Berlin : Springer 1915; 171962, 216을 참조하라. 게세니우스 (W. Gesenius)는  שדח의 번역을 “새롭게하다” (erneuern), “[...]에 새로운 것을 회복하다” (aufs neue herstellen). 게서니우스의 설명에 의하면 시 51:10b에서의 שדח의 뜻이 “[...]에 새로운 것을 주다” (aufs neue geben)란 의미로 나오고 있다. A. Weiser, Die Psalmen, ATD. 14/15, Göttingen 251973, 270은 “그리고 저에게 새롭고 굳건한 영을 주옵소서” (und gibt mir einen neuen und festen Geist)라고 번역하고 있고 H. -J. Kraus, Psalmen 1, 539는 이 절을 “그리고 굳건한, 새로운 영을 저의  가슴속에 가져 오소서!” (und einen beständigen, neuen Geist bringe in meine Brust!)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같은 뜻으로 해석하고 있는 Oxford 번역본도 참조하라: “God, creat a pure heart for me a new and steadfast spirit”.
39) 번역은 나의 사역에 따른 번역임.
40) 번역은 나의 사역에 따른 번역임.
41) H. -J. Kraus, Psalmen 1, 541과 비교하라.
42) 위의 책 546과 비교하라.
43)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달라는 이 말의 밑 바닥에는 선한 의지를 지킬 수 있는 인간의 노력의 한계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표출되어 있고, 이것에 대한 극복은 하나님의 새로움에 대한 창조에 있음을 보개 된다. 인간의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도움으로 인간 자아를 극복할 수 있다. 기도자는 여기서 한번 기계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영과의 외적인 연합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 삶이 항구적으로 하나님과 유기체적인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44) 신 21:8  לארשי ךמע ברקב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과 출 10:1 וברקב הלא יתתא יתש ןעמל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라) 에서 전치사 ב가 “... 위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5) M.E. Tate, Psalms 51-100, WBC 20, Dallas: Word Books, Publisher 1990, 22-23을 보라,
46) 그것에 대해서 위의 책 546f.를 보라.
47) M.E. Tate, Psalms 25.
48) A. Weiser, Die Psalmen, ATD 14/15, Göttingen 61963; 71966, 275.
49) Th. Söding, Wiedergeburt aus Wasser und Geist. Anmerkungen zur Symbolsprache des Johannesevangelium am Beispiel des Nikodemus-gesprächs (Joh 3,1-21), in: K. Kertelge (Hg.), Metaphorik und Mythos         im Neuen Testament, QD 126, Freiburg/Basel/Wien 1990, 168-219 (210f.).와 비교하라. 요 3:3-8에 따르면 구원을 가져오는 중생은 “위로부터” 물과 성령을 통해 성취된다.
50) E. Sjöberg, Wiedergeburt und Neuschöpfung im palästinischen Judentum StTh 4 (1951), 44-85 (76f.)와 비교하라.
51) H. Wildberger, Jesaja 2, BK AT X/2, Neukirchen- Vluyn 1978, 995f. 와 비교하라.
52) E. Sjöberg, Ibid. Anm 1과 비교하라.
53) 위의 책 77.82와 비교하라.
54) תומ רפע (죽음의 진토: 시 22:15)와 רפע ידרוי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자: 시 22:29)와 비교하라.
55) H. Wildberger, Jesaja 2, 995. 사 26:19은 각 개인의 부활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위로를 은유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H. Riesenfeld The Resurrection in Ezekiel XXX VII and in the Dura-Europos Paintings, Vrpsala, Leipzig 1948, 11과 비교하라. 그것에 대해서 G. Fohrer,Das Geschick des Menschen nach dem Tod im Alten Testament, KUD 14(1968), 249-262와도 비교하라.
56) םוק에 대해서는 암 5:2와 비교하라.
57) ἐγείρεσθαι에 대해서는 마 27:52; 고전 15:52; 엡 5:14와 비교하라.
58) H. Wildberger, Jesaja 2, 996과 비교하라. 겔 37에서 소생에 대한 관념이 호흡(Odem)을 통해 뚜렷이 드러나게 된다.
59) 렘 51:39,57; 마 27:52; 고전 15:20; 엡 5:14와 비교하라.
60) 이말은 1. ‘다시 태어남’ 2. ‘위로부터의 탄생’또는 ‘새로운 탄생’의 의미인데 이 말을 통해 요한은 자신의 중생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61) 배재욱, 요한복음의 중생, 신약논단 10/2 (2003년 여름), 348.
62) U. Wilckens, U. Wilckens, Das Evangelium nach Johannes, NTD 4, Göttingen 171998,  67f.
63) 창 3:1-19는 인간의 죄 때문에 일어난 에덴동산의 상실과 그 댓가로 인간에게 찾아온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창 2:16a; 3:17ff.; 비교. 삼하 14:14a; 롬 5:12). 그후 인간은 죽음의 권세 아래 서 있다.
64) Ch. Barth, Errettung, 11과 비교하라.
65) 잠 8:36; 롬 5:12; 6:23; 8:6; 엡 2:1; 약;1:15과 비교하라.
66) W. Zimmerli Ezechiel 2, 878f. 와 비교하라.
67) W. Zimmerli, Ezechiel 2, 879에 반대한다. G. Wildengren, King, 36쪽의 각주 2와 비교하라.
68) W. Zimmerli 의 같은 책 879와 비교하라.
69) H. -J. Kraus, Psalmen I, 546과 비교하라.
70) 이 성령은 하나님의 힘으로 생각되어진다.
71) 비교. 시 51:12b,14b; 렘 31:31. 1QS 3:8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복종이 정결의 전제조건이 된다. 벧전 1:22과도 아울러 비교하라.
72) Th. Söding, Ibid. 206과 비교하라.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교회(김종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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