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율법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아들 2013. 3. 19. 12:18

율법에 대한 성경적 이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5:17)


 

율법에 대한 성경적 이해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 속에서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성격이 확연하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위의 말씀을 이해하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서 성경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치 위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에게 손을 들어주고 율법주의에 확실한 근거를 제시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고 또 율법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오해는 위 본문이 율법주의를 주님께서 손들어 주고 있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위 말씀에서 말했듯이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일점일획이라도 버리지 말고 온전히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행동규범으로써,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과 율법을 온전케 하셨다는 의미를 마태복음 5장 21절 이후에서부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옳은 해석 같고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언제나 짝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에는 그것과 짝을 이루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짝을 함께 살펴봐서 그 말씀의 의미와 내용이 과연 그러한가를 밝혀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율법은 과연 폐하여지지 않은 것일까요? 다른 성경에서는 율법을 폐했다는 말씀은 없는 것일까요?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기에 성경에 율법을 폐하러 왔다는 말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위 말씀에서는 자신의 육체로 율법을 폐하셨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또 다른 성경을 보겠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히 7:1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히 7:28)

  구약시대 율법의 제사장들은 약점을 가진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자신들도 죄 사함을 받아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 사함을 맡은 것이니 이것이 약점입니다. 새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시기에 인류의 죄를 속함에 온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제사제도는 흠이 많고 연약해서 폐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히 8:7)

 

  첫 언약인 율법 언약이 흠이 없었다면, 둘째 언약인 은혜언약을 요구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 언약이 흠이 있었기 때문에, 은혜 언약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 8:13)

 

  낡아지고 쇠하여진 것은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폐하여진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 5장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일점일획이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에서 결코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또 이들을 뒤받침 해주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른 말씀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롬 7:6)

 

  위 말씀에서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에서 벗어났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과 지금까지 위에서 제시한 말씀들을 읽으면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정리를 하지 않으면, 과연 성경에서 율법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율법이 “폐하여 졌다”와 “폐하여 지지 않았다.”고 하는 양자 간의 충돌로 인해서 이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오늘날 율법에 관해서 해석이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해석이 두 가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두 가지 성격으로 나눠버린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어떤 시각으로 보고,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마태복음 5:17절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느냐? 에 따라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성격의 신앙생활이 형성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고, 본문이 의미하는 내용을 정확히 깨달아서 전달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적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지기 원합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습니까? 폐하여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거짓이 될 것입니다. 또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하면, 성경 다른 구절의 말씀들이 거짓이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과거 한때에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복음은 철저하게 율법에 입각한 복음을 증거 하셨는데, 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의 논리가 은혜가 도입된 후에 왜곡되어졌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증거 한 복음과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복음 사이에는 오차가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구원관과 성화관은 율법에 입각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훗날 사도 바울에 의해서 예수님의 정신이 왜곡되어졌고 잘못 해석 되어서, 사도바울에 의해서 새로운 기독교가 형성되어졌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의심점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의심의 눈초리들로 복음서와 사도바울의 서신서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보는 시각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들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복음관과 사도바울에 의해서 체계화된 복음관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해서 체계화 시킨 것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께서 증거 하신 복음과 사도바울이 가르친 복음이 다르다는 것은 대단히 큰 오산입니다.

 


문맥을 통한 성경 이해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문제를 먼저 나누어 보겠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요1:12, 엡2:8~9)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장 12절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구원은 이루어진 것입니까? 이루어져야 하는 구원입니까?

 

  이것은 구원이라는 표현을 어떠한 측면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는 다른 것입니다. 구원의 개념이 다릅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성격은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죄의 형벌로부터 온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지만, 죄의 세력으로부터 점점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똑같은 단어라 할지라도, 그 본문에서 쓰인 성격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다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성격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죄의 형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죄의 세력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이 부분이 문맥을 통해서 단어의 성격이 규정된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만 가지고, 단어의 개념과 성격을 규정시키지 않고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받아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만, 또한 구원을 이루어 나가야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양자를 다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문제도 동일합니다. 오늘 우리가 율법의 문제를 한 가지 개념으로 다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이 모순적인 표현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율법이 폐하여진 것인지, 폐하여지지 않은 것인지가 헷갈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말씀하신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표현과 율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표현은 각기 다른 개념인 것입니다. 다른 영역, 다른 입장, 다른 개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면으로는 절대로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면으로써 율법은 완전히 폐하여 졌기 때문에 우리가 염두 해 둘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 본문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떤 입장을 가지고, 어떤 성격의 율법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만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양자를 온전히 이해해서 상호 보완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충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서 “이것이 틀렸고, 저것이 맞았다”고 이야기 하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원리는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가? 핵심이 무엇인가? 이 주제에 대해서 다른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가? 하는 측면을 함께 다루어야만 본문에 대한 이해가 정확히 드러나게 됩니다.

 


율법은 폐하여 지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구약의 율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은 구약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여 졌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내용은 율법의 어떤 항목과 의무조항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 정신. 그 본질은 결코 폐하여지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구약을 계승하고 구약을 온전케 하러 온 사람이지, 지금까지 살아온 구약적 신앙의 관행을 무시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조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구약적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던 그들은 예수님을 종종 구약적 관점에서 볼 때에 잘못된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예컨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계명들과 일들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러한 것들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폐하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행한 금식조차도 제자들에게 강조하지 않고, 예수님 본인도 그것을 심각히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는 것(막 2:19)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할 세리들과 창기들과 어울리면서 그들과 벗하는 모습들은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전통적으로 행하여져 왔던 구약적 정신을 무시하고, 새로운 정신으로 새로운 종교를 세워 나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서 지금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구약에서 강조하는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강조하는 핵심 주제를 온전케 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씀은 구약의 정신, 핵심은 결코 폐하여 지거나 무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뜬금없이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새로운 종교를 창조 하겠다."고 나타난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도들이 대망하던 메시아로서 구약의 정신과 구약의 내용을 계승하신 분이고, 또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온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았다는 말도 같은 맥락입니다. 율법에서 강조하는 정신은 결코 폐하여지는 법이 없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폐하여 지는 법이 없습니다. 구약의 요구와 정신은 폐하여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지 않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선지자라는 말이 함께 포함되어져 있는 이유는 “율법을 폐하러 오지 않았다”라고만 이야기 하게 되면,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의미가 명확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계명들과 그 항목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말합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어가는 경륜 안에서 어떤 필요에 의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430년 후에 율법을 주셨다(갈 3:17)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항목들은 그 계명들 자체로서보다는 율법을 주신 의도와 목적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말은 율법의 본래 주어진 목적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기능, 역할, 본래 주어진 목적, 하나님의 의도는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은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의해서 율법의 기능이 끝나게 되면, 율법의 기능은 멈추게 됩니다. 그럴 때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율법의 항목들은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면, 당장 일어나는 모순점들이 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사제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에서 행하였던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율법의 모든 항목이 폐하여 진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지금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사라는 항목은 폐하여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제사를 지내지 않습니다. 제사의 기능이 폐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의 정신은 폐하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정신은 예배를 통해 계승되고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핵심이 완성되고 처리되면서 오늘 우리에게 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신은 폐하여지는 일은 없습니다. 율법의 강조점, 핵심은 결코 폐하여지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정신이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기능과 역할이 끝났다면, 그것이 폐하여진 것입니다. 율법에서 강조하는 제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죄를 범한 사람으로 판명되어졌기 때문에, 그 죄가 사함 받으려면 희생제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희생 제사 제도는 죄를 범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진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 단번에 십자가에서 이 제사를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 고 하신 것입니다. 온전케 된 것은 더 이상 기능이 필요 없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그러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에서는 폐하여지지 않고 여전히 요구되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후 말씀에서 구약의 율법보다 더 강한 율법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 기능이 폐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의 정신과 목적이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폐하여 졌다는 말의 성격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에서 충돌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어떤 면에서는 폐하여졌고 어떤 면에서는 폐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크게 구약의 율법은 3가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첫째가 도덕(윤리)법입니다. 두 번째가 의식(제사)법입니다. 세 번째가 당시 선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시민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 법은 예수님의 그림자였기 때문에 실제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 안에서 완성됨으로 그 기능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기능을 예수그리스도가 온전케 하셔서 대체하셨습니다. 율법의 정신이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되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법적인 기능은 의미가 상실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적 계명 때문에 이방인들과 화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자기육체로 폐하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그래서 둘이 한 몸이 되어졌습니다.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그렇기 때문에 시민법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인 우리에게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시민법에서 강조되는 정신은 그대로 계승되어 요구되고 있지만, 시민법의 기능은 이제 예수님의 육체 가운데 폐하여 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계명적 차이를 가질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의식법도 폐하여 지고, 시민법도 폐하여 졌습니다. 이제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도덕법입니다. 도덕법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사실 “율법이 폐하여 졌다”라는 말을 쓸 때, 시민법과 의식법이 폐하여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지닌 양자가 같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양자의 논쟁은 도덕법이 폐하여 졌는가 하는 여부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 도덕법은 기독교의 본질과 핵심을 다루는 문제이므로 매우 중요합니다.



관념을 내려놓자

  율법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단순명료한 것들이 복잡해지는 것은 사람들 안에 “율법이 없으면 부도덕해진다”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이 없으면 사람은 방종해진다는 것이 사람들 안에 고정화된 관념이기 때문에 율법을 폐하였다는 표현 자체가 두려운 것입니다. 고정관념을 포기 못하고 성경을 읽으니까,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율법에 대한 태도가 이미 결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율법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냐고 말하느냐를 보기 보다는,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했든지 간에 결과적으로 그 이야기는 율법은 폐기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야기 했을 것이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전제와 고정관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고정관념 하에서 이해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의 관념을 내려놓는 것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가져야할 가장 올바른 태도는 내 생각과 의견과 관념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려놓은 다음에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자 하는 진실 된 마음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율법에 있어서 폐하여 지지 않은 영역들

  

  성경의 다른 말씀들 중에서 “율법이 폐하여져졌다.”라는 표현이 나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성격, 본질, 정신, 목적, 수준, 내용의 영역에 대해서는 절대 손상이 없습니다. 율법의 그러한 측면들을 절대로 폐하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끊임없이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강조합니다만, 그러면서도 하는 말이 “율법은 죄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바울은 7장에서 분명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 (롬 7:6)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율법이 잘못된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벗어났고, 자유롭게 되었고,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는 그것이 율법이 잘못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율법의 역할, 성격, 본질, 정신, 목적, 수준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율법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율법의 역할, 성격, 본질, 정신, 목적, 수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표현한 것은 성경에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 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적 수준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선하시고 도덕적인 분이신가?”를 인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제시된 것이 율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적 수준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반영하고 있는 율법이 나쁜 것일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폐하여 질 수가 없으며, 설사 폐하여 진다고 해도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율법의 역할, 성격, 정신, 목적, 수준과 같은 율법의 본질들은 결코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17절의 예수님 말씀은 “율법의 본질들은 폐하여 지지 않는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더욱 강화된 율법


  마태복음 5장 17절 이하로 언급되어진 말씀을 살펴보시면, 율법이 더 강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율법의 요구와 수준과 성격. 그 본질들은 손상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절대로 손상되거나,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셔서 더 강화되었고, 더 의미가 선명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서 “폐하는 것”에 대한 개념은 “죄 지어도 된다.”가 아닌 것입니다. 성경의 용어는 문맥 안에서 정의해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17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 “율법을 폐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무엇으로 설정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셨는가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은 “너희들이 죄를 지어도 되게끔 하기 위해서 내가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써 “율법이 폐하여 지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의 정신은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율법이 가진 그 거룩한 도덕적 수준은 결코 폐하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것을 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개념 자체에 마음의 벽을 쌓는지 아십니까? “율법 폐기는 곧 도덕률 폐기다.” 라는 관념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 로라.” (마 5:17)

  

  이 말씀은 도덕률이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설사 우리가 “율법이 폐하여 졌다.”라고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도덕률 폐기 론의 개념은 동의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덕률 폐기를 전제로 한 율법의 폐기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완전케 되었다.”는 말을 쓰던지,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말을 쓰던지. 그 어떤 말을 쓰던지 간에 도덕률 폐기 론은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도덕률은 폐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믿고 율법이 온전케 되었던지, 폐하여 졌던지 간에 우리는 죄를 지어도 되는 자유를 받은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죄는 율법의 정신에서 어긋나는 것, 율법에 대해 빗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율법시대가 아닌 은혜시대에서 산다 할지라도, 죄의 개념은 여전히 율법의 정신을 어기는 게 죄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단 한 번도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율법 폐기는 성경에서 단 한 번도 주장한 적이 없으며, 그런 개념 자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폐기에 대해서 혹시라도 오해를 하고 계신 분이 계시다면, 오늘 그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단 한 번도 도덕률 폐기 론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완전케 되는 율법


  우리가 오늘 율법에 대해 명확히 알기 위해서 두 번째 풀어야 할 숙제는 바로 “완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케 하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을 때 율법은 완전해집니다. 다른 말로 완성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세 가지입니다. 의에 대한 요구, 의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 그리고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율법의 요구인 이 세 가지를 예수 안에서 다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것은 율법의 의와 정죄와 심판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의를 충족시키고, 정죄를 해소하고, 심판의 요구를 처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육체로 율법을 폐하신 것(엡 2:15)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로 폐하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인간들을 건져내셨습니다. 또한 죄에 대한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으며,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인으로서의 신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그 분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다 완성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 때문에 십자가를 거치셔야만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앞뒤가 맞는 이야기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폐하러 오셨다면, 그것은 의와 정죄와 심판을 없앤다는 의미가 됩니다. 만약에 율법의 요구가 폐하여졌다면, 그것은 의와 정죄와 심판의 요구가 폐하여 진 것을 의미하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요구는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폐하여 진다는 것은 도덕률을 폐기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써, 율법의 요구는 절대로 폐하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 수준, 정신들과 같은 율법의 본질들은 폐하여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율법의 요구가 계속되어 의에 이르지 못하고 심판을 받던지, 아니면 의와 정죄와 심판을 충족시키는 대안을 통해 구원을 얻던지, 이 둘 중 하나의 결론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대안으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으로 오셔서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율법의 요구를 예수 안에서 충족시키셨습니다. 그럼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율법이 완전케 된 것입니다. 율법이 정죄하는 정죄를 우리가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고, 죄에 대한 심판 또한 주님의 십자가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우리는 의인의 신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들이 예수 안에서 다 완성된 것입니다.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전케 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도덕 윤리법

 

  그렇다면 도덕 윤리법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이 도덕법들도 완전케 하셨습니까? 아멘.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도덕법에 대한 문제는 두 가지의 측면에서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신분의 측면이며, 다른 하나가 그 신분에 걸 맞는 상태와 수준의 측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차적으로 율법을 인간의 신분적인 측면에서 완성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도덕법적인 부분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신분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율법의 요구이며, 그것이 우리의 신분적 측면을 완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는 것을 두고, 신학적 용어로 [칭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의인의 신분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신분에 걸맞은 도덕과 윤리의 상태와 수준의 측면은 어떨까요? 이 도덕과 윤리의 수준에 대한 율법의 요구는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율법의 도덕적 삶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구원받고 난 이후에,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의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도덕적 의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받고 난 이후에도 도덕과 윤리에 대해서 나몰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수준에 걸맞은 거룩함의 요구가 율법 안에 남아있습니다. 구원받았어도 그 요구는 폐하여 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우리는 자연스럽게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담겨있는 그 율법의 요구를 연약한 우리가 지켜야 하다니요?

  

  하지만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무능함과 한계 때문에, 그 무능함과 한계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면 반드시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신분적 완성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신분에 맞는 수준의 요구 또한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대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우리는 예수 안에서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도덕법적인 율법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시지 않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앞서 “폐한다.”는 말은 기능과 형식이 폐하여 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제사법과 시민법은 그러한 의미에서 폐하여졌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폐하여질 수가 없습니다. 기능과 형식적인 부분에서 폐하여 질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는 성령으로 그 기능을 대체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거룩한 삶의 수준을 우리가 감당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율법에 대해서 죽게 하시고, 인간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율법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성령을 통해서 살아가도록 새로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성령을 통해 살아감으로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우리가 율법의 수준과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이제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의 행동 규범으로의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그 행동 규범이 성령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거룩한 도덕적 삶에 대해서, 율법의 규제에 의해서 삶을 살아가는 시스템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법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다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는 율법의 거룩한 수준과 그 정신이 지속되어야 하고, 또 율법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규범으로 계명을 지키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율법의 규범을 좇아서 거룩해져야 하고, 율법의 항목들을 순종하고 지켜감으로 거룩해지는 그런 시스템의 삶이 필요하다고 말씀 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생활규범으로써의 그 기능이 끝났습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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