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복음과 언약!!

[스크랩] 율법 문제의 핵심

하나님아들 2013. 3. 19. 12:17

율법 문제의 핵심



율법을 풀어가는 첫 번째 핵심은 은혜다


  이번 장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다루고 싶은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셨을 때, 아담에게 율법을 주지 않으셨다는 사실과 그렇다면 당시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어떤 형태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문제는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핵심이 무엇이냐를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문제는 단순히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과연 율법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핵심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사람을 다스리시고, 사람은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과 사랑을 받는 시스템이냐? 그렇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율법문제를 다루는 핵심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확인한 바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는 모세 이전에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롬 5:12~14, 갈 3:15~19)이었습니다. 즉,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온 것이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과 모세를 이렇게 분명하게 대립해서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한 사도는 모세와 예수님을 대립시켜 표현했듯이 율법과 대비시켜서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과 은혜가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왜 요한 사도는 이 두 가지를 대립시켜서 표현한 것일까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방식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무조건적이라는 말입니다. 조건이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시는 선물이 바로 은혜입니다. 반대로 율법은 조건적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의를 행하고 계명과 규례를 지키면, 나는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출 15:26)라는 조건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율법과 은혜에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계명이 있다.”라는 개념으로만 이해를 하기 때문에, 율법문제를 정확하게 본질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문제의 가장 근원에는 “그것이 조건적이냐? 무조건적이냐?”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해주시며, 인간에게 허락하신 모든 축복들(창 1:28~29)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진 무조건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조건적인 것이었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은혜는 율법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핵심에는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과와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바는 하나님의 은혜는 곧 하나님의 생명과 짝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과를 선택하지 않고, 선악과를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선악과의 개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은혜를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아브라함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언약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이 바로 은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입니다. 율법 문제를 은혜의 측면에서 풀어가지 못하고, 단순히 율법을 독립적 개념으로만 보게 되면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적 문제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와 생명을 그가 거절하고 선악과로 말미암아 타락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선악과를 선택한 그 선택이 정말 잘못된 것이었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면서 한동안 우리 인간들을 방치해 두셨습니다. 그 기간이 바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 때까지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거절한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결과로 인간들 사이에서 죄악이 관영함이 일어나 홍수로 인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 바벨탑을 지어 언어의 혼잡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런 이야기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죄악과 더불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유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언급되는 단어들이 뭔가를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5~8)

  

  여기서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방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의미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내 은혜를 거절했고, 그 결과 모든 죄악이 땅에 가득하게 되어서 이제는 내가 너희를 심판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시면서도, 여기 한 사람을 택하셔서 인류를 다시 세우려 하시는데, 그 한 사람으로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이 은혜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을 풀어가는 두 번째 핵심은 언약이다


  그 다음에 여기서 은혜라는 말과 함께 다뤄져야 할 중요한 핵심내용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율법 문제를 다루는데 필요한 두 번째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그런데 이 말씀을 원어로 보면 하나님을 히브리어 “엘로힘”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로힘이라는 말은 “능력자”라는 뜻으로써,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만큼 능력이 있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때문에 이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창세기 1장에서 거의 매구절마다 강조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모든 단어들은 히브리 원어로 “엘로힘”인 것입니다.


  이번에 창세기 2장을 살펴보기에 앞서 창세기 2장은 사람에 관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6일간의 천지 창조 중에서 인간이 창조된 내용만을 확대해서 보여준 것이 창세기 2장입니다. 그 때문에 많은 신학자들은 2장의 1절부터 3절이 1장에 편입되어야 하는 구조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2장 1절~3절”이 “1장 32절~34절”로 바뀌어야 하고, 2장은 4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관점이라 이 말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4절부터 하나님의 명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창 2:4) 1장에서는 엘로힘 이었던 하나님께서 2장에서는 여호와로 그 명칭이 바뀌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뜻은 무엇일까요? “언약자”라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라는 명칭은 언약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만큼 전능하신 분이다”라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데 2장의 인간 창조 속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모습은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언약의 관계를 맺고 계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냐면, 언약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구약(The Old Testament)과 신약(The New Testament)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즉,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성경의 가장 큰 핵심주제가 바로 이 언약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하나님과 동등된 관계에서 서로 합의와 협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주고받은 계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일방적 언약 관계입니다. 이 일방적 언약 관계를 성경에서는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언약 안에서 우리가 율법을 보면 율법의 정체가 아주 선명해지고, 율법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하는 것이 아주 선명해집니다. 반면에 은혜와 언약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에서 율법이 가진 자체적인 그 성격만 보게 되면, 우리는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을 옛 언약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구약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구약, 즉 옛 언약의 핵심주제는 바로 모세의 율법입니다. 모세로 말미암는 율법 언약인 것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 창세기에 나타난 인류고대사와 이스라엘 형성사의 모든 내용들은 사실상 구약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옛 언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옛 언약이라기 보단 원초적인 언약입니다. 본래의 언약, 본질적 언약이 바로 모세 율법을 받기 전까지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은 첨가된 언약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맺지 않았어도 될 언약이 바로 모세의 율법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새 언약의 개념은 구약에서 말하는 모든 언약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하고만 반대되는 것으로써의 새 언약입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은 구약을 무너뜨리고 세우는 언약이라기보다는, 모세 율법만을 무너뜨리고 그 전에 있던 본질적 언약을 회복하는 언약인 것입니다. 다시 그 본래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언약이 새 언약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개념을 이해할 때, 언약의 측면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은 언약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언약의 개념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을 “계명이 있다.”라는 계명적 개념으로만 이해를 하고, 성경의 전체적인 언약의 흐름 속에서 율법을 보지 못하니까, 율법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의 개념으로 율법을 본다면, 성경을 통해 율법의 정체를 아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 8:6)

  새 언약은 더 좋은 약속이고, 또 더 좋은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좋은 언약의 중보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히 8:7~9)

  여기서 말하는 첫 언약이란, 애굽 땅에서 인도하고 난 다음에 주신 모세의 율법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첫 언약이 흠이 없었다면 둘째 언약이 필요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둘째 언약을 세우신다고 하십니다. 즉 새 언약을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 언약이 어떤 것입니까?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 8:7~10)

  새 언약은 곧 마음에 이루어지는 언약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동일한 말씀을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한다.” (렘 31:33)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오늘날 율법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며, 율법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유형들이 각기 다르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한국교회는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율법주의와 극단적 복음주의 두 가지로 유형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더욱 더 바르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바르게 깨닫기 위해 풀어야 할 첫 번째 오해는 바로 “율법이 처음부터 인간들에게 주어졌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인간들을 율법으로 다루어오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모세 때에 비로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에 인간들과 은혜 언약을 맺기 원하셨으나, 인간들은 은혜 언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여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 언약을 만드신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인간 스스로 “우리에게는 정말 하나님 은혜가 필요하구나.”하는 것을 보게 하실 목적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옛 언약을 갱신할 새 언약이 필요하게 되어졌고, 그 새 언약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고자했던 본질적 은혜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본질적 언약을 회복하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율법의 성격과 목적 그리고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아주 선명해지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우리가 율법을 엉뚱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은혜 언약이 아닌 조건적 율법언약을 얼마나 지킬 수 있는가, 한번 보자.”하고 인간들을 잠시 동안 율법 아래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리석게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고,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음에도 끝까지 율법에 매달리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 (마 5:17)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규범만을 말씀 하시는 게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도 가르쳐 주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규범만 잘 지키면, 율법을 지킨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규범을 잘 지켰어도 율법의 본질적인 정신까지 실행하지 않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다.” (마 5:21~48)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와 로마서에서 바울이 했던 고백의 정체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외부적인 조항을 다 지키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 (빌 3:6)고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계명이 양심까지도 건드리기 시작할 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 7:24)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외형적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율법의 본래 정신인 하나님의 의와 그 거룩함에 비춰보니, 나는 그 율법에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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