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John M. Court)
김 정 열
제1장 서론 : 계시록 재방문
저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쳤던 여러 요소들을 설명하기 위해 1장을 썼음을 밝히고, 2장이 제공하는 주제별 개요와 함께 이 책의 첫 장을 먼저 읽을 것을 제안하고 있다.
저자는 1979년에 저술한 초기의 책에서 계시록이 처음 기록된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계시록에서 발견되는 이미지, 상정, 신화는 거의 무한한 수명을 가질 수도 있으나 또한 본래적으로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교 적인 묵시 문학과 유대 기독교적인 묵시 문학과 같은 특별한 종교적 전통 안에서, 그 동일한 이미지와 신화가 가장 최근판의 저술 시기인 역사의 한 특정한 순간에 존재하는 정치적 정황들과 종교적 필요들에 밀접하게 관련되는 방식들로 재포장되고, 통제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저자는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는 변화의 영역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묵시문학의 개념들의 현대적 타당성(The modern relevance of the ideas of apocalyptic)
2. 비평학의 컴퓨터화(The computerization of criticism)
3. 사회학적 해석들(Sociological interpretations)
4. 제국의 이미지들(Images of Empire)
5. 문학 장르들과 상징적 구조들(Literary genres and symbolic structures)
6. 독자들과 그들의 반응 범위 (Readers and the range of their response)
7. 방법론상 다원론의 폭넓은 수용(Wider acceptance of pluralism in method)
1. 묵시문학의 개념들의 현대적 타당성
아직도 어떤 이들은 묵시문학의 기괴한 세계를 병든 본성의 망상이라고 외면해 버리지만, 새로운 문학적 역사적 이해에 의하면 적어도 묵시문학의 저자는 심신증 환자(psychosomatic case)가 아니라 그가 고통당했던 악의 실체에 의해 실제로 병들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이렇게 묵시문학은 저항과 반란의 작품에 속한다.
2. 비평학의 컴퓨터화
문학비평은 컴퓨터 기술로 활력을 되찾았다. 용어 색인과 단어 분석, 문법, 저자를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문학적 문체에 대한 통계적 연구에 유익하다. 저자의 문체 연구만큼이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컴퓨터의 활용으로부터 광범위한 유익을 얻을 수 있고, 특별히 수학적 정확성을 얻을 수 있다.
3. 사회학적 해석들
사회학적 방법들은 요한계시록을 산출한 공동체에 대해 알려진 자료들을 해석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여기에서 자주 도입된 모델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어떤 분파 집단 모델이었다. 이 집단은 반드시 공공연한 핍박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추방과 사회적 경멸이라는 심각한 압박 하에 있었다. 그들은 위협과 불안전을 느꼈으며 또한 종교적 긴장과 씨름했음에 틀림없다.
4. 제국의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 중의 하나는 다니엘서와 유대 묵시 전통에서 발견되는 네 개의 세계 제국들에 대한 이미지이다. 로마의 이미지들 간의 긴장들은 터툴리안이나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의 저술들에서 계속된다. 다음으로 20세 기에 들어와 사람들은 바벨론과 악의 제국의 이미지들을 자기들의 상항에 맞게 사용하고, 로마서 13장의 정치적 적합성을 논쟁하며, 묵시적 소망을 해방신학과 관련짓는다.
5. 문학 장르들과 상징적 구조들
장르 비평으로 알려진 방법론은 본문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접근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장르에 대한 인식은 형식 및 서신 같은 특정 목적에 적합한 형식적 구조들의 인식과 함께 양식비평 안에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오랫동안 문학적 유형들의 혼합물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과거에 다양성은 그 다양한 것들 가운데 차별을 두는 식으로 비평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2장과 3장의 일곱 교회에 대한 편지(역자 주: 2-3 장은 편지가 아니다)를 선호하지만 그 묵시적 특성을 무시한다. 요한계시록의 구성 부분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그렇게 당파적이지 않지만, 종종 장르들간의 분쟁으로 귀결되곤 하였다.
6. 독자와 그들의 반응 범위
성경 전통의 경우 근대적 설교와 변증 그리고 문학적인 해석에 이르기까지 해석에 대한 절대적으로 굵은 맥이 존재한다. 본문이 처음으로 생성된 역사적 정황에 있어서 조차도 본문과 청중의 상호 작용의 최초의 단계들을 고려할 여지는 존재한다.
지금까지 논의되어 온 것보다 더 큰 문학적 구조는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는 신구약 성경의 최종적 정경이다. 교회에서 긴 논쟁 후에 계시록을 포함하기 위해 정경의 한계를 정의한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독자 반응이 논의될 필요가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예이다.
7. 결론: 방법론적 다원주의의 폭넓은 수용
좀 더 오래된 것과 좀 더 새로운 접근법 간의 대조는 요한계시록이 기독교 설교에 적용될 때 가장 잘 드러난다. 멀지 않은 과거에 설교를 위해 단골로 선정되는 것은 일곱 편지에서 초기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간단히 드러내 주는 것과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위로하는 본문들이었다. 이제는 초점이 정치적, 사회·환경적 위협 그리고 책임과 정의, 심판과 보복의 주제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위기의 시기에 권력에 반응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연구 자료가 되었다.
어떤 이는 이 책을 특정 상황에 관련한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고 무시간적인 따라서 모든 시대에 유효한 것으로 본다. 풍유적 주석이 저술의 시점만큼 혹은 해석의 시점을 그보다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근대 해석 이론은 작품의 의미가 우선적으로 그것이 독자에게 의미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방법론적 다원주의는 객관적으로 정확한 답은 없으며 단지 일련의 주관적 반응만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다원주의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 혹은 궁극적 진리를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와 저술 내용에 대한 그의 정황이 지니는 공헌들은 의미에 대한 질문에서, 비록 결정적인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충분히 이해되어야 할 문학적 긴장과 신학적 변증법을 위해서 역사적 질문들은 해석자의 임무의 일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으로 공급되는 묵시적 전통들과 그 책에 의해서 공급되어지는 신학적, 분파적, 금욕적 전통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은 그 이야기 안에 놓여 져야 하고 조명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구조주의적, 사회과학적 분석의 ‘새로운 관찰’은 환영할 만한데, 이는 정확히 이 책과 그 정황에 대한 더 풍성한 해석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방법론들과 결과들을 상호 관련시키고 기독교 전통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지속적인 공헌을 나타내는 것은 총체적 관점(a total view)을 필요로 한다.
제2장 계시록 주제로 읽기
요한계시록 개요 도표
서론
이 책을 어떻게 읽을 때에 고려할 세 가지 사항이 있다.
1. 우리는 이 책이 성립된 상황을 알아야 한다.
2. 저자가 사용하는 이미지들과 상정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읽혀져야 한다.
3. 아마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저자의 신학적 우선순위들을 인식해야 한다.
1. 하나님에 대한 환상들
1.1 계 1:12-16: 인자
천상적 영광중의 인자로서 그리스도, 이것은 요한이 그의 첫 환상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천상적 인자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미지였다. 천상의 인자에 대한 요한의 환상에는 구약 그림(겔1, 단7, 출34)에서 온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것은 심판적이며 ‘좌우에 날선 검’동시에 크게 위안을 주는(1: 17) 위대한 힘과 영광의 이미지이다.
1.2 계 1:17-20: 죽음과 삶
사도행전 7장에 따르면 첫 순교자 스데반은 돌에 맞기 전에 하늘의 환상을 본다. 스데반 환상에서 가장 독특한 모습은 인자가 전통적으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지 않고 서서 계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와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이 사람과의 만남의 긴급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스데반의 죽음의 시점에 두 번째의 승리의 재림을 위해 오려고 이미 서 계신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3:14)으로 묘사된다. 주요 특징은 충성된 증인(witness)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martus'는 ‘증인’을 뜻하는 헬라어로서 초기 기독교 박해의 결과로 ‘순교자’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음을 경험한 참된 증인이시다.
버가모 교회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2:13)의 죽음의 배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제자가 그러한 죽음으로써 자기 주님을 완전하게 따른다는 것이 바로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었다는 사실이며 지상의 제자와 천상의 주님은 이 순간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1.3 계 4:1-8: 하나님의 보좌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좌와 알현실로 알려진 크레테의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왕의 왕궁 모습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의 환상은 고대 동방의 정치적 권력의 상징과 기독교 교회의 거대한 예식들과 건축에서 영적 권력으로서의 재해석 사이에 서 있다. 데이빗 온(David E. Aune)은 더 특별한 관련성을 주장한다: ‘요한 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실행된 천상의 의식에 대한 묘사는 (로마)제국에서 궁정 예식과 제의와 현저한 유사성을 가지며 따라서 후자는 전자의 개작(parody)일 수 있다’고 하였다.
1.4 계 5:1-6: 하나님의 어린양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계속되는 천상의 예배에 대한 요한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법적으로 봉인되고 증언된 책은 세계에 일어날 일에 대한 내 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 책을 열기에 합당하지 않다. 다윗의 자손 메시야는 유대 지파의 사자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합당하신 그리스도는 사자가 아니라 어린양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일찍 죽임을 당하신 것 같이 서 있는 어린양이다. 그는 비록 부활의 영광으로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있지만 고난과 죽음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1.5 계 5:7-14: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은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 한다. 하나님의 어린양은 명백히 희생 제사의 이미지이며, 유대적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하게 한다(출 12). 가장 큰 역설은 계 5:5과 14:1-7에서 희생자(어린양)가 지도자(사자와 목자)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1.6 계 15:2-8: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환장
이 환상으로 우리는 알현실 혹은 하늘 성소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궁이자 예배자들을 위한 성전이다. 알현실의 기구들 중에서 관심의 초점은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4:6)이며 회중은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선택되고 인 맞은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7:4-8)을 구성하는데 이제 땅에서 부활하였고(14:1-5), 거문고를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찬양의 노래는 모세에게서 기인하며 이 장에 나오는 대부분의 상징들은 출애굽을 상기시키고 있다. 찬양의 노래는 아직 어린 양에게 돌려지는데 그들의 승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1,7 계 19:11-16: 백마를 탄 사람
묵시문학에서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을 탄 네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들은 1세기 지중해 세계에 대한 주요한 위협들을 반영한다. 전쟁과 기근, 역병에서 오는 죽음과 파멸 등이다. 백마를 탄 호전적인 모습을 가진 첫 번째 말 탄 자는 새로운 종교 운동들(신바 종교들) 중 하나로서 정복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말을 탄 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인데 피 뿌린 옷을 입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름, ‘충신과 진실’이라는 환호와 같은 모든 것들이 이를 명백하게 한다. ‘눈은 불꽃같고’와 ‘그 입에서 이한검이 나오고’ 등의 다른 모습은 요한계시록 1장에 나타나는 천상의 인자 환상을 상기시킨다.
19:7, 9에는 혼인 잔치가 선포된다. 그러나 그것은 21:2에서 신부가 도착하기까지 거행되지 않는다. 이 결혼 축하의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징하는 종말의 거대한 잔치(사 25:6)라는 구약적 사고를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 결혼이 19장에 선언되고 21장에서 거행된다면, 사이에 끼어 있는 20장은 누가 결혼 초대를 받거나 받지 않을 것인가에 관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세상 속의 교회에 대한 환상
2.1 계 1:1-11: 주의 날
요한이 교회 공동제의 어떤 지역 모임에 있는 것처럼 그의 첫 환상을 보았다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1:10: 역자 주: 원문 직역). 만약 요한이 밧모섬의 귀양으로 실제로 모임 중에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이 아시아 본토의 교회 공동체 중 하나에 참여한 것으로 상상한 것이다. 기원 후 2세기 중반인 저스틴 마터의 때까지 말씀과 성찬을 위한 일요일 모임은 관습이 되었다. 유대적 안식일(토요일)이 안식을 위한 날로 지켜졌고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토요일과 일요일을 함께 ‘주말’로 여기는 반면, 기독교가 부활(주의 날)을 축하하기 위해 혁신적으로 일요일을 선택한 것은 보통으로 일하는 날 매우 이른 시각에 성만찬을 위해 모이는 것을 의미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요일 예배의 영향은 요한계시록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최초 기독교 예배의 어떤 표준 양식에 관한 증거를 거의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계시록의 많은 찬송들인 천상의 찬양의 노래, 경배와 감사 중에서 우리가 초기 기독교 공동제의 본질적인 것들을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추론이다. 땅과 하늘의 예배는 한 목소리로 불려지는 찬양의 노래 속에서 함께 모여지게 된다.
2.2 계 2:1-7: 에베소 교회
신학적으로 이 “네 촛대를 옮기리라”는 위협(2:5)은 심판의 상징이요, 움직임의 하나로서 에베소의 역사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위치는 카이스터(Cayster) 강의 퇴적으로 항구로서의 가항성(navigability)이 위협받았기 때문에 옮겨져야만 했다(550 과 287 BCE). 신학적 위협들과 약속은 교회의 지역적 환경을 풍자 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나무’와 낙원’(2:7)은 창 2-3장의 반향들이며 또한 에베소에 있는 아르테미스(다이아나)의 나무 신전과 도피처를 제공한 신성한 장소의 모방이다.
2.3 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는 한 지역 교회 상황의 모든 불만족스런 특정들이 어떻게 생생하게 묘사되는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특별한 실례로서 작용한다. 골로새와 히에라폴리스에 이웃한 리커스(Lycus) 골짜기에 위치한 이 도시의 지역적 특징들을 교회에 대한 영적 논평을 위해 사용한다. 그 지역의 물 공급 상태는 유명한 웃음거리였다; 그것은 5마일이나 되는 수도관에 의해 운반되면서 태양에 의해 데워졌다. 골로새에는 차고 깨끗한 물이 있었고 히에라폴리스는 약효 있는 뜨거운 온천이 있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는 물이 데워져서 아무 쓸모없었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이는 잘 알려진 바대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미온적이었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다른 사람에게는 분명히 성공적인 것으로 비쳐졌지만 그 자신은 자신의 영적 무능을 보지 못하였다.
2.4 계 1:5-6; 5:9-10: 제사장직
이 두 개의 본문은 종종 모든 하나님의 백성,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적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에 대한 증거 본문으로서 계시록으로부터 취해진다. 이들은 벧전 2:9과 연결된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러한 인용의 정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요한에게 있어 하나님의 백성의 제사장적 기능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행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기독교적 사역이나 희생적 행위도 궁극적으로 제사장과 희생자로서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존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5 계 6:9-17;7: 1-4: 고난과 인맞음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속의 교회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해 면제 된 것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만약 세상이 고통을 겪는다면 교회도 고통을 겪는다. 2.4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봉인한 책(5:5)을 열기에 합당한 분임을 관찰해 보았다. 그 봉인을 떼었을 때 죽음과 재난, 전쟁과 기근과 역병을 상정하는 네 말 탄 자들이 나타났다. 소아시아 도시들은 1세기 경 이러한 파괴적 힘들과 대규모 지진들로 심각하게 고통당하였다(여섯 째 인-6:12).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공동체와 함께 고통당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소외되어 속죄 염소처럼 취급받았고 박해 당하였다(네로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로마의 화재 방화범으로 정죄하였던 때와 같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제단 아래 있는 영혼들이다(6:9).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식으로도 지진과 재앙에서 제외되지 않으며, 단지 효과적인 증거를 위해 하나님의 인침을 받을 뿐이다. 그리고 인맞은 자의 수(144,000)는 선택된 자의 최고치가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이것은 민족들(사 49:6)에 대한 대표 적인 표시이며 ‘상징적 수’일뿐이다.
2,6 계 11:1-3: 두 중인
두 증인은 이 어려운 시대에 교회의 사명에 대한 상징들이다. 매력적이나 내가 생각하기엔 억지적인 어떤 해석은 이 두 증인을 베드로와 바울로 보는데, 전통에 의하면 이들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 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두 증인이 활동한 위기의 기간은 거룩한 성이 짓밟힌 기간과 동일하다. 마흔 두 달, 혹은 일천 이백 육십일은, 삼년 육 개월인데 묵시적 환상에서의 전통적인 시간 계산에 있어 위기의 기간이다(단 7:25). 그러나 그것은 또한 네로의 박해에 이어지는 극적인 속편인 유대 전쟁과 예루살렘 포위의 기간이기도 하다(67년 봄에서 70년 8 월 29일까지).
2.7계 11:4-13:감람나무들과 촛대들
네로 시대와 그 이후의 세대에 있어서 교회의 경험의 결과로서, ‘증거’라는 말에 담겨진 사상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음에 직면함을 의미한다. 증거는 구약 예언의 전통과 일치하는 선지자적 행위이다. 고난과 거절(rejection)의 기독교적 경험은 정확하게 엘리야의 그것과 비교 될 수 있다. 증인들은 또한 슥 4:1-14의 심원한 이미지와 일치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한 등대의 일곱 등잔) 으로서 그의 우주적 시각을 함께 공유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기름 발리운 자들이다(두 감람나무들). 선견자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증거는 고난에서 영광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 그들의 죽음으로 순교자들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된다(11:8).
3. 창조에 대한 환상
3.1 계 4:8-11: 창조주께 드리는 찬송
성경적 전통에 있어서 최초의 언급인 창 1:12:4에서 7일 간의 창조에 대한 설명이 가르치는 내용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근본적으로 선하다. 창조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시각은 계시록에서 이십 사 장로들(천상의회의 대표자 표상)의 찬송에서 확증된다.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4:11). 이 찬미는 모든 피조물에 의해 반향되며(5:13에서처럼) 특히 주의 날에 요한의 교회에서 예배시(1:10)에 불러졌다고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무에서부터의 창조’ 교리는 영지주의나 마니교가 주장하는 선한 창조와 악한 물질이라는 이원론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3.2 계 6:12-17: 거대한 지진
요한의 일곱 도시 중 몇몇은 최근에 지진으로 인한 파괴를 직접적으로 경험했었다. 요한은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상징체계를 사용하여 엄중한 경고, 예고된 ‘종말의 징조’로 만들어 더욱 강조할 수 있었다.
3.3 계 8:6-13: 생태학적인 위기
연속되는 첫 네 나팔은 땅과 짠물과 민물, 천체들과 대기를 공격한다. 이 단계에서 환경적 재난들의 투영들과 함께 요한계시록을 ‘녹색으로’ 읽는 것(녹색으로 읽는다는 것은 환경적 관점에서 읽는 것을 의미한다)은 매우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생태학적 위기는 한정된 자연 자원의 과용이나 오용 뿐 아니라 공기, 땅과 물의 오염에서 나타난다. 인간의 야망과 탐욕에 의해 땅과 바다, 강 그리고 오존층과 태양계가 모두 어떻게 오염되고 심각하게 손상되었는가를 보여 준다.
3.4 계 10:1-11: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다섯 째 인은 순교자의 영혼들에게서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는 간청의 부르짖음을 만들어 냈지만, 이제 결정적인 시점이 도래하여 ‘더 이상지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10:6). 이것을 맹세로 확증하는 힘센 천사(10:5)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직접적인 사자이며, 자기 주위에 우주 속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사중적 표지(구름, 무지개, 해와 불기둥-10:1)를 지닌 우주적 형상(cosmic figure)이다. 따라서 그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10.6)으로 맹세하기를 하나님의 계획의 시간표가 이제 실행될 것이라고 한다. 요한에게 나타난 것같이 3년 반이라는 묵시적 시간의 길이(혹은 등가의 달 수나 날 수로)가 지금 시작되려 한다(11:2-3).
3.5 계 11: 15-19: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 최악의 자기 파괴로 치달을 때(정치적이든 생태학적이든) 그때에 하나님은 권능과 왕권을 잡으실 것이다. 궁극적으로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정치적 지배(그 종교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함축과 함께)가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행전은 기독교와 로마 시민권은 서로 잘 조화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3.6 계 14:6-7, 14-20: 땅의 추수
구약 전통에서 추수와 포도 수확은 신적 심판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그 대적들을 멸절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요한계시록 14장과 가장 가까운 평행은 욜 3:9-17인데, 거기서는 곡식과 포도의 이중 추수가 나타난다. 문맥은 최후의 전쟁과 종말론적 심판이며, 이때 모든 나라들이 예루살렘 밖 ‘여호사밧 골짜기’에 모인다. 욜 3:13에서 그 이미지는 정확히 계 14:15, 18-19과 일치한다. 포도주 틀은 포도주의 피 색깔과 함께 피의 복수에 대한 자연 그 대로의 상징이다.
3.7 계 18:21-24: 알려진 세장의 종말
이 주제는 18장 전체를 통해 천사들과 하늘 음성으로부터 권위 있는 선언과 상징적 행동과 함께 전개되며, 그 사이에 왕들과 상인들, 선주들의 탄식이 온다. 그 이슈는 알려진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듯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체제의 예언된 종말-로마제국과 그것이 나타내는 모든 것의 종말이다.
4.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환상
4.1 계 6:1-8: 묵시록의 네 말 탄 자들
주후 1세기에 그 말 탄 자들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요소들을 더욱 실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하다. 그들은 속 1:8-11과 6:1-8에서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를 상징하는 색깔 있는 말들의 풍자로서 주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상징주의로 가득 찬, 희화된 모습이 되었다. 그들의 기능은 세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말의 색깔에 의해, 수반되는 상정(활, 칼, 저울, 이름)에 의해, 그들의 행동에 대한 해석에 의해. 그들은 현재 적 실체들, 땅에 적대적인 능력들, 네 개의 첫 연속적인 역병들로서 나타난다. 네 말 탄 자는 로마 제국의 동시대적 정치 상황에서 위협적인 특징들을 대표하였다.
4.2 계 9:1-11: 파괴자
다섯째 나팔이 불려질 때, ‘땅은 화’로 불리는 세 사건들’중 첫째를 경험한다. 일련의 세 가지 명백한 일곱 재앙 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인을 뗌으로써 나팔을 붐으로써 그리고 대접을 비움으로써 각각 드러난다. 비록 동일한 상징들 중 어떤 것들은 다시 반복되나(특히 출애굽기의 애굽 재앙의 변형들), 주석가들은 둘째와 셋째가 첫째의 재연이라는 것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별 하나’(9:1)는 떨어진 천사이며 하나님께 행할 허락을 받은 악한 세력이다. 계시록에서 별들은 천사들과 동일시된다(1:20). 그러나 이 사단적 존재는 20:1에서 악의 세력들을 다시 ‘무저갱’ 에 가두는 ‘하늘로부터의’ 천사와 대조되어야 한다. 이 별은 8:11에서 쑥’이라 불리는 것과 아마 동일할 것이다. 요한은 떨어진 별의 신화를 취하여(사 14:12-21) 그것을 바벨론의 운명에 대한 예언(렘 51장)의 특징들과 요엘의 선지적 해석에 의해 풍부해진 애굽의 메뚜기 재앙에 대한 이야기(출 10:12-15)와 결합시겼다.
‘아바돈’(파괴)은 스올과 동의어로서 죽음을 기다리는 장소이다. ‘아볼루온’(파괴자)은 희랍 신 아폴로(희랍 극작가 아이스클루스는 분명히 제안하기를 아폴로는 파괴자를 의미했다)를 지시하며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아폴로로 동일시한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4.3 계 12:18-13:8: 바다에서 나온 짐승
짐승이 사단의 소환(12:18)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 바다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순서적으로 용이 하늘로부터 떨어진 결과이다. 따라서 이 짐승은 이 세상에서의 폭넓은 권력을 대표하며, 기독교 선지자에 따르면 사탄에 의해 동기가 제공된다. 구약은‘이스라엘을 위협하고 하나님을 대적한 지배적인 세상 권력들은 창조시에 굴복되었던 원시적 혼돈의 재언명이었다’는 신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신화를 사용하였다. 요한계시록의 짐승은 다니엘 7장의 네 짐승의 특징들 대부분을 결합하고 있다.
4.4 계 13:11-18: 두 번째 짐숭
용(12장에서 사탄)과 바다로부터 나온 짐승의 권력 계통에서 세 번째로 땅으로부터 짐승이 올라온다. 계시록의 문맥에서 이 짐승은 사탄적인 말의 능력과 마술적 기술을 가지고서 어린양 그리스도를 풍자적으로 모방한 첫째 짐승을 지지한다. 만약 첫째 짐승이 로마의 중앙 권력의 충분한 비중을 가지고 제국의 제의를 대표한다면, 둘째 짐승은 국지적 수준의 제의에 관련된 존재를 나타낸다. 둘째 짐승이 인을 찍는 과정에서 적용한 ‘짐승의 수’(13:18)를 해독하는데 많은 망상적인 창의력을 소비해 왔다. 만약 13이 나쁜 징조의 수라면, 누가 666호실에서 일하려 하겠는가? 세계를 탈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6-6-6을 포함하는 컴퓨터화 된 은행 업무와 슈퍼마켓 바-코드에 관한 관심은 더욱 적절할 수 있다. 13:17은 거래를 제한하는 일종의 경제적 제재를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마트리아(Gematria)는 한 단어에 있는 문자들에 상응하는 숫자 값의 합을 계산하여 표현한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미래를 말하거나 신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 해 보통 히브리어나 헬라어로 매우 진지하게 행해졌다. 로마의 거만함과 황제 제의의 신성 모독이 정죄되는 문맥에서 666에 대한 몇몇 가능한 해결들은 적절하다(네로의 히브리어 이름 혹은 티투스나도미티안 황제의 헬라식 이름).
4.5 계 16:12-16: 아마켓돈
‘히브리어’ 장소 이름(엄격하게는 하/마게돈’)은 므깃도 산을 표시 한다. 그러나 므깃도는 산이 아닌 평지에 있는 도시이며(슥 12:11), 언덕 지대는 적어도 7마일을 떨어진 곳으로 보통 갈멜로 불린다. 하지만 므깃도는 유명한 전쟁터였다. 바락과 드보라가 가나안인을 패퇴시킨 곳(삿 5)이었으며 요시야 왕이 패하여 전사한 곳이었다. 그리고 70인경의 헬라어 이름으로라야 인식될 수 있는 때에 왜 그 장소 이름이 ‘히브리어로’ 주어졌는가? 흥미로운 설명은 사 14:13에 사용된 집회의 산’이라는 히브리어 용어에 대한 유사성을 헬라어에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6 계 17:1-18: 큰 성 바벨론
앞에서 ‘짐승의 표’가 어떻게 경제적 제재와 무역 제한(13: 17)에 관련이 되는지 살펴보았다(3.7과 4.4에서). 나아가 18장까지 이어지는 바벨론을 위한 탄식과 바벨론의 몰락에 대한 상인들의 슬픔은 무역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18:11-19), 따라서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17:3)인 바벨론은 그 해석상 경제적 측면을 지닌다. 제국의 종교와 황제 제의(아시아 일곱 도시 중 적어도 다섯에서 입증된)와 관련된 로마 제국의 여신인 로마(Roma)의 제의는 직, 간접적으로 경제적 측면들을 지니고 있다.
구약은 음행을 우상숭배(성전 매음)와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결여(렘 2-3장과 사 23:17-18)의 상징으로 일관성 있게 사용하였다. 그러한 기초 위에 성적 부도덕의 방종과 상업적인 착취를 포함하는 것이 더 광범위하게 적용 될 수 있다. 요한은 일찍이 이 상징을 여자 이세벨과 두아디라의 무역 길드를 가리켜 사용하였다(2:20-23). 이제 그는 자신의 예언적 자료들로부터 세 모티프(음녀 뿐 아니라 짐승과 바벨론 성)를 취하여 하나의 은유적 통일로 조화시킨다. 그의 환상에서 이 여자와 짐 승, 도시는 다른 여자(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와 다른 도시 새 예루살렘에게, 다른 짐승(죽임 당한 어린양)의 매개를 통해 굴복하게 될 것이다.
4.7 계 20:1-10: 천년기
비록 천년이 분명 긴 시간이나, 묵시록에서 그것은 단지 사탄이 갇히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유한 자들이 제사장적 사역을 완성하는 임시적인 기간으로 인식된다(20:6, 순서 2에서, 1:5-6; 5:9-10). 천년왕국은 지상적 승리와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죽음을 옹호하는 것에 견줄만 하다. 로마 카톨릭의 전통 교리에서 이 지상 왕국에 대한 일천년의 문자적 기간에 집중하는 것은 오류로 여겨져 왔다. 오히려 그것을 교회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 사이의) 길고 무한한 시간으로 간주한다.
두 가지 점이 중요하다. 천년기를 단순히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서 균형 있게 보는 것과 이 단락을 전체로서의 이 책의 문학적 문맥에서 연구하는 것이다. 재림의 시점과 관련해서 전천년 주의자와 후천년 주의자가 있는데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역사를 통해 널리 영향을 끼쳐왔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니엘 7장의 유대적 꿈의 구조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인자가 오는 것과 성도들이 나라를 받는 것(단 7:18)의 양쪽 변에 의거한 두 시대(이 시대와 오는 시대)에 대한 꿈이다. 따라서 천년왕국은 양쪽 면을 모두 대변한다. 그것은 지상에 나타난 신적인 옹호(vindication)이며 천상적 환경들에 대한 지상적인 기대이다.
5. 미래의 희망
5,1 계 3:7-13: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들
계시록은 문들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참조. 4:1). 그것들은 소위 현대적 관용어구에서 ‘기회의 창들’로 불리울 수 있다. 빌라델비아교회 앞에 놓인 기회(열린 문)는 밖으로 나아가는 선교 행위를 위한 것이었다. 또한 개념들의 연결에 의해서, 열린 문들에 대한 말은 닫는 것과 열쇠들로 발전된다. ‘사단의 회’에 대한 언급은 유대인에 의해 추방 된 그리스도인들을 배제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갈등은 에베소의 니골라당(2:6) 문제와 유사한 기독교 내부적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사야의 ‘단단한 곳에 박힌 못’의 개념이 계 3:12에서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었다. 그 기둥은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미래의 도시 새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3:12): 새겨진 ‘새 이름’은 버가모에 보낸 편지에 있는 ‘흰 돌’에서도 발견된다(2:17).
5.2 계 7:9-17: 당신의 위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거듭 거듭 요한은 세상의 고난의 가혹함과 믿음의 힘으로 극복한 이들의 천상적 평안을 말한다. 7:9-17의 환상이, 인들을 떼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호의 인을 친 직후에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똑같이 11:15-18의 승리와 감사는 11:3-13의 두 대표적 증인의 설명 직후의 귀결이다.
5.3 계 12:1-12: 해를 입은 여자
계시록 12장은 그리스도의 탄생의 진술로 시작한다.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뿐 아니라 사역과 가르침에 강조를 둔다. 그리고 전 생애에서 이 모든 사건들의 의미는 누가와 마태에 의해 회고적으로 읽혀지며 또한 유년 이야기들(infancy stories)로 형성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천상의 옷을 입은 한 여자(이스라엘? 하와? 마리아?)를 묘사함으로 시작하여 그 다음 즉시 산고(塵苦)로부터 위협받는 아이의 생명(십자가에서 죽은 무죄한 자)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자신에게로 취하는 하나님의 목적들(부활과 승천에서)로 옮겨 간다.
5.4 계 12:13-17: 추적
계시록 12장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지금 땅으로 던져진 용에게 쫓긴다. 그녀는 이 박해로부터 보호된다(유대 전쟁시 예루살렘에서 펠라로 그리스도인들이 도망한 것을 암시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화가 난 용은 공격을 여자의 남은 자손들에게로 돌리는데, 그들은 교회의 지체들이다.
이 여자는 요한의 환상에서 변화무쌍한 성격을 지니는데, 구약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의 박해까지 시온의 딸에서 믿는 자들의 어머니까지 구원 역사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요 한이 만든 이 영광스런 모습과 다른 여자 곧 악의 화신이며 요한계시록 17장의 음녀의 참람함(4.6)의 의도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다시 계시록 12장의 그리스도의 어머니와 계시록 21장의 그리스도의 신부 사이에 의도적인 연결을 만들어낸다.
5.5 계 21:1-21: 새 예루살렘
요한의 새 예루살렘 환상은 유대적 묵시 작품에서의 초기 전국 환상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 거룩한 도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보여진다(21:2). 이 새 창조에서 땅과 하늘 사이의 간격은 연결된다. 유대교 신비주의자와 희랍 사상가들은 비슷하게도 땅과 하늘의 일치를 상상하였다. 그러나 복음서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변형된 상황에서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계 21:3은 요 1:14과 3:13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5.6계 21:22-22:5:도시와 동산
풍부한 이미지들이 요한의 새(혹은 갱신된) 창조의 환상에서 마치 자리를 차지하려고 앞을 다투고 있는 것 같다. 거기에 거룩한 도시가 있고 또한 낙원이(타락 전에 있었던 것처럼) 있었다. 동산과 물 근원 자체는 창 2:9과 겔 47:1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소아시아 일곱 성에 있는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계 2,3장)을 성취하는 용어들로 묘사된 천상의 도시와 낙원을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인상적이다. 헤머에 의하면 천상의 예루살렘은 실제적인 지상의 일곱 도시들의 불완전성과 암묵적으로 대조되어 세워져 있다. 2.2에서 본 것처럼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는(계 2:7)‘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약속되었다(22:2).
5.7 계 22:6-21 : 예언의 위험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언자를 시험하는 지침들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 있는 사기꾼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공짜 숙식의 양에 의해 노출되었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것의 진리를 판단하기 위해서 행하는 기본적인 신앙에 대한 고백적인 시험의 요소(그들이 초기의 복음 전통의 요소 혹은 원형적인 신앙고백에 따라 어떻게 평가했는가)도 있었다. 즉각적인 예언(22:10)은 왜곡된 해석이나 어구 삽입에 취약할 수 있다. 예언적 상징의 힘에 기초를 둔 위협(22:18,19)이 성경 본문을 다루는 것을 예방하는데 적절할 수 있었다.
계시록 읽기, 다섯 순서들의 결론
다섯 순서들은 계시록을 더 잘 이해하도록 그 안에서 재료의 덩어리들을 조직할 수 있는 도식적인 골격을 제공해 주었다. 요한은 이 파멸의 재로부터 창조의 회복과 하나님을 영원히 예배하는 땅과 하늘의 통일이 올 것임을 주장한다. 계시록의 언어가 아무리 이상하고 다채롭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 것은 많은 관념들을 아주 명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리스도의 구속자로 서의 능력;
2.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들의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성;
3.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위한 예배와 증거의 상호 작용;
4. 이 세대의 일시적 성격(그 종교적 차원들에 있어서일지라도);
5. 기독교적 증거에 고유한 자기희생적 요소;
6. 기독교적 삶의 정치적 함축들;
7. 고난의 정황에서 소망에 대한환상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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