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
눅 11:1-13
찬송: 539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417장 (주 예수 넓은 품에)
오늘 본문 9-10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 말씀을 읽으면 우리는 우리 기도에 확신이 생깁니다. 또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100% 응답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구한대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과연 그렇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데 왜 우리의 경험과 다른 것일까요? 이 약속의 말씀대로라면 응답이 없는 기도가 없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좀 과장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좀 속된 말로 예수님이 뻥 치신 것일까요?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하루에 얼마를 하건 간에 우리는 모두 기도를 합니다. 기도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구한테 특별히 배운 적도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기도를 하며 삽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기도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숨 쉬는 호흡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신 교훈이 다른 교훈에 비해 그리 많은 편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정도였고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극히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더 강조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말로서 가르치시기보다 기도하는 생활을 실제로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4복음서 저자 중에 그래도 예수님의 기도하는 삶을 가장 많이 부각시키고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 지면을 가장 많이 할애한 사람이 바로 누가입니다. 누가는 자기 자신이 이방인이었고 또 누가복음을 읽는 독자가 대부분 이방인이어서 그런지 기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새벽기도를 하셨다는 것과 12제자를 세우시기 전에 철야기도를 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6:12). 그리고 다른 복음서 저자와 달리 기도의 가르침에 대한 내용만을 따로 모아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오늘 본문 11:1-13절 말씀입니다. (18장에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따로 나오기는 합니다만).
오늘 읽은 본문은 쉽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은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는 내용이 나오고, 5-8절은 비유를 통해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고, 9-13절은 또 다른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한 세 가지 교훈을 이곳에 모아놓았다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주기도문은 한 구절 한 구절의 의미가 깊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와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함께 살펴보고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어떤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앞에서 말씀드렸던 그 의문점 “과연 예수님이 우리를 기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지키지도 못할 허황된 약속을 하신건지?” 함께 풀어갔으면 합니다.
5-8절의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는 예수님이 친히 즐겨 사용하시던 역설적인 표현으로 “너희 중에 누가 . . .”로 시작해서 ‘아니다, 없다’라는 당연한 대답을 기대하시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7; 눅 12:25
-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마 7:9-10 (눅 11:11-12)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마 12:11 (눅 14:5)
-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눅 14:28
-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4
-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눅 17:7
-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요 8:46
4절에 “너희 중에 누가”로 시작한 예수님의 말씀은 7절 마지막에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까지 하나의 긴 역설절 의문문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예수님의 질문을 쉽게 풀어서 말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얘들아 너희 중에 친구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너희 중 하나가 밤늦게 그 친구 집에 가서, ‘여보게 친구! 내 친구 하나가 긴 여행 끝에 밤이 늦어서 지금 우리 집에 왔는데 먹을 것이 똑 떨어져서 당장 줄만한 음식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는데 그 친구에게 줄 음식 나한테 좀 줄 수 있겠나?” 라고 말하면 집 안에 있던 너희 친구가 ’아 여보게, 지금 문도 다 걸어 잠갔고 우리 애들도 다 잠들었으니 제발 나 좀 괴롭히지 말고 오늘은 그냥 좀 가주게!’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니?” 이런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이 나와야 합니까?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니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예의 상, 친구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죠”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세요. 7절에 (1) 나를 괴롭히지 말라 (2) 문이 잠겼다 (3) 나와 우리 애들이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 등등 이런 것들이 어떻게 친구가 친구에게 댈 수 있는 핑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인심이 사납다고 하는 요즘도 이렇게 하면 안 되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도 동양 문화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잘 알다시피 동양 문화에서 손님접대는 필수 아닙니까?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문전박대한다는 것은 사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비유가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친구가 밤중에 찾아가 먹을 것을 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기 때문에 그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해서 응답을 얻어내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끈질기게 매달리며 기도해야 기도 응답을 받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오해가 생길 우려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별로 들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하도 끈질기게 매달려 기도하니까 할 수 없이 응답해 주시는 그런 분으로 우리 하나님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그런 분이실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늘 비유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가 바로 8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8절에 “그 간청함을 인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중요한 키가 됩니다. “간청함”으로 번역된 “아나이데이아”라는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파렴치함” 또는 “부끄러움을 보름” (shamelessness)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에서 간청함이란 단어를 문자 그대로 “파렴치함”으로 번역을 하게 되면 문제가 좀 생깁니다. 왜냐하면 믿는 성도가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들고 나가는 것이 “파렴치한” 행동이냐는 질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경번역자들은 헬라어 아나이데이아를 “파렴치함” 대신 좀 더 긍정적인 의미의 “간청함” 또는 “끈질김” “persistence”로 번역해 왔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영어NIV성경은 “boldness” “담대함, 당당함”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를 밤중에 찾아간 친구가 끈질기게 간청해서 필요한 것을 얻어낸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께 끈질기게 기도해서 기도 응답을 받아내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 해석을 해온 것입니다. 끈질긴 기도 자체가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의 비유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를 당시 갈릴리 시골정서에 맞추어 해석해 볼 때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를 “체면 때문에”로 번역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어떻게 “파렴치함”이라는 의미에서 “체면”이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밤중에 찾아간 친구가 파렴치하게 간청하면서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고 때를 써서 귀찮은데도 할 수 없이 일어나 문을 열어줬다면 아마 떡 세 덩이만 얻어갔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8절 끝부분에 보면 “그 요구대로 주리라”라고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떡 세 덩이뿐만 아니라 손님대접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받아갔다는 얘깁니다. 또 그렇게 필요한 것을 다 받아간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밤중에 찾아온 친구가, 그것도 손님을 대접하겠다고 찾아왔는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거절했다면 아마 그 친구는 그 다음 날 아침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동네에서 아마 ‘이 무심하고 인정 머리없는 놈’이라고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느니 아예 귀찮아도 일어나서 친구를 후하게 대접하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의 체면 때문에라도 일어나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후하게 대해 준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에 대해서 잘 아시죠? 그 비유에서는 불쌍한 과부가 정말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아뢰며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응답을 받아냅니다. 간청을 통해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의 끈질김과는 달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은 끈질기게 매달리며 떼를 썼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금방 응답을 얻어냅니다. 왜냐하면 “너희 중에 그럴 사람이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아니요”라는 당연한 대답을 이끌어 내시기 위한 질문이거든요. 또 이 “간청함”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제외하고는 오늘 비유에서 끈질김을 나타내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오늘의 주인공이 끈질기게 문을 두드렸을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그것은 단지 우리들의 추측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간청함”으로 번역된 이 단어를 정말 끈질기게 매달렸다는 의미로 해석하기엔 너무 무리가 있습니다.
또 8절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간청함”이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간청한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간청함으로 번역하는 학자들은 이것을 당연히 빵을 빌리러 간 친구의 끈질김으로 봅니다. 그런데 8절에 나오는 내용의 주어는 모두 빵을 빌려주는, 즉 집 안에 있는 친구입니다. 보십시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누가 일어나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또 “그 체면 때문에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누가 그 요구대로 줍니까? 모두 집 안에 있던 친구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간청함”으로 번역된 단어는 집 밖에 서 있는 친구에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체면 때문에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집 안에 있는 친구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간청함으로 번역된 단어가 결코 끈질김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자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의 말씀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친구라는 이유로는 귀찮아서 주고 싶지 않겠지만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어나 너의 필요한 모든 것을 줄 것이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때 자신의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이 응답해 주시느냐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오늘의 비유를 잘못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집 안에 있던 친구와 우리 하나님을 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집 안에 있던 친구를 하나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비유의 교훈을 집 안에 있던 친구가 보여준 모습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 사람들도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 하시겠느냐”라는 논리를 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 세상 친구들도 자기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너희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더 너희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체면 때문에 마지못해 억지로 줄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우리가 구하는 빵 세 덩어리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좋은 것으로 후히 주시고 소용대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 앞에 왜 마음껏 나가서 구하지 못하느냐고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으신 분임이 깨달아질 때 담대해지고 우리의 기도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나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내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나의 필요를 다 아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기도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하나님의 참 아버지 되심을 먼저 깨닫고 그 하나님이 내 모든 사정과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 위에 기초를 둬야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실 우리의 기도의 내용보다도 우리의 기도의 대상인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심을 바로 아는 것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껏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에도 그 기도의 첫머리가 어떻게 시작합니까? “아버지여” 마태복음에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또 오늘 본문 11-13절에서도 이와 똑같은 논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 임을 드러내어 놓고 무리들에게 가르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친밀한 관계를 제자들도 함께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친밀한 아버지처럼 생각하기 보다는 저 멀리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저 먼 하늘 어디선가 계시는 막연한 분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를 따라 도우시는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으신 분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혹자는 우리가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로 이어서 나오는 9절과10절 말씀이 그런 의미로 들릴 수 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치 기도가 어떤 자판기처럼 동전만 넣으면 커피나 음료수를 마음껏 빼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얼핏 보면 구하면 당장 주시고 찾고 두드리면 당장 찾아내고 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3가지 동사는 어떤 꾸준한 노력을 요하는 동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구하라고 했을 때 딱 한 번 구하라는 의미 보다는 계속해서 구하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찾는 것도 그렇고 문을 두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를 더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 헬라어에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헬라어에는 같은 명령어 중에서도 현재형과 과거형이 있는데 오늘 본문의 이 3가지 동사는 모두 현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과거형 명령어는 일회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에 현재형 명령어는 지속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은 한번 하고 말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할 것을 말합니다. 의역을 한다면 “계속해서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계속해서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기도에 대해 두 가지를 가르쳐 줍니다. 첫째, 기도할 때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합니다. 때로는 무응답이 하나님의 응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엔 아직 때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해지기를 원하시면서 기도의 응답을 늦추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꼭 응답됩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께서 가장 적절한 시기에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도 더 잘 아시는 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교훈은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친구도 자신의 체면 때문에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요구를 그 필요한 대로 다 들어줬다면 하물며 우리의 형편을 다 잘 아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정당한 필요를 그 분께 구할 때 그 기도를 흔쾌히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요구한 것 그 이상으로 응답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앞으로도 계속 기도하실 때에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임을 기억하시고 담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계속 믿음을 갖고 인내하시며 끝까지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들보다 더 넘치도록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좋으신 아버지를 의지하여 계속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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