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빌 1:27-2:4)

하나님아들 2013. 3. 5. 00:52

제목: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본문: 1:27-2:4

찬송: 325, 455

 

오늘 읽은 본문은 "오직"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바로 앞부분에서 자기가 현재 처해 있는 사정과 그리고 현재 느끼고 있는 깊은 심정에 대해 고백하고 나서 갑자기 테마를 바꾸어 빌립보교회를 향해 실제적인 권면의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빌립보교인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는데 그 말이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입니다. 과연 빌립보교인들에게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말씀이 오늘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 지를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생활하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127-30절의 말씀은 우리 한글성경에서는 다섯 개의 문장으로 나뉘어 번역이 되어있지만 원래 헬라어 성경에서는 하나의 긴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긴 문장의 핵심을 이루는 주동사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활하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씀드리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명령의 말씀이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활하라는 이 동사는 바울이 평소에 흔히 사용하던 단어가 아니라 오늘 여기서만 특별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 의미는 단순히 한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막연한 의미 보다는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권리와 특권을 누릴 뿐 아니라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사는 삶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제 이 세상에서 천국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세상 법은 불신자들보다도 더 안 지킨다면 어떻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전도도 많이 하고 세계선교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 개개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불신자들에게 참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회사의 한 직원으로서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것 물론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땅 끝까지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없이는 소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주일날에만 예수 믿는 교인수가 많아질수록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쇠퇴해지고 말 것입니다. 주중에 자기가 속한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복음은 그 영향력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세계가 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종교도 이론이나 교리만 가지고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삶으로 내가 믿는 신앙이 참 종교임을 보여주어야 전도가 되는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천국시민답게 믿음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말합니다.

 

두 번째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사도바울은 27절에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이 사용한 단어들이 모두 전투용어들이라는 점입니다. “한 마음으로 서서라는 말은 전쟁을 하는 군인이 어떤 전투상황에서도 확고부동하게 서서 자기에게 맡겨진 기지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남아공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우리 한국이 그리스에 20으로 잘 이기고 나서 아르헨티나와는 안타깝게도 41로 지고 말았습니다. 축구강국의 높은 벽을 실감하는 경기였죠. 그래도 우리 골키퍼 정성룡선수가 여러 차례 선방해 줬기 때문에 더 큰 참패는 막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정성룡선수가 자기도 볼 드리블을 잘 한다고 하면서 골대를 지키지 않고 자꾸 공을 몰고 나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골키퍼는 잘 하건 못 하건 간에 골대를 지켜야 하고 다른 선수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포지션에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기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묵묵히 잘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는 것은 적군을 향해 공동전선을 편다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씀드리면 팀워크가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며 서로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내에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분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22-4절에 보면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고 권면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겸손의 본보기로 예를 들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 공동체가 분쟁이 없이 서로 조화를 잘 이루려면 사도바울이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인 겸손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겸손의 자세가 공동체의 일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타날 때 한 뜻으로 협력하는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 교회를 같이 섬긴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는 것 외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 교회 아닙니까?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경제적인 형편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취미, 직업 등이 다른 것이 보통 아닙니까? 이렇게 서로 다른 가운데에서도 같은 교회에서 봉사하며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은 이 같은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의 미덕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 쪼~(웃으면서) 부족한 것이 하나있다면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받아들이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 때 서로 전공분야가 다른 한국 목사님들끼리 모여 한 가지 토픽을 놓고 서로 토론을 하게 되면 기대와 달리 토론이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쉽게 잘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그런데 영국 사람들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서로 토론하는 문화입니다. 그들은 의례히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하나 생기면 그들은 그 문제를 놓고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 못됐거나 실수한 부분을 지적하고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표본으로 삼는 것을 보면서 땅덩어리도 그리 크지 않고 인구도 그저 그런데 과거에 전 세계를 제패하고 지금도 세계 강대국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실감하게 합니다.

 

좀 전에 말씀드렸듯이, 사도바울은 복음에 합당한 삶에 대해 설명하면서 전투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는데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영적인 전쟁을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영적인 전쟁이란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를 쓰러뜨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할 때 이 적군은 우리를 공격해 쓰러뜨리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조금 해 보신 분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 것입니다. 또 자기가 어떤 부분이 약해서 적의 공격의 대상이 자주 되는지도 알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전쟁입니다. 미리 예고하고 공격하는 적은 없습니다. 전쟁을 하듯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세 번째로,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그리스도를 대신해 고난을 달게 받는 삶입니다. 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바울의 이신칭의교리만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고 율법도 함께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교 열성분자들의 핍박을 의미합니다. 빌립보교인들은 이렇게 순수한 복음을 변질시키고자 했던 외부 무리들의 방해공작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교인들은 예수를 믿고 자기들이 믿는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 이런 고난을 감수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핍박은 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핍박이요 고난인 것입니다. 빌립보교인들과 우리는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역시 예수 때문에 손해 봐야 하고 교회 봉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 물질 등을 희생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믿음엔 고난이 반드시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랬고 2000년 기독교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에는 이렇게 율법도 같이 지켜야 한다는 식의 복음을 전하는 예는 거의 없지만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복음을 왜곡시키거나 복음에 물을 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로 크게 인기를 얻었던 조엘 오스틴목사의 긍정의 힘이라는 책과 한국에서는 물론 이곳 싱가포르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고 있는 소위 예수 믿고 복 받자는 식의 축복신학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이곳 싱가포르의 가장 큰 대형교회라고 할 수 있는 두 교회가 있는데 각각 약 3만 명의 교인과 2만 명의 교인을 가진 교회입니다. 이 두 교회는 소위 축복신학이라고 하는 변질된 복음에 현혹돼 많은 성도들이 몰려드는 교회로서 이미 한국에 까지 소문이나 있는 교회들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교회에서는 현세에서 누리는 축복만 강조할 뿐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받는 고난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믿음 좋은 성도들은 모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심지어 왜 예수 믿으면서 아프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면 축복받고 다 고쳐주십니다.’ 왜 가난하게 사십니까? 예수 믿으면 물질적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이런 식의 메시지를 선포하곤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얘기 같아서 누가 저런 교회에 다닐까 생각하겠지만 이런 가르침에 미혹된 사람들이 요즘 너무나 많고 이런 메시지가 전 세계적으로 판을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정한 복음을 크게 오해하고 왜곡시킨 것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하나라도 더 축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일각에서는 복음을 너무 값싸게 취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음을 그냥 단순히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간다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를 믿고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젠 다 됐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과 삶이 철저히 이분화되어 살면서도 전혀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다. 이것 역시 복음을 너무나 잘못 오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한 복음주의자였습니다. 복음의 진정한 능력을 믿고 또 그 복음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제 내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손해도 보고 고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 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도 그랬듯이 빌립보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대신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그리스도 때문에고난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대신해고난 받는 것은 서로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 받는다는 것은 예수를 바르게 믿기 때문에 따라 오는 고난이요 어려움입니다. 바르게 믿으려면 반드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업의 성공이나 출세를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동원하는 방법들을 예수를 위해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그리스도를 대신해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24절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이 세상에서 당해야 할 고난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바울이 예수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듯이 우리가 스스로 자원해서 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주님은 지금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단 한 번의 고난으로 충분합니다. 또 어느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가진 것을 희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바쳐 희생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희생해 가며 한 영혼을 살릴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 필요하며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지금도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신해 받는 고난인 것입니다. pause 고린도후서 1:6절에 바울은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사도바울은 자원해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교인들도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은 오늘도 필요로 하시고 찾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시간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2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이 은혜는 누가 주시는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고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인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이나 어려움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마음 상해하거나 불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같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요 그리스도인의 특권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통해 주님께 헌신g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와 같은 큰 은혜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 감사합니다. 복음을 바로 들은 자 답게 복음의 능력을 붙잡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고 다짐하고 돌아가는 여기 모인 성도들과 가정과 사업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 이형일교수의 신약의 기독론
글쓴이 : 해피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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