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이란!

[스크랩]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하나님아들 2013. 2. 21. 10:49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서 2장 24-26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이니라”



 지난번에 예수님의 족보에서 다말의 구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또 한명의 여자 라합을 오늘은 야고보서를 보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타협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물론 독불장군으로 살아 갈수가 없을 것 입니다. 그래서 때론 자신의 주장이 분명히 옳지만 양보도 하면서 타협합니다.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분쟁을 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선 타협을 하여 그 분쟁을 끝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과의 타협을 원치 않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 다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부분을 읽으면서 왜 다 죽여야 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많은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타협 가장 많이 이루어 지는 곳이 성경말씀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그것을 연구하려 했던 열정 또 그것을 지키려 했던 열심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잘못된 신앙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원인은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너무도 타협을 잘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해석하면서 그것을 여러 상황에 맞추어 너무도 잘 정립을 하여 놓았습니다.

 

 

그런 타협으로 인하여 진리가 희석이 되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우리가 타협이 꼭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사랑으로는 세상을 덮을 만큼 타협 하면서 사랑해야 하지만 성경 말씀을 타협 해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오직 진리만이 전해 질줄 믿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는데 여러분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고 또 어떤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인가를 바로 아는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이것이 정립이 잘되 있어야 자신의 신앙생활에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챤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잘 알고 있고 또한 전도를 할 때 예수믿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전합니다. 그러다 이 본문을 보게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나타난다고 그럴싸하게 타협합니다. 지금 본문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본문 말씀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보게 되면 행함을 잘못하면 구원을 못 받는 것 처럼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한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 의에 이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이외의 방법이 있는 것 처럼 성경이 쓰여져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의 해석이 잘못 되었다고 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 저 방법 여러 가지를 사용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 주기위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표준으로 기록 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두 사람을 살펴 보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 입니까? 순종 하는 것 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 입니까? 이것이 순종이라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 앞에 몇%나 순종 했습니까.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면 율법을 얼마나 완전하게 지켰습니까. 노력합니까? 노력하는 것으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노력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할 때 로마서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가지고 종교 개혁을 했습니다. 그런데 후에 사람들은 야고보서의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믿음만 가지고 되냐 봐라 분명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지 않았냐 하면서 믿음에다 무엇을 첨가 하려 합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반대되는 성경 절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에다 마치 우리의 노력을 첨가 하는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온전히 100%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써 이루어 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협을 합니다. 로마서도 하나님 말씀이고 야고보서도 하나님 말씀이니까 둘 다 인정하여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도 구원을 받는데 꼭 필요한 한 요소라고 이야기합니다.

라합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2장8-24절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치 아니하면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라합이 그들을 창에서 줄로 달아내리우니 그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하였음이라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따르는 사람들이 너희를 만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 사흘을 숨었다가 따르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 길을 갈지니라 두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로 서약케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라합이 가로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따르는 자가 돌아가도록 사흘을 거기 유하매 따르는 자가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만나지 못하니라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와서 그 당한 모든 일을 고하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여리고 성에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들어 갔습니다. 기생 라합의 집은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 하므로 정탐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었을 것 입니다. 그들이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 하였고 무사히 이스라엘 진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일로 기생 라합이 구원을 받았는데 야고보서에는 라합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왜 기생 라합을 야고보서에 기록했겠습니까? 라합은 기생입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사람입니다. 그녀는 자기나라 왕이 보낸 사람에게 정탐꾼을 숨겨 놓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여리고 사람 인 그녀는 매국노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를 성경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법으로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라합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의롭다 하는 사람들이 나오면 마치 그의 행위가 의로운 것으로 잘못 알게 됩니다. 기생일 하고 있는 사람이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하나님이 의롭다 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백성을 인도하신 모든 사실을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습니다. 하나님 밖에 참신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여리고 기생 이었지만 마음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싶어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믿었습니다. 그 소문대로 라면 여리고는 분명히 멸망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이 살아 날수 있는 방법을 갈망했습니다. 그때 정탐꾼이 자기 집에 들어온 것입니다. 우연히 들어 온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의 가정을 구원 하기 위해서 생명의 구원을 갈망하는 그 집에 정탐꾼을 그 집으로 인도 하셨습니다. 사실 사람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비록 기생 일지라도 자기 생명을 구원 받기 원하는 기생에게 하나님은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만약 라합이 그들이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살수 있었다면 그들을 숨겨 주었겠습니까?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라합은 그들을 고발 했을 것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리고는 망하고 이스라엘은 승리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수 있는 방법은 이스라엘 백성과 연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정탐꾼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이 렇게 한일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고 합니다. 숨겨준 것이 행함입니까? 지금 라합을 선택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 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이 정말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셉,다니엘,예례미야등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기생 라합을 써 놓고 그는 행함으로 의롭다 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야고보서의 행함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니깐 그녀가 정말로 무엇을 잘해서, 깨끗하게 의롭게 살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기생의 행위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겠습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라합에게 본받을 만한 어떤 행위도 기록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붉은 줄을 달아 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라합이 붉은 줄을 메달아 놓고 자기 친척 아는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우리 집에 오면 산다고 했습니다. 그걸 믿을 수 있겟습니까? 적군이 쳐들어 오는데 어느 집에서는 살고 어느 집에서는 죽는다면 그것은 허망한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노아의 때도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할 때도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라합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했습니다. 틀림없이 우리집에 들어오면 산다고 했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적으로 여리고가 망할 때 라합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기 친척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입니다. 자기 친척들을 집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만약 우리집에 들어와도 혹시 죽을 수도 있다면 모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집에 오면 절대로 안 죽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 믿는데도 혹시 지옥에 갈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 말할 수 있겟습니까? 우리는 예수 믿으면 분명히 천국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오히려 안 믿는 그들을 안타까워 하지 않습니까?

라합은 기생입니다 또한 거짓말 장이 입니다. 그런 사람을 선택해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생애에서 율법적으로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율법적인 의는 하나도 없습니다. 기생이 무엇을 잘 했겠습니까?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어져서 움직여지는 것이 행함입니다. 빨간줄을 달아야 산다고 하니까 달았습니다. 바로 빨간 줄을 달아 맨 것이 행함입니다. 믿음은 어떤 약속이 믿어져서 그 약속대로 행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확신이 되면 행해 지지만 그것이 확신이 안되면 행할 수가 없는 것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라합이 집에다 붉은 줄을 매달아 놓고 그 안에서 기생노릇을 한다면 살까요 죽을까요? 어떤 잘못을 해도삽니다. 라합이 살수 있는 길은 붉은 줄을 달아 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붉은 줄을 달아 메지 않고 그 안에서 죄도 생각하지 않고 기생 하던 것 모두 치워 버리고 깨끗하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녀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죽었다면 성경에 기록도 안되었을 것입니다.

 정탐꾼과의 약속은 그 집에 붉은 줄을 매달고 그 집에 들어와 있는 것 이었습니다. 라합은 정탐꾼과의 약속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무엇을 잘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약속에 따라 움직인 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율법에 따라 움직여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이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율법의 행함으로 알고 있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많은 걸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약속했기 때문에 구원 하는 것입니다. 라합이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비록 기생이지만 약속에 따라 행했기 때문에 살아난 것 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했기 때문에 구원 받는 것 입니다. 그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에 라합을 이야기 한 것은 그 행함이 율법적이 행함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까? 드리지 말어야 합니까? 이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태어난 아들입니다. 율법에는 분명히 아들을 번제로 드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후에 율법이 기록 되었지만 기록되기 전 사람들도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 하였다고 기록 되었으며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사람 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번제를 드리지 말어야 하는 것도 하나님의 율법이고 번제로 드리라는 것 도 하나님의 명령 입니다. 만약에 율법에 따라 번제로 드리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불합격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드렸습니다. 행함이없는 믿음을 이야기 하면서 야고보서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이야기를 써 놓은 이유는 이 행함은 율법에 따른 행함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7절에서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나무와 불은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 하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전에 저는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인다고 직접 이야기 할 수 없어서 우회적으로 이야기 한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서를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린양을 준비 하실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어린양을 분명히 준비 하실 줄 알었기 때문에 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죽지 않을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이 순종입니까?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명령에 순종하여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순종을 이야기 할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을 저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히브리서11장 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아브라함은 분명히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행하여 지는 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율법에서 오는 것이라면 아브라함과 라합을 기록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의인들 노아, 다니엘, 욥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 시킬 때 이 세 사람만은 구원해 주신다고 하신 의인들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해 확신하고 그 약속에 따라 움직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그룹 회장이 5시까지 삼성 사옥으로 오면 1억을 준다고 했을 때 그 말이 믿어지면 갑니다. 하지만 믿어지지 않으면 웃기지 말라 하면서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히 믿어지면 아마 택시라도 타고 빨리 갈 것 입니다. 행함이라는 것은 그 사실이 믿어져서 움직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것은 안 가버리는 것 입니다 그것은 안 믿어 지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어떤 약속에 대해서 잘 안 믿어 져서 움직여지지 못하는 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행함과 행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말이지요. 하지만 야고보서에 기록한 행함은 조금 구분해서 기록했습니다. 행함은 약속에 대해서 움직여 지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행위는 율법에서 온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심이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믿음에서 난 행함과 여기서 말하는 행위는 다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그것은 행함이 있었기에 얻은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은 약속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에베소서의 행위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행함 말은 같은 말이지만 야고보서에서는 분명히 구분을 해서 썼고 그러기에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은 것 입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은 것은 그것이 율법이 아니고 약속을 믿는 것을 말해 주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와 비슷한 표현인 죄가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자범죄와 믿지 않으면 지옥 가는 죄가 있습니다. 똑같이 죄로 쓰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범죄를 지은 사람에게 천국을 못 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 기독교 진리와는 정 반대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에 기록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 라는 말씀을 우리가 행위를 잘못했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아니고 행위를 잘해야 산다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서 저는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으로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남길까? 그 충성의 기준이 무엇일까? 그런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그것을 남기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데 얼마를 충성해야 두 달란트를 남길지가 확신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그 두 달란트는 나의 행함이 있는 믿음을 예수님은 내가 장사한 것처럼 비유로 말씀 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작은 일에 충성 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의 적은 믿음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천국의 너무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행함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을 져 버리고 믿음에 따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땅에 감추어 두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바로 땅에 감투어둔 달란트와 똑 같은 것입니다.

 땅속에 감추어 두었던 사람이 뭐라 불평합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때론 전혀 우리의 뜻과는 다른 현실이 벌어집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기 보다는 불평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불의 하다고 판단합니다. 마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하고 똑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무익한 종이라 말씀하면서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말씀합니다. 땅속에 넣어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인입니다. 또한 에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주님께서 믿음을 주셨지만 그들은 믿음에 따른 행함을 행하지 않고 육신에 따라 행했기 때문에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이고 믿음은 믿음입니다. 그 둘이 결합된 것은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해서 자녀 삼으셨고 구별하셨기에 우리는 율법을 최선을 다 해서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데 우리의 잘못된 행위로 인하여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 할 수 있기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약속이 믿어지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졌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믿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약속을 믿고 행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최선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냐 안 하느냐 그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믿는 것을 최선을 다할 수가 있습니까?

최선을 다 해서 믿었는데 안 믿어 진다는 말이 성립 될 수가 있습니까?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느냐 안 믿느냐 선택 밖에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셨을 것 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이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잘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 하고 있습니다. 바리세인 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은 나의 가능성은 0%에다 약속을 믿는 믿음 인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천국 갈 가능성은 0%인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을 믿으니까 천국 가는 능력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분명히 죽은 믿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아서 움직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을 쉬려고 멀리 여행을 떠나서 망중한을 즐기지만 우리는 그 시간에 하나님을 찾고 주의 성전으로 나와 기도하며 주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울적할 때 유행가를 부르면서 그 마음을 다스리려 하지만 우리는 찬송가를 부르는 게 더 좋고 그 찬양으로 인하여 많은 기쁨을 누립니다. 믿음은 행함과 같이 일한다는 것은 새로 태어난 자는 심장이 뛰는 것같이 그것을 심장이 뛴단고 생각이 안듭니다. 자연적인 작동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나의 심장뛰는 것을 남에게 보여준다면 병원에 가야합니다. 영이 산 사람은 육신속에 착한 일을 행하시는 이가 들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행함이라 생각합니다. 행함이 있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져서 오늘도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의 전에 나오 신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행함이 있는 구원 받은 주님의 백성인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예수의 날까지 지켜 보호하시고 인도하실줄 믿습니다.扈ⓗ

출처 : ╋예수가좋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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