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란! 예배 기타!!!

[스크랩] 변화하는 현대문화에 있어서 예배의 전망

하나님아들 2013. 2. 14. 13:57
들어가는 말


오늘날의 급격한 문화변동이 정치, 경제, 교육, 과학등은 물론 그리스도의 신앙생활에도 나타나고 있는 때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배의 변화를 살펴보고 다가오는 21세기 예배의 변화를 전망해보려고 한다. 이 연구는 예배변화의 구체적 대안의 제시보다는 예배변화에 대처할때 고려해야할 범위와 문제점들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예배의 변화에 관한 최근 동향


한국교회에 있어서 예배의 변화에 대한 관심은 근래에 이르러 대두되었다. 여기에는 몇가지 교회 내적, 외적 요소가 작용하였다. 한국교회가 지닌 내적인 요소로는 한국선교 100주년이 되기 까지 한국교회는 오로지 전도지향성의 교회였으나, 선교 2세기가 되면서 성숙한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동안 이어내려온 예배에 대해서는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요소로는 교회성장의 정체에 따른 위기극복의 일환으로 예배의 변화를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한편, 한국교회 외적인 요소로는 세계교회의 변화에 따른 것인데,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예배복고운동이나 미국 교회의 대형교회의 자유로운 예배의 영향이 있다.

이러한 내적 외적 요소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이 교회마다 다르다. 크게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미국 교회에서 보여지는 자유로운 예배에 영향을 받은 예배인데, 문화적 변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데, 젊은 연령층에 관심하는 교회, 예를들면, 윌로우크릭(Willow Creek), 새들백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 온누리교회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세계교회일치운동의 예배복고운동에 관심을 가진 교회가 있는데, 신학교육을 통해 전통의 유산을 회복하고자하는 목회자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셋째, 예배의 변화에 관심을 갖지 않는 교회로 전수된 예배형식을 충실히 따르는 교회인데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회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이 중에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나, 지역교회 형편 때문에 예배의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는 교회도 상당수에 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과연 예배의 변화가 필요한것이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예배의 변화의 필요성과 한계


우선, 예배의 성격 자체가 갱신을 요청한다. 예배란 그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께 오늘의 회중에 의해 드려지므로, 회중의 존재를 형성하는 삶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고, 삶의 자리에 따라 예배의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회중의 삶의 집약된 표현으로서의 예배는 갱신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회중이 변화를 요청한다. 변화된 문화 속에 사는 회중은 새롭게 개념화된 언어와 그들에게 익숙한 예술적표현으로 복음을 듣고 표현하고 싶어한다. 마지막으로, 사회가 예배의 변화를 요청한다. 회중의 신앙이 그들의 삶 안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회중의 예배는 그들이 처한 사회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을 때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있게 된다. 사회의 선교적, 윤리적 요청은 예배의 갱신을 부른다.

이러한 예배의 변화의 필요성은 대부분 동감할 수 있지만, 변화의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배경과 교회의 특수성, 목회자의 목회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역사적 고찰을 함으로 다가오는 시대를 전망하는데 안목을 얻을 수 있다.


예배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


기독교 예배의 역사와 발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전통과 개혁의 변증법적 변형이다. 기독교 예배는 시대마다 전통적인 예전에 예속되려는 성향과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려는 개혁적 시도가 긴장 또는 갈등구조를 유지하며 변천되어왔다.


1.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 예배의 변화.

초대 기독교의 예배에는 일정한 형식과 자유가 어우러져 있었던 것 같다. 천국복음의 전파와 종말론적 사건이 전개되는 제자공동체에는 황무지를 개간할 때와 같은 자유함이 있었다. 한편으론 유대교의 회당예배와 불가분리관계에서 그 형식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분명한 것은 초기 기독교예배는 유대교의 하나님 예배와 동일한 기초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초대기독교예배에 전통에의 예속과 새로운 세계를 여는 자유로움의 특성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스카 쿨만이 지적한 것처럼 초대기독교예배는 비록 예배의 내용에 있어서는 유대적 전통에 예속되지 않았지만, 형식에 있어서 유대교 예배의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예배의 구조는 물론이고 각 요소들도 직접 간접으로 유대적 표현을 따랐다. 그러나 초대공동체 예배의 특징은 그들의 자유로운 영적표현에 있다. 그들의 자유로운 예수의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유대적 전통들을 새롭게 해석한 예수의 종말론적 선언과 행위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자유를 유대교가 허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자연히 원시기독교예배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훼르디난드 한이 지적한 원시기독교 예배가 유대교 예배로부터 나와 새로운 형식을 요구한 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행위의 현재적인 현실성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원시공동체의 본질적인 세가지 요소는 예수의 활동과 죽음, 예수의 부활과 현재, 임재, 그리고 성령의 활동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유대교 예배와 함께할 수 없는 상이점이라는 것을 들었다. 초대기독교예배는 이 세가지 본질적 요소의 상관 관계를 통해 잘 이해된다. 즉, 부활의 증인들은 예수의 활동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며, 성령의 강림과 활동을 통하여 보증을 얻었으며, 바로 여기에서 공동체의식이 성취된 것이다. 이런 초대공동체의 특이성은 유대교예배의 전통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 주었으며, 이후의 예배의 역사 속에서 변증법적 변형을 이루어가는 중심적 요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초대기독교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에서 분리되어가는 과정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대기독교공동체의 형성과 발전과 함께 고찰해야 한다. 한(Hahn)은 초대기독교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네부류, 즉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 공동체, 헬레니즘적 유대인 기독교공동체, 이방인기독교공동체, 속 사도시대의 예배로 나누어 이 공동체들의 예배와 유대교의 예배의 상관관계를 역사적으로 기술한다. 먼저, 아람어를 사용한 기독교공동체예배는 사도행전 2-5장의 누가의 진술에서 알려졌는데, 유대교예배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면들을 보여준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보인 곳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겠다"(마 18:20)는 말씀은 유대교적 예배이해를 거부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소수 열 사람이 포기되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예수의 세례로, 유월절 식사는 성만찬으로, 마라나타기도, 구원소식의 선교설교등은 기독교공동체의 독특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아멘, 할렐루야, 기도형식등 유대교예배적 표현들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전과 율법의 경우 중심적 위치에서만 벗어났을 뿐, 이 공동체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성전과 회당은 선포와 선교의 장소였다.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공동체의 독자적 지배력을 인수한 이후에는 강화가 되어 엄격한 율법준수, 유대적 제의 질서에의 충실등 편협한 유대인 기독교가 형성되었다.

그 다음, 스데반, 빌립, 바나바를 중심으로 예루살렘과의 연대를 유지하며 안디옥에서 발전했던 헬리니즘적 유대인기독교공동체는 사도행전6장1-6절의 기사에서 히브리적 유대인기독 공동체와 확실히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유대교 예배에 있어서 더욱 확실히 분리시키고 있다. 헬라어구약을 사용하고,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도 예수의 의도를 더욱 철저히 받아들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공동체에서 유대적 제의적 표상들을 종말을 선언함과 동시에 기독론적이고 교회론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를 율법과 성전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셋째, 초기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에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예배의 본질적 요소를 수용한 채, 성령의 활발한 활동이 포함되었다. 이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보여주는 예배의 설명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데, 사도적 교훈에 포함할 수 있는 교훈(디다케), 계시, 지식이 있고, 아멘이나 방언, 마라나타의 기도의 요소, 찬미가 있다. 여기에 다른 곳에서 성렁의 은사로 분류한 예언, 방언, 통역의 요소들도 언급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부적으로는 무질서와 분열, 그리고 공동체의 폐쇄성이고, 밖으로는 주위 세계의 이교적인 사상의 위협이였다. 이것을 간파한 바울은 한편으론 질서와 통일성, 공동체의 덕, 예배의 이해성을 강조하였고, 다른 한편으론 유대주의에 대해서처럼 혼합주의적이고 금욕주의적인 노력들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저항하였다.

마지막으로 속 사도시대(60년초부터 1세기말)의 예배는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야고보서, 목회서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들에서 간접적인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는 은사적인 형태가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의 직분적 질서에 의식적으로 결부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약화되는데, 따라서 유대적 제의개념들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시에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경우에 종말론적 기독론적 메시지를 유대묵시문화적 표상자료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히브리서 역시 제의적인 진술로 가득차 있다.[7:1-10:18] 야고보서에는 아람어를 사용한 유대인 기독교에서 수용된 장로제도가 전제되어 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제의적 술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다.[벧전2:5,9] 이 시대는 목회서신에서 처럼, 문서와 교훈이 나타나고, 전례적인 공식문과 공동체적 질서가 구체화되는데, 따라서 예배의 살아있는 은사적인 형태는 의식문에 흡수되어 약화되었다.


2. 종교개혁시기에 있어서 예배의 변화

루터, 칼빈, 쯔빙글리, 웨슬리에게 있어서 각 각 예배의 강조점이 다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학적인 이해에 따라 예배를 변형시켰다. 중세의 예배의 관심은 성례전의 형태와 성물에 있었던데 반해, 종교개혁자의 관심은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각 예전의 단순한 행위 하나 하나에 있었다. 성례전은 약화되고 개신교예배의 특징이 된 교육적 예배는 더욱 강화되어갔다. 자국어, 인쇄된 서적, 긴 설교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또 한가지 개신교예배의 특징이라면 예배구조에서 찬송에 독립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이겠다. 죤 바클리(John Barkley)는 개혁교회의 세가지 특징을 말하기를, 첫째 예배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경배와 감사, 겸손과 회개, 하나님 말씀을 들음, 다른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회중 자신들을 위한 기도의 시간이 있다. 둘째, 예배는 항상 공동체적이므로 비록 혼자 기도할 때일지라도 다른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 함께 기도하는 것이다. 셋째, 예배는 공동체적이므로, 내향적인 동시에 외향적인 성격이 있고 따라서 침묵과 말씀, 음악과 예배적 행동, 촛불과 색깔등을 사용한다. 이러한 특징은 개혁신학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칼빈과 쯔빙글리, 낙스에게서 각 각 달리 예배의 변화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있다.

단순성을 강조한 칼빈은 그의 예전적 모델을 교황제도에 앞선 고대교회였고,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결합된 원리를 찾으려고 노렸했다. 그에게 성경에서 벗어난 것은 주제넘은 것이고, 배은망덕한 것이며, 불경건이고 지독한 불충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보다 성경에 충실한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인간의 고안물을 최소한도로 첨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너무 개성적인 예배는 인간의 잘못된 상상력의 산물을 숭배하는" 자들을 경계했고 그 대안으로 예전적인 예배를 지지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외부형식이 영적예배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정교한 의식적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예배자가 자신들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성경적 권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것이다.

쥬리히예배서(The Zurich liturgy, 1535)를 만든 쯔빙글리는 많은 말이나 교훈, 의식적인 순서보다는 단순성과 고요함을 선호했는데, 기념설로 알려진 그의 성만찬 신학의 특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관상(contemplation), 친교(fellowship), 감사, 도덕적 열정이다. 특히 상상력이 고갈되거나 마음이 혼란함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두가지 관상의 주제를 주었는데, 하나는 성찬의 성물로, 이들은 매우 빨리 효과적으로 예배자의 마음을 자극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다른 한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끼리 이야기하는 것처럼 회중들에게 읽어준다. 이러한 관상은 성찬을 통해 성물자체의 깊은 의미, 즉 갈보리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실히 의심없이 마치 현장에서 눈으로 보듯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죤 낙스는 그의 예배서(The Form of Prayers)에서 후에 개혁교회의 특징이 될 여러 요소들을 강조했다. 즉, 성령의 영감에 의해 집례자 자신의 기도들을 작성하고, 공동체적 행위를 위해 성경을 자국어로 모든이에 들려지도록 큰 소리로 읽혀졌다. 설교를 위한 단순한 예복만을 남겨두므로 목사와 평신도의 간격을 좁히고, 예배인도는 칼빈이 목회했던 스트라스부르그나 제네바에서처럼 성찬상이 아니라 강대상에서 했다.


3. 청교도에 있어서 예배의 변화

종교개혁 이후에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신교회에 가장 큰 예배적 전통과 특징은 청교도예배에서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특히 청교도 신앙을 초대기독교신앙의 모델로 보고 지향해 오고 있기에 그들의 예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교도의 예배목표는 교회의 전통적인 인습이나 인간의 고안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 규례만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예배는 엄격한 성경적인 기초, 언약의 강조,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에 대한 표현과 평신도에 대한 격려를 담고 있었다. 그 예배는 철저한 성경중심, 성찬은 물론 찬송과 기도와 교회건축에 있어서 단순한 예전, 설교와 기도에 있어서 탈원고적 성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철저한 성경중심이었다는 점이다. 설교를 가장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는데 이런 설교중심의 예배는 강대의 중앙에 놓인 강단의 위치에서 나타난다. 설교의 시간은 한시간에서 두시간까지 걸리기도 했는데, 이 때 설교에서 오늘날의 매스미디아와 시민교육의 역활도 담당했다. 말씀의 묵상후에 회중의 형편을 충분히 반영한 친밀하고 자연스런 즉석기도, 검은 가운이나 높은 강단도 말씀에 대한 강조점을 반영한 것이다.

그들의 설교의 특징은 연속설교에 구절마다 해석하였다. 18세기 이전에는 설교자가 기도와 설교에 모두 즉흥적이기를 기대했고, 18세기초에는 설교메모에 매달리지만 않는다면 설교메모를 사용할 수 있었다. 주기도문은 로마카톨릭이나 영국 국교회처럼 매주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모범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음악에 대해서는 최초의 청교도들이 교회성가대에 대해 회중들의 찬양특권을 빼앗는다는 부정적인 견해와는 달리 많은 개혁과 진전이 있었고 성가대들을 배출하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성찬은 목사의 관심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월 1회 또는 격월로 집행되었다. 성찬받기 전에 회개와 믿음을 요구했고 앉는 자세로 받은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무릎꿇음의 우상숭배적 위함을 피하는 것과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종말론적 특권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초기 청교도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단순했지만, 내용은 길었다. 매 주일 오전 9시에 대예배를 오후2시에 오후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마다 3시간에서 3시간 반정도 걸렸다. 예배시간이 긴 이유는 긴기도때문이다. 개회 기도도 15분이나 길었지만 설교 후의 기도는 설교만큼 길어서 한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오후 예배도 마찬가지여서, 회중들은 주일의 6시간 이상을 예배시간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이들은 이 예배들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일주일의 삶의 절정으로 여겼다는 것은 청교도들이 예배를 통해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진지한 자세를 잘 나타내준다.

이러한 청교도 예배는 영어 언어권 세계에서 성장해온, 장로교회, 개혁교회, 회중교회, 그리스도의 제자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유니테리언 교파들에게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고 한국교회의 신앙형태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비예전적 예배

침례교 예배에서는 의식문을 철저히 거부했는데, 심지어 성경의 직접적인 사용도 배제하였다. 설교하려고 본문봉독후에 성경이나 원고를 보지 않고 몇 편의 설교를 한다. 즉석기도를 하고 시편을 암송하여 부른다. 성찬은 쯔빙글리의 전통을 따라 매월 또는 분기별로 하지만, 칼빈주의적 권징을 더 엄격하게-예를 들면 수찬정지- 실행하기도 한다.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예배는 보다 칼빈주의와 청교도 예배의 영향을 받았는데 예전적인 기도를 거부하고, 웨스트민스터 예배지침서를 비성서적인 것으로 반대한다.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는 스코틀랜드 장로였던 알렉산더 캠벨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별을 철폐하고, 사도신경은 비성서적으로 보고, 믿음을 고백하면 바로 침례를 행하고, 매주일 성찬을 주장하였다. 오순절교회예배는 특별한 체험과 황홀함이 성령의 임재라고 확신하는데, 늘 성령의 은사를 구한다. 이는 회개의 체험이나 성령세례와 관계되는데, 대부분 치유를 목표로 한다. 그들의 예배의 특징은 자발성인데, 기도와 간증과 고백과 찬송에서 잘 나타난다. 신오순절교회(Neo-Pentecostal church)예배에서는 오순절교회처럼 직접적인 성령의 역사를 믿지만, 오순절교회와는 달리 은사중심으로 흐르지 않는다. 퀘이커 교도들은 성령의 임재를 내적인 조명으로 말하며, 은사와 특권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이다. 내적인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수적이고 외적인 요소인 말씀까지도 성령의 체험을 위해서는 이차적이된다. 성찬의 제정어는 영적인 실체를 말하는 것이고, 세례의 말씀도 성령의 세례로만 이해한다.


5. 현대개신교 예배

20세기 초에 결성된 캐나다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1925년에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합쳐서 한 교단을 이루고, 예배의식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와 감독교회, 성공회의 예배의식, 감리교와 회중교회로 부터 가져왔다. 이런 예배의식은 융통성이 있었다. 찬송도 생략할 수 있고, 사도신경도 필수적은 아니다. 성서일과와 함께 기도문들이 제공되는데, 고전적인 기도문-크리소스톰의 예전, 성공회의 공동기도서, 칼빈의 기도등-에서 취하여 짧게 변형시켰다. 성만찬은 매월 또는 년 4회 집례된다.

20세기 중반이후 지금까지 서로 대립되는 갱신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전통의 예전적 예배의 회복과 성령임재 중심의 자유로운 예배인데, 한국교회는 두 갱신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다. 다시말하면, 성례전회복운동이나 찬양과 경배식의 예배 또는 열린예배이다.


예배의 변화를 위해 고려해야 할 요소와 원칙

게하르트 마르틴은 어떤 종류의 역동적인 모임에 대해서나 던져야할 질문은 그 모임이 회중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는가, 아니면 의식의 둔화, 정감(affect)의 불모화, 본성과 충동의 제약과 금기들로 둘러싸여 있는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질문이 예배에 대해서 물어질때, 예배의 회중과 세상, 예배와 문화, 예배와 예술, 형식과 자유의 관계로 설명되어야 한다.


1. 예배의 회중과 세상.

예배의 회중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예배의 회중은 세상과 이중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는데, 즉, 세상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무리이면서, 또한 세상으로 보내진 무리이다. 먼저, 세상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무리로서 예배의 회중은 세상의 불의와 불신앙의 세력으로부터 거부되고 소외된 후, 하나님의 깃발 아래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부르고 그의 의에 따라 통치되는 나라를 선포한다. 그러므로, 회중은 예배에서 세상의 불의를 부정하고, 그것과의 타협의 가능성을 경계하며, 그것들의 종말을 확인하는 한편,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구하고, 그의 완전하심과 능력을 노래하며 약속과 은혜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정치적 행동이라는 폰알멘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다음, 세상으로 보내진 무리로서 예배의 회중은 또 다시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즉, 선교적이며 윤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배의 선교적 성격은 선교적 주제를 지닌 예배요소, 즉, 세례, 선교적 선포, 세계를 위한 중보기도, 구제를 위한 헌금, 세상에로 파송등에 담겨있는데, 그러므로 예배의 회중은 선교사적 회중으로 요청을 받게된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이 있다.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한 특별한 형태의 예배형식이 과연 정당한가? 이러한 예배는 기존 회중을 위해서는 적절하지 못한 형식이 아닌가? 이에 대해 현재 예배 안에 세례나 설교와 같은 불신자를 위한 순서들이 있지만, 그들과 접촉하기에는 여러가지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복음의 영접을 촉구하는 선교적 호소를 위한 특별한 예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 구도자예배를 드리는 교회뿐 아니라 대다수 교회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예배의 선교적 성격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불신자들의 교육과 설득의 장으로 예배를 전용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릴 수 있다. 예배에서 유의해야할 것은 예배가 선교의 동기로 혼돈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예배는 선교와 윤리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선교를 위한 예배를 드릴 때 선교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의 성격이 선교적이다. 피터 브루너는 예배가 필요한 이유는 회중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한 선교적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인인 회중에게도 동일한 선교적 과업을 요청하기 위한 이유일때 정당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말하면, 예배는 그리스도인인 회중들을 위한 내면적이고 영적인 필요성이 기준이 될때만, 예배본질의 변화없이, 불신자를 위한 선교적 관심과 구체적 프로그램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에 보내진 무리로서 예배의 회중은 윤리적 요청을 받는다. 청교도예배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예전적인 예배에의 지나친 관심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고, 예배 에서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나 기분좋은 느낌은 세상에서의 힘들고 고된 복음의 희생적인 삶을 피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배와 윤리는 상호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불가분리의 관계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그리스도인의 선행과 구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히13:16)라고 했고, 바울도 일상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적인 제사를 드리는 기회로 보았다(롬12:1,2). 윌리암 윌몬이 그의 책 The Sevice of God에서 예배와 윤리의 관계를 다루면서, 예배와 세상에서의 윤리적 삶 사이의 보다 통합적이고 상호교환적 관계가 재정립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것도 위의 성서적 근거를 반영한다. 예배의 회중은 예배에서 회중 개인의 윤리적 결단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윤리적 변혁의 사명을 받는다. 참회의 기도는 이 사명에 대한 자아성찰의 기회로 주어져야 하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믿음과 성화를 위한 중보기도와 그리스도적 삶을 담은 선포, 천국시민의 윤리를 재천명하게 하는 성찬은 각각 예배의 윤리적 성격을 적절히 표현해야 할 것이다.


2. 예배와 문화.

시대에 따라 교회가 신학적으로 응답해왔듯이 문화의 변천에 따라 예배도 변화해야 한다. 여기서는 회중 문화의 수용요구를 적절히 해결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예배와 문화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리챠드 니이버의 유형은 유익하다. 웨인라이트는 다섯째 유형인 문화의 변혁자로서의 그리스도(Christ the transformer of culture)가 가장 만족할 만한 유형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유형이 그리스도와 문화의 양측의 힘을 손상함없이 잘 나타내고 있기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을 인정한 반면 창조와 성육신의 긍정적 생각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타락이란 내재적 죄가 아니라 선한 것의 악용이다. 따라서 회개와 중생이 필요한데, 성육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된 죽음과 부활의 패턴은 인간의 삶과 문화의 변혁의 기조가 된다. 이 변혁성은 의와 죄가 이원론적으로 함께 있는 것(simul justus et peccator)을 인정하지 않는다. 변혁적 유형의 가장 중요한 예전적 모델은 세례이다. 죽음과 부활의 패턴은 일반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인데, 세례에서 변혁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델은 일반세계의 어떤 자연적 상징들도, 나아가 어떤 문화적 표현이나 사회적 조직들도 예배를 위해 "세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지적이고, 예술적이고, 기술적, 사회적 업적들에 대해서 도외시하거나, 거부하거나 더구나 그것에 흡수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들을 "세례"한 후에 확장시켜야할 유산들로 대해야한다. 예배는 문화의 변혁의 에이젼트가 되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3. 예배와 예술

예배에서의 예술의 중요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범위와 정도에 대해서는 예술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에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되므로 규정하기 어렵다. 또한 문화적 위치에 따른 예술의 변형도 변수로 고려해야하는 복잡함이 있다. 과거 역사적 교회에서 예술에 대한 토론은 주로 이미지에 대한 교리논쟁이었으나, 최근에는 예배에서의 예술의 정당성과 표현 범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예배에서 예술의 정당성을 경배와 찬양을 위한 도구로만 제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모든 예술의 정당성은 예배에서만 확인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신앙고백적 맥락에서 잘 설명될 수 있다. 폰 알멘이 지적하듯이 평일이 주일에 의해 의미를 갖듯이 일반 예술적 표현은 예배 안에서의 예술성에 의해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예술의 형태는 그림이나 조형물의 회화적형태에서부터, 시나 이야기의 언어적 형태와 멜로디를 지닌 음악적 형태를 포함한다. 여기서 예술의 문제는 이와 같은 예배의 각 요소들 뿐 아니라, 사람에 의해, 또한 상징적인 형태로서 디자인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상징적 표현에 대해서는 초대교회의 교부들로부터 강조되어 왔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이 그의 존재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궁극적 완성은 우주의 거룩한 근원을 눈으로 보아 아는 것이다(visio beatifica)라고 주장해 왔던 것이다.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는 장이 곧 예배 의식이고, 그러므로 상징적인 표현들이 존재해야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언어적, 물질적, 인격적, 드라마적인 상징들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가 필요한다. 예를들면, 세례시에 촛불을 점화, 복음서 봉독시에 일어서는 것, 평화의 인사나 제스추어, 성찬에서 여러 상징적 동작등은 예배 순서가 지닌 의미를 보다 잘 표현해 준다. 예배 안의 상징적 성격은 현대교회 예배갱신을 메타포의 회복에서 가능성을 찾은 데이빗 뉴만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그에 의하면, 메타포적 예배는 항상 해석학적 질문을 하게되는데, 즉, "예배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메타포로서 예배는 역동적인 어떤 것을 만드는 효과를 갖는데, 그것은 언어-사건(word-event) 과 표지-행위(sign-act)라고 한다. 예배에서 이 두가지를 가지고, 없는 것을 있게 하고 감추인 것을 비추어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과 회중, 그리고 회중들끼리 더불어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메타포가 없는 예배에서는 회중은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배에서 예술의 표현정도에 대해서는 교단의 신학에 따라, 집례자와 회중의 이해차이에 따라 다르다. 이 때, 피터 브루만의 원리는 모든 예배에서 귀담아들을 수 있다. 모든 예술에 적용할 수 있는 원리를 제롬의 말을 빌려말한다. "찬양에서 중요한 것은 찬양하는 이의 목소리가 아니라 가사이다." 어거스틴도 심미적 예술에 빠져들때의 위험을 직시하고 제롬의 말을 확인한다. "나는 노래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래의 주제(대상)에 의해 감동받는다." 이는 실제의 경우 노래의 대상(주제)보다도 노래자체에 의해서 감동받는 경우가 있기에 경계하는 말이다.


4. 예배의 형식과 자유.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 세계교회를 구분하면, 카톨릭교회나 성공회, 루터교회처럼 예배서를 의무적으로 사용하는 교회, 장로교나 감리교회처럼 예배의 모범이나 지침을 참고로 사용하는 교회로 나눌 수 있다. 이외에 오순절교회나 침례교회, 독립교회처럼 전혀 예배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교회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은 형식의 규정이 예배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배와 찬양예배와 같은 맥락에서 예배를 이해하는 짐그래함은 예배의 원칙 중에 예배는 질서와 규율을 지키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예배에서는 인간적인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다양한 재능과 은사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든다. 그가 여기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융통성(flexibility)이다. 그런데, 질서를 말할때 무덤의 질서가 아니라 군대의 질서여야한다고 하는데, 이런 질서에서는 그가 주장한 성령의 융통성을 찾기 곤란하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형식과 자유의 균형이 쉬운 일이 아닌것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것은 형식과 자유는 대립되어 양자 택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조화되어 함께 어울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즉, 형식은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질서있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의 무제한적 방임은 영구적 역동성이 아니라, 소모적 혼란만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예배를 지향하는 교회라하더라도 전통유산의 발굴과 회복에 대해 부정적 편견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단순히 전통의 답습이나 모방이 아니라, 그 시대를 움직였던 살아있는 예배정신을 찾는 것이라할때, 그들도 역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식과 자유는 각 각 예배에서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형식을 갖춘 예배는 항구성, 당위성, 거룩성, 공동체성, 진정성의 측면을 강조하는 반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예배는 다양성, 자발성, 역동성, 개별성, 이해성의 측면을 보여준다. 예배의 변화는 이 양측면이 균형있게 반영되는 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두 측면을 좀 더 설명하면, 형식을 갖춘 예배는 하나님의 영화를 목표로 한다면, 자유를 지향하는 예배는 회중의 성화에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다음과 같은 통찰로 이 둘을 결합시키고 있다. "회중이 성화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세만큼 더 깊은 성화는 없다."

형식과 자유가 공통적으로 표현해야하는 것에 대해 폰알멘은 적절하게 제시한다. 그는 세가지 조건, 즉 명료성과 단순성과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명료성은 예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언어와 음악과 예술등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단순성은 복잡함의 반대가 아니라 분산의 반대로 질서있는 예배를 말하며, 아름다움은 화려함이나 조잡함, 난잡함이 아니라 정결함과 우아함과 조화를 뜻한다. 이것을 세계교회의 예배에 적용하면, 길고 복잡한 의식적 예배를 드리는 교회의 예배도 그것이 이해되고 질서가 있고 순결할 때, 형식과 자유가 조화된 예배라 부를 수 있고, 완전히 자유롭고 짧은 예배라 하더라도, 집례자의 개인적 기호에 따라 즉흥적으로 인도되거나 어떤 예배신학적 고려없이 청중의 취향에 맞춰 진행되는 예배라면 명료성이나 단순성, 아름다움의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예배라 지적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예배의 회중과 세상, 문화, 예술, 예배의 형식과 자유에 대해 토론할 때 고려해야할 것은 이런 예배변화의 요소와 기준들은 예배 집례자의 개인적 특성과 예배의 회중들의 공동체적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을 고려함 없이는 예배의 변화는 오히려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많다.


한국교회의 예배 변화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

예배변화의 요청과 수행은 어느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다. 공동체성이 보장되는 한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1. 성령과 회중의 일치를 추구하는 예배

회중의 적극적 참여와 성령의 활발한 활동은 초대기독교공동체 예배의 특징이었을 뿐 아니라, 시대가 바뀌면서도 예배 변화가 요청될 때마다 강조되어온 요소였다. 성령의 임재의 방식에 대해서는 예전적 예배와 비예전적 예배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즉, 기도문이나 예식문 안에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고 확인하는 예전적 예배와 동시대적인 음악이나 즉석기도를 통해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는 비예전적인 예배 사이에는 형식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예배에서 성령과 회중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은 같다. 이는 예배가 성령에 의해 인도될 때 모든 순서가 그 본래적 목적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신앙, 죄, 불결함을 회개하고 구원의 확신을 기대하는 것은 성령의 임재때문이다. 특히, 성례전 예배는 예배에서의 성령의 중요성을 확인해준다. 또한, 회중들이 다양한 삶의 자리로부터 나왔을지라도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이나, 회중들의 개인적 성향의 차이- 감정적인가 지적인가-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회중의 한계를 극복하여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하며 나아갈 힘을 얻게 하는 것은 성령의 활동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회중의 자발성의 강화는 종교다원화시대의 선교의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한가닥 희망을 준다. 그러므로, 예전적 표현이 어떠하든지 우선 지역교회의 예배에서 성령의 임재에 대한 기대와 간구가 적절히 포함되었는지를 항상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2. 세계교회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예배


지역교회 예배의 폐쇄성이나 무질서, 집례자 개인의 일시적 취향이나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예배를 역사적, 우주적 교회의 예배 안에서 이해하고 대화를 시도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확인하며 따라서 다양성, 통일성, 질서, 또는 포용성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화시대의 요청이기 이전에 초대기독교예배에서부터 지녀온 예배적 유산이다. 역사적이고 우주적 교회는 예전적 예배와 비예전적예배를 포함한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신조의 신앙고백, 회중 개개인과 교회, 세계를 위한 중보기도, 어느 시대와 민족의 신앙고백을 반영한 찬송,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념하는 교회력, 세계의 정의와 평화, 선교를 주제로하는 설교, 세례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의 개념을 우주적 교회로의 확장, 세계로의 파송과 축도등을 통해서 세계교회와의 일치를 표현할 수 있다.


3. 교회와 사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예배


회중이 속한 문화에 대한 정직한 이해와 대화의 결론을 예배에 수용하고, 전통적 유산과 진지한 만남을 시도하여 지역교회의 문화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예배를 지향한다. 전통적 예배의 무조건적 답습은 현대교회의 회중들로 하여금, 수동적인 방관자나 현실과 괴리된 이중적 신앙생활을 허용할 가능성이 많다. 또한 예배형식 중에 정서적으로나 이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때는 종교개혁자들이 우려했던 예배의 미신화를 조장하는 격이 된다. 그러므로, 예배의 집례자나 계획에 참여하는 자들은 회중의 삶의 자리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며, 그들의 소리와 몸짓을 예의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회중의 입장의 무조건적 수용과 반영은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주도적 행위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인간의 타락과 부패함과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표현한 개혁교회 예배의 속죄적 성격에 비추어볼 때, 회중의 편리함까지이르는 지나친 배려는 예배의 본래적 위치로 부터 이탈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배에서 예술적 표현도 회중 또는 예술가의 전시장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술가의 심미적 세계에 찬사를 보내고, 그 아름다움과 긴장미에 매료되어, 음악회 무대의 축제성, 전시회의 화려함을 예배의 역동성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예배는 세상의 흥행이나 무리의 힘이나 인간의 천재성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즉, 성례전과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그 은혜에 합당한 응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혜에 대한 깊은 명상과 체험없이 표현하는 모든 축제적 응답은 일시적이고 경박하며 회중을 산란하게 할 뿐이다. 열린시대를 맞이하여 온통 열린 것을 추구하는 마당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열린 음악회나 열린 연극과 같은 흥행성에 춤추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배에서의 역동성은 회중을 군중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도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이 될때 감격과 감사의 축제마당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와 사회의 일치라는 과제는 종말론적 목적을 담은 것이다. 즉, 사회와 수평적 또는 교차적 만남이 아니라, 사회를 개혁하고 주도해가는 의미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나가는 말

예배에서 회중은 한편으론 한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해가시는 하나님의 섬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공동체로서 뿐아니라 그의 가족의 한 식구로서 격려하시고 설명하시는 그 분의 섬세한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중심을 찾기 어려운 문화의 격변기 속에서 예배의 도구로서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깊이할 뿐 아니라, 문화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회복해야겠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수없는 문화적 변천에서 추출된 전통적 유산들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에서 문화선도적 역활을 수행할 수 있을 때 예배의 소외는 극복되고, 나아가 예배당의 울타리를 넘어 사회와 문화라는 큰 장소에 예배를 통합할 가능성을 갖게되는 것이다.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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