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왕하 20 1-7)
오늘날 현대 의학이 해결 할 수 없는 새로운 계속해서 질병이 생겨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모기도 많은 약을 뿌려대니 150배의 내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왠만한 약을 써도 모기가 죽지 않고 이제는 계절에 관계없이 모기가 출몰하는 것을 바라 보면서 “왜 오직 인간은 더 연약해지고 새로운 질병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가?” 하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온 세계를 공포로 떨게 했던 신종 바이러스 ‘사스’의 공포를 우리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샬롬! 이라는 히브리어 인사말이 있습니다. 샬롬이라는 말은 평화,성장과 번영이라는 뜻으로 만날 때(hello)나 헤어질 때(good bye) 나누는 인사말로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샬렘이라는 말의 명사어인데 ‘완전하다,건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이나 이웃의 관계에서 계약 조건을 다 이행 했을 때 주어지는 완전한 평화 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어 온전한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샬롬이 있게 되고 또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의무를 다 이행하지 못했다면 진정한 샬롬을 맛보거나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건강한 삶을 통해서도 온전하게 되는 것이 샬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온전한 샬롬은 무엇일까요? 이 땅에서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 온전한 샬롬을 찾거나 누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를 이 땅에 다시 보내실 때 그 샬롬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샬롬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는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샬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병이나 재물에서 샬롬의 기원을 찾으려 합니다. 병이 들면 병 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온갖 노력을 하고 몸에 좋다는 약을 구하려 가진 재물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나 결국 건강도 재물도 재 잃고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진정한 샬롬은 우리가 추구하는 질병의 극복과 재물과 권럭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참된 샬롬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샬롬은 ‘구원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하면 미래에 되어 질 ‘사건 또는 일’이나 미래의 ‘나의 삶’ 점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봅시다. 구원은 무엇을 구원이라고 말 합니까?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나중에 영원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라는 것이 상호 연결 되어 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구원은 지금 시작 되었고 게속해서 나에게 변함없이 이루어질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바로 이 구원이요 샬렘입니다. 미래의 소망 뿐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도 우리의 샬렘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오늘이 없는 내일이 없듯이 지금의 내가 없는 내일의 내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습니다. 그 왕은 아주 정직한 임금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이 왜 죽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그 정직한 왕의 병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병을 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병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2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결국 21절에서와 같이 벽에 열국을 향하고 변멱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통곡합니다. 히스기야의 샬롬이 깨어지는 순간이 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러한 히스기야 왕을 용서하시고 이사야 선지자를 다시 보내셔서 5절 말씀처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삼일 후에 성전에서 다시 볼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샬롬이 다시 회복되는 순간이지요. 무엇 때문에 샬롬이 파괴 되었으며 무엇 때문에 샬롬이 다시 회복 되었을까요? 그는 불의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더욱 어떤 문제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기도로 울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용서하신 것에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그의 생각대로 모든 일들을 감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찾으시려는 의도로 병을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지고 우리가 샬롬의 깨어진 원인을 그 다시 치유해주신 사건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일에 ‘비상 조치’입니다. 우리는 병이 우리의 전부 인 것이라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병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고 그 앞에 나아가며 그 앞에서 병 고침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과 담판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상조치로 내려진 그 조치가 해제 될 것이 분명하고 설사 그시기가 늦었다 할 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구원을 얻게 되어 영원한 샬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원하십니까? 병 고침입니까 영원한 샬롬입니까? 내가 안고 있는 병만을 바라본다면 병도 못 고치지만 영원한 샬롬도 얻지 못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샬름은 ‘15년’ 더 사는 것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십오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뛸듯이 기뻐했겠지만 결국 ‘15년 ‘이라는 조건부 생명 연장에 늘 노예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루하루 초가 타 내려 가둣이 마음을 조리며 살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연한이 다하여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죽으면서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유다의 멸망과 왕의 자손들이 바벨론에 끌려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는 이 비극적인 계시 앞에서 19절 말씀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하신 모든 일을 선하시다고 인정하며 그의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원한 샬롬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멸망 앞에서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누릴 수 있는 샬롬이란 그분은 선하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게 될 때, 우리는 샬롬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찾는 샬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를 물어 보신 일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은 마16:14에서 예수가”세례요한, 엘리야, 어떤이는 예례미야나 선지자 중에 하나이다.”라고 한 것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도로에게 다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것을 우린 기억합니다. 그 때 베드로 의 고백을 보십시요 마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선지자쯤이나 그리스도 정도 알았지만 베드로는 그가 ‘인자(son of god)’임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우리가 알고 그분을 인정 할 때 우리는 샬롬을 누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찾아주셔서 하신 말씀이 바로 샬롬입니다.”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20;19) 몇 년 더 살고 못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병이 낫고 안 낫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어도 샬롬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이 없이 평강을 누릴 수 없기에 주님을 바로 알고 그분이 주는 평강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3. 샬롬을 얻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능력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라는 군대의 포위 속에 성이 함락 되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면 초가 입니다. 병은 들었고 나라는 풍전 등화와 같이 위기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를 정도 고통이 심한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왕 앞에서 ‘샬롬’이라는 말을 꺼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처지 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그의 과거 선행을 추억해달라며 회개의 기도할 때 그가 회복 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실존주의 철학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노병사의 문제는 운명이라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불교의 경전을 가지지 않아도 ‘깨달음’을 통해 경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불교 인 것입니다. 자신이 그 모든 것을 깨달아 무엇을 얻는다는 것일까? 불교에서 깨달음이 없는 것은 ‘욕망’때문이라고 합니다. 욕망은 현실을 무시한 생각에서 얻어지는 것이기에 결국 현실에 만족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이고 해탈은’해방 된다는 것’이라는 데 해방되면 무엇이 좋을까요? 인도가 왜 발전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들은 무념 무상에서 ‘해탈’맛보아 결국 실존주의의 그 이상을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무지와 가난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일시적인 샬렘을 맛 볼뿐 영원한 샬렘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주님게로부터 능력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아 먼저 병고침을 받았고 앗수르의 십팔만 오천명이 다 송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현실을 바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불교에서처럼 허무주의에 빠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인도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수십년간 자신을 학대하며 서있거나 가부좌를 하고 고행하면서 그들은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주님은 진정한 샬롬을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망을 위해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땀 흘리는 수고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혼자서 아무 일도 안하고 결국 자신의 ‘득도’나 ‘해탈’ 만이 샬렘이 아닌 것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자의 뜻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는 지금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삶을 전면 부인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전생의 업보가 우리를 지배한다면 우리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업보를 넘어 더 나아가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께 내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은 궁극적으로 샬롬 보다는 욕망으로 인한 파멸 뿐이 기대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독재자가 결국 자신의 욕망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위대한 성인들은 자신을 희생하면서 영원한 샬롬을 위해 살았고 결국 아름다운 죽음을 가졌던 것을 기억해 봅시다.
사랑하는 모자이크장로교회 성도 여러분 ! 여러분과 저는 그 어느 것 하나 주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죄의 문제, 건강, 재물, 사랑, 지식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오직 우리 주위에 산적한 어려운 문제들로 가득 차있고 그것으로 인해 샬롬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히스기야 왕의 병 고침과 국가를 지켜 낼 수 있는 사명자로 인생을 마감하여 영원한 샬롬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에 빠져 있을 때 모든 문제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샬롬이 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집중하시기를 원하시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따르기를 원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샬롬을 원하십니까? 사업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내가 안고 있는 질병을 고침 받는 것도 중요한 문제 이지만 눈앞에 보이는 좁은 안목적 샬롬보다는 거시적인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샬롬을 찾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소망 가운데 살기를 노력하는 자는 이 땅에서의 모든 샬렘 또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자이크교회에서 영원한 샬롬을 찾게 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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