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본 주일신학(主日神學)
송광택
들어가는 말
신약교회는 역사적으로 제4계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였는가? 그리스도인은 제4계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즉, 주일)을 예배일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는가?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란 무엇인가? 유럽 대륙 칼빈주의의의 관점과 청교도의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주일을 맞이해야 하는가?
‘주일신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상과 같이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에 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하여왔다. 그러나 그 주제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 주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탐구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주일성수는 칼빈주의 교회들 가운데서도 영국과 미국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상징이었다.” 유럽 대륙 보다는 영국에서 매우 엄격한 주일성수가 시행되었고, 이는 청교도를 영국 성공회로부터 구별시켜주는 핵심적인 기준이었다.
본 소고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주일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주일의 기원 문제와 세계교회사에 나타난 주일에 관한 이해 그리고 주일성수와 관련된 실천을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주일신학을 조명해 보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1. 주일의 기원 - 안식일에서 주일로
안식일이란 유대인들이 안식하고(일을 쉬고) 예배드리는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식일은 창조시에 제정되었고(창 2:2.3) 그 다음에는 만나를 주실 때에 언급되었으며(출 16:23-30) 그 후에는 시내산에서(출 20:8-11) 계명으로 주어졌다(비교. 신 5:12-15). 안식일을 어기면 죽임을 당했으며(출 31:4), 개인의 일은 쉬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온 문제이다. 안식교인들은 제 칠일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인 도덕적 의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안식일 계명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 4계명이 본질적으로 의식법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주일의 기원을 추적할 때, 학자들은 대개 그리스도의 ‘부활’일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일요일에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요 20:26), 일주일의 첫날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행 2장) 주일을 강조하셨다. 물론 성도들이 처음 예루살렘에서는 매일 모임을 갖기도 했지만 점차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날이 되었다(행 20:7; 고전 16:2).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의 첫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주일에만 예배를 드렸던 것은 아니었지만(행 2:46),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지켜오던 하나의 관습이다(행 20:7). 유대인들은 안식일(토요일)을 그 전날 해질 때부터 지켰다.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토요일 저녁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계속하다가 성찬을 떼어 먹음으로써 그 절정을 장식했다(행 20:7, 11).
안식교는 ‘일요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이교의 태양숭배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랄프 프라임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이교도들이 그 신(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제정한 날을 본딴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순교자 저스틴과 바나바가 이 날을 지키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한 내용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숭배를 지극히 혐오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찰스 라이리(Charlrs C. Ryrie)은 초대교회의 주일성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누가복음 12:35-40에 기록된 경고의 말씀(‘신랑이 돌아올 때 깨어있으라’)에 따라 예배드리고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셨으면 하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바람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노예인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 모이고자 하는 실제적인 필요성도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초대교회는 매주일 첫날인 이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연보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음이 특징이다(행 20:7; 고전 16:2).”
그는 또한 주일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사도행전 20:7에 나타난 기사를 볼 때, 주의 만찬을 준수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일 예배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음에 틀림없다. 헌금(연보)하는 것도 주일에 행하는 활동들 중의 하나였다(고전 16:2). 저스틴(Justin, 주후 150년경)은 주일날 행한 여러 가지 활동들, 예컨대 사도들의 서신과 선지서들을 읽은 것과 권고(설교)와 기도와 주의 만찬 거행하는 것과 헌금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변증서> 1장 67절). 일찍이 아가페(애찬)는 예배의식의 한 부분이었으나(고전 11:34) 저스틴 시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음이 분명하다”.
2. 교회사에 나타난 주일 이해
1) 초대교회
일반적으로 말해서 초대교회는 구약이 말하는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임했고 동시에 장차올 세상에서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특히 초기의 교부들은 유대인을 향한 그들의 변증에서 구약적 예표(그림자)의 성취와 완성을 강조하였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안식일관(安息日觀)이 이 두 시대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깨닫고 그 날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으며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활용하신 실례들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다. 저스틴은 글자 그대로의 안식일은 영원히 폐지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수의 초대 교부들은 안식일을 할례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초기에 이방 기독신자들 간에 있었던 토요일 성수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는 그 관습의 시초와 같이 모호한 문제로 남아 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아마 토요일을 성수하는 유대교의 경향이 주일의 우위성(優位性)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 대제가 집권한 후에는 주일이 기독신자의 안식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이런 경향이 유대교의 토요일을 겉발림식으로 지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주일(일요일)이 공식적인 휴일로 공포되자, 많은 사람들은 주일날의 꽤 많은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의식적인 행위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해 구약성서가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금령들을 빙자하여 쉬라는 요구에다 종교적 열성과 의무를 지우려 하였다.
어쨋든 모든 학자들은 한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 사건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첫 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가 언제 어디서 왜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성경 저자들과 대부분의 고대 교부들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유대인의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유추를 위한 기초작업을 한 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교리문답식의 교육을 위해 그는 십계명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해석했다. 사실 어거스틴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한 날을 지키는 일’로 다룬 적이 없다.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그의 안식(the Sabbath rest)은 시편 46;10의 안식이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물론 그 안식을 마음의 평안에 관련시키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소망 가운데서의 현재적 의미를 다루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안식은 소망 가운데 성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안식하실 때(when God 'rests in us') 온전한 안식의 실재(reality)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따르면, 10계명 중 제 4계명은 그리스도인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단 하나의 계명이다.
2) 중세 교회
중세 초기에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는 야만 민족들의 기독교화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빌헬름 토마스에 따르면, 개종한 게르만 민족들은 그들의 금기일(禁忌日)들과 유대교의 안식일 사이의 유사성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주일을 일과 폭력을 멈추는 날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세기에 안식일 엄수주의는 법적인 강제에 의해 엄격히 시행되곤 했다.: “만일 자유인이 일요일에 일을 하겠다고 주장하면 세 번 경고받은 후에는 그의 유산을 몰수당하게 되고 나중에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일요일의 휴식을 어긴 농노는 체형을 받게 되고, 만일 그가 그 버릇을 고칠 수 없으면 오른 손을 짜르게 되어 있었다. 694년 스페인의 비시고드(Visigothe) 왕은 유대인들에게까지 일요일에 아무 일도 못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적인 일요일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유대인은 누구나 그의 머리를 밀리우고 100대의 태장을 맞아야 했다. 영국에서는 697년에 켄트왕이 명령을 내려, 일요일에 일을 강요당한 농노가 있으면, 그를 자유인이 되게하고, 주인이 40수스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일요일 저녁 집회에 관해서는 6세기 경에 와서 여러 종교회의가 출석을 권하였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사 때 강제로 출석시키는 일은 12세기와 13세기에 불란서에서 현저하였는데, 이는 알비파를 반대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세신학은 안식일의 안식에 대한 영적 차원 즉 죄에서 자유하게 하는 마음에 대한 어거스틴적 강조를 상실했다. 특히, 이시도레(Isidore of Serville, 570-636)는 안식일의 안식을 실현된 종말론적 실체로 본 고대교부들의 진술을 생략함으로써, 그리고 육체 노동의 중단이란 관점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을 비교하여 강조함으로써 어거스틴적 강조를 잃어버리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796년 아퀼레자의 폴리너스(Paulinus of Aquileja)에 의해 소집되었던 종교회의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일요일을 삼위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선언하였다. 이 날을 성자의 부활일로, 성령의 강림일로, 성부의 천지 창조일로 봄에 따라 그 존엄성이 더 많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폴 쥬이트(Paul K. Jewett)에 따르면, 학자인 알프릭(Aelfric, 955-1020)은 제 4계명에 대한 교리문답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세의 율법하에 있던 당시에는 토요일을 사람들이 크게 경외하고 거룩히 구별해서 심한 노동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와같은 심한 노동을 금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쉬는 날을 지키되 우리 자신이 죄에서 해방되어 그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영적으로 지켜야 한다.... 지금 우리는 구세주가 부활한 후부터 일요일을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절 주일에 죽음에서 일어났고 주일은 창조의 날이 되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9-10세기의 아일랜드에서는 그 거룩한 시간이 토요일에서 월요일 아침 예배 시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소위 ‘안식일의 율법’이 다음과 같이 형성되기도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며,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며, 팔지 않으며, 계약을 맺지 않으며, 고소하지 않으며, 재판하지 않으며,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으며, 빨래하지 않으며, 목욕하지 않으며, 옳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목적없이 뛰지 않으며, 곡식을 빻지 않으며, 떡을 굽지 않으며, 교유기(攪乳器)를 돌리지 않으며, 나무를 쪼개지 않으며, 집안 청소를 하지 않으며, 소나 말이나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며, 고역에 해당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정당한 사유가 없이는 거주지의 경계를 넘어 방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폴 쥬이트는 말하기를, “이러한 타부(taboo, 禁忌)의 이론은 중세기의 안식일 이론의 과도기적 일면”이라고 했다.
피터 코메스토(PPeter Comestor, d. 1179)도 안식일 계명을 기독교적 주일 성수에 문자적으로 적용하였고, 창세기 2:2에 근거하여 “안식일은 율법 이전에도 어떤 민족들에 의해서 항상 지켜져왔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가 되면서, 일요일 휴일에 대한 교회법이 완화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시대의 변천에 의해 되어진 일이었다. 원고를 복사하는 일, 특히 거룩한 인물의 글을 복사하는 일은 허용되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일요일에 수를 놓는 것도 허락되었다.
공식적으로 로마 카톨릭은 일요일이 ‘예배를 위한 안식(휴식)의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죄한 레크리에이션(오락)의 합법성에 관한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3) 종교개혁기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16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자들이다. 그들은 안식일 해석 또는 주일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폴 쥬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기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범한 안식일주의의 과오를 피해 보려다가 결국은 안식일 계명이 기독교의 예배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여 안식일주의자들과 정반대의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과오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이해가 갈만한 것임을 인정한다”라고 말했다.
(1) 루터의 주일 이해
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매주 어떤 날을 지키는 일에 매여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종교적 의무로서의 예배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 계명은 영적인 의미로서만 그리스도인과 관련이 있다. 또한 육체적 휴식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는데, 그 휴식은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한 여가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디서든지 주일을 단순히 주일이란 그 날을 위해 거룩히 구별해야 한다면, 만일 어디서든지 유대교적 근거에 입각하여 그 날을 성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주일에도 일하고, 말을 타고, 댄스도 하고, 연회를 베풀고, 기독신자의 자유를 침식하는 이같은 제도를 없애기 위한 무슨 일이라도 하라고 명하겠습니다.”
루터교의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도 복음에 의해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필연적인 요구 때문에 성수해야할 날은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언제 모여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어떤 날이 필히 지정되어야 한다고 했다(Article VII,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이것은 공중예배를 위한 어떤 정한 시간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2) 칼빈의 주일 이해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적 안식’의 측면을 다시 강조하였고, 칼 바르트는 이것을 칼빈의 ‘안식 신비주의’(Sabbath mysticism)라고 불렀다. 그러나 칼빈은 제 4계명의 영적 의미로서 종말론적 안식보다는 이생에 있어서의 성화를 강조하였다.
① 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제4계명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이것이니, 우리 자신의 일들과 성향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만을 명상해야만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방법 안에서만 이 명상을 실천행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은총의 날로 보았다. 안식일은 이런 은총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는 안식일의 일반적 해석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였다.
첫째, 이 날은 영적 안식의 예표적 그림자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날에 모여서 율법을 들으며, 제사의식을 준수하는 날로 주셨다(이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특별히 묵상해야 한다).
셋째, 이 날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서 일하는 자들에게 하루의 안식(휴식)을 주도록 지정해 놓으신 날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제4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안식일에서 이 영적 안식의 예시(豫示)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이 계명에 대해서와 같이 엄격한 복종을 명령하신 계명이 달리는 거의 없다(민 15:32-36; 참조. 출 31:13이하; 35:2). 모든 경건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안식일을 더럽히며 범하며 지키지 않으며 거룩하게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경외가 없어지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전연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고(겔 20:12-13; 22:8, 23:38;렘 17:21,22,27; 사 56:2),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는 최고의 찬사를 주셨다. 따라서 신자들도 다른 말씀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대한 계시를 크게 존중했다(느 9:14). 율법의 모든 교훈 가운데 안식일을 특히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출 31:13-14, 16-17).
에스겔은 이 뜻을 더욱 자세히 표현하지만, 그 요점은 안식일이 한 표징이라는 것과,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겔 2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죽이는 것이라면, 외면적인 표징과 내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 우리 자신의 일은 일체 쉬고,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히 31:21), 우리가 그의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히 4:9) 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약속이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實相)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그리고 칼빈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의미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1)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 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42). 그리고 (2) 하인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생각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지극히 현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복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슨 까닭에 일요일을 지키는가? 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17)...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은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에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2)...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칼빈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제4계명은 공동의 예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루를 정해 모여야 될 필요성이 있었듯이, 신약의 교회들도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날이 필요하게 되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고대인들이 우리가 말하는 주일(主日)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실현되었다”라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경건의 훈련을 위해서도 일정한 날에 모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울 수 있는 외면적 보조 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된다.”
② 신명기 설교(34번, 35번)
칼빈은 신명기 설교에서 제4계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설명하였다. 1555년 6월 20일(목요일)에 행한 설교(본문/신명기 5:12-14)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했다:
“율법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본체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그것이 완전히 폐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희미했던 모호성은 제거되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무시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배를 얼마든지 자신의 발 밑에 둘 수 있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한 사람들을 마치 살인한 사람을 대하시듯 가혹하게 벌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배가 이 안식일이라는 상징 아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 나옴에 있어서 “인간 자신의 자원하는 마음과 노력이 요구된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와 같이 설교에서도 공적 집회(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안식일은 백성들로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듣고, 희생제사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이같은 점들에 관하여는 그것이 비단 고대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는 사라졌지만, 바울이 골로새서에서(골 2:16-17) 말한 것처럼, 이 질서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의 본래적 취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유효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의 목적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정녕 그와 같은 일이야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우리의 연약함과 특히 게으름으로 인하여, 이레 가운데 하루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따라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이를 위하여 일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주일에 모이는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를 눈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을 이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완력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무엇보다도 내적 동기와 마음의 자세를 강조하면서 안식의 참 뜻을 설명하였다.
“더욱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안식일이 제정된 것은 단지 우리들로 그 날에 말씀만을 듣게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쓰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계시건만, 우리는 받은 그것들로 인하여 그를 찬미하려는 뜻에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에 관하여 충분하게 생각해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지킬 때에는 마치 우리들이 높은 탑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기분으로 멀리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일일이 묵상하면서 그 날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주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는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에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으로부터 유익을 얻어 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그가 하신 일들에 관하여 오랫동안 묵상해온 터이므로, 주일의 모든 나머지 시간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묵상은 이미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것의 윤기를 내 온 것이기에, 마침내는 우리들이 월요일에도 그리고 나머지 다른 요일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이 허영으로 가득찬 기분전환이나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하는 가운데 보내진다면, 그러한 사람은 전혀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영적 자유 안에서 자발적으로 그 날을 구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우리는 현재 유대인들에게 명령되어진 그 날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에게 명령된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들을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해 주셨고 또한 그것에 대한 책임을 면케해 주셨음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증거하는 뜻으로 그 날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해서 그 날을 변경시키기는 했지만, 어쨋든 우리는 일주일 가운데 특정의 날을 지키는 이 전례를, 하루이건 혹은 이틀이건간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맡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그의 생각을 간략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만약 사람들이 공동의 성례를 치르고, 함께 공동기도를 드리고, 혹은 상호 간의 믿음의 화합과 일치를 보이기 위하여 모여야 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일을 위하여 특정의 날을 가져야만 합니다... ” “우리에겐 외형적인 질서가 부여되어 있는데, 그것이 주어진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들과 세상적인 업무 등을 제쳐두게 하고, 모든 일로부터 손을 놓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묵상케 하며 또한 그가 우리에게 항상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일년에 대여섯 번 정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은 정녕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기 위해서 온 돼지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돼지 우리 안에나 있어야 마땅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에 관한 한, 차라리 그들은 그 악취나는 우리 가운데 쳐박혀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가증스러운 떼거리들이라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경건한 자들의 회중 가운데로 섞일 수 있도록 허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완전히 잘리어 나가는 편이 더 좋으리라는 말씀입니다.”
1555년 6월 21일의 설교(신 5:13-15)에서도 그는 제4계명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자신을 위한 하루에 대한 대가로 우리들에게 엿새를 주셨으니 만치, 우리가 하나님께 특정한 하루를 드리고 헌신하는 날에 있어 인색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러두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온전히 나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만 쓰일 수 있는 하루를 선택하여 남겨두라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지나친 요구이더냐? 너희들에게는 너희의 필요한 것과 너희의 사업적인 일들을 돌볼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엿새의 시간이 있으므로, 너희가 이 날을 그 같은 일들로 나에게 바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고로 내가 일주일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단 하루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너희도 알 수 있겠거니와, 내가 이처럼 너희를 자비로써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너희가 그 날을 마치 써서는 안될 일에 쓴 것처럼 여기거나 혹은 일곱 중 하나에 해당하는 그 시간을 가지고 나에게 인색하게 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용납될 수 없는 배은망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어찌하여 내가 이레 가운데 하루를 정하고, 그 날에 너희들이 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을만큼의 세상 근심으로 둘러싸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각 사람에게 자신의 일에서 손을 떼도록 요구할만한 권한이 내게 없다 하겠느냐?”
칼빈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 뜻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 뜻은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거룩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고, 그들이 반드시 그들의 모든 집착하는 것들과 욕망으로부터 물러서야 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 안에서 전적으로 일을 하셔야만 한다는 것 등을 깨우쳐 주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 쥬이트는 칼빈이나 루터가 주일 성수를 “제 4계명에 근거한 도덕적 명령으로 보지 아니하였다”라고 주장한다.
비록 폴 쥬이트가 “안식일에 관한 칼빈의 실제적이고 교육적인 언급마저도 안식일 성수를 의무적이라기 보다 임시 방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도 칼빈의 생각은 “교회의 안녕과 참 종교의 확립을 위해 공중에배를 위한 어떤 일정한 날이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고 그의 견해를 피력했다.
프리머스(John H. Primus)에 따르면, 칼빈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안식일 엄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그의 윤리에 있어서 많은 청교도적 강조들에 대해 아주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칼빈과 청교도들은 다르다. 칼빈의 접근방식의 특징은 그가 교회 질서에 실제적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칼빈에게는 안식일이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법이 아니다. 사실상 칼빈은 유대인의 안식일의 도덕적 의미보다 의식적이고 예표론적 의미를 강조한다. 칼빈은 교회의 좋은 질서와 건덕(健德)이라는 실제적인 유익의 측면에서 주일 성수를 강조하였다.
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주일성수 개념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서로 다르다.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주일성수’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으며, 아직까지도 매우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3-1649)에 담긴 차이점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칼빈이 극찬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다. 그 요리문답은 제 103문에서 “하나님은 제4계명에서 무엇을 요구하는가?”라고 묻는다.
“첫째로, 복음의 사역과 기독교 교육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회에 열심히 출석할 것과 특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석하며, 공적으로 주님을 찾으며, 구제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로, 나의 전생애를 통하여 나쁜 것을 행하지 말고, 주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내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게 하고, 나아가서는 이생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도록 요구하신다.”
위의 요리문답이 작성된지 80여년 후에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 모인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면서 제 4계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청교도적 주일 성수 스타일’을 강조하였다.
제21장 예배와 안식일
(7)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칠일)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깨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그들의 일사적인 일들을 미리 정돈한 연후에, 그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을 중단하고 거룩하게 안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바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대륙의 칼빈주의가 안식일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들의 안식일 엄수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5) 청교도
영국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엄격한 안식법’(일요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엄격히 지키도록 규정한 법률)을 제정하여 준수했던 것은 당시에 주일이 너무 무시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한 노회 회록의 기록(1658년 6월 6일)은 다음과 같이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틸로치에 거주하는 알렉산더 케어니가 양 한 마리를 목장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므로 안식일을 범하엿기에 이를 처리하기 위해 노회가 연기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폭풍에서 그 가축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불평적으로 말했다. 이에 본회는 그 같은 언사를 꾸짖고 다시는 그와 같이 안식일을 범하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폴 쥬이트에 따르면, 이 엄격한 ”안식일 성수 제도는 처음으로 미국을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뉴 잉글랜드에 전해졌다. 초기 뉴 잉글랜드의 주일법은 청색법률(Blue Law, 엄격한 법률이란 의미)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사무엘 피터스 목사가 그의 저서 ‘코네티커트의 일반 역사’에서 가혹한 주일성수법에 대해 처음 사용했던 말이다.”
폴 쥬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인 경우나 특별히 허락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주일 장례는 금지되었다. ”1650년에 새로운 법 하나가 통과되었는데 주일에 도둑질을 한 자에게는 체형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범의 귀 하나를 베어 내고 두 번째이면 남은 귀를, 세 번째는 사형을 선고하게 되어 있었다.” 1741년에는 주일에 길이나 들에서 빈둥거리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는데 그 법을 처음 어긴 사람에게는 20실링의 벌과금을 부과토록 되어 있었다.
사실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미국 식민지의 안식일 기본법을 만든 자는 영국 왕과 의회였지 청교도들이 아니었다. 그 법은 교회 출석을 요구하였다. 주일에는 소매상, 기술자, 직공, 노동자, 혹은 여하한 다른 사람이라도 세상적인 무슨 노동이나 장사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로드 아일랜드와 펜실바니아의 법률은 일요일에 ‘평상시의 업무’를 계속하는 행동을 엄하게 금하였다.
청교도들은 제 4계명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꼭같이 부과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인간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주어졌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폴 쥬이트는 청교도가 ‘안식일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청교도의 안식일은 구약의 안식일을 거의 완전하게 본뜨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청교도들은 주일 성수에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청교도들이 안식일 준수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안식일 준수론자들이 청교도는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다양한 성경적 근거 위에서 주일 성수를 주장했다.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 주장은 부분적으로 4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 연속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서도 구약의 안식일이 지닌 의식법적 성격과 도덕법적 성격에 각별히 주목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도록 제정된 법이나 일과 활동을 극단적으로 금지하는 등 구약의 안식일적 국면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 폐지된 의식법이다. 그러나 칠일 중 하루를 휴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원리는 “당연하고 도덕적이여 항구적인” 원리라고 간주하였다. 4계명에 나타난 원리에 따라, 청교도에게 있어서 주일 성수는 일상사에서 손을 놓고 쉰다는 개념을 일부 포함한다. 그들이 안식일 준수론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주일의 기본 목적이 예배에 있다고 초지 일관 주장한 것이다.
청교도들이 추구한 안식일의 중심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날을 따로 구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주일을 보내기 위해 여흥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래서 한 유명한 청교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날을 운동 경기나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날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보내야 할 것이다.”(윌리엄 퍼킨즈).
청교도들은 “칼빈에 비해서 더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였다. 그 결과 때로는 ‘실수’와 ‘지나침’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아직 밤이 깊지 않았는데도” 사업에 관한 메모를 했다고 해서 벌금형을 받았다. 플리머스의 한 여성을 주일에 빨래를 짜서 널었다는 죄목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어떤 병사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 “낡은 모자 조각을 적셔 신발에 넣었다”고 해서 벌금을 냈다.
청교도의 안식일의 쇠퇴는 산업화와 도시화와 이민, ‘대륙의 주일’을 받아들임과 개선된 교통수단과 주일의 기차 운행 일정, 일요일판 신문, 사업화된 스포츠와 오락에 의해서 가속화되었다. 1828년 주요 교단들은 주일에 우편 배달을 하는 것과 우체국을 여는 것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831년에 주일성수협회(The Lord's Day Observance Society)가 창설되었다. 레코드지(誌)의 수많은 독자 편지와 기사들은 공원과 박물관 그리고 동물원의 주일 개장을 반대하였다. 6년동안 한 복음주의적 목사는 어떻게해서든지 모든 객차가 주일에 그곳에 정차하지 않도록 하였다. 많은 주들이 오늘날 안식일 관련 법령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강제력은 느슨하다.
6) 니콜라스 바운드와 청교도 안식일 엄수주의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und, d. 1613)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서 1571년 문학사, 1575년에 문학석사, 그리고 1594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가족은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깊이있고 지속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바운드는 1595년 그 유명한 <참된 안식일론>(True Doctrine of the Sabbath)이란 책을 출간했고, 1606년 증보판을 내었다. 이로써 그는 ‘청교도 안식일 엄수주의’로 알려진 입장을 책으로 펴낸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의 책은 점점 그 수가 많아지고 있던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놀랍게도, 안식일 엄수주의는 바운드가 그의 엄청난 저작을 완성한 후에 그 이상의 발전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 풀러는 <영국교회사>에서 안식일 엄수주의의 부흥은 바운드의 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바운드가 최초로 안식일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아니었다. 안식일 신학과 안식일 윤리는 1580년대 내내 캠브리지에서 뜨겁게 논의되던 주제들이었다.
바운드의 책이 출판된 후, 안식일 문제에 관한 견해 차이는 영국 프로테스탄티즘 내의 두 파, 즉 청교도와 국교회측(성공회) 간의 가장 분명한 차이의 표식이 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안식일 엄수주의는 청교도주의의 뚜렷한 표식이 되었다.
그러면 바운드의 안식일 신학은 무엇인가? 바운드는 안식일 계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로, 그는 안식일이 창조에 근거하고 있고, 따라서 타락과 모세의 율법보다도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제 4계명은 창조시에 세워진 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인을 구속하는 자연적이고, 영구적이고, 도덕적인 법’이다. 단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의식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운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주일 성수는 교회에 의해 제정된 실천 규정이 아니라,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세 율법의 제 4계명에 직접적으로 근거한 준수이다.
둘째로, 바운드는 안식과 예배의 날이 유대인의 일곱째 날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첫째 날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날의 변경은 초기의 교회가 임으로 결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의 그리고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진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 주(週)의 첫 날은 다른 날들과 구별되며 다른 날들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그 날이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었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1606년도 증보판에서, 심지어 제 4계명이 에덴동산(Paradise)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는 놀라운 주장을 했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으로 새겨졌으나, 제 4계명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운드는 ‘제 칠일’(seventh day)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첫째 의미는 한 주의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을 뜻한다. 두 번째 의미는 ‘매(每) 칠일’(every seventh day)이라는 뜻이다. 이 날은 주(週)의 어떤 날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운드는 그 날이 ‘일요일’이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바운드에 의하면, 날의 변경에 있어서 그의 주장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도들의 실천’이다. 바운드는 사도들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천이 규범적이고 구속적(拘束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한 실천이거나 또는 그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役事)로부터 유래한 실천이기 때문이다.
바운드는 계시록 1:10에서 사도 요한이 ‘일요일’을 ‘주의 날’(主日)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로써 우리가 그 날이 어떤 권위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몇 가지 다른 변화와 비슷하다는 점을 열거하였다(제사장→사도; 동물 희생제사 → 자기 희생제사; 유월절 →주의 만찬; 할례 →세례). 이와같이 안식일이 주의 마지막 날에서 첫 날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사실상, ‘일요일’이란 명칭이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그 명칭은 본래부터 이교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다. 주의 첫 날의 독특성과 유일성 때문에 그 날만이 ‘주의 날’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바운드는 단순하게 제 4계명의 문자적 의미를 취하여, 그 의미를 ‘기독교 안식일’에 적용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안식일은 거의 ‘제 3의 성례’(third sacrament) 수준이다.
그러면 바운드의 안식일 윤리(Sabbatarian ethics)는 어떠한가?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는 하나의 신학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윤리이다. 한 사전은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에 관하여 “주일 성수의 해석에 있어서 엄격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바운드는 그의 안식일 신학의 실제적, 윤리적 함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의 책의 내용 중 절반은 주일 성수의 세칙을 열거하고 있다.
바운드에 따르면, 제 4계명은 ‘휴식’(rest)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것이 영적 안식이 아니라,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육체적 휴식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보통의 일상적 일과 놀이의 중단이다. 그러나 이 휴식은 특별한 휴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휴식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예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운드는 주일에도 어떤 일은 허용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일과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치는 일 같은 것이다. 또 전쟁, 환자를 돌보는 일, 홍수와 화재와 도적과 싸우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의 일 등이 허용된다고 했다.바운드에 의하면, 사격과 사냥, 테니스와 펜싱, 매사냥과 볼링은 금지된다. 그는 곰 곯리기, 소 곯리기, 닭싸움을 언급하였고,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부적당한 행위라고 말했다.
바운드는 주일이 무엇보다도 ‘공적 예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 공적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선포(설교)하는 것과 듣는 것이 있다. 그는 당시의 강단과 설교자에 관하여 크게 슬퍼하였고, 어떤 설교자는 연구하지 않으며, 어떤 설교자는 그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설교한다고 한탄했다.
바운드는 주일의 공동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공동 예배를 준비하면서 각자가 집에서 ‘개인적인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아성찰과 기도 그리고 개인적인 성경읽기가 필요하다. 또한 묵상이 필요한데, 이것은 설교 말씀을 통해서 들은 것과 말씀을 읽은 것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말씀을 중심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나 설교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운드에 의하면, 이러한 영적 연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큰 감사를 드리게 만들며, 그 감사는 한 주간 내내 계속된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주일에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강조하였다(Psalm singing).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시편을 불러야 한다. 그것은 -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므로- 예배의 바람직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기쁨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운드는 안식일이 무엇보다도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편을 부르는 것을 등한히하는 것에 대해 크게 슬퍼하였다. 그는 민요를 부르는 것이 유행하고, 유행가가 그리스도인 가정들에서 시편의 자리를 찬탈했다고 한탄하였다.
바운드는 또한 주일이 ‘자비를 베푸는 날’이라고 했다. 자비의 일들은 특히 주일(안식일)에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피난처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주고, 병자와 옥에 갖힌 사람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바운드는 안식일의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문자적 안식일을 히브리서 4장의 ‘영적인 영원한 안식일’에 관련지었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의 주된 목적은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요, 장차 하늘에서 영원히 계속될 안식일을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운드의 안식일 윤리의 중심은 이것이다: 제 4계명이 요구하는 ‘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적 일이나 활동으로 가득 찬 날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영적 활동은 일차적으로 예배(공적, 개인적)이다. 전(全)안식일은 이러한 예배를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 어떤 자세로 주일을 맞이할 것인가?
폴 쥬이트는 말하기를, “[화성인이] 이 우주로부터 우리들을 관찰한다고 하자. 그는 이 지구상에 매주 첫날이면 어떤 지정된 장소와 시간에 다같이 모이는 기독신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주일 문제는 교회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도 중요한 것인데도 현대의 신학적 저서에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날들을 지키는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지 상호간의 교화(敎化)와 공동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일을 봉사할 때만 유용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이같은 주일의 ‘낮은 신학’(low theology)은 유럽 대륙의 교회 특히 루터의 전통에 속한 교회들과 스위스와 불란서의 개혁파 교회에 광범한 영향을 끼쳐왔다.
교회가 날들을 지키는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 견해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주일 예배마저 아주 답답한 시대착오라고 인정, 아주 폐지해 버릴 것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주일 아침의 간단한 예배시간을 그날 하루를 자유스럽게 놀기 위해 아침 9시로 당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은 주일 예배를 더 이상 그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는 관습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여가가 늘어난 이 시대에 주말을 교회에 빼앗겨 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주일은 별다른 날이 아니다. 우리가 단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주일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자신을 미신적으로 인간화하고자 하는 주일의 축하와는 무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7일의 전부는 물론 달(月) 해(年) 심지어 생애 전부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그 이상의 하나님 즉 모든 것의 하나님으로 외적인 제한이나 영적인 제한을 가지지 아니하신 분이시다”(Hiley H. Ward, Space Age Sunday, 1960, pp. 143, 145)
그러나 청교도들은 제 4계명을 엄격히 주일에 적용하고자 했다. 폴 쥬이트는 영국 청교도들의 견해가 ”종교개혁자들의 과오와 제7일 안식교도들의 과오를 둘 다 피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청교도의 안식일관은 기독교 예배일의 새로움(newnes)을 인정하는 반면, 기독교 시간의 안식일적 구분(the Sabbatical division of Christian time)을 인정하므로 고대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와의 계속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미 살펴본대로, 바운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청교도의 접근 방식은 훨씬 더 원칙적이다., 즉 안식과 예배의 날에 대한 성수가 제 4계명에 직접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프리머스는 그의 논문에서 말하기를 “분명히 청교도의 안식일 엄수주의는 -부분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예배 상황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청교도 안식일의 목적이었다.
폴 쥬이트는 주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는데,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 자신의 일을 의지하는 신뢰감을 모두 다 부인하고,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들이다. 즉 믿음이 없는 참 주일은 존재할 수 없다.
2) 이 날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이다. “주일은 개인의 날이 아니다. 그 날은 교회의 날이다.”
3) 기쁨으로 이 날을 지키는 자만이 올바르게 주일을 지키는 자이다. 주일의 안식은, 축제일에 속하는 날의 즐거운 안식이다.
4) 그 날이 특별히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킨다. “주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에서의 자유를 그의 말씀 듣는데 바치고, 그 말슴을 마음에 두며, 우리 생활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주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날로서 주어졌다(as a reminder of this grace) 그리고 주일은 세상의 다른 나머지 것들로부터 그의 신실한 교회를 분리시키는 일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안식과 예배의 날인 주일에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의 기본적 자세를 잃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은혜를 상기하고 묵상하고 감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 전체를 이러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살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성도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가 한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나의 삶의 전부’라는 신앙고백의 구체적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송광택
들어가는 말
신약교회는 역사적으로 제4계명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였는가? 그리스도인은 제4계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언제부터 그리고 왜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즉, 주일)을 예배일로 구별하여 지키고 있는가?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란 무엇인가? 유럽 대륙 칼빈주의의의 관점과 청교도의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세로 주일을 맞이해야 하는가?
‘주일신학’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상과 같이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에 관하여 심도있는 연구를 하여왔다. 그러나 그 주제는 다루기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 주제는 세 가지 측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 즉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탐구가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때, “주일성수는 칼빈주의 교회들 가운데서도 영국과 미국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청교도들의 상징이었다.” 유럽 대륙 보다는 영국에서 매우 엄격한 주일성수가 시행되었고, 이는 청교도를 영국 성공회로부터 구별시켜주는 핵심적인 기준이었다.
본 소고에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주일신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따라서 주일의 기원 문제와 세계교회사에 나타난 주일에 관한 이해 그리고 주일성수와 관련된 실천을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주일신학을 조명해 보는 데 이 글의 목적이 있다.
1. 주일의 기원 - 안식일에서 주일로
안식일이란 유대인들이 안식하고(일을 쉬고) 예배드리는 날을 가리키는 말이다. 안식일은 창조시에 제정되었고(창 2:2.3) 그 다음에는 만나를 주실 때에 언급되었으며(출 16:23-30) 그 후에는 시내산에서(출 20:8-11) 계명으로 주어졌다(비교. 신 5:12-15). 안식일을 어기면 죽임을 당했으며(출 31:4), 개인의 일은 쉬어야만 했다.
그리스도인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어 온 문제이다. 안식교인들은 제 칠일을 준수하는 것이 필수적인 도덕적 의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안식일 계명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제 4계명이 본질적으로 의식법에 불과하며,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주일의 기원을 추적할 때, 학자들은 대개 그리스도의 ‘부활’일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주일에 부활하심으로써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일요일에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시고(요 20:26), 일주일의 첫날에 성령을 보내심으로써(행 2장) 주일을 강조하셨다. 물론 성도들이 처음 예루살렘에서는 매일 모임을 갖기도 했지만 점차 주일은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날이 되었다(행 20:7; 고전 16:2).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의 첫 날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초대교회는 주일에만 예배를 드렸던 것은 아니었지만(행 2:46),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초대 교회 때부터 지켜오던 하나의 관습이다(행 20:7). 유대인들은 안식일(토요일)을 그 전날 해질 때부터 지켰다. 초대 교인들은 이러한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토요일 저녁부터 예배드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계속하다가 성찬을 떼어 먹음으로써 그 절정을 장식했다(행 20:7, 11).
안식교는 ‘일요일’을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이교의 태양숭배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랄프 프라임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은 이교도들이 그 신(태양신)을 숭배하기 위해 제정한 날을 본딴 것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순교자 저스틴과 바나바가 이 날을 지키게 된 동기에 대해서 말한 내용과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숭배를 지극히 혐오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러한 가능성은 전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찰스 라이리(Charlrs C. Ryrie)은 초대교회의 주일성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은 누가복음 12:35-40에 기록된 경고의 말씀(‘신랑이 돌아올 때 깨어있으라’)에 따라 예배드리고 있을 때 주님이 재림하셨으면 하는 초대 교회 신자들의 바람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노예인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 모이고자 하는 실제적인 필요성도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초대교회는 매주일 첫날인 이 일요일에 정규적으로 연보를 드리고 성찬식을 거행했음이 특징이다(행 20:7; 고전 16:2).”
그는 또한 주일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사도행전 20:7에 나타난 기사를 볼 때, 주의 만찬을 준수하는 것은 처음부터 주일 예배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음에 틀림없다. 헌금(연보)하는 것도 주일에 행하는 활동들 중의 하나였다(고전 16:2). 저스틴(Justin, 주후 150년경)은 주일날 행한 여러 가지 활동들, 예컨대 사도들의 서신과 선지서들을 읽은 것과 권고(설교)와 기도와 주의 만찬 거행하는 것과 헌금 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변증서> 1장 67절). 일찍이 아가페(애찬)는 예배의식의 한 부분이었으나(고전 11:34) 저스틴 시대에 이르러서는 폐지되었음이 분명하다”.
2. 교회사에 나타난 주일 이해
1) 초대교회
일반적으로 말해서 초대교회는 구약이 말하는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임했고 동시에 장차올 세상에서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으로 남아 있다고 보았다. 특히 초기의 교부들은 유대인을 향한 그들의 변증에서 구약적 예표(그림자)의 성취와 완성을 강조하였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안식일관(安息日觀)이 이 두 시대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깨닫고 그 날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으며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안식일을 활용하신 실례들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다. 저스틴은 글자 그대로의 안식일은 영원히 폐지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많은 수의 초대 교부들은 안식일을 할례와 같은 것으로 취급했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초기에 이방 기독신자들 간에 있었던 토요일 성수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가는 그 관습의 시초와 같이 모호한 문제로 남아 있다. 아무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아마 토요일을 성수하는 유대교의 경향이 주일의 우위성(優位性)을 위협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틴 대제가 집권한 후에는 주일이 기독신자의 안식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이런 경향이 유대교의 토요일을 겉발림식으로 지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주일(일요일)이 공식적인 휴일로 공포되자, 많은 사람들은 주일날의 꽤 많은 시간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의식적인 행위만 증가시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대해 구약성서가 규정하고 있는 엄격한 금령들을 빙자하여 쉬라는 요구에다 종교적 열성과 의무를 지우려 하였다.
어쨋든 모든 학자들은 한가지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첫날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부활의 기념일로 축하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요일을 지키는 것은 부활 사건에다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발생 과정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용이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첫 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관례가 언제 어디서 왜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성경 저자들과 대부분의 고대 교부들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유대인의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유추를 위한 기초작업을 한 자는 어거스틴이었다. 교리문답식의 교육을 위해 그는 십계명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해석했다. 사실 어거스틴은 안식일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한 날을 지키는 일’로 다룬 적이 없다. 일차적으로 종말론적인 그의 안식(the Sabbath rest)은 시편 46;10의 안식이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됨을 알지어다”). 물론 그 안식을 마음의 평안에 관련시키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소망 가운데서의 현재적 의미를 다루었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안식은 소망 가운데 성취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안식하실 때(when God 'rests in us') 온전한 안식의 실재(reality)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따르면, 10계명 중 제 4계명은 그리스도인이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단 하나의 계명이다.
2) 중세 교회
중세 초기에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는 야만 민족들의 기독교화에 의해 크게 촉진되었다. 빌헬름 토마스에 따르면, 개종한 게르만 민족들은 그들의 금기일(禁忌日)들과 유대교의 안식일 사이의 유사성에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주일을 일과 폭력을 멈추는 날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중세기에 안식일 엄수주의는 법적인 강제에 의해 엄격히 시행되곤 했다.: “만일 자유인이 일요일에 일을 하겠다고 주장하면 세 번 경고받은 후에는 그의 유산을 몰수당하게 되고 나중에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일요일의 휴식을 어긴 농노는 체형을 받게 되고, 만일 그가 그 버릇을 고칠 수 없으면 오른 손을 짜르게 되어 있었다. 694년 스페인의 비시고드(Visigothe) 왕은 유대인들에게까지 일요일에 아무 일도 못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적인 일요일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일을 하는 유대인은 누구나 그의 머리를 밀리우고 100대의 태장을 맞아야 했다. 영국에서는 697년에 켄트왕이 명령을 내려, 일요일에 일을 강요당한 농노가 있으면, 그를 자유인이 되게하고, 주인이 40수스의 벌금을 물도록 하였다.”
일요일 저녁 집회에 관해서는 6세기 경에 와서 여러 종교회의가 출석을 권하였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사 때 강제로 출석시키는 일은 12세기와 13세기에 불란서에서 현저하였는데, 이는 알비파를 반대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중세신학은 안식일의 안식에 대한 영적 차원 즉 죄에서 자유하게 하는 마음에 대한 어거스틴적 강조를 상실했다. 특히, 이시도레(Isidore of Serville, 570-636)는 안식일의 안식을 실현된 종말론적 실체로 본 고대교부들의 진술을 생략함으로써, 그리고 육체 노동의 중단이란 관점에서 안식일과 일요일을 비교하여 강조함으로써 어거스틴적 강조를 잃어버리게 한 장본인이 되었다.
796년 아퀼레자의 폴리너스(Paulinus of Aquileja)에 의해 소집되었던 종교회의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일요일을 삼위되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로 선언하였다. 이 날을 성자의 부활일로, 성령의 강림일로, 성부의 천지 창조일로 봄에 따라 그 존엄성이 더 많이 부과되었던 것이다.
폴 쥬이트(Paul K. Jewett)에 따르면, 학자인 알프릭(Aelfric, 955-1020)은 제 4계명에 대한 교리문답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세의 율법하에 있던 당시에는 토요일을 사람들이 크게 경외하고 거룩히 구별해서 심한 노동을 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그와같은 심한 노동을 금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쉬는 날을 지키되 우리 자신이 죄에서 해방되어 그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영적으로 지켜야 한다.... 지금 우리는 구세주가 부활한 후부터 일요일을 축제일로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절 주일에 죽음에서 일어났고 주일은 창조의 날이 되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9-10세기의 아일랜드에서는 그 거룩한 시간이 토요일에서 월요일 아침 예배 시간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소위 ‘안식일의 율법’이 다음과 같이 형성되기도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며, 여행을 시작하지 않으며, 팔지 않으며, 계약을 맺지 않으며, 고소하지 않으며, 재판하지 않으며,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으며, 빨래하지 않으며, 목욕하지 않으며, 옳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목적없이 뛰지 않으며, 곡식을 빻지 않으며, 떡을 굽지 않으며, 교유기(攪乳器)를 돌리지 않으며, 나무를 쪼개지 않으며, 집안 청소를 하지 않으며, 소나 말이나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으며, 고역에 해당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며, 정당한 사유가 없이는 거주지의 경계를 넘어 방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폴 쥬이트는 말하기를, “이러한 타부(taboo, 禁忌)의 이론은 중세기의 안식일 이론의 과도기적 일면”이라고 했다.
피터 코메스토(PPeter Comestor, d. 1179)도 안식일 계명을 기독교적 주일 성수에 문자적으로 적용하였고, 창세기 2:2에 근거하여 “안식일은 율법 이전에도 어떤 민족들에 의해서 항상 지켜져왔다”고 주장하였다.
16세기가 되면서, 일요일 휴일에 대한 교회법이 완화되었는데 이것은 주로 시대의 변천에 의해 되어진 일이었다. 원고를 복사하는 일, 특히 거룩한 인물의 글을 복사하는 일은 허용되었다. 날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 아니라면 일요일에 수를 놓는 것도 허락되었다.
공식적으로 로마 카톨릭은 일요일이 ‘예배를 위한 안식(휴식)의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죄한 레크리에이션(오락)의 합법성에 관한 공식적인 교회의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3) 종교개혁기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은 16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자들이다. 그들은 안식일 해석 또는 주일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폴 쥬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기의 유대교 개종자들이 범한 안식일주의의 과오를 피해 보려다가 결국은 안식일 계명이 기독교의 예배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여 안식일주의자들과 정반대의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과오가 신학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이해가 갈만한 것임을 인정한다”라고 말했다.
(1) 루터의 주일 이해
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매주 어떤 날을 지키는 일에 매여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종교적 의무로서의 예배로부터도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 계명은 영적인 의미로서만 그리스도인과 관련이 있다. 또한 육체적 휴식을 위해서도 의미가 있는데, 그 휴식은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한 여가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어디서든지 주일을 단순히 주일이란 그 날을 위해 거룩히 구별해야 한다면, 만일 어디서든지 유대교적 근거에 입각하여 그 날을 성수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들에게 주일에도 일하고, 말을 타고, 댄스도 하고, 연회를 베풀고, 기독신자의 자유를 침식하는 이같은 제도를 없애기 위한 무슨 일이라도 하라고 명하겠습니다.”
루터교의 신조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도 복음에 의해 안식일이 폐지되었으므로, 필연적인 요구 때문에 성수해야할 날은 하나도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언제 모여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 어떤 날이 필히 지정되어야 한다고 했다(Article VII,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이것은 공중예배를 위한 어떤 정한 시간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2) 칼빈의 주일 이해
칼빈은 어거스틴의 ‘영적 안식’의 측면을 다시 강조하였고, 칼 바르트는 이것을 칼빈의 ‘안식 신비주의’(Sabbath mysticism)라고 불렀다. 그러나 칼빈은 제 4계명의 영적 의미로서 종말론적 안식보다는 이생에 있어서의 성화를 강조하였다.
① 기독교강요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제4계명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이것이니, 우리 자신의 일들과 성향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만을 명상해야만 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시된 방법 안에서만 이 명상을 실천행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안식일을 하나님의 은총의 날로 보았다. 안식일은 이런 은총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는 안식일의 일반적 해석으로서 세 가지 요소를 강조하였다.
첫째, 이 날은 영적 안식의 예표적 그림자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이 이 날에 모여서 율법을 들으며, 제사의식을 준수하는 날로 주셨다(이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특별히 묵상해야 한다).
셋째, 이 날은 다른 사람의 권위 아래서 일하는 자들에게 하루의 안식(휴식)을 주도록 지정해 놓으신 날이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제4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안식일에서 이 영적 안식의 예시(豫示)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러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께서 이 계명에 대해서와 같이 엄격한 복종을 명령하신 계명이 달리는 거의 없다(민 15:32-36; 참조. 출 31:13이하; 35:2). 모든 경건이 전복되었다는 것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알리고자 하실 때에는, 안식일을 더럽히며 범하며 지키지 않으며 거룩하게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셨다. 안식일에 대한 경외가 없어지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법이 전연 없다는 듯이 말씀하셨고(겔 20:12-13; 22:8, 23:38;렘 17:21,22,27; 사 56:2), 안식일 준수에 대해서는 최고의 찬사를 주셨다. 따라서 신자들도 다른 말씀들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대한 계시를 크게 존중했다(느 9:14). 율법의 모든 교훈 가운데 안식일을 특히 존중한 것을 알 수 있다...(출 31:13-14, 16-17).
에스겔은 이 뜻을 더욱 자세히 표현하지만, 그 요점은 안식일이 한 표징이라는 것과, 이 표징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자기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겔 20:12).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곧 우리의 의지를 죽이는 것이라면, 외면적인 표징과 내면적인 실상 사이에 아주 긴밀한 일치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전적으로 쉬어야 하며, 우리의 의지를 바쳐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맡겨야하며, 우리의 모든 육적 욕망을 버려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생각한 우리 자신의 일은 일체 쉬고, 사도가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며(히 31:21), 우리가 그의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히 4:9) 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통해서 마지막 날에 자기의 안식이 완성될 것을 백성에게 대략 알리시며, 그들이 평생 안식에 대해서 끊임없이 명상함으로써 이 완성을 동경하게 만들려고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칼빈은 안식일 계명의 약속이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인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實相)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그리고 칼빈은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그리스도인에게도 의미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킨다.
“안식일은 폐지되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1) 일정한 날에 모여 말씀을 들으며 신비의 떡을 떼며 공중 기도를 드려야 한다(참조, 행 2:42). 그리고 (2) 하인들과 노동자들의 노고를 쉬게 해야 한다. 주께서 안식일을 명령하셨을 때에 이 두 가지 점을 생각하신 것은 틀림이 없다. 처음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만 봐도 증거가 많다...
이 두 가지 일이 유대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우리에게 명령하며, 우리는 일상 경험으로 모임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안다. 그러나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이 없으면 어떻게 이런 모임을 가질 수 있겠는가? 사도가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며 질서있게 해야 한다(고전 14:40). 예정과 규정이 없이는 적절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으며,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지극히 현명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필요한 일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 필요한 일에도 유의하셨던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복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슨 까닭에 일요일을 지키는가? 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날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들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이 점에서 유대교를 초월한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가장 엄격하고 신중한 의식으로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거기 영적 신비가 상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교회내의 질서 유지에 필요한 대책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무도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며, 그것은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가르친다(골 2:17)... 사도는 날에 대한 이 어리석은 구별을 비난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인 사회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합법적 날짜 선택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가 세운 교회들은 이 목적으로 안식일을 보존했다. 사도는 에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을 돕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는 것도 그 날 하라고 지정했다(고전 16:2)... 미신을 없앨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일을 제쳐놓았고, 교회의 예절과 질서와 평화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목적을 위해서 다른 날을 제정한 것이다.“
칼빈은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교회들도 미신만 없으면 나는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제4계명은 공동의 예배가 가능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의 성도들이 하루를 정해 모여야 될 필요성이 있었듯이, 신약의 교회들도 무질서와 혼돈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 날이 필요하게 되었다.” 칼빈은 말하기를, “고대인들이 우리가 말하는 주일(主日)로 안식일을 대신한 데는 신중한 고려가 없지 않았다. 고대의 안식일이 대표한 저 진정한 안식은 주의 부활에서 그 목적이 실현되었다”라고 했다.
칼빈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경건의 훈련을 위해서도 일정한 날에 모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울 수 있는 외면적 보조 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서,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명상해야 한다. 또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압박해서는 안된다.”
② 신명기 설교(34번, 35번)
칼빈은 신명기 설교에서 제4계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설명하였다. 1555년 6월 20일(목요일)에 행한 설교(본문/신명기 5:12-14)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했다:
“율법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본체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그것이 완전히 폐지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것의 희미했던 모호성은 제거되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무시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경배를 얼마든지 자신의 발 밑에 둘 수 있는 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휴식을 취하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한 사람들을 마치 살인한 사람을 대하시듯 가혹하게 벌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배가 이 안식일이라는 상징 아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 나옴에 있어서 “인간 자신의 자원하는 마음과 노력이 요구된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와 같이 설교에서도 공적 집회(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안식일은 백성들로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듣고, 희생제사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이같은 점들에 관하여는 그것이 비단 고대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상징적인 의미는 사라졌지만, 바울이 골로새서에서(골 2:16-17) 말한 것처럼, 이 질서에 대하여 언급한 말씀의 본래적 취지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며 또한 유효성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것의 목적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정녕 그와 같은 일이야 항상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우리의 연약함과 특히 게으름으로 인하여, 이레 가운데 하루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를 따라 열심을 품고 하나님을 경배한다면, 이를 위하여 일 주일 가운데 하루를 정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우리들은 주일에 모이는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를 눈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을 이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완력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무엇보다도 내적 동기와 마음의 자세를 강조하면서 안식의 참 뜻을 설명하였다.
“더욱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점은, 안식일이 제정된 것은 단지 우리들로 그 날에 말씀만을 듣게 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고, 그 이외의 모든 시간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로 쓰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계시건만, 우리는 받은 그것들로 인하여 그를 찬미하려는 뜻에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에 관하여 충분하게 생각해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지킬 때에는 마치 우리들이 높은 탑 꼭대기 위에 올라가 있는 기분으로 멀리서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일일이 묵상하면서 그 날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주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하는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에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은택으로부터 유익을 얻어 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그가 하신 일들에 관하여 오랫동안 묵상해온 터이므로, 주일의 모든 나머지 시간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묵상은 이미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것의 윤기를 내 온 것이기에, 마침내는 우리들이 월요일에도 그리고 나머지 다른 요일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이 가능하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이 허영으로 가득찬 기분전환이나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어긋나는 일을 하는 가운데 보내진다면, 그러한 사람은 전혀 주일을 지켰다고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결과만을 초래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제 영적 자유 안에서 자발적으로 그 날을 구별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우리는 현재 유대인들에게 명령되어진 그 날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에게 명령된 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을 통하여 우리들을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해 주셨고 또한 그것에 대한 책임을 면케해 주셨음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를 증거하는 뜻으로 그 날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비록 이렇게 해서 그 날을 변경시키기는 했지만, 어쨋든 우리는 일주일 가운데 특정의 날을 지키는 이 전례를, 하루이건 혹은 이틀이건간에,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맡겨질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그의 생각을 간략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만약 사람들이 공동의 성례를 치르고, 함께 공동기도를 드리고, 혹은 상호 간의 믿음의 화합과 일치를 보이기 위하여 모여야 한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일을 위하여 특정의 날을 가져야만 합니다... ” “우리에겐 외형적인 질서가 부여되어 있는데, 그것이 주어진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들과 세상적인 업무 등을 제쳐두게 하고, 모든 일로부터 손을 놓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하여 묵상케 하며 또한 그가 우리에게 항상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깨달을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데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칼빈은 “일년에 대여섯 번 정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들은 정녕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기 위해서 온 돼지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돼지 우리 안에나 있어야 마땅한 자들인 것입니다. 그들에 관한 한, 차라리 그들은 그 악취나는 우리 가운데 쳐박혀 있는 편이 더 나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가증스러운 떼거리들이라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경건한 자들의 회중 가운데로 섞일 수 있도록 허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전으로부터 완전히 잘리어 나가는 편이 더 좋으리라는 말씀입니다.”
1555년 6월 21일의 설교(신 5:13-15)에서도 그는 제4계명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고 하신 말씀은, 그가 자신을 위한 하루에 대한 대가로 우리들에게 엿새를 주셨으니 만치, 우리가 하나님께 특정한 하루를 드리고 헌신하는 날에 있어 인색함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일러두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온전히 나를 섬기는 일을 위해서만 쓰일 수 있는 하루를 선택하여 남겨두라는 것이 너희들에게는 지나친 요구이더냐? 너희들에게는 너희의 필요한 것과 너희의 사업적인 일들을 돌볼 수 있는, 완전히 자유로운 엿새의 시간이 있으므로, 너희가 이 날을 그 같은 일들로 나에게 바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런고로 내가 일주일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단 하루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너희도 알 수 있겠거니와, 내가 이처럼 너희를 자비로써 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너희가 그 날을 마치 써서는 안될 일에 쓴 것처럼 여기거나 혹은 일곱 중 하나에 해당하는 그 시간을 가지고 나에게 인색하게 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용납될 수 없는 배은망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어찌하여 내가 이레 가운데 하루를 정하고, 그 날에 너희들이 나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을만큼의 세상 근심으로 둘러싸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각 사람에게 자신의 일에서 손을 떼도록 요구할만한 권한이 내게 없다 하겠느냐?”
칼빈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 뜻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참 뜻은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거룩한 방식으로 사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 것이고, 그들이 반드시 그들의 모든 집착하는 것들과 욕망으로부터 물러서야 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 안에서 전적으로 일을 하셔야만 한다는 것 등을 깨우쳐 주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 쥬이트는 칼빈이나 루터가 주일 성수를 “제 4계명에 근거한 도덕적 명령으로 보지 아니하였다”라고 주장한다.
비록 폴 쥬이트가 “안식일에 관한 칼빈의 실제적이고 교육적인 언급마저도 안식일 성수를 의무적이라기 보다 임시 방편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도 칼빈의 생각은 “교회의 안녕과 참 종교의 확립을 위해 공중에배를 위한 어떤 일정한 날이 필요하다고 본 것 같다”고 그의 견해를 피력했다.
프리머스(John H. Primus)에 따르면, 칼빈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안식일 엄수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그의 윤리에 있어서 많은 청교도적 강조들에 대해 아주 마음 편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 접근 방식에 있어서 칼빈과 청교도들은 다르다. 칼빈의 접근방식의 특징은 그가 교회 질서에 실제적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칼빈에게는 안식일이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법이 아니다. 사실상 칼빈은 유대인의 안식일의 도덕적 의미보다 의식적이고 예표론적 의미를 강조한다. 칼빈은 교회의 좋은 질서와 건덕(健德)이라는 실제적인 유익의 측면에서 주일 성수를 강조하였다.
4)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주일성수 개념은 개혁주의 안에서도 서로 다르다. 칼빈과 그의 후계자들 사이에서 ‘주일성수’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가에 대한 많은 논쟁이 있으며, 아직까지도 매우 첨예하게 대립하는 요소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1563)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3-1649)에 담긴 차이점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칼빈이 극찬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이다. 그 요리문답은 제 103문에서 “하나님은 제4계명에서 무엇을 요구하는가?”라고 묻는다.
“첫째로, 복음의 사역과 기독교 교육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과 교회에 열심히 출석할 것과 특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석하며, 공적으로 주님을 찾으며, 구제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로, 나의 전생애를 통하여 나쁜 것을 행하지 말고, 주님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내 속에서 역사하게 하시게 하고, 나아가서는 이생에서 영원한 안식을 시작하도록 요구하신다.”
위의 요리문답이 작성된지 80여년 후에 영국 웨스트민스터 교회당에 모인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면서 제 4계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청교도적 주일 성수 스타일’을 강조하였다.
제21장 예배와 안식일
(7)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칠일)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리워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8)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깨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그들의 일사적인 일들을 미리 정돈한 연후에, 그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을 중단하고 거룩하게 안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바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대륙의 칼빈주의가 안식일을 이해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들의 안식일 엄수주의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5) 청교도
영국의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인들이 ‘엄격한 안식법’(일요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엄격히 지키도록 규정한 법률)을 제정하여 준수했던 것은 당시에 주일이 너무 무시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당시 한 노회 회록의 기록(1658년 6월 6일)은 다음과 같이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틸로치에 거주하는 알렉산더 케어니가 양 한 마리를 목장에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므로 안식일을 범하엿기에 이를 처리하기 위해 노회가 연기되었다. 알렉산더는 그가 폭풍에서 그 가축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불평적으로 말했다. 이에 본회는 그 같은 언사를 꾸짖고 다시는 그와 같이 안식일을 범하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폴 쥬이트에 따르면, 이 엄격한 ”안식일 성수 제도는 처음으로 미국을 건너간 청교도들에 의해 뉴 잉글랜드에 전해졌다. 초기 뉴 잉글랜드의 주일법은 청색법률(Blue Law, 엄격한 법률이란 의미)이라 불렸는데 이 말은 사무엘 피터스 목사가 그의 저서 ‘코네티커트의 일반 역사’에서 가혹한 주일성수법에 대해 처음 사용했던 말이다.”
폴 쥬이트의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인 경우나 특별히 허락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주일 장례는 금지되었다. ”1650년에 새로운 법 하나가 통과되었는데 주일에 도둑질을 한 자에게는 체형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범의 귀 하나를 베어 내고 두 번째이면 남은 귀를, 세 번째는 사형을 선고하게 되어 있었다.” 1741년에는 주일에 길이나 들에서 빈둥거리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는데 그 법을 처음 어긴 사람에게는 20실링의 벌과금을 부과토록 되어 있었다.
사실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미국 식민지의 안식일 기본법을 만든 자는 영국 왕과 의회였지 청교도들이 아니었다. 그 법은 교회 출석을 요구하였다. 주일에는 소매상, 기술자, 직공, 노동자, 혹은 여하한 다른 사람이라도 세상적인 무슨 노동이나 장사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로드 아일랜드와 펜실바니아의 법률은 일요일에 ‘평상시의 업무’를 계속하는 행동을 엄하게 금하였다.
청교도들은 제 4계명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꼭같이 부과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안식일이 인간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주어졌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폴 쥬이트는 청교도가 ‘안식일주의적 입장’에 서있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청교도의 안식일은 구약의 안식일을 거의 완전하게 본뜨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청교도들은 주일 성수에 신학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청교도들이 안식일 준수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안식일 준수론자들이 청교도는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다양한 성경적 근거 위에서 주일 성수를 주장했다. 청교도들의 주일 성수 주장은 부분적으로 4계명에 근거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 연속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서도 구약의 안식일이 지닌 의식법적 성격과 도덕법적 성격에 각별히 주목했다. 일곱째 날에 안식하도록 제정된 법이나 일과 활동을 극단적으로 금지하는 등 구약의 안식일적 국면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로 폐지된 의식법이다. 그러나 칠일 중 하루를 휴식과 예배의 날로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원리는 “당연하고 도덕적이여 항구적인” 원리라고 간주하였다. 4계명에 나타난 원리에 따라, 청교도에게 있어서 주일 성수는 일상사에서 손을 놓고 쉰다는 개념을 일부 포함한다. 그들이 안식일 준수론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주일의 기본 목적이 예배에 있다고 초지 일관 주장한 것이다.
청교도들이 추구한 안식일의 중심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 날을 따로 구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주일을 보내기 위해 여흥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그래서 한 유명한 청교도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날을 운동 경기나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날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데 보내야 할 것이다.”(윌리엄 퍼킨즈).
청교도들은 “칼빈에 비해서 더 엄격히 주일을 성수”하였다. 그 결과 때로는 ‘실수’와 ‘지나침’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아직 밤이 깊지 않았는데도” 사업에 관한 메모를 했다고 해서 벌금형을 받았다. 플리머스의 한 여성을 주일에 빨래를 짜서 널었다는 죄목으로 벌금형을 받았다. 어떤 병사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 “낡은 모자 조각을 적셔 신발에 넣었다”고 해서 벌금을 냈다.
청교도의 안식일의 쇠퇴는 산업화와 도시화와 이민, ‘대륙의 주일’을 받아들임과 개선된 교통수단과 주일의 기차 운행 일정, 일요일판 신문, 사업화된 스포츠와 오락에 의해서 가속화되었다. 1828년 주요 교단들은 주일에 우편 배달을 하는 것과 우체국을 여는 것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831년에 주일성수협회(The Lord's Day Observance Society)가 창설되었다. 레코드지(誌)의 수많은 독자 편지와 기사들은 공원과 박물관 그리고 동물원의 주일 개장을 반대하였다. 6년동안 한 복음주의적 목사는 어떻게해서든지 모든 객차가 주일에 그곳에 정차하지 않도록 하였다. 많은 주들이 오늘날 안식일 관련 법령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지만 강제력은 느슨하다.
6) 니콜라스 바운드와 청교도 안식일 엄수주의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und, d. 1613)는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캠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거기서 1571년 문학사, 1575년에 문학석사, 그리고 1594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가족은 안식일 문제에 관하여 깊이있고 지속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바운드는 1595년 그 유명한 <참된 안식일론>(True Doctrine of the Sabbath)이란 책을 출간했고, 1606년 증보판을 내었다. 이로써 그는 ‘청교도 안식일 엄수주의’로 알려진 입장을 책으로 펴낸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의 책은 점점 그 수가 많아지고 있던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의 생각을 명료하게 표현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놀랍게도, 안식일 엄수주의는 바운드가 그의 엄청난 저작을 완성한 후에 그 이상의 발전을 하지 않았다.”
토마스 풀러는 <영국교회사>에서 안식일 엄수주의의 부흥은 바운드의 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바운드가 최초로 안식일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아니었다. 안식일 신학과 안식일 윤리는 1580년대 내내 캠브리지에서 뜨겁게 논의되던 주제들이었다.
바운드의 책이 출판된 후, 안식일 문제에 관한 견해 차이는 영국 프로테스탄티즘 내의 두 파, 즉 청교도와 국교회측(성공회) 간의 가장 분명한 차이의 표식이 되었다. 17세기가 되면서, 안식일 엄수주의는 청교도주의의 뚜렷한 표식이 되었다.
그러면 바운드의 안식일 신학은 무엇인가? 바운드는 안식일 계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신학적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로, 그는 안식일이 창조에 근거하고 있고, 따라서 타락과 모세의 율법보다도 앞선다고 주장하였다. 제 4계명은 창조시에 세워진 법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만인을 구속하는 자연적이고, 영구적이고, 도덕적인 법’이다. 단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의식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운드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주일 성수는 교회에 의해 제정된 실천 규정이 아니라,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세 율법의 제 4계명에 직접적으로 근거한 준수이다.
둘째로, 바운드는 안식과 예배의 날이 유대인의 일곱째 날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첫째 날로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날의 변경은 초기의 교회가 임으로 결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의 그리고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진 신적인 권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 주(週)의 첫 날은 다른 날들과 구별되며 다른 날들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처음에는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인 그 날이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었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1606년도 증보판에서, 심지어 제 4계명이 에덴동산(Paradise)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처음으로 생생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는 놀라운 주장을 했다. 다른 아홉 가지 계명은 인간의 마음에 자연적으로 새겨졌으나, 제 4계명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운드는 ‘제 칠일’(seventh day)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첫째 의미는 한 주의 일곱째 날, 즉 토요일을 뜻한다. 두 번째 의미는 ‘매(每) 칠일’(every seventh day)이라는 뜻이다. 이 날은 주(週)의 어떤 날도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운드는 그 날이 ‘일요일’이 된 까닭을 설명하였다.
바운드에 의하면, 날의 변경에 있어서 그의 주장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도들의 실천’이다. 바운드는 사도들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들의 실천이 규범적이고 구속적(拘束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한 실천이거나 또는 그들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役事)로부터 유래한 실천이기 때문이다.
바운드는 계시록 1:10에서 사도 요한이 ‘일요일’을 ‘주의 날’(主日)로 부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로써 우리가 그 날이 어떤 권위에 의해 바뀌었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몇 가지 다른 변화와 비슷하다는 점을 열거하였다(제사장→사도; 동물 희생제사 → 자기 희생제사; 유월절 →주의 만찬; 할례 →세례). 이와같이 안식일이 주의 마지막 날에서 첫 날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사실상, ‘일요일’이란 명칭이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그 명칭은 본래부터 이교도적이고 신성모독적이다. 주의 첫 날의 독특성과 유일성 때문에 그 날만이 ‘주의 날’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바운드는 단순하게 제 4계명의 문자적 의미를 취하여, 그 의미를 ‘기독교 안식일’에 적용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안식일은 거의 ‘제 3의 성례’(third sacrament) 수준이다.
그러면 바운드의 안식일 윤리(Sabbatarian ethics)는 어떠한가?
안식일 엄수주의(Sabbatarianism)는 하나의 신학일뿐만 아니라, 하나의 윤리이다. 한 사전은 안식일 엄수주의자들에 관하여 “주일 성수의 해석에 있어서 엄격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바운드는 그의 안식일 신학의 실제적, 윤리적 함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의 책의 내용 중 절반은 주일 성수의 세칙을 열거하고 있다.
바운드에 따르면, 제 4계명은 ‘휴식’(rest)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것이 영적 안식이 아니라,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육체적 휴식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보통의 일상적 일과 놀이의 중단이다. 그러나 이 휴식은 특별한 휴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휴식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고, 예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운드는 주일에도 어떤 일은 허용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일과 예배 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을 치는 일 같은 것이다. 또 전쟁, 환자를 돌보는 일, 홍수와 화재와 도적과 싸우는 일,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한 자비의 일 등이 허용된다고 했다.바운드에 의하면, 사격과 사냥, 테니스와 펜싱, 매사냥과 볼링은 금지된다. 그는 곰 곯리기, 소 곯리기, 닭싸움을 언급하였고,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부적당한 행위라고 말했다.
바운드는 주일이 무엇보다도 ‘공적 예배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이 공적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선포(설교)하는 것과 듣는 것이 있다. 그는 당시의 강단과 설교자에 관하여 크게 슬퍼하였고, 어떤 설교자는 연구하지 않으며, 어떤 설교자는 그의 영예와 영광을 위해 설교한다고 한탄했다.
바운드는 주일의 공동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공동 예배를 준비하면서 각자가 집에서 ‘개인적인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아성찰과 기도 그리고 개인적인 성경읽기가 필요하다. 또한 묵상이 필요한데, 이것은 설교 말씀을 통해서 들은 것과 말씀을 읽은 것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말씀을 중심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나 설교를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운드에 의하면, 이러한 영적 연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큰 감사를 드리게 만들며, 그 감사는 한 주간 내내 계속된다는 것이다. 바운드는 주일에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강조하였다(Psalm singing).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시편을 불러야 한다. 그것은 -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를 표현하므로- 예배의 바람직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기쁨의 표현이기도 하다. 바운드는 안식일이 무엇보다도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편을 부르는 것을 등한히하는 것에 대해 크게 슬퍼하였다. 그는 민요를 부르는 것이 유행하고, 유행가가 그리스도인 가정들에서 시편의 자리를 찬탈했다고 한탄하였다.
바운드는 또한 주일이 ‘자비를 베푸는 날’이라고 했다. 자비의 일들은 특히 주일(안식일)에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벗은 자에게 옷을 주고, 피난처 없는 자에게 잠자리를 주고, 병자와 옥에 갖힌 사람들을 방문해야 한다고 했다.
바운드는 안식일의 목적을 상기시키면서, 문자적 안식일을 히브리서 4장의 ‘영적인 영원한 안식일’에 관련지었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의 주된 목적은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요, 장차 하늘에서 영원히 계속될 안식일을 이곳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운드의 안식일 윤리의 중심은 이것이다: 제 4계명이 요구하는 ‘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적 일이나 활동으로 가득 찬 날을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영적 활동은 일차적으로 예배(공적, 개인적)이다. 전(全)안식일은 이러한 예배를 위해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 어떤 자세로 주일을 맞이할 것인가?
폴 쥬이트는 말하기를, “[화성인이] 이 우주로부터 우리들을 관찰한다고 하자. 그는 이 지구상에 매주 첫날이면 어떤 지정된 장소와 시간에 다같이 모이는 기독신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주일 문제는 교회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도 중요한 것인데도 현대의 신학적 저서에서는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혹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날들을 지키는 모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단지 상호간의 교화(敎化)와 공동생활을 위해 그리스도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일을 봉사할 때만 유용할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폴 쥬이트에 의하면, 이같은 주일의 ‘낮은 신학’(low theology)은 유럽 대륙의 교회 특히 루터의 전통에 속한 교회들과 스위스와 불란서의 개혁파 교회에 광범한 영향을 끼쳐왔다.
교회가 날들을 지키는 의무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하는 이 견해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나머지 어떤 사람들은 주일 예배마저 아주 답답한 시대착오라고 인정, 아주 폐지해 버릴 것을 지금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주일 아침의 간단한 예배시간을 그날 하루를 자유스럽게 놀기 위해 아침 9시로 당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들은 주일 예배를 더 이상 그 목적에 이바지할 수 없는 관습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여가가 늘어난 이 시대에 주말을 교회에 빼앗겨 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주일은 별다른 날이 아니다. 우리가 단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주일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자신을 미신적으로 인간화하고자 하는 주일의 축하와는 무관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7일의 전부는 물론 달(月) 해(年) 심지어 생애 전부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그 이상의 하나님 즉 모든 것의 하나님으로 외적인 제한이나 영적인 제한을 가지지 아니하신 분이시다”(Hiley H. Ward, Space Age Sunday, 1960, pp. 143, 145)
그러나 청교도들은 제 4계명을 엄격히 주일에 적용하고자 했다. 폴 쥬이트는 영국 청교도들의 견해가 ”종교개혁자들의 과오와 제7일 안식교도들의 과오를 둘 다 피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에 의하면, “청교도의 안식일관은 기독교 예배일의 새로움(newnes)을 인정하는 반면, 기독교 시간의 안식일적 구분(the Sabbatical division of Christian time)을 인정하므로 고대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와의 계속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미 살펴본대로, 바운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나타난 청교도의 접근 방식은 훨씬 더 원칙적이다., 즉 안식과 예배의 날에 대한 성수가 제 4계명에 직접적으로 근거하고 있다.
프리머스는 그의 논문에서 말하기를 “분명히 청교도의 안식일 엄수주의는 -부분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예배 상황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라고 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청교도 안식일의 목적이었다.
폴 쥬이트는 주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는데,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 자신의 일을 의지하는 신뢰감을 모두 다 부인하고,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들이다. 즉 믿음이 없는 참 주일은 존재할 수 없다.
2) 이 날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이는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키는 자이다. “주일은 개인의 날이 아니다. 그 날은 교회의 날이다.”
3) 기쁨으로 이 날을 지키는 자만이 올바르게 주일을 지키는 자이다. 주일의 안식은, 축제일에 속하는 날의 즐거운 안식이다.
4) 그 날이 특별히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그 날을 올바르게 지킨다. “주일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일에서의 자유를 그의 말씀 듣는데 바치고, 그 말슴을 마음에 두며, 우리 생활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주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날로서 주어졌다(as a reminder of this grace) 그리고 주일은 세상의 다른 나머지 것들로부터 그의 신실한 교회를 분리시키는 일의 표식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안식과 예배의 날인 주일에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의 기본적 자세를 잃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은혜를 상기하고 묵상하고 감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일주일 전체를 이러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살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성도의 감격과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가 한 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삼위 하나님이 나의 삶의 전부’라는 신앙고백의 구체적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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