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부분적 영감설의 배경
2. 부분적 영감설과 주장
가. 칼 바르트
나. 루돌프 불트만
다. 에밀 브루너
Ⅲ. 결론
Ⅳ. 참고문헌
Ⅰ. 서 론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는 전제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은 하나의 문학작품이거나 혹은 예배에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예전으로서 성경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 세기간의 논쟁 끝에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이루어졌다는 성경 영감론이 조직화되었다. 그러나 그 영감을 해석하는 부분에 있어서 또 다시 학자들은 견해가 나누어져서 영감의 방법이나 혹은 범위의 문제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의 진행을 크게 둘로 나누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되 그 중의 일부만 받아들이는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영감의 범위에 관한 문제로 발전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적과 기사, 창조와 신의 현현들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이성에서 이해될 수 없는 문제이다. 크게 한 부류의 학자들이 이성에 입각하여 성경의 이러한 기사 문제를 제기함과 더불어 성경의 영감설에 대한 범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정하여 연구를 거듭하여 왔다.
우선 성경의 부분 영감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언어의 영감이 아니라 사상의 영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의 영감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와 같은 완전 부정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다소 수정해야 한다고 느끼고, 언어 영감보다는 사상 영감을 더 많이 강조한다.
둘째, 영감은 성경의 도덕적 영적 교훈에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리적인 내용이나 윤리적인 내용에만 영감이 되어 있지 역사적인 사실이나 혹은 이적과 기사에 관한 부분은 전혀 영감이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로 세분할 수 있지만 부분적 영감설을 주장한 사람들의 견해를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
우리는 분명히 성경의 전체 부분이 영감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또한 이것은 성경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일부만 영감 되었다는 학자들의 견해를 알아보고 그들의 견해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Ⅱ. 본 론
1. 부분적 영감설의 배경
부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모태는 초대 교회의 노스틱주의로 올라가야 할 것이다. 그들은 헬라어의 에서 온 것으로 인간 구원이 '자아 지혜(self-knowledge)'로서 성취된다는 주장이다.1) 이들은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 이원론으로 인해서 그들은 선한 영과 악한 육을 분리하여 구약의 창조의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을 다른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물질적인, 즉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구약의 성경은 그들에게 필요한 성경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해 성경의 일부를 제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즉, 노스틱주의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말시온은 구약 성경이 율법의 하나님인 유대인의 하나님만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이를 부인해 버렸다. 또한 신약 성경에 관해서도, 그는 유대교와 율법에 관련된 모든 내용들이 제거되기를 원했다. 그는 직접 신약 성경 가운데서 바울의 10개 서신(목회 서신 제외)과 누가복음의 전체 내용 중 발췌된 부분만을 가지고 있었다.2) 그는 당연히 성경 중에 일부분만이 영감 되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서 오히려 초대 교회가 신약 성경을 종교회의를 통해 공식적인 정경화 작업을 하는데 그 필요성을 제공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바로 합리주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분적 영감설을 주장한 사람들이 현대 신학자들이라 하면 이들의 거의 모든 토대를 합리주의라 할 수 있겠다.
합리주의는 理性을 모든 진술의 궁극적인 조경자나 판단자로 간주하려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입장으로 이성이 종교적 진리의 궁극적인 판단자인지의 여부가 주목되기도 하였다.3) 초기 합리주의자들은 본래 성경 계시와 영감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수정할 의도뿐이었다. 그들은 성경 교훈을 이성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했지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다.4) 그러나 그들의 입장은 점차 성경 전체로부터 하나님의 참 말씀을 가려내야 한다는 입장, 즉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들은 신앙을 북돋우지 못하는 성경의 부분은 사람에게서 나온 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독일 계몽주의의 초기 단계에서는 이미 교회의 축자 영감설은 특별한 비판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독일 합리주의자들이 자율 이성의 척도로 성경을 잰 후로 성경의 내용을 내던져 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결과였다. 천사니 귀신이니 신유니 부활이니 하는 기록들은 터무니없는 유대 전설로 내몰았으며 삼위일체니 그리스도의 신성이니 십자가니 속죄니 하는 성경 교리는 옛 시대의 미신이라고 처리해 버렸다. 성경을 유오한 인간의 책으로 보고 성경 집필에 하나님은 전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본 나머지 독일 합리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뒤엎어 버리는 도구 노릇을 하게 되었다. 노골적으로 파괴적인 성경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주의는 교회 역사의 페이지에 등장한 가장 부패한 불신앙 사조 중의 하나로 손꼽히게 된다."5)
이들 합리주의적 성경관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되는 신학 사상이 바로 신정통주의와 후대의 자유주의로 볼 수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이나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 것이지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볼 수 없다는 합리주의의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된다.
2. 부분적 영감설과 주장
부분적 영감설이란 18세기의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생겨난 학설로 당시 영감에 관한 막연한 부분적 영감설들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부분적 영감설은 성경의 역사적 부분의 영감을 부정하고, 공통적으로 교리적 문서에만 영감을 한정시켰다. 이와 같이 교리적 문서에만 한정시킨 영감마저도, 그들은 처음에는 성질상 그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였으나, 결국에 가서는 순수하게 자연적인 과정으로, 곧 특수한 영적 개발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사건에 있어서는, 저자들로 하여금 신빙할 만한 증인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으나, 역사적인, 연대적인 및 과학적인 모든 종류의 오류에는 반증을 제공하지 못하였다.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틀리며 어떤 학자들은 신약 성경에만 한정시키고, 또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만 한정시키고, 심지어는 산상보훈에만 영감된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6)
여기서 우리는 세부적으로 바르트와 불트만, 브루너의 입장을 살펴보고 각각 그의 입장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가. 칼 바르트
신정통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운동이다. 1919-1945년 사이에 주로 영향을 미쳤다. 신정통주의 특징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기독교 신학의 근본 기초로서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신정통주의는 소위 성경 신학이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신정통주의의 기수 칼 바르트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 바르트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현현하는 세 가지 형태를 강조하였다.
첫째로, 궁극적 차원에서 계시된 말씀은 삼위의 제 2위인 로고스와 동일하다. 그러므로 계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모든 다른 형태가 그에게 관련되어져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유로운 은혜로 그것을 계시적 만남을 위해 친히 사용하시는 한해서만 효과가 있다. 계시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계시는 개인에게 발생하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언어로서 신빙성 있는 진술들이 아니다.
둘째로, 성경 전체로 구성된 성문화된 말씀은 계시에 대한 한 증언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 하나님과 의사 소통했던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기록이다. 기록된 말씀 자체는 계시가 아니다. 그것을 계시로 보는 것은 성경 우상 숭배이다. 성경은 인간의 말로 인간들에 의해 기록되었고 모든 점에서 오류가 있다. 그러나 계시의 한 증언으로써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만나시기 기뻐하신다면, 기뻐하실 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다. 이 경우 개개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에 의해 부딪힘을 받는다. 하나님 자신의 약속 속에서 이 기록된 말씀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직도 자신의 주권적 자유에 따라 인간들과 만나시기 때문이다.
셋째로, 선포된 말씀은 계시된 데 대한 증언을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으므로 기록된 말씀에 의존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뒤로 보고 있으나 선포된 현재와 미래에 주권적 목적의 계속적인 보강을 앞으로 내다본다. 재론의 여지없이 선포 역시 유오한 인가의 말로 되는 것이므로 계시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 선포는 하나님의 주권적 약속 하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하지만 인간성의 특징은 온갖 연약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는 사상 구조 속에 이 세 가지 형태의 말씀이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사용된다. 그러나 절대성을 지닌 것은 첫째 형태뿐이다. 다른 두 형태는 상대적이다. 그 둘은 하나님께서 개개인에게 말씀하시려고 자유롭게 허용하시기 원하시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의 사상을 들어가 보고자 한다.
1) 성경의 권위와 그 신적 성격은 여하한 인간의 입증에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실 때에만 한 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성령의 이러한 사역은 자명한 것으로 입증에 좌우되지 않는다.
2)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하나님과의 계시된 만남을 증언한 남녀들이다. 그러므로 신의 대변인들로서 그들의 활동 근저에는 진정한 경험이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신적 진리의 파악에 있어서 본질적인 관계가 있으나 그 관계 자체가 그 진리를 남들에게 전달하거나 남들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개하는데 충분하지 않다. 기록된 말씀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우라도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하실 수 있다.
3) 성경은 교회가 인정하는 66권의 정경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교회가 그 책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의 형태로서 계시를 증언한 자들의 기록이 그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정경은 종결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속에서 기존 정경집을 통하여 증언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종결되지 않았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다.
4) 하나님께서 성경의 언어 자체를 계시 증언으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바르트는 축자 영감이란 말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실 글자가 영감된 것을 암시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바르트는 글자 하나 하나가 영감되었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성경의 언어 속에 가두어 버리는 사상이라고 하였다.
5) 유오한 인간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은 모든 면에서 유오하며 역사. 지리. 자연. 과학 등 지엽적인 문제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신학과 윤리에 있어서도 오류와 모순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증언이 그 유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개개인에게 말씀하시고 대결하시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성경 속의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내용을 구분하고, 무오한 부분을 유오한 표현 등과 구분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구분을 통해 성경 속의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과의 만남을 우리 스스로 창조할 수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그의 저서「축자 영감 대 언어 영감」제1권 제2부 p.53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6) 교회의 과제는 기록된 본문의 의미를 확인하고 그 교훈을 전파하기 위하여 그 본문을 근면하게 연구하는데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 과제를 성실하게 수행 할 때 하나님은 개개인에게 말씀하시고 대결하시기를 기뻐하신다.
7) 이처럼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말씀하시는 직접성의 필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거나, 하실 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으로 자신의 말씀이 되게 하시는 만큼,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만큼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술은 신앙고백, 즉 하나님 자신이 성경의 인간 언어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신앙의 진술이다... 성경은....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술 속에 있는 이다(is) 는 말은 '된다'(becoming) 는 의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신앙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에게 계시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CF Ibid.,제1권 제2부 p.530 에 말하고 있다.
8) 성경의 신적 요소의 관계성은 하나의 신비로서, 어떤 면에서 옛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신비인 것과 유사하다.
9) 칼 바르트는 자기 입장이 성경 자체의 입장과 일치하며, 초대 교회의 일부 교부들의 교훈과 일치하며 개혁가들, 특히 루터와 칼빈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17세기 루터파와 개혁 주의 정통 주의의 경향은 성경관의 경화를 나타내며 이것은 성경의 권위를 말씀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글자'일 수도 있는 기록된 페이지로 옮겨 버린 경화증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성경이 객관화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이 주권적 자유가 배격되어 교회 생활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이다.7)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면에서 평가할 수 있다.
1)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실 수도, 안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시도에서 바르트는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인 성경의 본질을 손상시켰다. 논리 적용을 마음껏 허용할 경우, 성경의 참된 권위를 모두 허물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바르트의 성경관에서 드러났다.
2) 성경의 본래적 권위야말로 성경 자체가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은 단지 계시의 증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시이다. 성경에서 입증하듯이(요10:35; 마:5:18) 우리 인간들이 죄성의 흑막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둔감하여,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것을 구원적으로 깨닫도록 조명하시지 않는 한 못 깨닫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 때문에 성경 자체가 빛이요(시 119:105, 130), 진리인(시 119:160; 요 17:17) 사실이 전혀 영향받지 않는다.
3) 바르트는 개혁자들, 특히 루터와 성경관을 재포착 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주장은 매우 심각한 문제성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 신학자들은 개혁자들과 16세기 신학자들과 별로 의견을 달리하지 않았다. 진리의 성경은 말과 행위로 나타난 '증표들'의 사실성과 의의를 증거 하시고, 일관성 있는 교훈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된 증인들과 거짓된 증인들을 구분케 하시고 참 성경과 거짓된 글과도 구분케 하신다. 바르트는 복음주의 전통 전체의 성경관을 지나치게 비판함으로써 또 하나의 약점을 드러냈다.
5) 바르트에 의하면 정경의 기초가 부적합하다. 그는 사실 성경 66권이 정경이라고 주장하지만 정경의 확대 쪽으로도 문을 열어 놓았고 정경의 축소에 대해서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 바르트의 주관주의적 약점이 그의 성경관 전체의 성경을 문제시하도록 해주는 하나의 색인 부호라 할 수 있다.
6) 바르트는 하나님의 자유와 위엄을 수호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을 "멋대로 조종할 수 있는" 죄수로 가두지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초월성 원리를 주장하였는데 아마 이 원리가 성경을 계시의 표현으로 보지 않고 계시의 증언으로 보는 그의 성경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초월성 사상이 인간의 교만을 정당하게 꺾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균형 있고 성경적인 신관은 아니다.8)
나.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이 평생의 과제로 삼았던 신학적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전달되어야 하는가였다. 그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을 통해 이 과제를 수행하려고 했는데 첫째,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였고 둘째는 실존론적 분석이다. 불트만은 베를린 대학에서 궁켈에게 구약 성경을 하르낙 밑에서 교리사를 공부했고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율리허와 바이스 밑에서 신약성경을, 헤르만 밑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했다. 그의 성경 신학 교수 대부분은 종교사학파에 속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다.9)
그는 1921년 「공관복음 전승사(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을 통해 궁켈의 양식 비평적 분석과 역사 비평적 방법을 도입하여 공관 복음서 안에 모든 자료의 성립과 역사를 비판 연구하였다. 그는 전승된 예수의 말씀 대부분은 초대 교회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구성한 것이며, 공간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예배를 위해 만들어진 예배서라고 주장했다.10)
불트만의 신학 사상은 결정적인 변화 없이 일관성을 지니면서 발전한 것이 특징인데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현대인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신약성경 학자로서의 자신의 평생 과제로 삼았는데 이를 위해 초기에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양식사 비판(From Critism)과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수용했으며 후기에는 비신화화와 실존론적 해석 방법을 개발했다. 양식사 비판은 구전 전승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문학 해석의 방법이다. 성경 중에 있는 문학 양식과 고대 근동의 문헌들을 문항 및 역사적으로 비교 검토하여 그 사상의 유래가 어디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궁켈이 이 방법을 구약성경 연구에 처음 도입했다.
불트만은 그의 영향을 받아 디벨리우스, 슈미트와 함께 양식사 비판을 신약성경 연구에 도입하여 그 기초를 개척하고 발전시켰다. 그리고 그는 신약성경 연구에 종교사적 접근 방법을 사용했다. 이것은 19C 후반에 독일 고팅겐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한 종교사학파로서 성경의 외적 환경에 관심을 가졌다. 후기의 불트만은 비신화화와 실존론적인 해석을 통해 성경을 연구했다. 성경이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전제로 시작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요소는 세 가지이다. 첫째, 하늘의 존재가 세상 속에 임재하는 극적 이야기이다. 둘째, 과학 이전의 우주론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신화적이다. 그들은 세계가 삼층, 즉, 하늘(하나님과 천사들의 세계)과 땅(인간과 자연의 장소)과 음부(땅밑 고통의 장소)로 나누었다. 셋째, 하나님을 인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표현했다. 불트만은 이러한 신화적 표현을 현대인에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대인이 신약성경의 케리그마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과학적 세계관에 맡도록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약성경의 신화적인 요소가 있다는 데에 19세기 자유주의 자들과 입장을 같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그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그는 신화의 제거나 파괴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으로 신약성경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밝힐 수 없으며 현대인의 복음 이해라는 과제를 충분히 수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신약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성경에 있는 신화적인 요소의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신약성경의 신화론을 유대 묵시문학과 영지주의 구원 신화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이원론적 사고를 근본 구조로 하는데 그들은 실존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하이데거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관심은 존재의 본질 규명에 있었다. 그러나 불트만이 하이데거의 철학 전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사상에서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재해석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구조를 파악한 것이다.11)
실존론적 해석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보다 오히려 그 사건이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건의 교리적 내용보다는 오히려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트만은 성경에서의 비신화화의 요소들을 모두 제거한 이후의 남은 '케리그마'를 영감된 부분이라고 보았는데 중요한 오류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긍정적인 면은 현대인의 이해를 위해 성경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방법론과 신학은 그의 생존시부터 많은 논쟁과 논란을 일으켰다. 불트만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정리되는데 첫째, 불트만은 성경의 초자연적 사건들을 신화로 취급하고 그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시켰다. 역사에 기초한 기독교를 신화에 기초한 기독교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둘째, 신약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예수의 생애와 구전에 대한 전승과 고대 근동의 종교들로부터 유래한 자료들을 편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이 지니고 있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셋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의 영향으로 모든 기독교 신학은 인간 실존에 관계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신학은 역사성과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신학의 영역을 인간의 주관적인 영역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신적 계시의 우주적인 측면을 과소평가 하였다. 하나님의 계시는 현재와 과거 및 미래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종말의 세계의 완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 역사의 전 과정을 외면하고 단지 그 중에서 현재 속에 순간과 인간의 실존에만 관심을 집중했다.12)
다.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브루너는 츄리히 대학을 거쳐 독일의 베를린과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13년 츄리히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스위스 농촌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으나, 1924년 이후 은퇴할 때까지 40여 년 간 츄리히 대학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 교수로 활동했다.13) 그는 지식과 신앙에 관한 저술에서는 칸트의 영향을, 종교적인 경험의 강조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그리고 하나님의 초월성과 사회 및 정치적 활동에 대한 필요성 강조에서는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14)
브루너의 성경관을 주로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계시 및 종교 영역에서의 진리가 그 본질에 있어서 인격적(Personal)이라는 것이다.15) 그는 자기에게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자기에게 말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결정 짓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함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할 뿐이라는 입장을 취했다.16) 성경은 계시에다 증언이 제시된 통로로써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루너는 그의 저서 「계시와 이성(offenbarung und vernunft)」에서 말하기를, "근본주의자들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경의 문자를 신격화한다. 마치 하나님이 성경책의 페이지들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들은 성경 말씀과 하나님 말씀 사이에는 간접적인 일치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성경 말씀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이다."17)
브루너는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데 가장 적절한 통로가 되는 것은 인격적 만남을 통해 참으로 계시를 받은 자들의 증언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통로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다른 방식으로도 자신과의 만남을 매개하실 수 있고, 또 매개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정리하여 요약하고 또한 비판하면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1) 브루너의 역사관은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관에 있어서 성경사관과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의 증거로서의 그리스도의 빈 무덤도 부인한다.
2) 하나님의 자유 전달에 있어서 어떤 하나의 책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3) 구약계시와 신약계시와 심각한 차이가 있다. 구약계시는 말씀계시이고, 후자는 더 이상 그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그는 "기록된 본문과 하나님의 말씀을 동일시하는 것이 후대 신자들이 오해해서 삽입시킨 왜곡된 성경 사상이 아니라 실제 신약성경 속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라고 해 놓고도 "디모데후서가 사도 바울의 작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4) 종교 진리의 인격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란 명제와 "그는 그리스도이시다."란 명제 사이에 인식론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했다.
5) 브루너는 자기 입장이 개혁주의자들의 성경관과 일맥 상통한다고 주장한다.
6) 성경을 그는 여러 작품들 속에서 성경의 결함들을 공공연하게 지적하고 있다.18)
Ⅲ. 결 론
신정통주의 운동은 하나님의 초월성 교리를 재포착하고 성경 계시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려는 의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성경관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하여 성경 신학과 성경적 선교에 대한 관심이 재기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성경에 관한 태도 전체에 비뚤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칼 바르트의 사상에서 그의 성경관이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계시관과 성경관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도 사실이다.
양식사학파의 불트만도 역시 그의 성경관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부분을 신화 취급하고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과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주관적인 판단 하에서 그의 성경관과 신학을 펼치고 있음을 보이는 그의 성경관은 우리가 수용하기 어렵다.
정통주의 축소 성경관을 가지고 있는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가 복음주의 입장을 왜곡하였음을 볼 때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을 경고로 삼아 성경관을 밝히고, 그 성경적 근거를 밝히며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 전체와 그것의 관련성을 밝힘으로써 바르트나 브루너의 입장이 복음주의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19)
우리의 입장은 성경을 두 부분으로, 곧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는 휴식하고, 정신은 활동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성경에 있어서 인간적인 것은 휴식하고, 신적인 것은 활동한다든가, 혹은 그 반대로 말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두면은 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호 침투 결과로, 성경은 한편은 인간의 작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창작품으로 그 완전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정통주의나 양식사학파의 영향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계속해서 성경의 권위를 침해하려고 할 것이며, 이들의 성경관은 어떠한 다른 신학자들에 의하여 전수될 것이지만 그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가설이 아무리 뛰어나고, 석학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해도 성경의 권위만큼은 건드릴 수 없었음을 우리는 교리사를 통하여,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성경 정경의 과정을 보여주는 정경사를 통하여 보아 왔지만 성경이 없어지거나 축소되어지거나 빠지는 것이 없이 정경으로 받은 그 성경 그대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는 진리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Ⅳ. 참고문헌
노르만 L. 가이슬러, 성경 무오 도전과 응전, 권성수 역, 도서출판 엠마오, 1988.
루이스 뻘콩,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1974.
목창균, 현대신학논쟁, 도서출판 두란노, 1995.
밴 A. 하비, 신학 용어 해설, 박양조 역, 기독교문사, 1984.
하문호, 기초교의신학, 한국로고스연구원, 1989.
합동신학원, 신학정론 제1권1호, (1983.3)
홍창표, 신약과 문화, 합동신학교 출판부, 1995.
--------------------------------------------------------------------------------
1) 홍창표, 신약과 문화 (수원; 합동신학교 출판부, 1995) p. 130.
2) Ibid., p. 54.
3) 밴 A. 하비, 신학 용어 해설, 박양조 역 (서울; 기독교문사, 1984) p. 348.
4) 노르만 L. 가이슬러, 성경 무오 도전과 응전, 권성수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88) p. 37.
5) Ibid., p. 38.
6) 루이스 뻘콩, 기독교 신학개론,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4) p. 43-44.
7) 노르만 L. 가이슬러 외, 성경무오 도전과 응전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1) pp. 152-160.
8) Ibid., pp. 162-170.
9) 목창균, 현대신학논쟁 (서울;도서출판 두란노, 1995) p. 175.
10) Ibid., 176.
11) Ibid., pp. 180-182.
12) Ibid., pp. 187-188.
13) Ibid., p.155
14) Ibid., p.156
15) 가이슬러, Op. cit., p.171
16) 합동신학원, 신학정론 제1권1호, p.62-63 (1983.3)
17) 하문호, 기초교의신학. 한국로고스연구원, 1989. (p.158)
18) 노르만 L. 가이슬러, 『성경 무오 도전과 응전』, 권성수 역(서울: 엠마오, 1988) pp. 175-180.
19) Ibid., p. 181.
* 원문에 저자가 삭제되어 있어서 그대로 옮깁니다.<믿음의 문학>
<출처: 백합선교회>
'성경 하나님 말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경의 영감 (0) | 2013.01.30 |
---|---|
[스크랩] 구약성경의 영감성 (0) | 2013.01.30 |
[스크랩] 성경의 영감(靈感)과 무오(無誤)/김효성 목사 (0) | 2013.01.30 |
[스크랩] 신약의 영감/서춘웅 목사 (0) | 2013.01.30 |
[스크랩] 칼빈의 성경 영감에 대한 이해/양신혜교수 (0) | 2013.01.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