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국 국교회와 감리교의 연합 등과 같은 교파들간의 연합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새로운 방향으로의 시도가 요청되었다. 교파간의 단순한 획일적 연합체를 조직하는 방법 대신, 교파 상호간의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활동을 보다 많이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브리튼교회협의회는 1986년에 ‘우리는 타인이 아닌 순례자들’(Not Strangers but Pilgrims)을 ‘렌트 과정’(Lent Course)이라는 에큐메니칼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했다. 이것이 교파들 상호간에 일어나는 새로운 활동의 장을 열었고, 1987년 스완위크(Swanwick) 대회 때는 로마 교회도 여기에 참가했으며, 흄 추기경의 말을 빌면 이는 “단순한 협조에서부터 적극적인 열심으로” 점차 발전해나갔다. 서로 다른 전통들을 지역적 차원에서 통합하는 문제는 19세기에 존 헨리(John Henry)가 주창한 바 있으며, 대주교 런시가 필요성을 제기한 “교리의 재정립”과 함께 앞으로 추구해야 할 분명한 목표였다.
교리의 타협을 통한 연합이 목표로 제시되었으며, 람베드에서 보여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투표 결과는 어떠한 댓가를 치르고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연합하려는 흐름을 보여준 듯했다. 그러나 1989년 1월 바티칸은 카톨릭의 교리에 더욱 가까운 신앙 성명서로 이에 응답했으며, 교황은 자신을 방문한 켄터베리의 대주교 로버트 런시를 냉랭하게 영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향한 이 운동은 교파 자체를 포기하기까지 하려는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사이에서 열정적으로 일어났으며, 이 열정은 지난 수십년간 극적으로 증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인가?
연합을 향한 초기의 움직임들
영국 국교회 및 비국교회의 개혁 신앙은 반종교개혁 현상으로 인해 세기를 거듭하면서 퇴색해갔으며,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을 위시한 트랙테리안들이 주도한 영국 국교회 내의 옥스포드 운동이 일어난 이후 19세기에는 더욱 그랬다. 인본주의, 이성주의, 자유주의 신학으로 인해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 쇠퇴함에 따라, 영국 교계에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가는 영국 국교회 카톨릭파는 로마 카톨릭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강화시켰다. 20세기 초에 고교회파(High Anglicans)는 영향력있는 자유주의 전통주의자들과 합세했으며, 교리적 차이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니, 에큐메니즘은 발전해나가고 있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의 목표는 하나의 세계 공동체를 이룩하며 모든 교회, 교파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종교를 하나로 만들려는 데 있다. 런시 박사는 람베드 회의에서 “교회의 연합을 위한 노력과 온 인류의 연합을 위한 노력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1990년 10월 흄 추기경도 그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줄 것인지에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애에 집중해야 한다.”(‘노스트라 이테이트’ 선언 25주년 기념; 1990년 11월 4일자 Universe 紙) 이 운동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라 명명된 것은 한참 후에 로마
카톨릭이 이 운동에 합세하고 나서였다. ‘오이쿠메네’(영어 ‘에큐메니칼’에 대응하는 헬라어 단어-역자 주)라는 이 용어는 신약 성경에서 많은 경우 ‘온 세상’을 뜻하는 단어로 쓰였지만, 때로는 로마 제국과 같은 정치 체제를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로 ‘믿음과 질서’(Faith and Order) 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후에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발전했다. 제 3차 세계선교대회 때는 최초로 영국 국교회 카톨릭파 대표들이 참가했으며, 대회의 의장은 미국인 감리교 목사 존 모트(John Mott)가 맡았다. 평생 선교를 위해 노력한 그가 내건 슬로건은 “우리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에딘버러 1910 대회와 존 모트의 예언적 비전은 ‘크티스챤 유니티 위크’의 창립을 유도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세계교회협의회와 1990년에 80주년을 맞은 기독교 연합을 위한 바티칸 회의에 의해 창립되었다. 브리튼 ’91 대회의 주최자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에 따르면, 그 대회를 자극한 것은 에딘버러 1910 대회였으며, 특히 로마 카톨릭 및 그리스 정교와의 화합을 위해 미래에는 그들까지도 포함시키겠다는 열망을 표명함으로써 이를 더욱 입증하였다. ‘생명과 일 대회’(Life and Work Conference)는 1925년에 스톡홀름에서, 1937년에는 옥스포드에서 열렸는데, “교리는 분열을, 봉사는 화합을 가져온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이 슬로건은 1990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 대집회들을 통해 계속해서 울려퍼질 것이다.
’20년대와 ’30년대의 ‘생명과 일’(Life and Work)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 ‘믿음과 질서에 관한 세계대회’인데, 이 대회로 인해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설립되었으며, 여기에 그리스 정교회가 참가했으나 로마는 아직 참가하지 않았다.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WCC의 설립자 중 한 명이자 브리튼교회협의회(BCC)의 최초 회장을 역임했다. 1937년 에딘버러 회의에서, 당시 요크의 대주교였고 후에는 상당히 존경받는 직책인 켄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했던 템플은 “기독교계 내에서의 화합하지 못하고 분파를 만드는 죄”에 대해 역설했다. 그렇다면 그는 종교개혁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었던가? 전에 피카딜리의 성 야고보 성당의 교구사제였으며 교회 연합을 오랫동안 꿈꾸어 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보다 더 침착하고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신앙에 너무 열성적이어서 보완적인 진리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보완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그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후에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 전통적 교리들이었다는 사실을 검토할 것이다.
아직 로마 카톨릭은 ‘믿음과 질서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에딘버러 1910 대회를 포함하여 바티칸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말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 내에서 복음주의 계열의 세력이 여전히 강했던 데다 개신교와 카톨릭간의 교리적 차이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WCC나 BCC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분열 해소의 다리를 놓는 것이 자기들 쪽임을 분명히 알아야 했다. 로마는 과거는 물론 지금도 교리에 관한 한 입장을 너무나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나 근본 가르침에는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같은 변화는 카톨릭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된 교회임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Catholic Register 1961)
로마가 내건 슬로건은 “셈페르 이뎀”(‘변함없이 동일하다’)이며, 스스로를 “유일하게 참된 교회”라 한다. 따라서 연합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1960년대 초, 새롭고 따뜻한 협조의 바람이 로마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회와 교황 요한 23세의 발언을 통해 연합으로의 문은 활짝 열렸다. 비공식적인 대화들이 이루어졌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지오프리 피셔(Geoffrey Fisher)는 1960년에 교황을 만났으며, 그로부터 몇달 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던 여왕은 교황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런데, 로마 교황의 태도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독교계에서 일어난 또다른 커다란 요인이 있었다. 그 요인은 바로 은사주의 부흥운동이었다.
부흥운동
은사주의 부흥운동은 1950년대에 다양한 특징들을 동반하고 시작되어 기독교 세계를 빠른 속도로 휩쓸었다. 처음에 이 운동은 성령의 부으심을 통해 전 교계를 개혁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영국인 도날드 지(Donald Gee)는 은사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에큐메니스트로, 이 운동을 ‘새로운 오순절 사건’이라 칭했다. 이 새롭고도 에큐메니칼한 성격을 띤 ‘오순절’ 운동의 핵심 인물은 데이빗 듀 플레시스(David du Plessis)였다. 그는 로마 카톨릭과 은사주의자들과의 대화를 진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회에도 초청되었으며 WCC가 여섯 차례에 걸쳐 개최한 집회에도 암스테르담 집회(1948)부터 뱅쿠버 집회(1963)까지 모두 참석하였다. 다음은 타임 紙에 실린 내용이다.
“20세기 들어 우리 시대의 3大 주요 운동인 오순절 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과 은사주의 운동을 ‘미스터 펜테코스트(오순절)’인 데이빗 듀 플레시스처럼 효과적으로 연결시킨 사람은 없다.”
이 오순절 운동은 ‘순복음세계실업인협회’(Full Gospel Busi- nessmen's Fellowship International, FGBFI)라는 공식 명칭을 얻었으며, 당시 미국 전역으로 펴져나가 위세를 떨쳤다. 이 FGBFI를 설립한 사람은 알미니안주의와 오순절파의 배경을 가진 캘리포니아의 백만장자 낙농업자 데모스 샤카리언(Demos Shakarian)이었으며, 1951년에 열린 그 첫 집회 때부터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윌리엄 브래넘(Willian Branham), 오스본(T.L. Osborn) 등 미국의 신유주의 복음주의자들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이 모임은 오순절파가 아닌 사람들을 오순절 교단으로 개종시키지는 않더라도 그들을 복음화시키고 그들에게 증거하려는 성령 충만한 실업인들로 구성되었다. 오순절 특유의 축복과 현상들이 일어났으며, 이를 북미오순절협회는 이렇게 표현했다. “순복음은 각 사람의 마음과 생활의 성결, 몸의 치유, 성령 세례를 핵심으로 하며, 성령께서 발설하게 하시는 대로 말하는 방언의 증거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에 은사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다른 ‘유사교회’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FGBMFI는 “성령의 연합과 사랑” 안에서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끌어들였고, 성경보다는 체험을 강조하였다. 논쟁은 삼가했다. 교리와 관련해서 부각되는 난제들은 무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또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의 전도집회가 각 교파간의 교리적 차이들을 무시한 채 진행되었으니, 이 복음 전파자는 그의 집회에서 “기독교라는 가족 내에서 우리의 카톨릭 형제들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켄터베리의 대주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를 비롯해 기독교계 내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모든 기획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어 우리를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우리를 세워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조와 신앙고백, 교리 등으로 야기되는 모든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사도행전에서 보듯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 말씀이 과연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상고하기는’ 커녕, 새로 믿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부흥운동을 통해 감정과 경험에 더 의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1957년에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이단적이며 분파주의적이라고 비난한 대주교 램지는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편협한 마음, 믿음없음으로 성령을 제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이 대중 복음화운동과 은사주의 부흥운동이라는 야생마를 붙잡아 마구를 달았다.
제 2차 바티칸 공회
제 2차 바티칸 공회 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같은 압도적인 추세와 서로간에 오랜 동안 존재해온 이질성을 개의치 않겠다는 약속에 반응하여 이 새로운 성령 운동을 축복했다. 추기경 어거스틴 베아(Augustine Bea)는 피오 12세의 고해 신부이자 예수회 회원으로서 고령의 교황 요한 23세의 배후에서 활약했던 중요 인물인데, 그는 앞으로 에큐메니칼 운동 및 서로간의 신앙 차이를 무시한 혼합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할 인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 운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의 내적 생명을 소생시키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카톨릭 교회는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우리 형제들 앞에, 복음에 따른 보다 더 분명한 기독교상(像)으로서 드러
날 수 있을 것이다.”
성모 교회의 어휘에서 “이단”(또는 그밖의 많은 용어들)이라는 단어가 “분리되어 있는 형제들”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된 것은 분명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1965년 제 2차 바티칸 공회는 “분리되어 있는 형제들은 양우리 안으로 기꺼이 맞아들일” 것을 결정했으며, 베아 추기경은 제 2차 바티칸 공회 제 3차회의 때 데이빗 듀 플레시스를 초청함으로써 그같은 결정을 가시적으로 실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교회 내의 부흥운동을 공식적으로 수용했으며, 이것은 교단 차원에서는 유일한 일이었다. 벨기에의 대주교이자 말라인즈의 대주교인 레온 죠셉 수에넨스(Leon Joseph Suenens) 추기경은 로마 교황청의 떠오르는 별로서 곧 바티칸의 요직에 앉게 되었는데, 그 후에 이 새로운 운동은 기독교 연합 추진을 위한 비서국장 베아 추기경 및 교황 바오로 6세와 그의 계승자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FGBMFI의 Voice 紙 편집장 프레드 래디니우스(Fred Ladenius)는 그의 저서 『위대한 요한』(Amazing John)에서 교황 요한 23세가 죽기 직전에 로마 교회에 ‘또 하나의 오순절 사건’이 일어나도록 기도했다고 쓰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기도가 그의 임종 5년 후인 1975년에 피츠버그의 듀퀴슨(Duquesne) 대학에서 시작된 카톨릭 은사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Amazing John XXIII: Gift Publication, Costa Mesa, CA, 1980). CCR의 감독인 수에넨스 추기경이 저술한 영향력있는 에큐메니칼 저서의 제목은 『새로운 오순절 사건』(A New Pentecost)이다.
미국에서는 카톨릭 은사주의자들이 1970년에 교단 차원으로는 최초로 은사주의 대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에 그들은 전국봉사위원회(National Service Committee)를 열었다. 1972년에는 미시건의 앤 아버에 국제상호교류기구(International Communication Office, ICO)가 설치되었는데 추기경 수에넨스와의 보다 긴밀한 접촉을 위해 1976년 브뤼셀로 이동했다가 1981년에는 다시 로마로 옮겼으며, 이때 기구의 명칭을 ‘국제 카톨릭 은사주의 부흥운동 기구’(ICCRO)로 바꾸고 회장에는 톰 포레스트(Tom Forrest) 신부가 임명되었다. ICCRO는 ‘카톨릭 은사주의 부흥운동 국제회의’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운영되었으며 후자의 의장 역시 탐 포레스트였다. BB
에큐메니즘의 형성 배경(2) | |
진리의 영 『진리의 영이신 그 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에로 인도하시리라』(요6:13). 영국 국교회(‘성공회’로 알려져 있음) 부흥운동을 주도하는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는 1980년 출간된 그의 책자 「은사주의의 위기」(Charismatic Crisis)에서 이렇게 말했다. “은사주의 부흥운동은 진리에 관한 한 특별히 뛰어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의 진리를 언급하고 있다. 이 운동은, 적어도 이제까지는, ‘간증’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관해서는 아주 약한 입장을 취해왔으며 심지어는 진리를 무시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진리를 강조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연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될까 하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과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어 하나에 대한 의견대립과 서로 다른 교리로 인한 분파 싸움에 휘말렸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적개심을 해소하고,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누는 원인이 되었던 커다란 이슈들을 접어두며, 개인적인 성령의 체험이라고 하는 새로운 화합점을 찾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화합은 ‘증거 신학’(testimony theology)을 그 기반으로 삼는 것이 가능한 동안만 지속될 것이며,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운동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은 성령 충만한 카톨릭 신자들이 이제 성경을 알게 되어 카톨릭 교회 내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다. 성경의 진리들을 깨닫고, 미신과 우상이 사라지며, 전통은 무시되고, 로마 카톨릭 체제 자체 내부로부터 극적인 개혁이 일어날 줄로만 알았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 부흥운동으로 새롭게 된 카톨릭 신자들이 그들 교회의 교리를 거부한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데도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많은 에큐메니칼 카톨릭 신자들이 그들이 고수하는 교리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그들과 함께 교리에 대해 토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톨릭 교회에 개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견해는 최근 한 기독교 잡지에 보낸 젊은 카톨릭 신자의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 내의 전적으로 비기독교적인 제도에는 반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 교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거대한 개혁의 물결이 내부에서부터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케빈 래너건(Kevin Ranaghan) 박사는 1977년 켄사스 시티에서 열렸던, 주목할 만한 최초의 에큐메니칼 대회 및 뉴 올리언즈 1987 부흥집회의 의장을 맡았는데, 후자에서는 모든 강사들(케네스 코프랜드, 제임스 로빈슨, 존 윔버 등)이 대회에서 결정된 사항들에 서명했다. 그는 대회에서 “카톨릭 교회는 카톨릭 교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성령의 부으심이 카톨릭 교회 내에서 카톨릭 신자들에게 최근 일어났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부흥운동 지도자인 로마 카톨릭 신자 버트 게지(Bert Ghezzi)는 미국의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은사주의 잡지 『카리스마』 紙의 편집인인데, 그는 감격에 차서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체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카톨릭의 전통적인 헌신, 예를 들면 마리아를 위한 헌신 등과 같은 것들이 이제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 성도들의 성별된 삶, 특히 우리 부부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하는 고행은 더욱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케빈 래너건, 『카톨릭 은사주의』 1969) 카톨릭 교회의 복음주의와 부흥운동을 위해 조직된 단체인 ‘Fire’는 “신실한 카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와 마리아, 교황, 주교 등을 위해 더욱 헌신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과 도덕에 관한 문제를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 및 세계 복음화운동을 위한 1987년 뉴 올리언즈 대회 때 ‘Fire’(믿음 Faith, 중보 Intercession, 회개 Repentance, 복음화운동 Evangelism의 약자)라는 제목으로 배포되었던 팜플렛의 메시지였다. 톰 포레스트(Tom Forrest)는 로마 카톨릭의 ‘복음주의 10년’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인물로서 카톨릭 은사주의 부흥운동을 위한 전체 조직의 핵심 인물인데, 그는 명백하게 로마 교회에 속하는 교리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로마 카톨릭 신자들을 위한 훈련 과정인 “인디아나폴리스 ’90”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신앙의 부흥에 대해 열정과 확신에 차 이야기한 바 있다. 1990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복음화운동에 있어서의 나의 임무, 나의 역할, 아니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데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임무는 사람들을 카톨릭 교회 안으로 데려옴으로써 그들을 풍성하고 또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결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카톨릭 신자가 되라고 말해야 한다. 사람들을 여러분의 교구 교회로 데려와 새로운 회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여러분에게 그 이유를 몇 가지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우선, 성사(聖事)에는 모두 일곱 개가 있는데 카톨릭 교회는 이 일곱 모두를 지킨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가지 성사를 제정하셨다면, 그것 모두를 지켜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카톨릭 신자인 우리에게는 입교의 성사인 세례뿐 아니라 견진성사가 있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함에 이르게 해 주며, 맥키니(McKinney) 주교가 미사 때 말한 것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임명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준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으로서만 행하지 않는다. 제단 위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피를 마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제단 위에 제물로서, 또한 사랑의 향연으로서 살아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서 나온 하나의 혼인 행위이다. 우리는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푸에르토리코의 한 교구 교회에서 병자에게 기름바르는 성사를 수많은 교구 신자들에게 행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교회는 사람들로 가득찼었다. 그 성사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병이 치유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다시 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그후 수개월 동안 사람들이 고해실과 사무실로 찾아와 자기들이 그 성사를 통해 온전하게 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들은 병만 나은 게 아니었다. 그 성사로 인해 낙원의 문이 그들에게 열렸으며, 죄로 인해 겪는 내적 형벌까지도 치유되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복된 성사인가! 이 얼마나 복된 교회인가!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역사하시는가! “여기에 우리는 2000년의 전통을 통해 지켜져왔고 완전케 된 믿음의 유산을 덧붙일 수 있다. 우리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마리아가 있다.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 낙원의 여왕은 영광중에 우리와 만날 때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고 계시다. “우리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베드로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는 교황들의 역사가 있다. 우리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가 되는 반석이 있다.... 우리의 역사는 2000년에서 10년 모자란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남은 10년을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카톨릭 교회 안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카톨릭 교회 역사의 세번째 천년기간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부흥운동의 초기에는 사람들을 로마 카톨릭 안으로 끌어들일 것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위와 같은 내용은 CCR 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선언되지 않았었다. 은사주의 집회의 부흥사들은 믿음과 실행에 관한 그 어떤 불일치도 일단은 뒷전으로 미루었다. ’60년대 및 ’70년대의 영향력 있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이 부흥운동이 개혁과 화합을 위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복음주의 진영의 분열 1977년 노팅햄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 성공회 공회’(NEAC)에서 데이빗 왓슨(David Watson)은 종교개혁을 “교회 역사상 일어났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라고 말했으며, 또 더블린에서 열린 ‘카톨릭/프로테스탄트 은사주의 집회’에서 “자신의 몸이 분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슬픔을 느끼셨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Evangelicals Tomorrow: John Capon, Collins, Glasgow). 마이클 하퍼(Michael Harper)는 에큐메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신앙 노정을 “현대 교회에 일어난 세 가지 중요한 영적 흐름”과 연관지어 표현했다. 그의 저서 「바로 오늘」(This is the day)에서 작중 인물 캐논 하퍼(Canon Harper)는 세 명의 자매에 대해 말하는데, 그들의 이름은 이반젤라인(Evangeline), 카리스마(Charisma), 로마(Roma)로서 각각 복음주의 및 은사주의 운동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들이 “한때는 그에게 저주받을 이단이었으나, 이제 그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심오하고도 사랑에서 우러나온 헌신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성 프란시스 성공회 협회의 라몬(Ramon) 형제는 그의 책자에서 영적 대립의 해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마이클이 한때 가졌던 편견이 사라지자... 그는 이전에 거부했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들을 통해 성령을 배우게 되었다. 카톨릭 신앙생활의 영적 보물창고가 그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 성경적 교리는 뒷전으로 하고 그는 말한다. ‘성모 마리아가 생생하게 다가왔으며 이제 나는 복음주의를 통해 성 바울을 안 것과 똑같이 그녀를 알고 있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의 창조, 창조의 역사가 제공한 은사, 자연과 자연의 예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생명을 갖게 되었으며, 하나된 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 안에 존재했던 모든 풍요함과 함께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성사는 더이상 생명없는 기계적인 의식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곳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표적이 되었다. 로마를 만나면서부터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는 타는듯한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었다.”(Brother Ramon SSF: Deeper Into God, PP. 81,83, Marshall Pickering, 1987) WCC의 고문이자 유명한 복음주의자인 존 스코트(John Scott)는 노팅햄 NEAC 집회에서 “우리의 목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시적인 연합이 되어야 한다... 또 복음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완전한 교제를 이루기 위해 영국 교회 내의 각 집단과 연합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같은 해인 1977년에 존 스코트는 베니스로 가서 ‘선교에 관한 복음주의-로마 카톨릭 대회’에 참석했다. 존경받는 복음주의 학자 패커(J.I.Packer)는 에큐메니칼 부흥운동을 지지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가? 프로테스탄트로서 본인은 로마 카톨릭의 공식적인 주요 요소들이 왜곡된 기독교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어찌됐든 부흥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부흥운동이 지속되고 또 집중적으로 일어날 때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계의 나머지 부분들 및 우리 시대의 무지한 비기독교 세계를 위해 가장 많이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New Covenant magazine, February 1988) 그러나 미국의 복음주의자 데이빗 클라우드(David W.Cloud)는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다. “로마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목표, 즉 카톨릭 교회를 굳건하게 다지고 카톨릭 지배를 재건하는 데 겉다르고 속다른 은사주의 운동보다 더 효과적인 도구가 없는 것이다. 이 운동은 카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의 사악한 비진리에 대해, 또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 배도한 집단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함에 대해 경고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게임은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다.” 영국 성공회의 ‘교회 협의회’와 ‘개신교 연합’ 등은 이같은 상황을 우려하는 프로테스탄트 단체들로서, 은사주의 부흥운동과 ‘신복음주의’를 용납하는 것은 너무나 큰 댓가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교회 협의회를 이끌고 있는 데이빗 사무엘(David Samuel) 박사는 1990년 그의 글에서 “우리는 교황의 권세에 촛점을 맞추는 고대 종교체제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교황의 권세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고 바티칸의 운명이 쇠퇴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던 1870년에는 짐작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이 종교체제의 놀랄만한 부활을 보았으며, 이것은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한 교회 제국(ecclesiastical empire)의 건설로 이어질 것이다.”(The End of the Ecumenical Movement: The Harrison Trust, 1990)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이 이제 압도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다고 보고 있다.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차이점들은 무시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실제적으로 뒤바뀌어졌다. 개신교 연합의 서기 죠지 애쉬다운(George Ashdown)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다.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사람들(Reformers)은 카톨릭 체제를 반기독교적이라고 보았다. 루터와 칼빈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하기까지 했고, 위클리프, 틴데일, 매튜 헨리, 스펄젼, 로이드존스,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체제를 계시록 17장에 생생하게 묘사된 신비의 바빌론,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로 보았다.”1) BB 1) 중요한 사실은 헬라어 성경의 ‘적’(anti)이라는 단어가 종종 ‘대체하는’(substitute) 또는 ‘대신하는’(taking the place of)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반드시 ‘반대하는’(against)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교황을 가리키는 말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말 자체가 바로 ‘적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하는 자’와 동일한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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