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베드로 후서
400m 이어 달리기 경기에 주자로 참가해 본 적이 있는가? 정식 경기는 아닐지라도 운동회나 소풍에서 이어달리기 게임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게임을 보며 즐긴 경험은 있을 것이다. 자신이 달려야 할 몫을 다하고 다음 주자에게 바톤를 넘겨주고자 하는 주자의 마지막 달음질은 혼신을 다해 달려 왔기에 지쳐 있지만, 다음 주자가 가속도를 내고, 바톤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도록 마지막 힘을 낸다. 탁월한 주자가 있어 달리는 중 순위가 바뀌는 경우도 있지만 바톤 터치에서 극적인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바톤 터치는 아주 중요하다.
사도의 시대가 끝나고 교회시대가 도래하면서 황제이신 예수님의 명령이 들어 있는 바톤을 후세에게 넘겨 주어야 하는 죽음을 앞둔 노 사도 베드로는 위기의식 속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유언의 편지를 남겼다. 그들이 함께 믿었던 가치를 요약하여 반복하며 기억을 되살리고, 사람들이 결코 버려서는 안될 소중한 것을 계속적으로 언급한다.
1) 배경 정보
베드로 후서는 이름 그대로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쓴 편지이다. 이는 1:1에 베드로 자신이 쓰는 편지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가 저자임을 보충해 주는 증거들은 많다. 그는 이 편지 가 두 번째 편지임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첫 편지는 베드로 전서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가 지시한 것 같은 죽음의 임박을 말하고 있는데(벧후1:14)는 이는 요한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 고백을 받은 후 그의 죽음에 대해 하신 말씀과 일맥 상통한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당시에 읽혀지고 있었던 바울의 편지에 대한 권위를 검증하는 위치에 있었다. 바울의 편지를 평가할 정도의 위치라면 저자가 베드로임이 합당하다.
벧후3: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원독자
이 글을 읽는 독자에 대해 사도 베드로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1:1)이라고 언급한다. 또한 이 편지가 둘째 편지이므로 첫 째 편지를 받았던 자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베드로 전서와 똑 같은 독자들이다.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또한 그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도 읽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울의 서신을 읽었다면 소아시아 외에도 마게도니아, 아가야 지역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도 높다. 베드로 전서를 본도, 갈라다이.. 등에 보내면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로마에서 가까운 아가야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에도 보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린도 전서에서 베드로가 아내와 함께 다니며 사역했음을 언급함을 볼 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전 9:5). 또한 이집트 지역에서 1세기에 베드로 후서를 사용한 증거들이 나타나는 점은 이집트 지역의 성도들도 독자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준다,
그들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로서 많은 강점을 가지고 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며 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자들이다(벧후1:5). 그들은 이미 진리에 선 자들로 이단의 정체를 인식하고 있다(벧후1:12). 무엇보다 베드로, 바울 등 사도들의 지도를 받고 있다.
반면 당시의 세상은 피해야 할 것이 많았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공교히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며(벧후1:16). 재림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있었다(벧후3:4).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이단을 끌어들이는 자들도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으며(벧후2:1-2) 배교한 자들도 있었다(벧후2:21).
기록 시기
바울의 서신들이 쓰여졌고 읽혀졌다면 적어도 50년 이후, 60년대일 것이다. 첫 편지인 베드로 전서가 64년 네로의 박해 이전에 기록 되었다고 판단되므로 둘 째 편지인 베드로 후서는 적어도 64년 이후에 쓰여졌다. 유세비우스의 글에 의하면 베드로는 네로 박해 기간 중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 그렇다면 이 글은 68년 이전에 쓰여졌으며, 벧후1:14-15에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 유언하고 있음을 볼 때 67-68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베드로는 말년에 로마에서 활동하였으며, 첫째 편지인 베드로 전서 말미에 그는 로마(바벨론)에서 편지를 쓰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음이 이를 증거한다. 그렇다면 베드로 후서는 67-68년 죽음 직전에 로마에서 믿음의 후진들에게 유언의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원독자 관점으로 읽기 위해
네로에 의한 기독교 박해와 이단의 속임에 일부 지도자들의 타락은 있었지만, 그들은 믿음을 지켜갔다. 그러나 불안한 것은 과연 재림은 있는 것인가? 사도들이 다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등에 대한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가 읽혀지는 등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정확히 전달 될 수 있도록 복음에 대한 체계 글로 남겨지는 것이었다. 베드로 사도 역시 그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후진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주님을 안다는 것이며, 받은 진리를 기억하는 것이며, 속이는 자들에게 속지 않는 것임을 글로 남기고 있다.
원독자들은 위협과 기회 앞에서 과연 베드로가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은혜란 무엇인가? 알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과연 알아야 할 지식은 무엇인가? 앎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함께 받은 자로서 끝까지 지키고 또 전해야 할 ‘진리’가 무엇이며, 이를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만 했다.
2) 책의 분위기 및 특징
시작하는 인사말부터 은혜와 평강의 근거를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라고 언급하며 시작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도 '앎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권면한다. 마지막 인사말에도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축원하고 있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단에게 속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갈 수 있다.
사도 베드로는 후진들이 실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기를 소망하며, 전통적으로 왕의 명령을 전하는 글의 형식에 그의 유언과 경험적 고백을 더하고 있다.
왕의 명을 받는 공동체는 얼마나 큰 특권을 받은 선택된 자들인가를 강조한다. 그리고 선택해주신 왕의 은덕을 찬양한다. 그러므로 선택되어 명령을 받은 자들은 왕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해야 함을 잊지 말라고 유언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나게'가 반복된다.
너희가 이미 알고 진리에 서 있지만 항상 생각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벧후 1:12). 이는 그가 장막에 있을 동안 즉 살아 있을 동안 계속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다고 확신하고 있다(벧후 1:13). 뿐만 아니라 그가 떠난 후 즉 죽은 후에라도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벧후 1:15).
3) 문맥과 구조
베드로 후서는 전통적인 고대 로마의 서신서 구조에서 감사 기도와 끝 인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편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발신인 |
수신인 |
인사/축복 |
. 감사/기도 |
. 본문 |
끝 인사 |
축도 |
1:1 |
1:1 |
1;2 |
|
1:3-3:18a |
|
3:18b |
인사말에 포함된 단어를 보면 괄호(inclusion)구조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편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편지이다. 이 은혜의 나라에 속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시작하여 그를 아는 지식이 자라감으로 계속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표현된 지식(에피그노시스: Epgnosis)은 일반적인 지식인 그노시스(Gnosis)보다 더 광범위하고 철저한 지식, 인격적 지식을 말한다.
A |
|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 |
B |
본문 |
|
A |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는 지식 |
전체적인 글의 구조는 당시 황제의 명령 전달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유언의 형식으로 간절함을 더하고 있다.
1:1-11 |
1:12-21 |
2:1-22 |
3:1-10 |
3:11-18 |
그리스도의 나라 |
전달자의 간절함 |
백성들의 문제 |
문제를 극복하는 삶 권면 | |
앎으로, 더욱 힘써 |
유언/경험/성경 |
거짓선생, 변절자 |
알아야 할 것 |
살아야 할 것 |
황제의 명령 전달 |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도바울의 유언 |
1:1-11 그리스도의 나라
노 사도 베드로는 자신이 황제이신 예수님의 사도이며, 황제가 붙여주신 베드로란 이름을 언급하며 명령 전달자로서의 권위를 말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종과 시골 어부 시절 불려졌던 자신의 이름 ‘시몬’을 추가하며 겸손을 보여 준다. 어쩌면 시몬에서 베드로로 변화된 자신을 소개하며,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황제의 명을 받는 공동체가 어떤 존재인가? (1:1-2)
공동체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이다. 그 보배는 사도와 우리(지도자 그룹), 그리고 수신자가 동일한 가치이며, 같이 받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동일하게, 같이, 그리고 우리를 강조함으로써 특별한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거짓 선생들과 차별을 둔다,
이는 그리스도를 앎으로 받은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예수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삶으로 인해 은혜와 평강을 풍성히 누리는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 삶이 원독자들에게 필요하였고, 오늘 나에게 필요하다.
은혜를 베푸는 황제의 덕을 기림(1:3-4)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우리가 알고자 노력해서 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덕 때문에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것이다. 이는 보배롭고 큰 약속인데, 그 약속의 본질은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도록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이단들은 새로운 것, 새로운 지식이 있으며, 예수님만으로 부족하여 추가하여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말들을 했을 것이다.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고 무언가를 더 알아야 한다는 부담은 그들을 유대주의나 신비주의로 이끌었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아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황제의 은혜를 인정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1:5-11)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경건과 생명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성품, 예수님의 성품에 참예하라는 것이다. 믿음 à 덕 à 지식 à 절제 à 인내 à 경건 à 형제 우애 à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믿음 다음에 나오는 '덕'은 도적적 탁월성을 말한다. 당시 기독교조차도 부패의 징조가 있었으며, 특히 영지주의는 도덕적 부패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라고 말씀하신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그리고 사랑은 거짓 선지자들이 무시해버린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1:7의 '더하라/공급하라'와 1:11의 '주시리라'는 합창단을 의미하는 코러스로부터 온 말로 어근이 같다. 코러스 합창단을 운영하려면 막대한 예산이 들어 갔다. 특히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많이 먹어야 했고, 이들의 음악성 계발을 위해 넉넉히 공급해야 했다. 사랑을 주는 것은 합창단을 먹이는 것처럼 넉넉히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합창단을 배불리 먹이듯이 우리에게 넉넉히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흡족하다.. 이는 합창 연습을 열심히 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를 맺으라는 권면이다.
1:1부터 긴 설명을 해 온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란 요약적 진술을 통해 결론을 맺고자 한다.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성경에서 몇 개의 고별 설교를 볼 수 있다. 신31:2 모세의 유언 수23:2,14 여호수아의 유언 행20:25, 딤후4:6 바울의 유언 요16:16 17:1 예수님의 유언
이 고별 설교들의 형식은 1. 설교자는 죽음을 알려줌 2.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문제가 있음 3. 하나님의 상벌을 생각하고 신실하게 살 것을 권고하는 형식이다.
베드로 후선의 1:12이후는 이 고별 설교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
1:12-21 전달자의 간절함- 설교자는 죽음을 알려줌
천국은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이자 영원한 나라이다. 이는 하나님이 주실, 우리가 받아야 할 미래형이다. 이 나라를 받으려면 부르심과 택하심에 굳게 하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결심을 굳게 하고 싶어서 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천국 소망은 헛것이 아님을 3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한 번은 유언으로, 또 한 번은 재림의 증거를 변화산에서 직접 본 증인으로, 그리고 성경 예언으로 3중 강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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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생각나게 하려 (1:12-15)
베드로는 공동체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알고 진리에 서 있음을 확신하지만 언제든 생각나게 하고 싶다. 기억하게 하고 싶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을 알린다.
요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도 디베랴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는데, 누군가가 잡은 고기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하니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무엇인가에 이끌려 그물을 던졌는데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힌다, 어리둥절 하고 있을 때 요한이 말씀하신 분이 주님이라 외친다.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후 바다로 뛰어내려 가서 주님을 만난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전 날 밤과 같이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주신다. 조반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 조반을 먹은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잡히시던 날에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그의 부활을 알고도 낙향하여 고기를 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건대 드릴 말씀이 없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를 표명했던 과거의 모든 일들을 되돌아 보면 자신의 의지대로 된 적이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사랑하지만..' 뒤 끝을 흐린다. 어쩌면 침울하면서도 엄숙한 대화, 그러나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며 위로하신다. 이 대화가 3번 이어진 후 베드로는 완전히 회복되었나 보다, 베드로 본래의 밝고 저돌적인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을 보고 주님은 다시 한 번 주의를 주신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본연의 기질대로 흥분해 있다. '저는 그렇다 치고요 저 친구는요?' 하면서 요한을 가리켰다가 또 한번 혼난다. '그가 어떻게 죽든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네가 나를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베드로는 이 때를 기억하며,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내가 지금 살아 있을 동안에도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고 싶지만, 내가 죽은 후에도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고 싶다고 강조하신다.
경험-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1:16-18)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 가신 후 곧 오실 것으로 예상했었는데, 30년 이상 흘렀지만 소식이 없자, 세상에는 주의 강림이 없다는 거짓말까지 돌았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자신의 변화산 경험을 이야기 한다.
내가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9:20)'라고 고백한 후 주님이 말씀하셨지.
눅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 말씀을 하신 후 8일쯤 되어 주님은 나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어. 주님이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는 거야. 문득 두 사람이 예수님과 말하는데, 한 분은 모세였고, 한 분은 엘리야였어. 두 분다 종말과 관계 깊은 분이지. 세 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별세에 관한 이야기였어.
모세가 말했지.. '예수님!! 하나님이신 당신이 인간을 위해 죽는 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미 주신 율법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가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엘리야가 모세를 거들었어. ' 맞습니다. 예수님. 선지자들도 있습니다. 주님이 이미 주신 말씀과 권능으로 그들이 바른 길로 돌아 오도록 경고하겠습니다. 제발 하나님이신 당신이 죽는 다는 말씀은 취소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 '아닙니다.. 더 이상은 안되겠어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어려워요. 이제 내가 죽을 수 밖에 없어요. 내가 죽어서 그들이 산다면.. 그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죠'
성부 하나님도 구름 속에서 말씀하셨어. '나의 택한 아들. 예수님이 말씀에 나도 동감이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씀은 위엄 그 자체였어. 내가 거기서 횡성수설 했다는 이야기 거짓말이 아냐.
벧후1: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이는 우리 세 사람에게 맛만 보여 주신 것이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야.
성경-더 확실한 예언(1:19-21)
우리의 경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성경의 말씀이지. 성경의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나니라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아.
모든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강림에 대해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어..
2:1-22 백성들의 문제 -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문제가 있음
베드로 후서의 원독자들에게 다가오는 핍박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거짓 선생과 변절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거짓 선생과 심판(2;1-19)
사도 베드로는 천국 소망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거짓 선생이 출현하여 주를 부인하고 진리의 도를 훼방하는 거짓 선생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원독자들의 현재에도 있을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주님을 3번 부인했던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는 베드로가 이런 용어로 비판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지만,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자신의 과거가 들추어지더라도 거짓 교사의 본질을 알리려는 베드로의 마음이 들어 있다.
거짓 선생은 호색하는 자이다. 그의 호색을 좇아 하는 자들이 있다. 이로 인해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는다. 그들은 진리의 도를 비방할 뿐만 아니라 지은 말을 한다. 비방의 말, 유혹의 말을 한다. 그 목적은 호색이며, 탐심을 채우는 것이며, 이를 삼는 것이다. 베드로 후서에는 멸망이란 단어가 많이 반복된다. 거짓 선생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멸망이라는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않으셨고,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않으셨다.
구원 |
심판 |
노아의 일곱 식구 보존 |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 |
의로운 롯 건지심 |
소돔과 고모라 성 멸망, 재되게 |
롯을 의롭다고 표한 것은 때론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베드로 후서에서 베드로는 의로움, 의인, 의로운 심령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신뢰해야 하고 이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해야 한다.
롯은 무법한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받고 있었다. 우리는 천사를 모신 롯이 상관하겠다고 모여드는 군중들에게 차라리 나를 죽여라는 말을 대신하여 딸을 대신 내어 주겠다고 한다. 그로 인해 딸과 정혼한 사위될 자들에게 더 이상 롯은 보호자가 아니었다. 사위들은 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농담으로 들을 정도로 신뢰가 깨져 버렸다.
롯은 그 불법한 행실을 가운데서 의로운 심령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성에서 가족들을 이끌어 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롯은 이미 삶의 의욕을 상실해 버렸나 보다. 무슨 미련으로 지체하는 모습이 아닌 것 같다. 보다 못한 천사가 손을 잡아 성 밖으로 인도해 낸다. 이렇게 하나님은 의로운 롯에게 자비를 베푸신다(창19:1-16)
이는 원독자의 시대에도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벧후2: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거짓 선생들은 천사보다 능력이 적지만 혀 놀림은 더 자유롭다는. 특히 진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편의대로 논리를 만들어 담대하게 전파힌디. 거짓 선생들이 비방하는 '영광 있는 자들'과 천사들도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않는 자'가 누군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을 해 왔지만, 현재는 많이 받아들여 지고 있는 해석은 교회 지도자라는 것이다. 거짓 선생들은 영광 있는 교회 지도자를 비방하지만,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도 교회 지도자를 비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지도자에게 천사보다 더 큰 힘과 능력과 영광을 주셨기 때문이다.
벧후2: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이 이야기는 외경인… 그러나 1세기에는 다른 성경과 동등하게 읽혔던 에녹서 9장에 나온다. 미가엘과 마귀의 싸움에서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요구했다. 미가엘은 그 것을 묻어버리려 했으나, 마귀는 모세가 애굽인을 살해했다는 근거로 그 것을 요구했다. 천사장은 사단을 쏘는 고소를 하는 대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서 ‘주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하노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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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생들이 담대하다고 표현한 것은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과 같다. 이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바르지 못한 종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낮에 잔치 벌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점과 흠이다. 예수님과 정 반대이다.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들은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하기를 쉴 수가 없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은 여기에 유혹된다. 사람에게는 탐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거짓 선생의 본질은 물 없는 샘으로 샘의 모양은 있으나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샘이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같이 방향성도 없고, 스스로 움직일 힘도 없고, 내용은 물이지만 물로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며, 멸망의 종인 것이다. 그들은 허탄한 자랑의 말로 미혹하고 음란으로 유혹하며 자유를 준다고 함 속여 종으로 만든다. 그들에게는 깜깜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다.
2:18을 보면 거짓 선생은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
음란- 육체 – 정욕 – 유혹은 서로 깊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단어이다.
유혹은 헬라어로 텔레아조인데 '낚시로 미끼를 잡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미끼에 눈이 어두워지기 때문인데 미끼는 '육체의 정욕'이다.
당시의 영지주의적 이단들은 '지식을 통해 영혼 구원 받고 나면 육체로 무엇을 하든 상관 없다. 영적으로 깊은 자들은 종교를 성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음란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육체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다시 부활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값으로 사신 것이다. 그리스도도 자신의 육체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육체가 누구에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죄의 덩어리가 될 수도 있고, 거룩함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성도들은 육체를 잘 관리하고, 사용해야 한다.
변절자 –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2:20-22)
베드로는 어쩌면 사도 요한이 부러웠을 것 같다. 요한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흑백이 뚜렷하고, 예수님을 알아보는 영 분별력이 뛰어났던 반면 베드로 자신은 수시로 실족했었다.
의의 도를 안 후에도 거룩한 명령을 저버렸던 자신이다.
그는 잠언 26:11을 인용하며 자신이 과거에 개처럼 미련한 자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듯하다.
벧후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
잠26:11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
또 아이칼의 설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내 아들아 너는 마치 내게 돼지와 같았다
돼지는 목욕탕에 들어 갔다가 나와서 진흙 구덩이를 보더니 다시 내려가서 씻더구나
그리고 친구들에게 ‘이리 와서 목욕해” 하고 외치는 것이었단다
노 사도는 배교하지 말 것에 대해 권면의 반복, 인용의 반복으로 강조하고 있다
나는 문제 없다고 생각했던 원독자가 있었다면… 베드로의 과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같이 위대한 사도도 실족을 거듭했는데, 나는 기도하고 신중하지 않으면 안됨을 느껴야 한다. 주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사건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3:1-18 문제를 극복하는 삶 권면
사도 베드로는 이전에 보냈던 편지와 이 편지를 쓴 목적을 말하고 있다. 성도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그 동안 베드로가 가르쳤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나게 하며, 성경에 예언한 말씀과 사도들의 명령을 기억하게 하고자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알아야 할 것 - 황제의 명령이 참임을 강조하고, 이를 부정하는 자들을 반박(3:3-10)
구약의 예언과 예수님의 명령 중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조롱하는 자들이 말세에 나타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의 재림 예언을 조롱한다는 것이다.
이 편지가 쓰여진 60년대 당시 스데반, 야고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등의 죽음을 조롱하는 자들이 많았다. '자기의 제자와 동생의 죽음도 지켜주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구세주냐, 언제 어떻게 다시 온단 말이냐?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며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조롱해 왔다.
베드로는 이 것은 창조에 대한 부정이라 설명한다. 사단의 고단수 전략인 것이다.
벧후3: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조롱하는 자들은 창조와 재림을 일부러 무시하려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개역 성경에는 원문에 있는 '일부러'가 빠져 있으나 개역개정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창조를 부인하는 것은 세계관의 변화나 다른 세계관에 대한 확신으로 음행을 탐닉하고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음행의 탐닉을 타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 고집하는 것이다. 조롱하는 자들은 욕망에 굴복한 자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거창한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조롱하는 자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조목조목 반박하며 설명하고 있다
인본주의 |
3:5 창조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 함 -사탄의 전략 |
역사적 사실 |
3:6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 |
예언에 근거 |
3:7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 |
하나님의 성품 |
3:9 주의 약속은 더딘 것이 아니라 -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심 |
예수님의 약속 |
3:10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
살아야 할 것(3:11-18)
재림의 날에는 불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인데, 중요한 것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인다는 것이다. 동일한 말씀이 구약에도, 신약의 마지막 계시록에도 나와 있다. 기대되지 않는가?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기를 사모하는 우리는 마땅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다. 사실 이런 것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나고 기억나게 노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점과 흠이 없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점과 흠 그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점과 흠이 없는 삶이다.
벧후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상과 같은 내용은 바울 사도도 여러 편지를 통해 전달한바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진리에 대해,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에 대해, 재림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라고 권면하며 결론 짓는다.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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