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4 - 섬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20장 20절에서 28절 말씀입니다.
(마 20:20-28)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네 번째로 제목은 “섬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기막힌 헛발질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여러 차례 보아왔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내세워서 헛발질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고로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요청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요. 세 모자가 의견일치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요즘으로 말하자면 학부모가 선생님을 찾아가서 “우리 아들을 반장시켜 주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찾아가 치맛바람을 일으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실망스러우셨을까요? 우린 그렇게 보지 않지요.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시지요. 심지어 나중에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갈 때에도 예수님은 실망하시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으십니다. 당연하지요. 우리도 그러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했지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눈이 열려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24절에서 나머지 열 제자가 그 이야기를 듣고 분히 여기는 모습입니다. 열두 제자 사이에서 탐욕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욕먹을 짓을 하는 사람이나 그걸 보고 욕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것이지요. 그에 반해 예수님은 아주 쿨 하십니다. 제자들이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들이 속해 있는 시스템의 작동을 다 아시니 당연히 쿨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시스템을 비교하면서 설명을 시작하십니다. 25절에서 세상 시스템을 먼저 말씀하시지요.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의 시스템은 큰 자가 통치하는 시스템이라는 말씀입니다. 권세와 관련해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은 겸손과 베풂인데 그 겸손과 베풂도 사실은 통치의 한 수단입니다. 존경까지 얻는 것이 가장 손쉬운 통치 방법입니다. 누가복음 22장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눅 22: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그 집권자들이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베풂으로써 은인이라는 칭송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베풂과 성경의 섬김의 본질적인 차이지요. 제자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마태복음 20장 26절부터 28절을 봉독합니다.
(마 20:26-28)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베푸는 세상 권세자들과는 달리 섬기려고 오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번역 문제를 먼저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의 번역에 대한 것입니다. 뉘앙스가 마치 크게 되고 싶으면 먼저 섬겨야 한다는 듯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겸손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너희가 큰 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섬겨야 한다.... 이 번역은 상당히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보겠습니다. “크고자 하는”에서 “하는”으로 번역된 동사는 기노마이라는 동사인데 영어로 단순히 be 동사나 심지어 be made, 즉 만들어지다 또는 되어 가다의 의미를 가진 동사입니다. 그래서 “크고자 하는 자는”의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큰 자로 변화되어 가는 자는”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큰 자란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장한 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크게 성장시키신 자인 것이지요. 성령께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실 때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의역하면 “누구든지 앞으로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피조물로 자라나게 되는 자는”의 의미가 됩니다.
다음으로 큰 자는 메가스, 즉 great의 의미이고, 섬기는 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디아코노스입니다. 영어로 집사가 deacon이지요.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봉사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으뜸은 프로토스로서 former, 즉 가장 먼저 또는 앞장 선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자를 의미하는 으뜸이 아니라 가장 앞선 자가 더 정확한 의미가 되겠지요. 가장 먼저 변화된 자로 보아야 합니다. 종은 둘로스지요. 정리하면 “먼저 성장된 자는 봉사하는 자가 되고, 먼저 앞서서 가게 된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제목이 “섬김”인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이 바로 섬김의 본질적 모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목숨까지 던지는 종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섬기는 자로서의 예수님이지요. 너희도 나처럼 참된 종의 모습으로 섬김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명령일까요, 약속일까요? 명령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으로 봅니다. 그렇게 만들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봅니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리다툼을 하느냐?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메가스가 되어가는 것이나 프로스토스가 되어가는 것은 나중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 생전의 제자들은 전혀 메가스가 되어가는 자도 없고 프로스토스가 되어가는 자도 없는 것이지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사건 이전에는 열두 제자라 하더라도 전혀 진도가 나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리다툼을 하지요. 나중에 높은 자리를 달라는 두 사람이나, 그걸 보고 화를 내는 나머지 열 사람이나 모두 똑같은 것이지요.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종교성이 충돌하는 부분입니다.
제가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썬다싱이라는 사람이 있었지요.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인데 인도사람으로서 크리스찬이 되어 자기 가문에서는 추방이 되었고 히말라야를 돌아다니면서 고산족과 티벳 선교를 위해서 애를 쓰다가 히말라야에서 결국 실종되어 죽은 사람입니다. 명상록 등등 여러 가지를 남겼는데 이 썬다싱이 불교 지도자 한 사람을 만나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대화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불교 지도자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욕구라 하여도 그것은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려 할 때도 알든 모르든 좋은 갚음을 되돌려 받으려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사람이 어떤 신을 섬기든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이다. 인생의 경험으로 보면 우리의 욕구는 거기에 따르는 갈망과 불안이 함께 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욕구도 사악한 것과 같은 것으로 보고 제재해야 한다. 이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곧 열반이다.”
이 불교 지도자의 말이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메시지와 대단히 비슷하지요? 그런데 썬다싱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사는 자가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같이 욕구 없이 살 수 없다. 욕구 없이 존재하는 자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것일 것이다. 감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다. 영과 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완전히 욕구를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도 죽여 버리는 일이 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욕구를 제거하는 것은 파괴요 구원이 아니다. 만약 완전한 구원이 욕구를 버리는 것이라면 버리고자 하는 마음도 벌써 욕구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 하고 물을 말리려고 물을 붓는 것과 같다.”
여기서 썬다싱과 불교 지도자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데 양쪽에 모두 성경의 중요한 메시지들이 들어 있습니다. 썬다싱의 경우에는 우리가 에피뒤미아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을 보았듯이 인간의 탐욕과 열정이란 가치중립적인 것이지요. 그 열정의 소멸을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 부분에서는 썬다싱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힘을 얻는 그 열정이라는 것이 싸르크스를 섬길 때에는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일 때에는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 열정 자체는 소멸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장의 대상이지요. 탐심 자체가 아니라 모티브가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면에서는 썬다싱의 말이 맞습니다.
그에 반해 이 불교 지도자가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에피뒤미아, 인간의 열정이 결코 선한 쪽으로 쓰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멸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탈과 같은 말이지요. 불교에서는 이 해탈에 의해 얻는 열반적정을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 상태로 보는 이론도 있고 궁극의 평안을 얻는 것으로 보는 이론도 있는데 어쨌든 여기서 이 불교 지도자는 탐욕을 소멸시킴으로써 니르바나, 즉 열반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두 사람이 각자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지고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불교 지도자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열정이 모두 악한 목적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선한 열정이라는 것은 사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지요.
제가 이십 대의 나이에 한창 불교에 빠져 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말이 “불사선, 불사악”이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가 했던 말인데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네가 가진 선악의 기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단 말이지요. 성경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 모두 악한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싸르크스를, 즉 자기 자신을 섬기기 위해 선악을 구분하기 때문에 모두 악하다고 규정을 하는 것인데 지금 이 불교 지도자가 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썬다싱이 그가 지적한 문제점을 초월하는 성경의 하나님의 계시를 정확하게 해결책으로 제시했어야 하는데 썬다싱은 그 에피뒤미아를 죽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접근을 하는 거지요. 그 부분이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에요. 그 에피뒤미아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어야 하지요.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장차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드러내는데 그 탐욕이 종교에까지 미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 부분이 해결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탐욕 때문입니다. 공포와 탐욕 때문에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학에서 종교의 기원에 대해 그렇게 규정하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천재지변과 같은 자기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고 분석합니다. 맞는 얘기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해서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이유도 결국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지금 열두 제자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느냐? 자기를 위해서지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열두 제자가 모두 마찬가지에요. 그것이 인간의 종교성인데 예수님께서 지금 지적하시는 것은 그 인간의 종교성과 하나님의 계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다 탐욕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거기서 사람들이 해결책으로 찾아내는 몇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오뚜기 같은 인생, 7전8기입니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거지요. 사람들이 그런 모습에 갈채를 보내지만 성경에서는 그것을 가리켜 미친 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계속 도전만 하다 끝나기 때문입니다. “도전만 하다 끝나다니? 성취할 때도 있는데 무슨 소리냐? 금메달 따는 선수들 못 봤느냐?” 그럴까요? 금메달 따면 뭐합니까? 그 다음에 또 미친 마음이 임하는데 말입니다. ‘금메달도 땄고, 이제 곧 은퇴하게 될 텐데 그 다음엔 어떻게 먹고 살지?’ 이렇게 되는 거지요. 금메달이 끝이 아니란 말이지요.
시지프스의 신화가 그것을 정확하게 꼬집었지요. 시지프스가 받은 형벌이 산꼭대기로 돌멩이를 밀고 올라가는 것인데 거의 올라가면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또 다시 밀고 올라가고 그것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아주 중요한 통찰입니다. 불교도 그렇고 희랍 신화나 철학도 그렇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어떤 일부분들을 굉장히 명확하게 자기들의 인식능력으로 파악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기독교인들만 그것을 몰라요. 자기들이 만든 종교에 눈이 멀어서 그렇습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성경 해석과 자기식의 조직신학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세상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는 것조차 성경에서 파악을 못합니다. 성경에 그것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는데 안 보입니다. 왜 안 보일까요? “하나님이 내 빽인데 뭐가 걱정이냐?”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어지고 더 천박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의 근원은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공포와 탐욕의 이유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불안정성입니다. 결국 죽는다는 것이 사람들의 무의식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소외의 고통입니다. 고독의 고통이지요. 결국은 나 혼자구나, 내 편은 아무도 없구나. 그것이 소외의 고통입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모두 그 두 가지를 꼽습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가 삶의 형편에 대한 염려와 근심입니다. 사업이 망하면 어떡하지? 나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런 다양한 염려와 근심인데 이렇게 다양한 염려와 근심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 두 가지 본질적인 것, 즉 존재의 불안정성과 소외의 고통에서 야기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해결책으로 오뚜기 인생에 이어 두 번째로 절망이 있습니다. 자포자기지요. “아! 나는 결국 안 되는 구나.” 절망도 사실은 하나의 해결 방법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하느냐? 자살을 해결 방법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에 대해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보다 산다는 것 자체가 더 공포스럽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해결방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해결방법이지요.
세 번째는 구도의 길로 들어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어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가 종교에 귀의하는 방법입니다. 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이 공포와 탐욕을 해결하기 위해서 네 가지 방법 중에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네 가지 방법에 공통적인 것이 자기를 위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방법은 방향성만 다를 뿐 모티브는 똑같은 것이지요. 결국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네 가지 옵션일 뿐이에요.
오늘 장면에서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을 했던 것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이지요. 여기가 인간의 네 가지 선택 중의 하나였던 인간의 종교성과 하나님의 계시가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종교성이 충돌하는 그 예민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지요.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제자도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오랜 동안 쭉 보아 왔고 오늘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쪽을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스템에 대한 25절 말씀을 다시 봉독합니다.
(마 20: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공포와 탐욕을 해결하기 위한 사람들의 탐욕은 권력욕과 명예욕으로 나타납니다. 자기가 높은 곳에 서기 위해 기를 쓰지요. 오늘 본문의 세베대의 두 아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님 오른편에, 주님 왼편에. 지금 이 열두 제자가 예수님 앞에서 모두 높은 자리를 놓고 서로 시기 질투를 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한 솥밥을 먹으면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표적과 가르침과 눈으로 보고, 옹기종기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을 보좌하는 삶을 살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들 식으로 해석합니다. 왜죠?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 자체가 애초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둘로 갈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이 인간을 위한 약속이라고 해석하는 쪽과 하나님을 위한 약속이라고 해석하는 쪽으로 쫙 갈라집니다. 성경에는 양 쪽이 각각 자기들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말씀들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조직신학이 중요합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 구절만 뽑아내면 하나님을 비서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조직신학을 얼마든지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셨으면 자기 아들까지 죽이셨겠습니까?” 이런 거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런 겁니다.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대부분 그렇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충돌의 최전선이 바로 내가 계속 주인으로 남아 있느냐, 아니면 종이 되느냐 하는 것인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형제자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을 봉독합니다.
(롬 1: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하나님께 대해서 채무자지요. 하나님께서 순전한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셨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빚진 자인데 그 빚을 실제로는 누구에게 갚아야 하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 빚진 자가 바로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 더 구체적인 모습을 로마서 9장 1절부터 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종도 이런 종이 없지요. 내가 설혹 저주를 받는다 해도 이웃에게 빚을 갚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채무자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종의 모습이 바로 가장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거의 접근하는 모습이지요.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기 몸이 찢겨지고 못 박혀 죽으시는 것으로 종노릇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지요. 사도 바울도 차라리 내가 저주를 받더라도 빚진 자로서 사람들의 종노릇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입니다. 이 부분을 고린도전서 4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4절에서 1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4:14-16)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여기서는 아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종입니다. 부모자식 관계만큼 주종관계가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자기를 던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을 아비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부모들의 종노릇에는 큰 함정이 있지요. 자기 자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게 악인지도 모르고 칭송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사도 바울이 상징적으로 내가 부모의 심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교회에 나옵니까? 하나님의 섬김과 돌봄을 자기가 받으려고 나옵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종교생활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절에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 종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지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불교와 기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왜곡을 잠깐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에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이 있는 것처럼 불교에도 자력 불교가 있고 타력 불교가 있습니다.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지요.
자력 불교는 스스로 참선을 해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주장입니다. 스스로 해탈하고 성불한다는 교리지요. 그에 반해 타력 불교는 염불을 해서 극락왕생한다는 주장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이 바로 그 염불입니다.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인데 이 염불을 계속해서 외우면 죽어서 왕생극락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불교에는 원래 극락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업보에 따라 윤회를 계속 반복하던가, 아니면 해탈해서 그 윤회에서 벗어나든가 둘 중 하나지요. 그런데 대승불교로 변질되면서 정토사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왕생극락을 위해서 재도 올리고 하지요. 변질입니다.
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모두가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계시는 종이 되어서 부모의 심정으로 서로를 섬기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이 땅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해서 천국을 차지하게 된다는 쪽으로 갑니다. 용서받은 죄인이 되어서 죽어서 천당만 차지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땅에서 선행을 베푸는 것도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심지어 순교를 하는 것도 받을 상급과 관련해서 생각합니다. 내세신앙과 기복신앙의 결합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예수님 덕분에 내가 이 땅에서도 잘되고 죽어서도 천당을 차지하겠다는 것인데 불교의 정토신앙과 마찬가지 왜곡입니다. 도덕주의 기독교도 이 땅에서 내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율법을 잘 지키면 확실히 구원도 받고 상급도 크다는 것이지요.
이런 동일한 왜곡이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인간들이 절에도 가고 교회에도 가니까 불교나 기독교를 왜곡시키는 모습이 똑같은 것이지요.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모든 것을 다 뛰어넘습니다. 이 땅에서 복을 누리겠다는 신앙이나 죽어서 상급을 받아 극락이나 천당에 가겠다는 신앙이나 참선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것까지 모두 뛰어넘는 것입니다. 다 뛰어넘어서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종으로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가장 큰 은혜를 입은 사도 바울이 가장 처절한 빚진 자의 마음을 가진 가장 충성된 섬기는 종으로 바뀐 것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아! 종이 되라고 하시는구나” 하면서 종노릇을 하려고 애를 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까 누가복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은인이 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가 종이 되려고 애를 쓰면 그 과정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은인이 되는 과정이 됩니다. 이건 해결이 안 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 문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내가 다른 사람들의 종이 아니라 은인이 되어 갑니다. 절대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사람의 종으로 만들어주실 것을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종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실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고 사도 바울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가 점차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5장 13절입니다. 봉독하겠습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진행과정의 순서를 명확하게 밝히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우리가 그 자유를 얻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고 그래서 점차 자유로워지는데 그 자유로움을 종노릇을 하는데 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따라서 이 자유로움은 누구로부터의 자유로움입니까? 나로부터의 자유로움입니다. 내 본능으로부터의 자유로움입니다. 내 본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우리가 자유롭게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나의 종에서 다른 사람의 종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렇게 각자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서로의 종노릇을 하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종노릇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말씀에서 그의 의가 서로에 대한 충실한 종노릇인 것입니다.
이 약속이 성령의 역사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하는 것이 우리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하나님의 덕을 보자고 하는 종교성이지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이용하고자 하는 종교성이고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이용하고자 하는 종교성입니다. 이 종교성이 우리의 가장 경계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조금씩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모습을 보여 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있을 수 없는 신비한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우리가 한 단계 더 종의 모습으로 변화도록 만들어 주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저희들을 서로 종노릇하는 자들로 바꾸시려고 저희를 선택하시고 또 저희들 마음에 그러한 소망을 불러일으키셔서 저희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인도하시는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서로 충실히 종노릇하는 삶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도 서로 종노릇하는 삶이 바로 신세계임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서로 권력을 탐하며 상대방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그 처참한 인생에서 벗어나게 하시옵소서. 이 일을 가로막고 있는 저희들의 본능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하나님, 간구하오니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이 모든 신비한 일이 진행되게 하시옵소서. 이루실 줄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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