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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도 설교집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아들 2013. 1. 23. 14:36

제자도 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6장 30절에서 34절입니다.

 

(마 6:30-34)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 제자도 세 번째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제목으로 성경적인 제자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에 몇 년에 걸쳐서 계속 성경 말씀에서 은혜를 받고 진리를 깨닫는 그 과정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우리에게 많이 정리가 되었지요. 오늘은 제자도의 관점에서 이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한 몸 공동체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이웃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설정하고 있는데 그 진정한 의미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개와 돼지에게 귀한 것을 주지 말라고 하셨고 그 집에 들어가서 평안을 빌 때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집에서 나와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것처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 또는 앞으로 될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모든 세상 사람들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23장 19절과 20절에서 네가 형제에게 꾸이거든 이자를 받지 말되 타국인에게서는 받아도 된다고 하신 말씀도 이웃의 범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외인을 향하여는 지혜롭게 행하고 세월을 아끼라고 했고 또 외인들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냐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가이사의 세계가 철저히 구분된 상황을 전제로 성경 말씀이 진행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폐쇄적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예수님의 사역이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 대상이 천하 만민으로 확대됩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을 향해서 확산되어 가는 새 언약으로 변화되지만 여전히 확산되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가이사의 세계 자체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진보 기독교가 특히 이 부분이 더욱 혼란스러워서 휴머니즘으로 달려가는데 신구약 성경 말씀은 철저하게 그 둘을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산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이 세상 전체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창세기 18장 1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쩨다카와 미쉬파트입니다. 신약에 와서는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디카이오쉬네와 크리시스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와 관련해 마태복음 22장 34절에서 4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 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두 가지 큰 계명, 즉 하나님의 의는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나라의 형제자매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에 공통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정의입니다. 쩨다카와 미쉬파트지요.

 

참고로 현대 유대인들은 쩨다카를 구제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무조건 구제하는데 써야 합니다. 구제기관에 기부를 하든, 아니면 개인적으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하든 합니다. 물론 유대인들끼리 그렇게 합니다.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합니다. 그 구제를 쩨다카라고 부르지요.

 

그 하나님의 의가 내부에서 행해질 때에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실제로 한 몸 공동체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대비되는 가이사의 세계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세계의 사람들, 즉 이방인들의 삶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구하는 삶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염려하여 그 세 가지를 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결국 생존과 번영에 대한 갈구를 모티브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생존과 번영에 대한 갈구의 밑바탕에는 공포가 있습니다. 그 공포 때문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미친 듯이 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먹을 것? 그것으로는 안 되지요. 내년에 먹을 것? 그것으로도 안 됩니다. 나 죽을 때까지 먹을 것? 그것으로도 안 되지요. 나 죽은 다음에 내 자식들이 먹을 것까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 절대로 거기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설교에서 자주 예로 등장하는 삼성 이건희 회장님을 보면 불쌍해 죽겠어요. 항상 하는 말이 “10년 후에는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입니다. 그 분이 수사적으로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모토로라가 구글에 넘어갔잖아요? 삼성은 모토로라에 비하면 신생아 같은 기업입니다. 물론 덩치는 크지만 그 전통과 축적된 기술과, 특허량 등에 비하면 삼성이 모토로라 같은 기업에 비하면 아슬아슬한 신생기업이거든요. 모토로라가 휙 날아가고 노키아가 휙 날아가고 하는 것을 보면서 이건희 회장이 공포에 휩싸이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저는 그분이 괜히 엄살떠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 뭐 보통 사람들이야 오죽하겠어요? 오랜만에 그 말씀 한 번 더 드릴까요? 사실혼 관계에 있는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룸펜이고 아내는 식당에서 일을 합니다. 부인에게는 여중생 딸이 있었어요. 그 부인이 매주 남편에게 오천 원씩 주면서 복권을 사게 했습니다. 몇 년을 계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이게 일등이 돼 버렸어요. 19억을 받았답니다. 그래서 남편이 “여보. 우리 부모님이 연립주택 지하에 저렇게 월세를 살고 계신데 일층이나 이층으로 전세를 옮기게 돈을 좀 드립시다”라고 했더니 부인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소송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재판이 열렸는데 남편 주장은 당첨금의 절반이 자기 몫이라는 것이지요. 재판 결과보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는 부분은 그 부인의 주장입니다.

 

그 부인이 너무 하지 않느냐? 저는 그렇게 안 봅니다. 왜냐하면 여중생 딸이 있거든요. 그 딸에게 19억을 물려주는 것으로는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겁니다. 19억이라는 돈은 자기 딸의 앞날을 생각하면 푼돈이에요. 19억을 가지고 어떻게 딸의 미래가 보장이 됩니까? 기껏해야 아파트 한 채, 상가 조그만 거 하나면 19억인데 그것으로 그 딸아이의 인생이 보장이 되겠어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같이 사는 남자의 부모가 물도 들어오고 곰팡이도 피는 지하 셋방에서 사는 그런 것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거예요. 자기 딸의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에. 19억? 그 돈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요. 그런 거거든요. 그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 인간의 삶을 예수님께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에 반해 하나님의 의가 행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붙들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 34절에서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앞의 30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봉독하겠습니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신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씀합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도들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거나 참수형을 당해서 죽거나 하는 이런 일들도 모두 형통함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40에 하나 감한, 즉 39대의 태형을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39대를 때리는 이유는 40대를 때리면 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죽기 직전까지 다섯 번이나 매를 맞은 것이지요. 천사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고 성경을 보게 되면 이건 엄청난 넌센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해주시는 것은 우리의 사명 감당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감당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교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는 말씀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할 때까지 그 여건을 보장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걷는 제자도에 보장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도의 사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명을 감당해가는 단계는 네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가 먼저 제자로 변하는 단계입니다. 즉 내가 먼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가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빚진 자로 변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과정이 완벽하게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서 완전한 의인으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로까지 변하지는 않아요. 그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군대를 예로 들어보지요. 신병이 들어오면 훈련소에서 훈련을 시켜서 실전에 배치하게 되는데 그때 완벽한 군인이 되었기 때문에 실전에 배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기본 훈련이 끝나면 자대 배치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느 정도 의인으로 변하고 어느 정도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면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두 번째 단계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나처럼 제자로 만드는 일을 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두 번째 단계에요. 그래서 가까운데 있는 사람들을 나처럼, 나도 불완전하지만, 내가 진도 나간만큼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나 있는 곳까지 데려오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이지요.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는 사도 바울의 간곡한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 또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이 일을 시작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제자도의 세 번째 단계는 그렇게 몇 명이 모여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일입니다. 정말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게 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도 그들끼리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계입니다. 이 네 번째 단계가 오늘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록한 마태복음 10장을 보면서 이 네 번째 단계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봉독하고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여기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번은 뉴스앤조이에 안티 성향을 가진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는다고 했으니 복음을 전하려면 독사를 가지고 노는 모습부터 보이고 복음을 전해라.” 시비를 거는 글이지요. 이 말씀의 의미는 이사야서 42장 6절과 7절에서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 42:6-7)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그리고 같은 이사야 61장 1절부터 3절입니다.

 

(사 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앞에서 제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것은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신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말씀들도 아픈 사람이 치료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들린 자는 귀신이 쫓겨나고 정신병자가 정신병이 낫고 등등의 의미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성경 전체의 말씀으로 볼 때 이 말씀들은 복권에 당첨된 그 여중생 엄마나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들, 즉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약속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갇혀 있는 상태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는 말씀인데 여기서 갇혀 있는 상태란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갈망해 일어나는 공포와 탐욕에 이글이글 불타 자기 인생과 자기 생명을 파멸로 이끌고 옆의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으며 사는 삶입니다.

 

성경의 약속은 이렇게 양과 이리처럼 서로 물고 먹으며 살아가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고 바람처럼 자유로운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존재적인 자유를 얻게 하는 권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열두 제자의 명단이 나온 다음 10장 5절 이하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5절부터 8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마 10:5-8)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이때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도 않았고 따라서 당시의 제자 공동체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이 가까왔다”라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사도 바울은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이후로는 제자들이 증인이 되어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6절에서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원문의 의미는 “차라리 이스라엘의 집, 즉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입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사역이 초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 공동체를 초월하여 천하 만민에게 이르는 것을 아직 선포하시지 않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사역 후반에 바뀌게 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 즉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누가 네 이웃이냐. 사마리아인이 네 이웃이라는 말씀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에는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도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지요.

 

그 다음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 10:9-10)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누가복음 22장 35절과 36절을 대비해서 보아야 합니다.

 

(눅 22:35-36)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찌어다

 

이 부분도 예수님의 사역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달라집니다. 검에 대한 말씀은 오늘은 좀 관계가 없으니까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전대 없이 가라고 하시지만 나중에는 전대를 차고 가라고 하시지요. 공생애 초반부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과 후반부에 제자들에게 주시는 사명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초반부에는 제자들에게 초보적인 믿음을 강조하셔야 했습니다. 사명 감당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지키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게 만드시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어요. 하지만 후반에 가면 앞으로 성령께서 오실 것까지 밝히시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려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단계에서 벗어나 제자들이 자신들의 능력까지 최대한 발휘하면서 일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대는 제자들 각자가 가진 자기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의 재능을 모두 총동원해서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성경을 볼 때 어느 한 부분만을 떼어내서 그 말씀에만 집중하게 되면 대단히 큰 오류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경우도 그런 경우입니다. 자주 등장하는 것이 까마귀 이야기지요. 하나님께서 굶겨죽이시면 나는 굶어 죽겠다고 하면서 대책 없이, 그러니까 전략 없이 그냥 무조건 하나님만 믿고 나아가는 오류입니다. 아주 비참한 예가 몇 년 전 샘물 교회 청년들이 중동에 가서 함부로 집회하고 하다가 붙잡혀서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이런 넌센스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전대도 가지지 말고 두 벌 옷도 가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을 믿음의 훈련을 겸해 파견하시는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볼 때에는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고 증인으로 변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모습과 비교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 11절부터 15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마 10:11-15)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결과에 대해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평안이 성령의 열매 에이레네입니다. 따라서 평강으로 번역되는 게 사실을 더 정확하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이 집에 임할지어다, 즉 “샬롬!” 하고 인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샬롬이 바로 에이레네인데 peace로 번역되기도 하거니와 사람들은 이 샬롬, 에이레네를 사람들 간의 평화롭고 화목한 관계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팔복에서 "화평케 하는 자"를 peacemaker로 번역하고 또 그런 의미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오류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에이레네, 즉 영적인 평강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화목은 카탈라게라는 다른 단어가 있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포한 평강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 복음을 거부하면 그 집에서 그냥 나와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하면서 결과를 우리가 예단하고 고집을 부리면 절대 안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맡을 자인지 사망에 이르는 냄새를 맡을 자인지를 예단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결과에 욕심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나오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들을 버림받은 자들이라고 예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다른 팀이 가서 평안을 전할 때에는 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우리 사명에는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16절부터 18절까지 보겠습니다.

 

(마 10:16-18)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 몸 공동체라는 삶의 형태가 그들에게 굉장한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우리의 생각이 그들에게는 생존과 번영을 포기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우리가 죽는 것까지도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죽음도 사명의 일환이기 때문인 것이지 생존과 번영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제자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보다 실제로 훨씬 더 행복한 삶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생존과 번영 자체를 포기한 삶을 사는 방향으로 가는 크리스찬들이 많이 있습니다. 금욕주의 기독교 계열이지요.

 

사실 이런 면에서 보면 기독교가 두 그룹으로 나뉘어요. 하나는 하나님께서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셨다고 착각하고 “주세요. 주세요” 하면서 울부짖는 소경 같은 크리스찬들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희생과 금욕과 절제 등을 강조하며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실제로 구차하고 비참한 삶을 살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찬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최근에 불붙었던 청부론과 청빈론의 갈등이었다고 저는 보는데 그 두 그룹은 모두 오류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들의 모습은 실제로는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행복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으로는 공포와 탐욕에서 해방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이 세상 누구도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제자들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극치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제자들의 그러한 삶이 생존과 번영을 포기한 삶으로 보인단 말이지요.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을 핍박하게 됩니다.

 

19절과 20절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세상의 핍박에 대해 어찌 대응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십니다. 봉독하겠습니다.

 

(마 10:19-20)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우리의 사역의 현장에서 핵심적인 일은 성령께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사도 바울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했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과 내가 깨달은 진리를 전하는 경우가 물론 대부분이지만 어떤 경우들에는 내가 생각지 못한 말이 나가면서 상대방의 영혼이 확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서 ‘아,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구나. 내 힘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구나’하고 실제로 인정을 하게 됩니다. 이어서 23절을 봉독합니다.

 

(마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이 말씀을 두고 참 곤혹스러워 하지요. 초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생각으로 삼백 년을 버텼어요.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슈바이쳐 박사도 자신의 의학박사 학위 논문에서 예수님을 종말을 믿었다가 실망해 목숨을 던진 청년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 오류들이 있는데 실제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고 인자가 오셨지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24절과 25절을 봉독합니다.

 

(마 10:24-25)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말씀은 핍박받을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만큼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사람들이 “저 사람이 지금 바알세불의 힘을 얻어서 저런 일을 한다”고 비난했던 그 사건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집 주인인 바알세불이라고 하면서 핍박하였으니 그 집 식솔들이라 할 수 있는 내 제자들인 너희들에게 오는 핍박도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가 받은 핍박만큼만 너희들도 받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0:26)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사명 감당의 현장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8절부터 31절을 봉독합니다.

 

(마 10:28-3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제자들을 사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의 사명 감당의 현장에 함께 하셔서 주어진 몫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신다는 말씀으로 보면 안 되는 것이지요. 반드시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 각자의 사명의 완수가 어디까지인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명에 욕심을 내면 안 됩니다. 다만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40절부터 42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마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을 선지자 또는 의인으로 인정하고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와 의인이 받을 상을 공유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일은 하나님께서 다 정하신 대로 진행이 됩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아직 부르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이고, 우리를 선지자로 의인으로 제자들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에게 때를 정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상황이에요.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결과에 대해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미리 예단해서 희망에 들뜰 일도 없고 미리 예단해서 두려워할 일도 없습니다. 과욕을 부려서 안 되고 실망하거나 절망해서도 안 됩니다. 꿋꿋하게 나가는 거지요.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여기저기에 세워지는 일을 위해서.

 

우리로 인해 미국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도 있고 우리 때문에 북한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진행이 됩니다. 단 조건은 우리가 빚진 자의 마음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길, 즉 제자도입니다.

 

이 제자도는 우리가 자원해서 걷는 길입니다. 의무로 감당하는 사명이 아니에요. 의무라고 인식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복한데 저들은 비참하거든요. 우리는 해방되었는데 저들은 감옥에 갇혀 있거든요. 우리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데 저들은 문둥병에 걸려 있고 귀신에 들려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가 저들에게 기쁜 소식을 들고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을 주시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간다든가, 나중에 천국에서 큰 상급을 주시리라 생각하고 이 땅에서 이렇게 힘들지만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것은 오류도 보통 큰 오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행하며 사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 자들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누려야만 한다는 그 절박함 때문에 우리가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를 쓰시려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또 그런 일들이 조금씩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앞으로 점점 더 이 일이 크게 확산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허락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진행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자 가장 첫 선결 과제는 정확한 조직신학입니다. 올바른 성경의 해석이지요. 즉 제자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첫 번째 과제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실제로 먼저 해방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세워지는 것이고 마지막 과제는 우리가 해석한 복음과 우리에게 성취된 일이 합쳐져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실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일이 오늘날 세상 곳곳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냐 하면 사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기존 교리를 기반으로 한 주류 기독교의 폭력적인 권위가 이 일을 가로막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이 세상에 만연하게 하셨거든요. 이제는 사람들이 교회의 권위를 인정 안 합니다. 그들의 교리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아요.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던가 아니면 탐욕에 가득차서 뭐 하나라도 얻을까 해서 교회를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윤리도덕적인 거룩한 삶을 살아 자기 명예를 높이고 싶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로 교회가 채워져 있습니다. 교리가 예전처럼 이 사람들을 짓누르지 못합니다.

 

이 일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행되는 일입니다. 저만 해도 제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20년이나 30년 전이었으면 저는 특정 교단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 은혜를 서로 나누면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제 뿌리부터 뒤집히는 조직신학이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미 그런 시도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조직신학이 완성되어서 세상에 발표되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니까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로 많이 진행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기존의 교리에 도전하는 단편적인 논문들은 이미 우리가 확인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깨달음과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체험과 실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이 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세상 이곳저곳에서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연합이 되면서 또 진행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교 이천년과 기독교 이천년을 합하면 모두 사천년인데 사천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환경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특별한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론적인 교리의 시대를 거쳐 성령의 은사 운동으로, 그리고 이제는 성령의 은사 운동을 지나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성령의 열매와 이 땅에 실제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제자도입니다. 그 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제자 공동체로서 역할을 다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하나님께서 더 깊은 은혜를 주실 줄 믿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시려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 곳곳에서 펼쳐지는 데에 저희를 퍼즐 조각 중의 하나로 쓰시려고 저희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속히 이루시옵소서. 저 감옥에 갇혀 피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죽이고 자기 옆 사람을 죽이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저희와 같이 해방시킬 수 있도록 저희들이 모든 노력을 다하게 하시옵소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어서 저희의 삶을 그 일에 던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사역의 현장에 항상 함께 해주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뜻을 저희들을 사용하여 이루시옵소서. 저희들이 그 제자의 길에서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미약한 저희들의 힘이지만 모든 것을 다 던져서 충성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며 함께 힘을 모아 일을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놀라운 일을 진행하심을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 은혜로운 주제별 성경요절
글쓴이 : 김용호전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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