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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도 설교집 5] 두 가지 소망과 회개

하나님아들 2013. 1. 23. 14:35

제자도 5 - 두 가지 소망과 회개

 

오늘 본문 말씀은 두 곳입니다. 먼저 마가복음 9장 21절부터 29절까지를 봉독하겠습니다.

 

(막 9:21-29)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두 번째는 누가복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14절까지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다섯 번째로 제목은 “두 가지 소망과 회개”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두 본문에서 인간의 고통스러운 환경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만사형통으로 이끄는 믿음을 갖게 된다는 소망과 회개의 논리, 그리고 인간의 죄성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의인으로의 변화로 이끄는 신비한 은혜가 임한다는 소망과 회개의 논리를 비교하면서 제자도의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다양한 말씀이 있어서 각자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적으로 끌어다 붙일 수 있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명확한 푯대를 발견하는 일을 계속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은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열심히 해나가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푯대가 명확해지면 명확해질수록 우리가 걸어가야 할 방향도 점점 뚜렷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대원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어느 성경 구절을 보든지 성경 66권 전체를 기반으로 그 구절 또는 그 상황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 어렵다면 적어도 그 말씀과 유사한 말씀과 모순되어 보이는 말씀을 찾아내어 비교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두 가지 소망과 회개인데 회개는 메타노이아, 즉 돌아섬입니다. 후회나 반성이 아니고 삶의 방향의 전환이고 지향하는 가치의 교체인 것이지요. 우리가 올바로 방향을 전환하려면 푯대의 좌표와 내가 위치한 좌표가 먼저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돌아야 하는가가 결정되지요. 그 푯대가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소망이고 이 소망이 명확해져야 정확히 방향을 수정하는 회개를 한 다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제자도입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이 푯대, 즉 소망을 명확히 찾아내고 회개의 방향을 올바로 규정하는 실제적인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표적인 두 가지 소망과 회개의 경우를 두 본문을 비교하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의 본문에서는 간질 걸린 아들과 그 아버지의 경우를 보고 이어서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보면서 성경에서 제시하시는 정확한 소망과 회개가 어떤 것인지, 즉 진정한 제자도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본문인 마가복음 9장 말씀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황이지요. 간질에 걸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제자들을 찾아왔지만 해결 받지 못하다가 마침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달려가 호소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우리 아들의 병을 못 고치니 당신께서 좀 고쳐달라고 하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이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의 병이 나아서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과연 예수님 덕분에 그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이 장면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발견하는 소망은 고통스러운 환경의 개선이고 자신의 현재의 포지션은 믿음 없음입니다. 그리고 푯대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이 아버지와 예수님의 대화를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9장 22절부터 24절입니다.

 

(막 9:22-24)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고통스러운 환경의 개선이 소망이고, 현재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고 푯대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며 믿음을 갖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기도로 성취된다고 말씀하십니다. 28절과 29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막 9:28-29)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회개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도로 아뢰면 고통스러운 환경의 개선에 능치 못함이 없게 된다는 것이지요. 믿음만 확실해지면 내 환경이 개선되고 팔자가 피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소망과 회개의 논리가 세워지면 그 제자도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확실히 믿고 간구하는 기도로 형통한 삶을 살자.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확실히 믿고 기도하게 해서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자.”

 

기도원에 가면 이러한 제자도를 걷고 있는 설교자들을 흔히 보게 됩니다. “여러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이루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문제도 믿고 기도함으로써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하고 외치는 제자들의 목소리가 찌렁찌렁합니다. 이렇게 목청을 높이는 그 제자들 자신들이 정작 형통한 삶을 살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말입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과 회개의 논리는 일견 하자가 없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가적으로 붙는 논리가 하나 있는데, 확실한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고난과 환난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우리가 팔자가 편하고 배가 부를 때에는 절대 믿음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한번 된통 당해야 하나님께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그 때 진짜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열심히들 복음을 전하는데 과연 이것이 성경적인 제자도일까요? 이 기복신앙의 논리를 깨뜨릴 수 있는 말씀이 본문 자체에서 여간해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더욱 확신을 가지고 울고불고 매달리면서 자기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어쩌다가 어려운 일이 한번 해결되면 여기저기 간증을 하고 다닙니다. 하지만 그런 성공 확률은 절에 가도 있고 무당에게 가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두 번째 본문을 보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제 누가복음 18장 본문으로 가서 두 번째 소망과 회개의 논리, 즉 두 번째 제자도를 보겠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제자도의 논리의 오류를 우리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비유로 설명을 하시면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등장시키십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의롭게 살게 된 자신을 대견해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 다음이 세리인데 세리의 기도에 대한 말씀을 봉독합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14절 말씀입니다.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정의를 내리시면서 성경적인 푯대를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기도의 비유가 바로 성경적인 푯대에 대한 설명이고, 우리가 가져야 할 소망과 행해야 할 회개에 대한 설명이며, 성경 66권 전체에 계시되어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말씀입니다.

 

앞서 등장했던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간질병이라는 상황 때문에 고통을 겪었는데 이 세리는 자기의 죄성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첫 번째 경우의 푯대는 자기의 안락한 삶이지만 세리의 경우는 의롭게 되는 것이 푯대이고 현재 자기의 위치는 죄성이 발휘되는 악한 삶입니다. 따라서 의로운 삶을 향한 방향 전환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이것이 성경적인 회개, 성경적인 돌아섬입니다.

 

마태복음 9장 9절에서 1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 9:9-13)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이 때 전제가 있는데 자신이 지금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이 의원을 찾는 것처럼 자기의 죄성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간질 걸린 아이의 아버지는 올바른 소망과 회개라는 성경의 계시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입니다. 내 아들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라는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신단 말이지요.

 

제가 요즘 카페에서 계속해서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기반으로 한 글들을 쓰고 있는데 우리가 로마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결국 성경의 핵심은 의입니다. 디카이오오, 즉 의롭게 만드신다는 것이 성경 66권 전체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등장한 간질 걸린 아이의 아버지는 도대체 뭐냔 말이지요. 자기의 죄성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러 온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지요.

 

성경의 기사들은 그 상황과 진행에 있어서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상황과 진행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가 임하는 상황과 전개가 있습니다.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기사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과 공포의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와 같이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즉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과정도 둘로 그 방향성이 나뉩니다. 인간의 공포와 탐욕의 문제를 기반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향이 있는가 하면 존재의 문제, 진리의 문제, 의의 문제로 성경에 접근하는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 해석상의 충돌의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를 언급하시는데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심령이”라는 말을 마태복음의 기자가 추가한 것으로 봅니다. 원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였는데 거기에 종교적인 색채를 덧입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바꾸었다는 주장입니다.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는 방향성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이 원래 표현이고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는”이 오히려 “심령이”가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이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계시로 보기 때문입니다. 같은 누가복음 4장 18절과 19절 말씀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가 환경이 어려운 자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1장 1절에서 3절을 봉독하신 것인데 같은 이사야서 42장 7절을 보겠습니다.

 

(사 42: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이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핍박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공중권세 잡은 어두움의 영의 지배 아래에 속박되어 있는 인류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간질 걸린 아이를 치유해주실 때 귀신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귀신 때문에 간질에 걸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기동 목사의 베뢰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감기도 귀신 때문에 걸린 것이니 감기가 걸리면 감기 귀신을 내쫓아야 한다는 식의 말씀이 아니고 인류의 삶이 공중권세 잡은 어두움의 영의 지배 하에서 살고 있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삶 자체가 바로 감옥에 갇힌 삶이고 그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귀신이 쫓겨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지요. 누가복음 4장에서 18절과 19절의 말씀에 이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의 경우를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과부의 궁핍한 처지를 돕고 문둥병이라는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본질이 아님을 설명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문둥병을 치료해 주시고 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존재의 해방에 대한 상징적인 사역입니다. 진리가,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인간 존재의 해방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이나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내막을 알 수가 없지요. 그 내막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은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신 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모두 주어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그것을 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모두에서 환경에 의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과 죄성에 의한 인간의 고통을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속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데 인간이 주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간질 걸린 아들의 아버지의 눈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성경의 약속을 보면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보게 되고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쪽에서 오는 계시의 말씀의 본질은 우리를 의로운 존재로 재창조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성경의 모든 기사는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들의 공포와 탐욕의 충돌에 대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도 마찬가지고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인간 쪽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로 상징되듯 모든 말씀이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보게 되고, 하나님 쪽에서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로 상징되듯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말씀은 똑같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이렇게 성경의 말씀에 양극단이 있어서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충돌하고 있고, 또한 성경을 읽을 때 인간의 육과 영이 충돌하기 때문에 같은 말씀도 서로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이 충돌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가 우리 앞에 대두되는 문제입니다. 자기 공포와 탐욕의 문제로 하나님 앞에 나오던 자들이 어떻게 진정한 회개를 하며 나올 수 있게 되는가. 잘못된 소망과 회개의 논리에서 어떻게 벗어나 올바른 소망과 회개의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4절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체험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후 12:1-4)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올바른 소망과 회개로 이끄는 말씀을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셨던 그런 자기 의를 드러내는 기도를 하는 대표적인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5절과 6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빌 3:5-6)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은 진리를 모르고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파괴하러 다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자가 7절에서 이렇게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극적인 전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극적인 전환의 구체적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요. 로마서 7장 7절을 봉독합니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탐심은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탐심이 아니고 종교적이고 영적인 거룩한 탐심입니다. 따라서 이 탐심이 죄인 줄을 몰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극적인 신비한 전환을 하고 나서 눈이 열려 율법이 지적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기의 종교적인 의를 내세우면서 종교적인 탐심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가히 사람의 말로 이르지 못할 말을 듣고 극적인 전환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내 의를 세우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모든 탐심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극적인 전환에 따른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6장 25절부터 27절에서 이랗게 고백합니다.

 

(롬 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의 복음은 이 비밀의 계시인데 이 비밀의 계시가 바로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듣고 극적으로 전환케 된 계시였던 것이지요. 이 전의 사도 바울은 사실 간질 걸린 아들의 아버지처럼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였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기도를 드리는 바리새인이었는데 그랬던 사도 바울이 극적으로 전환케 될 수 있었던 것은 진리를 직접 듣는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진리를 셋째 하늘로 끌려올라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으니까 낙원에 이르러 하나님께로부터 들었으니 전환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내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 접근하고, 내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자기의 죄 때문에 오는 괴로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리의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후 계속해서 자기의 죄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람입니다. 자기를 괴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듯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깊은 회개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이 제자도 다섯 번째 설교인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제자도의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행하면서 사는 의인으로 변하는 것을 푯대로 삼고 그 푯대를 향해 돌아서는 회개, 그리고 그 푯대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제자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기 혼자 그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아비의 심정으로, 애끓는 마음과 하나님의 근심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함께 그 푯대로 데려가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푯대를 향해 혼자 달려가는 개인 구원 성향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큰 오류를 불러일으킵니다. 서구 기독교가 국가 교회를 합리화하기 위해 개인 구원론을 기반으로 한 성경 해석을 고집한 것은 아주 큰 비극입니다. 개인 구원은 성경의 계시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누룩의 비유도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푯대를 발견하고 돌아선 사람이 절체절명의 과제로 삼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도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대의 과제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제자도의 출발은 자기의 죄성 때문에 괴로워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기 죄성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직접 계시의 비밀을 듣고 그 일이 일어난 것만큼이나 극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포와 탐욕에 휘둘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죄성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윤리도덕적인 문제로 반성하고 후회하는 일은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반성과 후회는 죄성을 발휘하는 일이지요. 성경적인 회개는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이 죄성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입니다. 재탄생을 위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받았던 그 충격과 그 극적인 전환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환경 문제 때문에 자극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우리의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거기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실제로 고통을 받고 있잖아요? 오늘 허전도사님 대표기도에서도 간절히 그 기도를 드리셨는데 우리가 우리의 죄성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야 푯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이라는 탐욕의 푯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된 푯대가 언제 부서지느냐 하면 나의 시선이 나의 죄성으로 옮겨갔을 때 부서지게 됩니다. 이 일은 인간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런 일에 초점을 맞출 수가 없어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의 해방과 우리의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에 초점이 맞춰지질 않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이해하지를 못해요.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올해가 십년인데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떠났습니다. 그 분들이 떠난 이유는 제가 제시하는 성경의 푯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일어났던 그 극적인 전환이 안 일어났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동의가 되는 경우조차도 그 푯대가 자기 푯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 푯대는 뭐에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과 고상하고 거룩한 인생이지요. 그리고 주류교회에서 세뇌당하면서 갖게 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이라는 그 푯대가 부인되지를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떠났고 우리는 남았습니다. 함께 걸어가고 있는 저와 우리 형제자매님들은 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죄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나의 표적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우리가 우리의 죄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히브리서 말씀대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파쎄마, 즉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죽는 고난이지요.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서로 힘이 되고 서로 본이 되면서 점점 더 새로운 피조물로 함께 부활해나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 될수록 지금도 여전히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고 서로 물고 먹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애타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우리가 해방된 만큼 아직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 어떤 일이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외부를 향한 제자도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제 발걸음을 옮기도록 인도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는 푯대를 향해서 발걸음을 옮길 때에 우리끼리만 가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옥에 갇힌 자들 때문에 애가 타서 힘을 합해 증인의 역할, 추수꾼의 역할도 열심히 감당하면서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제자도를 걷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일을 진행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 힘을 내서 서로 권면하며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우리들이 되기 원하고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사명을 자원해서 감당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되기 원합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이 일을 또 한 걸음 더 진행을 시키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사도 바울을 셋째 하늘에 불러올리셔서 하셨던 그 비밀한 일을 우리에게도 행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의 관심을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서 죄에서의 해방으로 바꾸신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서로 힘이 되고 서로 본이 되면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파쎄마를 겪는 그 일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 일이 진행되면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따라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나갈 때에 그 사명 감당의 현장에서 권능으로 임하시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늘 특별히 간절히 기도드리옵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문제와 약속과 푯대를 정확하게 보게 된 우리들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울 수 있도록 더욱 큰 은혜를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희들 간절히 기도하오니 저희들 안에 불타는 열심을 주시어서 이 죄성에서의 해방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이 일을 이루실 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 은혜로운 주제별 성경요절
글쓴이 : 김용호전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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