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6.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제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태복음 17장 18절부터 20절까지입니다.
(마 17:18-20)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여섯 번째로 제목은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 대사명을 주실 때에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천하 만민에게 가서 그들로 제자를 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명령하신 계시를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제자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회가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부르짖는 것은 크리스찬은 제자이어야 한다는 절대 명제를 배제하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땅의 기름진 복이라는 그 말 자체가 성경과 어긋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기름진 복을 허락하시는 목적에 대한 시각차가 심각한 오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복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제자로서의 사명 감당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존재냐,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보는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성경은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써놓은 책이냐, 아니면 내가 하나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써놓은 책이냐 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4장 12절을 봉독하겠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그리고 떠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그 일을 물려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말씀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가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씀도 같이 있습니다. 이 두 말씀을 결합하면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이 두 말씀이 충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지만 성경을 볼 때에는 어느 구절이든지 성경 66권 전체를 기반으로 그 구절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되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의 탐심을 채워주기 위해 온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신다고 보게도 되는 것입니다. 왕자병 공주병 환자들로 만드는 것이지요.
성경 말씀을 각자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 가장 끔찍한 예가 2차 대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전 기독교계가 다 공황상태에 빠집니다. 기독교 국가들끼리 전쟁을 하면서 서로를 수천만 명을 죽인 것입니다. 당시 독일에서는 교회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독일 교회는 나치를 지원하고, 고백 교회는 지하에서 히틀러를 반대하면서 히틀러 암살 계획에까지 참여합니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를 메시아로 격상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제정신이 드니까 엄청난 혼돈에 빠진 거지요. 도대체 우리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냐? 기독교 국가들끼리 말입니다. 신학자들까지도 전쟁에 휘말려 있었으니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지요. 그만큼 성경 해석은 위험한 일입니다. 시대의 천재들인 신학자들까지도 휘말려서 히틀러 쪽은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세우셨다고 보고 연합군 쪽은 하나님께서 히틀러 세력을 제거하기 원하신다고 보는 거예요. 이런 오류는 크리스찬 개개인의 삶에도 계속 찾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66권 전체를 기반으로 각 구절을 해석할 때에만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도 맡기셨다는 이 제자도의 개념이 성경을 보는 가장 중요한 토대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의 논리 중 가장 기본되는 논리가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셔서 일을 시키셨고, 예수님이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일을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 어느 구절을 보든지 이 제자도의 논리를 바탕으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이자 우리에게까지 넘겨진 그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지난 세기부터 나는 세상의 밥이 되고 싶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요. 서구 휴머니즘의 영향입니다.
오늘 오후 프로그램에서도 우리가 기독교 이천년의 큰 흐름과 다양성에 대해서 개괄하게 될 텐데 성경 해석의 변화무쌍한 흐름들을 보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어떤 잘못들을 저지를 수가 있는지 확인할 수가 있어요. 이천년 동안 성경 해석의 사조가 계속 바뀌어 왔습니다. 특히 근대 이후는 윤리도덕에서 휴머니즘으로 바뀌고 있는 시대입니다. 서구 기독교의 큰 흐름의 변화지요. 지난 세기에 진보 기독교가 나와서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윤리도덕은 지배자의 논리입니다. 어느 시대나 윤리도덕은 지배계층이 만들어서 피지배계층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 합리화의 논리는 윤리도덕을 지켜야 우리 공동체가 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피지배민들을 향해 그렇게 설득합니다. 우리가 다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면 윤리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지난 세기에 들어와서 인권이 신장되고 민주주의가 실제로 자리를 잡으면서 변화가 오게 됩니다. 민주주의가 실제로 자리를 잡은 것은 10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여자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것이 1920년이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차별 문제를 다룬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이 1963년, 불과 50년 전에 행해진 연설입니다.
이렇게 최근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바로 대두된 것이 기존 윤리도덕에 대한 반항입니다. 시민 혁명들이 일어나면서 제시된 것이 휴머니즘이에요. 휴머니즘은 윤리도덕과는 다릅니다. 윤리도덕은 자기들의 공동체가 깨지지 않기 위해서 강제하는 수단이지만 휴머니즘은 단위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인류 차원의 평등과 박애를 지향합니다.
서구 주류 기독교가 윤리도덕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는 윤리도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고 요즘 와서는 휴머니즘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상황이 지금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윤리도덕인가 휴머니즘인가?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일이 윤리도덕을 행하는 삶인가? 휴머니즘을 행하는 삶인가?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 밝히셨던 대로 천하 만민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쩨다카와 미쉬파트이고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와 크리시스입니다. 이 공의와 정의가 신약성경에 와서 사랑으로 규정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이지요. 사랑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이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도 사람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서, 즉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내신 그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드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이 그 길을 통과하면서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오셨던 것이고 우리에게도 그 일을 이어받아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정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그런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맨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제자들에게 이렇게 사명을 넘겨주시는데 제자들이 자신들의 힘이나 의지나 능력으로는 이 일을 할 수가 없지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성령을 오심으로 성취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시고 은사와 권능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스스로 의를 행하는 존재로 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의인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놓고 손을 떼시는 것도 아니에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가장 큰 특징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을 꼽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은 독립적인 의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에 있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고 예수님의 표현대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인 것이지요. 즉 In Christ 상태에 있는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고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고 계실 때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31절의 말씀을 봉독합니다.
(마 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고 너희는 하나님께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된 그런 존재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대개들 생각하듯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보장하신다는 말씀일까요? 10장 5절을 봉독합니다.
(마 10:5)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이 넘겨주신 일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사명의 완수를 위해 인도하시고 도와주신다는 말씀인 것이지 우리 인생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마음 놓고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뭐 좋습니다. 복을 주십니다. 왜? 일을 잘하게 하시려고. 이것이 성경 해석의 절대적인 틀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우리가 제자로서 감당하게 되는 사명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9장 7절과 8절을 보시겠습니다.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치장하는 세마포가 바로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옳은 행실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즉 제자로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옳은 행실이에요. 성경의 선은 세상 풍속에 불과한 윤리도덕도 아니고 휴머니즘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 예수님이 넘겨주신 사명인데 다른 사람들을 의인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쩨다카이고 미쉬파트이며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가도록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돕는 것이 쩨다카와 미쉬파트인 것이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의 사랑은 양육입니다. 내가 먼저 제자된 자로서 다른 사람을 제자로 만드는 것이 사랑이에요.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좀 더 행할 수 있게 된 자가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아직 잘 행하지 못하는 자를 쩨다카와 미쉬파트를 잘 행할 수 있는 자로 양육시키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쩨다카와 미쉬파트,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따라서 그 사랑의 본질은 양육인 것이지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를 사랑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섬김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할 터이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일을 우리가 감당해 나갈 때 방해하는 원수가 있어요. 그 원수가 누굴까요?. ‘나’입니다. 내가 원수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과 32절을 봉독합니다.
(요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게 되면 참 제자가 되는데 그 참 제자의 특징으로 진리를 알게 되어 자유케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44절에서는 예수를 믿는 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즉 마귀에게 매인 자들로 규정하십니다. 그런데 앞으로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게 되면 그때에야 너희가 내 제자가 되면서 자유케 된다는 것이지요. 자유하지 못한 자, 이것이 성경의 인간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존재를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라고 규정을 하지요. “너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로다.” 싸르크스를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자기 싸르크스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신앙생활을 자기를 위해서 하는 자들에 대한 규정입니다. 그런 육에 속한 크리스찬을 보고 예수님께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아직도 너희가 마귀에게 묶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이 사람들은 아직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자로 변화되는 과정을 훼방하는 존재가 자기 자신입니다. 내가 제자가 되는 것을 내가 훼방을 해요.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불의의 종으로서 불의한 삶, 사랑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유는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해서라기보다는 약해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유가 없는 것이지요.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받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셨고 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요. 연약해서 상황이 우리를 흔들면 우리가 즉시 실족을 합니다.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는 즉시 Out of Christ 상태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상황에 의해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확 밀려들기 때문이지요.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베드로였지요. 예수님께서 “와라!” 하시니까 물 위로 저벅저벅 걸어서 예수님 앞에 와서 예수님과 대면했는데 눈을 잠깐 돌려 바람이 부는 것을 보는 순간 즉시 공포에 휘말리고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예수님 앞에서도 공포에 휘말리는 것이지요. 그것이 상황에 휘둘리는 연약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상황에 쉽게 휘둘리기 때문에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내 자신이 방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주로 큰 틀, 즉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포와 탐욕이라든가 나를 세우고 나를 보호하는 본능이라든가 또는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존재의 불안정성과 소외의 공포에서 오는 고통이라든가 이런 큰 차원에서 말씀을 드려왔는데 오늘은 좀 현실적인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를 흔드는 상황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돈 문제, 두 번째는 건강 문제, 세 번째는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를 흔드는 상황의 원인들입니다.
이 세 가지에 의해서 우리가 흔들림으로써 제자로서 제자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우리 자신이 나서서 훼방을 하게 됩니다. 푯대를 바라보고 걸어가던 나를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버리게 만들거든요. 어디로 방향을 틀어버리게 만듭니까? 나를 보호하고 나를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게 만듭니다. 제자의 사명을 감당하는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8장 마지막에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성령께서 임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 바뀌고 예수님이 맡기신 일을 시작했어도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순식간에 제자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실 때에만 우리가 제자도를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돈 문제와 건강 문제와 인간관계의 문제, 이 세 가지 문제가 계속 돌아가면서 우리를 흔듭니다. 그럴 때 마귀 핑계를 대기 좋아하는 쪽에서는 마귀가 상황을 나쁘게 해서 우리를 방해한다고 봅니다. 그 시각도 물론 틀린 시각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에요. 이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는 마귀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오는 파도와 같은 것이에요.
따라서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오는 것 자체를 신의 가호로 막겠다는 것은 미신입니다. 필연적으로 항상 오게 되어 있어요. 순서와 그 강도가 조금씩 다를지는 몰라도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는 항상 오게 되어 있고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칙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가 없이 살겠다는 것은 그건 샤머니즘인 것이지요. 잡신의 힘을 빌려서 액땜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샤머니즘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바람에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요.
사람이 살면서 이 세 가지 문제는 항상 수레바퀴처럼 돌면서 우리에게 오는데 이것을 피해서 도망 다니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결국 제자의 길을 못갑니다. 그 사람에게는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를 피하는 것이 급선무지 사명 감당이 급선무가 아니거든요. 다 우리들 이야기지요? 그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존재는 발등의 불을 끄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에 자기 사명에 대해서 생각을 할 엄두조차 못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이 밖에서 마귀가 던진 불이냐, 아니면 내 안에서 나오는 불이냐 하는 거예요. 이 불은 내 안에서 나오는 불입니다. 밖에서 마귀가 던진 불이 아니에요. 우리가 걸어가면서 돌부리에 차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돌부리에 안 차이고 걸으려는 것 자체가 샤머니즘이에요. 신을 이용해서 만사형통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과도 맞지 않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는 우리 평생에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예를 하나 말씀드리지요. 항상 설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베드로 못지않게 현실에서 등장하는 예가 저 자신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탁송을 합니다. 그런데 지방에 있는 중고차 매장에 밤늦게 도착할 때가 많아요. 그럼 대개 매장 담벼락 옆에 차를 세우고 문을 잠그고 키를 운전석 쪽 바퀴 위나 조수석 쪽 바퀴 위에 올려놓습니다. 한 번은 상당히 쌀쌀한 날이었는데 고급차를 밤 늦게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평소처럼 바퀴 위에 열쇠를 놓는다는 게 리모콘 키가 묵직하다보니 바퀴 뒤로 뚝 떨어져 버렸어요. 손을 넣었더니 안 잡히는 거예요. 핸드폰을 조명으로 삼아 비춰 보아도 안 보여요. 그래서 잠바도 벗고 차 밑으로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해서 다 살펴보아도 안 보이는 겁니다. 바퀴 뒤로 넘어가면서 어딘가에 낀 거예요. 손이 닿지 않는 곳 어딘가에 열쇠가 있는 거예요.
옷도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제가 그걸 해결하지 못하면 그 다음날 딜러가 와서 레카차를 부르든 아니면 자키로 퍼 올리든 해야 하는데 그러면 일이 좀 복잡해집니다. 말하자면 거래처가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지요.
깜깜한 밤에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차도 안 다니는데 한 10분 정도 애를 쓰다 보니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냐 하면 제가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거예요.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면서 거대한 공포 같은 것이 다가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사실 거래서 하나 잃어버리는 것이 그런 거대한 공포는 아니지요. 뭐 거래처 하나 떨어져 나갈 수도 있지요. 문제는 안간힘을 쓰면서 몸부림을 치는데도 그 상황이 해결이 안 되니까 그때 확 제 몸에 이상이 오더라고요. 그 즉시 정신을 차리고 ‘내가 지금 수렁에 빠졌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 열쇠를 찾아주세요”라는 기도를 한다면 그건 샤머니즘이지요. 제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상황에서 제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잠깐 조시거나 주무시는 동안 일어난 사건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 머리카락까지 세신 분이시지요. 그렇다면 이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부러 열쇠를 뒤로 떨어뜨리신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마귀가 열쇠를 뒤로 떨어뜨려서 나를 골탕 먹이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러면 그거야 미신이지요.
이건 자연현상입니다. 왜냐하면 제 근육이 부적절하게, 정밀하지 못하게 작동하는 바람에 열쇠가 뒤로 떨어진 것이지 거기에 왜 하나님과 마귀가 등장하느냐는 말이지요. 그 일은 자연적인 인과관계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제가 해결을 못하니까 확 근심 걱정이 닥치면서 마음이 답답해지면서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는 육체의 변화까지 온단 말이지요.
그때 제가 드려야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허락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세요”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고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두 가지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하나는 나의 죄성의 문제에 대한 것인데 나를 회개시키는 데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다시 정신 차리고 제자의 길을 똑바로 걷게 만드시기 위해서 그 일을 허락하시는 경우입니다. 나로 하여금 ‘야, 겨우 이런 일로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흐르고 불안과 공포가 밀려오는가’ 하면서 나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나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In Christ 상태로 다시 깊이 들어가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된 것이지요. 그 순간 공포고 근심이고 모두 다 사라집니다. 뛰던 심장도 가라앉고 거칠었던 호흡도 가라앉고 다 원상태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그 상황을 아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면서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제가 겪었던 그 일은 나의 회개 나의 돌아섬 나의 영성의 증진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인 것이지요.
두 번째 경우는 사명 감당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경우인데 제가 자주 드는 예를 들어 드립니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중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아!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먹고 살지? 내 회사는 어떻게 되지? 이 일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는 거 아닌가?’ 등등 온갖 근심 걱정이 확 밀려듭니다. 그 때 기도를 하는 겁니다. 교통사고는 재앙일까요? 그것이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근심 걱정으로 확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기도하게 되면서 교통사고가 나서 중상을 입고 입원하게 된 이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 상황이 나에게 줄 고통에 환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 속에서 내가 제자로서 사명 감당을 하는 데에 어떻게 쓰일까 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흥미진진해집니다. 내가 병원에서 누굴 만나게 될까? 또 내가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누구가 나를 찾아오게 될까?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에서 하나님께서 내 입술을 어떻게 사용하실까? 초점이 제자도,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이 일이 어떻게 사용될 것인가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걱정과 근심과 불안에서는 당연히 해방되지요.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예를 말씀드리자면 기독교인들이 굉장히 큰 오류를 범하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 저 마귀 새끼 같은 인간을 어떻게 좀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경우입니다. 이게 굉장히 큰 오류입니다. 제가 앞에서 2차 대전 말씀을 드렸지만 결국 양쪽이 서로 그 시각으로 상대방을 본 것이지요. 나치 독일과 연합군이 서로 상대방을 마귀 자식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고 상대방은 마귀 자식으로 본 것이지요. 나치를 마귀 자식이었다고 보는 것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요즘은 이라크 사람들을 마귀 자식으로 보고 무슬림을 마귀 자식으로 보지요.
사람들이 ‘하나님. 마귀의 종노릇하는 저 인간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시각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똑같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물으면서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때도 두 가지 경우가 있지요. 하나는 나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내 영성을 더 깊게 만드시기 위해서이거나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는 상황 자체를 효율적인 수단으로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둘 중에 어떤 것인가를 보는 쪽으로 우리 시각이 맞추어지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받는 고통도 사라지고 그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사라집니다. 이건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세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에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원수 같은 사람에게 떡을 주라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내가 양육해야 할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든 아직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든 내가 양육해야 할 사람이 있고, 다음으로는 내가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상관이 없는 외인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원수 짓을 하든 우리에게 친절하든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든 그런 것을 모두 떠나서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전략적 활용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한금옥 자매님과 카톡을 하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금옥 자매님은 간호사시니까 환자들에게 정성을 베푸는 것이 미덕입니다. 의료인의 미덕인데 그러나 거기서 가치를 추구하게 되면 상당히 잘못된 것입니다. 제가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기를 어떤 위암 환자를 정성을 다해서 고쳐 놓으면 그 사람은 얼마 후에 간암으로 죽든가 교통사고로 죽습니다. 그 사람의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 일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허무한 일입니다.
그 환자의 위암이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로 양육하는데 수단으로 쓰이던가, 아니면 나이팅게일 정신으로 정성껏 치료를 해줌으로써 그 사람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수단으로 쓰이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그 환자를 정성껏 돌봄으로써 병원 안에서 칭찬도 듣고 환자에게서 고맙다는 말도 듣고 하면서 내가 간호사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벌어들이는데 아주 효율적이기 때문에 나이팅게일 정신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가치를 두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다 엉클어집니다. 한금옥 자매님에게 있어서 환자는 양육의 대상이거나 전략적 활용의 대상인 것이지요.
그 사람이 만약 양육의 대상이라면, 그 사람이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에 위암이 참으로 귀한 계기가 되고 그 일에 내 목숨까지 바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나를 분노하게 하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냐 라는 그 시각이 우리를 수렁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육을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깨어있지 않으면 순식간에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지금 저 사람과 이런 문제를 겪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즉시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는 순간 거짓말처럼 빠져나와요.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걱정 근심 두려움 분노 서운함 이런 것들이 순식간에 정말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우리의 영성이 주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성취된 결과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없이 내 인격, 내 결단만으로는 절대 제자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혼자 독립적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옛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도 자기 혼자서는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자기 혼자 제자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의 의미를 확인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8절에서 20절을 봉독합니다.
(마 17:18-20)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때부터 나으니라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이 옮겨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뽕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심긴다고 말씀하시지요. 상황이 180도 역전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간증을 들었었는데 이 말씀을 보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나 자기가 소유한 산을 도로 건설 자재로 쓰려고 캐가는 바람에 큰 돈을 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 다음에 겪은 일들이 궁급합니다. 보나마나 별 환난을 다 겼었겠지요. 이 말씀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상황이 180도로 반전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대사명을 주시는 마가복음 16장에서는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있지요? 미국에서 18세기와 19세기에 실제로 뱀이나 독극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는 순회 전도자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 뱀과 독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8장 11절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인데 이 말씀은 서로를 해치지 않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산이 옮겨진다는 말씀은 거대한 산과 같은 상황이 확 반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 안에서? 내 안에서. 내 안에서 상황이 반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가 제자의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황이 반전이 되지 않으면 그 상황에 휘들리거나 그 상황을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돈 문제 해결하느라고 정신없고, 내 질병 문제 해결하느라 정신없고, 인간관계 문제 해결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제자의 길을 한 발짝도 가지 못하거나 아예 제자의 길에서 떠나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방해하는 원수가 누구냐 하면 나쁜 상황을 일으킨 그 사람이나 마귀가 아니라 바로 나에요, 나.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계속 서로를 권면하게 되는데 돈 문제, 건강 문제, 인간관계 문제로 낙담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공포에 빠지거나 분노에 차 있는 형제를 보면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지체가 그 형제를 권면을 해 줌으로써 그 형제가 공포와 두려움과 근심과 분노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서로를 권면하면서 함께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제자도지요.
영성이 깊어지면 어떤 상황에서도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지만 영성이 깊지 못하면 하나님을 바라볼 때까지 시간이 걸려요. 그 동안에 온갖 고통을 겪는 겁니다. 그때 그런 상황에서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성이 깊은 사람이 지금 헤매고 있는 형제자매에게 큰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도움을 줄 수가 있어요. 그것이 섬김이고 양육이지요. 느닷없이 휘청거리게 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오게 되는데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끌어주면 혼자 걷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굳센 발걸음으로 함께 제자도를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리더는 대단한 분이어서 항상 우리를...." 이렇게 말하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마세요. 둘 중에 하나라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요. 사기꾼이거나 아니면 바보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누구나 순식간에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 서로 옆에서 수렁에서 건져주는 것입니다. 그때의 효율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래서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가야 하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말씀 한 곳을 봉독학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데 그 선이 이 땅의 기름진 복이 아니고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는 일입니다. 돈 문제, 질병 문제, 인간관계 문제까지 모두가 우리가 제자도를 행하는 데에 쓰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회개시키는 일에 쓰임을 받든, 내가 제자도를 행하는데 수단으로 쓰임을 받는 모든 상황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상황인 것이지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니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니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건 미신이에요. 모든 일은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진행되는 것입니다. Out of Christ 상태에서는 그 일들이 우리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지만 In Christ 상태에서는 그 모든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제자도를 온전히 걷게 하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이 선한 일을 위해서 허락된 일들입니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리려고 일어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상황이 나에게 고통스럽다면 지금 내가 Out of Christ 상태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도 위에서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걸어가는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어깨동무를 하고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당겨주며 함께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들이 여러 상황을 맞으며 살아가게 되는데 그 상황들까지도 우리가 제자도를 행하는 일에 쓰이게 하시는 것을 보는 눈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연약한 저희들이 순간순간 수렁에 빠질 수 있으나 하나님을, 예수님을 바라보며 더 빠른 시간에 빠져나올 수 있도록 우리의 영성을 키워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들이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서 함께 푯대를 향해 걸어 갈 때에 서로를 수렁에서 꺼내주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삶을 살며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이를 위하여 저희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더욱 성숙하게 하셔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사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하시옵소서. 그 과정에서 저희들이 주신 사명을 저희들이 잘 감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옵시고 언제나 우리가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제자도를 온전히 걷게 하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저희의 영성을 예수님의 살과 피로 더욱 깊게 해주실 줄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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