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설교집 1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오늘 말씀은 마태복음 16장 21절부터 28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마 16:21-28)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오늘부터 전해 드릴 말씀은 “제자도”입니다. 제자들이 걷는 길이지요. 오늘은 제자도 첫 번째로 제목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입니다.
오늘이 추석인데 추석이 마침 주일이어서 우리에게는 어장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장 관리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를 빠지고 일가친척들과 모여서 차례도 지내고 명절을 즐겁게 보내면서 어장 관리를 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차례도 거부하고 일가친척들의 야유를 받으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일가친척들에게 아주 세상적으로 모범이 되는 모습으로 접근을 하여 후일에 그물을 던질 기회를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아니, 도대체 교회에 무슨 떡을 감춰 놓았기에 저렇게 추석날까지 교회를 가고 난리냐” 하면서 일가친척들로 하여금 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방법인 것이지요. 여기서 어느 쪽이 옳으냐로 접근하면 핵심을 벗어나게 됩니다. 어느 쪽 방법을 취하든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 마음의 중심입니다. 잠언 16장 2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심령을 감찰하신다, 즉 우리의 모티브를 저울에 달아보신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 그 행위를 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를 따지시는 것이지요.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하는 율법주의는 사실 성경과 맞지 않은 것이고 우리가 제자로서 살아갈 때에 효율성을 위해서 아주 자유롭게 방법들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이 그것이지요. 봉독하겠습니다.
(고전 9:19-21)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추석 명절에 일가친척이 모여 전부 한 마음이 되어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일 터이고 또 그것이 우리의 목표지요. 그러나 우리가 또 거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단 말이지요. 일가친척은 됐으니까 그 다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목표를 삼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니까 우리의 어장 관리는 실제로 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참 난처한 경우는 일가친척 사이에 서로 미워하면서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서로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지요. 함께 예배는 참석하는데 서로 사랑이 없고 미움이 있어요. 그럼 예수님을 믿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아무 열매가 없다는 증거가 되어버립니다. 최악의 경우는 어떤 것일까요? 예배에 함께 참석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 상대방을 고자질하는 것이지요. 자기네들 싸움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최악입니다.
오늘 주일이지만 추석인 이유로 우리 형제자매님들 중 예배에 참석 못 하신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지금 이 시간 각자 처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내 모티브를 달아보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그런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와 주장들이 있습니다. 대단히 혼란스럽습니다. 먼저 자기 부인은 사람들이 굉장히 자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말씀 중에 하나지요. 누구나 성경을 볼 때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씀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자기 부인의 의미를 성경에서 확인해야 하는데 대개 그렇지 않고 온갖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합니다. 추악한 욕심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무조건 포기하는 쪽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아예 세속을 벗어난다는 개념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인문학적인 상식을 동원한 잘못된 성경 해석들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성경에서 확인해야 하지요.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경우에는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듣게 되는 “아이고, 저 인간이 내 십자가지 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냥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의 해석에서 대개 나타나는 오류는 희생정신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인내나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확인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자기 의를 가지고 이 말씀을 해석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심각한 오류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에서 그 핵심적인 내용을 보려고 합니다만 우선 이 말씀의 앞뒤에서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1절에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종교적인 특별한 과정을 거치신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고 당시 로마인들의 반역자들을 처형하는 일반적인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에게는 십자가형이라는 것은 너무도 익숙한 현실입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내가 곧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십자가형이라는 공개처형은 얼마나 처참한 일입니까?
그러니 이제 베드로가 펄펄 뛰지요.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십자가에 달리는 거룩한 사명 같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로마에 저항하던 자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수시로 본 베드로가 기겁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그렇습니다. 자기 부인은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자기 부인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일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의 일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일은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실마리는 2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제자도에 대입하면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쳐 좇는 것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 살던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문제는 사랑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거지요.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마리를 결합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도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까지는 대개 진도가 나갑니다. 성경을 해석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여기까지는 대개 진도가 나가는데 어디에서 그 한계에 부딪치게 되느냐 하면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라” 하면 “알겠습니다. 내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해라” 하면 “알겠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를 따르라”고 하면 “알겠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서구 주류 기독교의 한계입니다. 성경의 신비한 약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여기가 한계입니다. 내가 사람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내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한계는 신앙생활을 하는 주체가 나 자신이라는 한계입니다. 신앙생활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신비한 약속으로 들어서지 못한 사람들이 부딪히는 벽이지요. 이 벽을 넘으려면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벽을 넘었느냐 못 넘었느냐에 의해서 싸르크스,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냐 아니면 프뉴마, 영에 속한 크리스찬이냐가 선명하게 갈라집니다. 그런데 그게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영에 속한 크리스찬? 나도 성령 받은 것 아닌가?” 이런 혼란이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선명하게 구분해주는 말씀이 로마서 6장 15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롬 6:15-20)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즉 누구의 종이냐입니다.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지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앞으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겠습니다”라고 할 때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나입니다. 행동의 주체가 나 자신인 것이지요. 결정도 내가 하고 현실에서 판단도 내가 합니다. 그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할 때 “알겠습니다. 이제 앞으로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겠습니다” 할 때 주체가 누구냐 하면 자기란 말이지요. 자기가 자기를 컨트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로마서 설교할 때 말씀드렸던 노예의지의 주인이 바뀌는 부분입니다. “내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효율성 부분만을 다루는 것이고 나를 위할 것이냐 하나님을 위할 것이냐의 가치 부분을 다루는 것은 우리의 노예의지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우리의 자유의지가 가치를 지향하려고 해도 우리 속에 있는 노예의지가 자기 자신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으면 우리의 자유의지가 추구하는 효율성이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효율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오는 목적이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조직신학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직신학이라고 하면 신학자들이 두꺼운 책을 세 권 네 권 쓰면서 하는 거창한 조직신학도 있지만 교회를 오는 이유는 나름대로 조직신학이 생겼기 때문에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아주 엉성하고 유치한 조직신학부터 거창한 조직신학까지 다양한 조직신학이 있는 것인데 시골의 어떤 할머니가 자기 아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도 그 할머니 나름의 조직신학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 내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하면 들어주신다는 나름대로의 조직신학이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조직신학이 다 다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다 다릅니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몇 가지를 구분해서 말씀을 드리는 목적은 우리의 조직신학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속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지요.
첫째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대다수가 그렇지요. 이 땅의 기름진 복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내가 받겠다고 교회에 옵니다. 실용주의 기독교가 대표적이지만 사실은 대부분이 이런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이 조직신학은 성경의 조직신학이 아니고 샤머니즘의 조직신학입니다. 성황당의 조직신학을 가지고 교회에 오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장소만 교회고 믿는 신의 이름만 여호와 하나님이지 마음속에 있는 조직신학은 성황당의 조직신학입니다. 뭐 이 부분이야 우리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그런데 대부분이 그 쪽이라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이웃과 세상을 위해, 즉 휴머니즘적인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니 그런 것들이 보인단 말이지요. 휴머니즘을 조직신학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간 것이 Secularized Theology, 세속화 신학이고 진보 기독교입니다. 또한 보수 기독교에는 윤리도덕이라는 조직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휴머니즘적인 조직신학이나 윤리도덕이라는 조직신학을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은 사실 없습니다. 누구나 다 마음속에 한 구석에는 ‘아! 나도 돈이 많이 생기면 고아원을 지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말씀의 의미를 모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짓들, 그것이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인 셈이지요.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랑, 즉 휴머니즘적인 행위나 윤리도덕적인 행위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사랑이 없으면 모두 쓸데없는 짓에 해당합니다.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도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 한 사람의 문제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백 명 천 명이 모여서 재산을 다 모아도 서울역에 있는 노숙자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이지요. 부자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식의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절실한 문제입니다. 영혼의 구원이지요.
그 다음 세 번째가 이 영혼구원과 관련된 오류인데 나름대로 영혼구원을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영혼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서 혼란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선교사로 오지에 가는 헌신을 하기도 하고 복음 전도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나가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기도 하고 전철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면서 영혼구원에 목숨을 겁니다. 이 사람들은 콘스탄틴 기독교의 조직신학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의 조직신학을 우리가 잘 들여다보아야 됩니다.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콘스탄틴 기독교 조직신학에서 영혼의 구원된 상태의 실체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를 우리가 세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영혼 구원은 최후심판에서 천당이 보장되는 판결을 받는 것. 즉 한 마디로 말해서 내세구원론입니다. 실체는 없고 선포만 있는 것이지요. 본훼퍼 목사가 유럽의 기독교 전통에 대해 “싸구려 은혜”라고 질타한 이유입니다. 그 현실과 괴리된 내세구원론에 콘스탄틴 기독교는 집중해 왔던 것이고 그 반발로 지난 세기부터 휴머니즘을 내세운 진보기독교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콘스탄틴 기독교가 주장하는 영혼구원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은 좀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관념의 유희에 빠져 있는 거예요. 구원의 실체가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구원받자는 선포된 교리, 사실은 관념적 교리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진정한 제자들이 추구하는 구원의 실체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 즉 싸르크스를 섬기던 자가 프뉴마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로 바뀌고 집단적으로는 새로운 피조물들로 이루어지는 한 몸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서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이 구원의 실체에요. 그 구원이 종말 때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복을 구하는 자들이나 윤리도덕적인 삶 또는 휴머니즘적인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들, 그리고 내세 구원을 전파하고자 목숨을 바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하는 자들이 추구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이냐를 우리가 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한 몸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가 빠져 있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존재론적인 구원의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구 기독교의 실체입니다.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생존과 번영에 초점이 딱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의 생존과 번영, 이타적인 사람은 내 이웃의 생존과 번영. 이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끌벅적한데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달라는 사람들이나 누구를 대통령으로 찍을 것이냐를 고민하는 사람들 모두 다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생존과 번영입니다. 어떻게 하면 국방을 튼튼히 하고 전쟁의 위협을 막아내고 외교를 잘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가? 전부 생존과 번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지금 대통령 선거 예를 들었지만 개개인의 일상의 삶도 마찬가지지요. 생존과 번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공부를 해도 그것 때문이고 교회를 나가도 그것 때문입니다. 내세구원이라고 해서 이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샤머니즘적인 조직신학이나 휴머니즘적인 조직신학이나 결국 생존과 번영에만 딱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게 사람의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 일들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든 이타적이든 생존과 번영에 대한 열망을 떨치는 일이지요.
다음으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으로 가는 겁니다. 그 당시 십자가 처형 방법이지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갑니다. 그리고는 처형장에 이르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는데 매달리는 목적이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죽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이웃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자기 문제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해 로마서 8장 16절부터 18절까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롬 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고난이 파쎄마의 번역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치는 몸부림이지요. 주인이 바뀌는 과정에서 오는 몸부림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나를 주인으로 섬기며 살고 싶은데 성령께서 주인이 되겠다고 칼을 들고 달려드시니 안 죽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것이 파쎄마입니다. 반드시 겪어야 하고 끝내는 죽임을 당해야 하지요. 그래야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는 신비가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인 이웃을 위한 십자가는 골로새서 1장 24절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서 고난으로 번역된 단어는 앞에서 본 로마서의 파쎄마와는 다른 들립쉬스라는 단어입니다. 환난으로 주로 번역된 단어지요. 파쎄마와 들립쉬스의 차이는 뭐냐 하면 파쎄마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몸부림인 반면 들립쉬스는 밖에서 오는 환난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들립쉬스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겪으셨던 고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겪으셨던 것처럼 우리 이웃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저들을 위한 애통함이고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는 핍박이지요. 그들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를 소원하는 내가 하나님의 근심으로 신음하고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증인으로서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들립쉬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우리가 지게 되는 십자가의 두 번째 목적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말리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생존과 번영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예수님이 그렇게 죽어버리시면 우리는 어떡합니까? 우리 생존과 번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게 막 뒤엉켜서 예수님을 말리는 것이지요. 그게 아직 진정한 제자가 되지 못해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몸부림을 치다가 주인이 바뀌는 일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내가 무슨 고난이든 감내하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4장 12절을 봉독합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즉 그들이 현세구원과 내세구원을 받도록 해주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겁니다. 들립쉬스, 고난과 환난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본능이 제거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우리의 이웃도 그렇게 되도록 내가 무슨 일이든 감내하여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일에 내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부터 25절까지입니다.
(행 20:22-25)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목숨까지 아끼지 아니하고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진보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사회보장제도가 잘된 휴머니즘이 가득한 그런 유토피아도 아니고, 보수 기독교가 주장하는 예배드리고 흩어지는 지금의 교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주인이 되신 자들이 모여서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현실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마서 12장을 보겠습니다. 로마서의 결론이 12장부터입니다. 6장 7장 8장에서 말씀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인이 바뀌어 의의 종으로 바뀌는 과정도 모두 로마서 12장 이후 하나님의 나라라는 결론을 향해서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12장 1절을 먼저 봉독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리고 4절입니다.
(롬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한 몸이 로마서의 결론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즉 목숨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하지요.
한편 우리가 이 땅에서 완벽한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완벽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종말 이후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 완벽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과 동일한 말씀인 누가복음 9장 23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여기서는 “날마다” 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이 삶은 우리의 매일매일의 현실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날 교회 안에서 행하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 식구들이 모이면 그 안에서 구제와 양육을 행하고 각자 삶의 현장으로 흩어지면 세상에서 사람을 낚고 또 하나님의 나라 한 몸 공동체에 필요한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하루하루 일상의 삶입니다. 우리 삶 전체입니다. 교회에 오면 크리스찬이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인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의 삶을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7:15-18)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모였을 때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구제와 양육을 하면서 형제자매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밖에 나가서는 낚시질을 하고 재물을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이 날마다 한 순간도 빼지 아니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성장해 나가고 또 이곳저곳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이 아닌 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오면 크리스찬이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인 자는 제자가 아닙니다.
한 개인이 은혜를 받아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은 극히 신비한 과정인 동시에 극한의 고통을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 무시무시한 십자가에 비유해서 말씀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일을 사람들이 수시로 저지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루터입니다. 루터는 십자가에 매달리는 데까지는 갔어요. 하지만 다시 내려와 버립니다. 루터는 죄의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했고 그래서 십자가에 올라가게 되었지만 성령의 칼을 맞는 일이 두려워 몸부림을 치다가 도망갈 틈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오직 믿음”이라는 성경해석, 즉 이신칭의론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못되어도 상관없다는 주장이지요. 그것이 바로 루터가 찾아낸 탈출구입니다. 그리고는 거기로 빠져나가 도망가 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루터가 유럽의 수도원에서 가장 계명을 열심히 지키고 가장 모범적인 수도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루터도 틈을 찾아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몇 명만 모여서 한 몸 공동체, 즉 증인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면, 그래서 그 안으로 육에 속한 자가 낚시질에 걸려서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은 그런 환경 속에서 십자가 위에서 파쎄마를 겪을 때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미 겪은 사람들을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이고 그들이 옆에서 힘을 주기 때문이지요. 만약 루터 옆에 증인집단이 있었다면 과연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론을 주장하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파쎄마를 겪을 때 자기 본능이 막 칼질을 당하는데 도망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과정을 넘어선 사람들을 보고 또 그 사람들의 권면과 증언을 들으면서 참고 견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동역자의 사명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지는 십자가지요. 그리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빚진 자의 삶입니다. 이 삶이 얼마나 처절한 삶인가를 로마서 9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 빚진 자로서의 절실함이 바로 십자가에 오르셨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 자들은 자기들을 위해 십자가를 진 그 큰 자들을 보면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 처절한 파쎄마를 견딜 수 있게 됩니다. 소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는 거지요.
루터도 십자가에서 도망을 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이처럼 개인의 영성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연약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눈을 못 보게 하셨다가 보게 하시기도 하고, 직접 명령을 하시기도 하고, 특히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 직접 계시를 받는 일까지 체험하면서 십자가 위에서의 파쎄마를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 정도의 체험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모두 빠져나갈 구멍들을 찾느라고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영성 운동이니 영성신학이니 하는 데에서 주장하는 개인 영성에 기대를 걸어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영성은 파쎄마를 겪지 않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영성입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실체가 없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성은 한 몸 공동체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 삶이 평균케 되는 구제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양육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서만 성경적인 영성이 발견되는 것인데 그 공동체가 없이 개인 영성을 말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전부 뜬구름 잡는 이야기고 관념의 유희고 종교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이지요. 실체가 없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개인 영성에 실체가 어디 있습니까? 설혹 하나님과의 연합이 극대치로 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 개인 차원에서 끝나거든요. 새로운 피조물 개인은 그 영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될 방법이 없습니다. 마치 무인도에 혼자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성경 말씀의 모든 결론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를 향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등장했던 것이구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도 마지막 27절과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왕권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의 같은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9장 1절입니다.
(막 9:1)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성령의 역사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왜 마태복음에서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왕권을 가지고 임하시는 일은 성령에 의해 각자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들이 모이면서 성취됩니다. 왕권이 임하는 것이 현실화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 일이 성취되는 것은 종말 때이고 그 전에는 이 땅에 세워진 작은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에서 적은 무리들에게 실제로 왕권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신 성경의 제자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자들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성취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에 자기가 소용이 되도록 살아가는 자들의 삶을 제자도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불가시 교회라고 규정하며 현실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에 처음에 말씀드린 세 가지 오류, 즉 샤머니즘적인 접근, 휴머니즘적인 접근 그리고 종교주의적인 접근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어거스틴이 큰 사고를 쳤던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로마 교회라는 국가 교회를 보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체로 규정하면 기독교 국가가 된 로마제국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일은 감히 아무도 못하지요. 성경 해석이 그쪽으로 진행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처음 공인했던 콘스탄틴이 엄청난 짓을 했다는 겁니다.
어거스틴 때부터 시작된 이 오류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실체로 그들에게 제시될 때, 즉 하나님의 나라가 Invisible Church가 아니고 Visible Church라는 것이 저들에게 확인될 때 서구 교회의 조직신학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구 주류 기독교의 조직신학이 무너져야 돼요. 반드시 무너져야 합니다. 조그만 귀퉁이에서 우리에게도 그 역할의 일부가 맡겨졌습니다. 퍼즐조각들 중의 하나로서지요. 우리와 같은 퍼즐조각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 곳곳에 많이 만들고 계신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서로 물고 먹으며 다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조금씩 이루어져가는 것을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각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예수님을 좇는 그 날을 소망하며 저희가 나아갈 때에 지치지 아니하고 유혹에 빠지지 아니하고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저들도 소망으로 가지게 되는 일을 이루셔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저희들이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순적하게 만들어 주시고 또 저희들에게 항상 가장 합당한 길을 인도하시고 또 그때그때 필요한 능력을 주시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시옵소서. 감사드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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