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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자도 설교집 2] 무익한 종

하나님아들 2013. 1. 23. 14:38

제자도 설교집 2.  무익한 종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10절입니다. 제가 봉독하겠습니다.

 

(눅 17:5-10)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오늘 전해드릴 말씀은 제자도 두 번째로 제목은 “무익한 종”입니다.

 

지난주에 제자도 첫 번째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가 제자도를 보았고 오늘은 두 번째로 무익한 종이라는 말씀으로 제자도에 대해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사도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예수님께 요청을 합니다. 아주 성경적이지요. 이 믿음, 즉 피스티스는 자기들의 확신이나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제자들이 그 정도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만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믿습니다!” 하는 것은 성경의 믿음이 아닙니다. 피스티스는 예수님께 요청해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스티스는 성경에서 네 가지로 번역이 됩니다. 믿음, 신실함, 미쁨, 충성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충성의 경우는 충성심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래서 그 네 가지를 합친 의미는 ‘믿음직함’이 됩니다. 따라서 피스티스는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한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주시는 ‘믿음직스러움’이지요. 따라서 이 피스티스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피스티스의 실체입니다.

 

그것을 아는 제자들이 주님께 요청을 합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피스티스가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익한 종을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10절이지요.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즉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의 의미는 피스티스가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들로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라는 명령이 아니고 너희가 지금 나에게 피스티스를 더해 달라고 요청을 하는데 후일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너희에게 피스티스가 임하게 될 터인데 그때 너희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존재들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논리의 비약이 엄청나게 심합니다. 제자들이 과연 알아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약이 커요. 그렇지요? 중간에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부분들이 마태복음에서는 상세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함께 보면서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의 말씀인지 지금부터 우리가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무익한”은 “아크레이오스”라는 단어인데 “크레스토스”라는 단어 앞에 부정의 뜻인 “아”가 붙은 단어입니다. 크레스토스는 유용한, useful, 쓸 만한 등의 의미인데 앞에 아가 붙어서 아크레이오스가 되면서 쓸 만하지 않은, 무가치한. KJV은 unprofitable, 즉 “도무지 이익이라고는 내지 못하는”으로 번역했고 NIV는 unworthy, 즉 “무가치한”으로 번역했고, 공동번역에서는 “보잘 것 없는”으로, 그리고 표준새번역은 “쓸모없는”으로 번역했습니다. 다 비슷한 의미지요. 개역성경의 “무익한 종”이 참 좋은 번역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 아무런 이익을 드릴 수 없는 종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6절에서 “겨자씨 한 알만한 피스티스가 너희에게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고 명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엄청난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뽕나무는 육백년까지 자라는 뿌리가 튼튼하기로 유명한 나무여서 예수님께서 뽕나무를 예로 드신 것인데 그런 뽕나무가 뿌리 채 뽑혀서 바다에 가서 심기는 엄청난 일도 너희가 하게 된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너희는 “우리는 아무 쓸모없는, 아무것도 주님께 해드릴 것이 없는 종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마태복음에서 하나하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들이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면서 주님께 요청하는 장면은 마태복음 17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7장 14절부터 나오는 기사에서 간질 때문에 고통을 받는 아들을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데려왔는데 고치지 못하지요. 그런 제자들에게 17장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7:17)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예수님이 꾸짖으시니까 귀신이 나가서 고쳐졌고 19절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마 17:19-20) 이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바로 이 장면이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믿음을, 피스티스를 더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으로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는 뽕나무를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산을 옮기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 피스티스, 신실함이 오게 되면,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운 제자들로 바뀌게 되면 하나님께서 권능을 부어주셔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믿고 사용할 만한 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능력도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과 같은 흐름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쓸모 있는 종이라고 판단하실 때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그런 권능이 임해서 산을 옮기고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 될 때 정작 너희들은 “우리는 전혀 쓸모가 없는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존재로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이어지는 마태복음 18장으로 넘어갑니다. 먼저 1절입니다.

 

(마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어디에 있습니까? 작자 자기가 서열 높은 제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제자는 아무도 없었지요. 그 일은 성령 강림 이후에 진행되는 일이고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라고 요청을 했지만 이 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이루어지지요. 따라서 지금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전혀 변화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제자들도 어느 정도 그 가르침을 깨닫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변하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신 이후의 기록인 사도행전에서부터 바뀐 모습을 보이게 되지요.

 

여기서 제자들은 여전히 육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기는커녕 ‘우리 중에 누가 첫째가 될까?’에만 온통 관심이 가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부분이 육에 속한 크리스찬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싸르크스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항상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나를 보호하고, 어떻게 하면 나를 높이느냐에만 가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당연히 예수님께 장래의 서열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kingdom of heaven, 즉 천국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태가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꺼리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썼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천국으로 vughus한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 이후에 임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이 새로운 피조물로 변하면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누가 큰 존재가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2절부터 3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 18:2-3)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 어린 아이는 보통 생각하듯이 철없고 힘없어 주님만 의지하는 그런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큰 자를 상징합니다. 4절을 보시지요.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 자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는 자와 동일한 자인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는 피스티스가 엄청나게 임한 자입니다. 피스티스가 엄청나게 임한 자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고 그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기를 낮추는 모습이 바로 어린 아이만큼 낮아져 있게 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아직 피스티스가 임하지 않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듣겠어요? 못 알아듣습니다. 그것을 이어지는 마태복음 20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절과 21절을 봉독합니다.

 

(마 20:20-21)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세베데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변화산에까지 올라갔던 제자들이지요. 그런데 자기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께 와서 한다는 소리가 주의 나라가 임할 때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겁니다. 제자들은 전혀 안 변합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우두머리가 되느냐입니다. 그 생각으로 가득 차있는 것이지요. 마가복음에서는 그걸 알고서 나머지 열 제자가 광분을 합니다. 왜 화를 낼까요? 자기들도 높아지고 싶거든요.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앞에 가서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하는 꼴을 못 보는 거지요. 열두 제자가 똑 같은 것이지요. 언제까지?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오실 때까지. 그 전에는 절대 안 변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 중의 본능이고 바로 인간의 본능의 핵심입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본능이고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왜 사느냐?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고별사에서 그 유명한, 그래서 우리나라 중학교 영어 교과서에까지 올랐던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명구를 남겼던 윌리암 클라크 박사가 말년에 광산업으로 일가친척들까지 모두 파산하게 만들고 우울증으로 죽었던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윌리암 클라크 박사가 외친 것이 "Boys, be ambitios for Christ", 즉 그리스도를 위해 야망을 가지라는 것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익한 종이라는 개념을 전혀 모르는 크리스찬들이 하는 이야기의 대표격인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가 꼭대기에 올라가겠다는 거지요. 한 마디로 “하나님도 좋고, 나도 좋고”입니다. ‘내가 꼭대기에 올라가서 내가 천하를 호령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실까?’ 바로 이것이 인간의 탐욕과 복음을 교묘하게 결합한 것입니다. 내가 잘되면 잘 될수록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주장이 전 세계 기독교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 틀에서 못 빠져 나갑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르쳐주시는데도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천연덕스럽게 예수님께 하는 거지요.

 

여기서 “낮추다”라는 동사가 굉장히 중요한 동사입니다. “타페이노”라는 동사인데 레위기 16장 29절에서 31절을 봉독하겠습니다.

 

(레 16:29-31)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칠월의 대 속죄일에 대한 말씀인데 스스로 괴롭게 하고,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할 때 “아나”라는 히브리어 동사를 쓰는데 이 “아나”가 70인역으로 번역될 때 “타페이노”로 번역됩니다. 스스로를 낮춘다고 번역된 것이지요.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나오라는 말씀은 스스로를 낮추고, 즉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오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NIV와 유대교 랍비들의 영어 번역에서 이 말씀을 “deny yourself”, 즉 “자기를 부인하고”로 번역했습니다. 저는 이 번역이 참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괴롭게 하고 나옴과 동시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안식일이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면 죽이기까지 합니다.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기독교도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오류가 널리 퍼져 있었지요. 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세우는, 즉 자기를 위한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장 10절을 보겠습니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의 실체에요. 이 말씀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15절부터 17절을 봉독합니다.

 

(요 5:15-17)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예수님 자신도 일하는 것이 옳다는 말씀입니다. 안식은 자기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일상생활이어야 합니다. 자기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의 실체고 자기 일을 하지 않는 자가 바로 자기를 낮춘 자입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만큼 자기를 어린아이처럼 철저히 낮춘 자는 자기를 위한 행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행위를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찬의 365일은 다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 제자도에 충실한 충성된 종은 자기를 위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는 자이며 그때 성령의 엄청난 권능이 임해서 그 일을 잘 감당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무익한 종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고백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제자도입니다.

 

이 제자들이 이 부분을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예수님께서 등장시키시는 인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본 마태복음 말씀들 중간에 위치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16절부터 22절까지 봉독하겠습니다.

 

(마 19:16-22)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부자 청년이 원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영생의 확보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들 외치는데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바로 이 부자 청년의 심리상태입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가 영생을 얻자는 것이 바로 도무지 변하지 않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고 그 상징적인 인물이 부자 청년인 것이지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쪽으로 가지를 않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잘 보여서 내가 성경에 약속된 것들을 획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의 특징이지요.

 

이것은 착하고 충성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자기 싸르크스를 주인으로 섬기는 자들이 자기를 위해서 하고 있는 종교생활이지요.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더 큰 선행을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네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너의 존재가치를 포기하라는 거지요. unworthy한 무가치한 자로 먼저 바뀌라는 말씀입니다. 너는 네가 가진 재물 때문에 네 자신을 아주 유익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먼저 무가치한 존재로 바뀌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걸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알아들었다고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지요. 왜 못합니까? 육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못합니다. 이 부분이 지난주에 살펴 보았던 “자기를 부인하고”와 함께 가는 부분이고, 오늘 말씀으로는 “자기를 낮추고”와 함께 가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려면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내가 인정한다기보다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실제로 발견하고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역사하시는 과정에서 퍼즐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한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성경을 해석하면서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립니다. 교회에 가보세요. 모두들 하나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고, 우리는 빛의 자녀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피를 흘리게 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등등 예수님과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높이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대단한 존재라고도 말합니다. 우리의 무가치성을 확인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가치가 다시 회복된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인간의 존엄성을 기반으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제자도는 철저하게 자기를 낮춰서 마치 어린 아이처럼 변한 자들, 아무런 가치를 주장할 생각이 없는 자들, 실제로 자기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고 처절하게 확인한 자들, 한없이 한없이 낮아진 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참제자의 모습입니다. 얼마만큼 낮아졌느냐? 자기의 존재가치조차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도 그것에 다르지 않습니다. “너 네가 가진 재물 때문에 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거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줘 버리고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 알몸뚱이만 남은 보잘 것 없는 상태가 되고 그야말로 네가 세상에 존재했는지 아무도 기억해주지도 않는 그런 존재가 된 다음에 나를 좇으라는 말슴입니다. 그때에야 네가 내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이 거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근심하며 가니라. “어이구, 영생이고 뭐고. 영생도 팔자 좋을 때 생각했던 거지. 이건 뭐 내 재산 다 나눠줘 버리고 알몸뚱이가 되라고?” 영생에 대한 관심조차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관심을 두었던 영생조차 포기해 버릴 정도로 자기의 존재가치, 자기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본능의 핵심입니다. 제자란 자기의 존엄성, 자기의 존재 가치조차 인정하지 않는 자입니다. 마태복은 18장 4절을 다시 봉독합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을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잘 감당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을 가장 잘 감당하는 자는 자기 존재의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 자기를 실제로 존재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인식하는 자인 것입니다. 참제자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요즘 신사도 운동이 유행입니다. 제가 몇 일전에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하나 보았는데 피터 와그너가 어떤 사람을 신사도로 임명하는 장면이었어요. 아주 하늘을 찌르더군요. “당신을 신사도로 임명하노라” 하고 선포하는 피터 와그너는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 있고 그걸 받는 사람도 몸을 휘청휘청하면서 손을 들고 자기 딴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받는데 좋아서 죽는 거지요. 자기가 신사도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아주 좋아 죽습니다. 그러고들 있는 거예요. 이런 것이 지금 신사도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특징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서구 기독교가 사실은 그 흐름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온 겁니다.

 

이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은 겸손이 아닙니다. 실체를 발견한 자의 고백인 것이지요.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지요. 실제로는 자기 지위가 상당히 높은데 겸손하게 자기 눈높이를 낮추고 자의적으로 낮은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이지요. 원래 자기는 높은데 말입니다. 고위 큰 자가 어린 자처럼 행세하는 위선을 성경의 겸손으로 착각합니다. 큰 자가 어린 자처럼 행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린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제로 자기의 포지션이 어린 자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크지만 겸손한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벌레 같은 자라는 것을,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본 사람이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겸손과는 정 반대입니다.

 

그리고 부자 청년에 이어서 20장에서 부자 청년 못지않게 헛발질하는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을 하시지요. 마태복음 20장 21절 후반부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20:21후반-23)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잔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여기서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도 마실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고 예수님께서 이 잔을 마실 때, 즉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신 고백이 있습니다. 그 고백을 우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입니다.

 

(마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의 이 절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실 수 있느냐가 해석의 난제입니다. 성경에서 계속 예수님께서 우리의 본이 되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예수님의 절규가 바로 무익한 종의 모습의 극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당연한 존재로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끝까지 남아있는 우리의 아집이 뭐냐 하면 “좋습니다. 제가 벌레라는 것 인정하겠습니다. 제가 어린 아이처럼 되겠습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 것이고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는 거죠?”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남아있는 자기 연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과 천사들의 구경거리가 되어도 좋고 제가 이 세상 끝까지 비참해지는 것 다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 것이고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시죠? 이것이 마지막 남아있는 인간의 자기 연민이에요. 그 자기 연민까지 부정되는 모습입니다.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의 최정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은 사도 바울의 이와 관련된 고백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9장 1절에서 3절입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람들이 왜 하나님께 충성을 합니까? 자기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에 속한 자들이 하는 충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도는 그것까지 포기된 사람이 걷는 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종이고 나는 하나님 것이라는 그 확신 안에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저주를 받아서 내가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나는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것이라는 것 그것까지 포기하는 충성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더라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무익한 종이라고 자기 자신을 고백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논리로만 보자면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에 엄청난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한다는 말은 그 소망과는 완전히 모순됩니다. 이 모순이 풀려야 합니다. 이 모순이 풀려야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참제자의 포지션을 우리가 개념적으로 정리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우선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으려면 사도 바울이 자기 친족을 배신해서라도 구원을 받기 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논리적으로 일관적인 모습이 되지요. 나의 동족이 다 지옥에 가버리더라도 나만은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일관된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실제로 많이 나타납니다. 자기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니까 자기가 구원을 받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교회에 훼방이 되는 사람들을 마구 죽여 없애는 겁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최근에는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 논리의 전개입니다. 역사적인 사건들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들 안에서도 내가 구원받는 것이 종교적 소망으로 딱 자리를 잡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도 사실은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께 칭찬받고 상급을 받기 위한 전략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구원과 상급을 위한 이용물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 목숨까지 바쳐서 충성을 다하는데 그것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앞에서 본 사도 바울의 모순된 모습이 사실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가 실제로 실현된 자의 모습입니다. 나의 존엄성은 물론 나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 다 멸망해도 나는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대부분 크리스찬들의 모습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내가 큰 상급을 받기 위해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고, 그러면 나중에 천국 가서 삼 층짜리 맨션에 금이 어떻고 은이 어떻고.... 이런 이야기들이 다 다른 사람들을 전부 이용물로 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나의 구원과 나의 상급을 위해서. 심각한 오류입니다.

 

사도 바울이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내 자신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 끊어져도 좋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극단까지 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이 박히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치시던 그 절규와 같은 모습입니다. 그것을 본받아서 사도 바울도 그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입니다.

 

피스티스가 임하게 되면 너희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마태복음 17장부터 20장까지에서 보았고 그것의 진정한 본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절규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9장 고백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제자도를 따라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의 존재가치, 우리의 존엄성까지 포기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자기 연민까지 제거된 모습입니다. 그것까지 포기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무익한 종은 레위기에서도 보았듯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 일관되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일을 하지 않는 안식 가운데에서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제자도입니다. 겸손은 위장입니다. 실제로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의 구원에 대한 소망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제자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만 있다면 나의 구원까지도 포기하겠습니다. 저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 끊어지는 것까지도 감수하겠습니다. 이것이 무익한 종의 실체입니다.

 

이 말씀들에서 보듯이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헬라 철학을 기반으로 삼아 세워진 서구 기독교가 얼마나 성경의 말씀과 반대로 가고 있는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극단적으로 아주 적나라하게 나온 것이 바로 실용주의 기독교지요. 그러나 그 흐름은 근본적으로 서구 기독교 이천 년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구원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그 정도로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었던 제자도를 따라서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의 진정한 모습이지요.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말씀을 봉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롬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제물로 드려진 자가 제물의 존재가치를 생각하고 있으면 그건 제물이 아니지요. 우리는 제물로 드려져 버리는 겁니다. 제물로 드려져 버리는 우리의 삶, 제물로 드려져 버리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스티스가 임하면서 이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신비의 극치입니다. 인간의 자기보호본능까지 부정되는 신비의 극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물로 하나님 앞에 드려져 버리는 그 일을 위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고 또 앞으로도 계속하여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용하심으로써 크신 영광을 받으시고 온 우주 차원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이 섭리가 한 발짝 더 진행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어지는 성찬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더욱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수 있는 존재로 바꾸실 줄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들을 선택하시사 산 제물로 드려질 수 있는 그 길을 여시고 우리로 하여금 걷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가신 그 길, 그리고 사도 바울이 따라갔던 그 길을 우리도 따라가게 하시옵소서. 이 벌레 같은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사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 귀한 역사를 이루시옵소서. 이어지는 성찬에서 이 신비한 일이 한 단계 더 진행될 줄을 믿사옵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출처 : 은혜로운 주제별 성경요절
글쓴이 : 김용호전도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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