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준 세우기 - 19. 십자가의 삶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십자가’와 ‘복음’이라는 단어는 알지만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 다 습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매일 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경험하고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십자가 복음이 우리 삶 가운데 매일매일 그리고 순간순간 실제가 되어질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 시대에 잃어버린 중요한 신앙의 실제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기준 앞에 자신이 죽어지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 십자가의 삶의 글이, 지금 지옥으로 떨어져 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서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해결을 말하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처음 구원의 감격과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에게 인도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부으셔서 지금 하나님의 기준 앞에 죽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면, 이 글이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십자가로 인도하고 계시고, 삶 가운데 그것이 실제가 되도록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 앞에 실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단순히 복음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거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1.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복음이 아니라,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복음에 대한 정의가 우리시대에 많이 오해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성과 과학이라는 합리적인 사고가 서구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신학에도 영향을 지대하게 많이 끼쳤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인데, 이성과 과학의 합리적인 사고에 맞게 설명한 것이 바로 지금 흔히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교리가 인격을 대체한 것을 강하게 지적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가 인격을 대체해버린 것입니다.
복음을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하나님이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신 보혈의 공로를 영접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으로 복음을 설명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복음의 일부분입니다. 복음의 핵심이지만 그것 자체로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 되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입니다.
2.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는 성경의 증거 1 - 고전 2:2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이 복음이 아니라, 인격체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복음이라는 구절을 증명하는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2장 2절입니다.
개역개정판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을 지금까지 복음은 예수그리스와 십자가에 대한 사실로 인식하고 많이 해석을 해왔습니다. 중요한 단어인 ‘카이’라는 단어인데 그것을 항상 ‘와(and)’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새번역에서는 ‘카이’라는 단어를 ‘곧’으로 다르게 번역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 2:2)
‘카이’라는 단어가 예수님시대에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와(and)’ 라는 단어와 앞의 단어를 설명하는‘곧’이라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문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서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성경이 정경화 될 무렵에는 ‘곧’이라는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모두 ‘~와’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3장 5절에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과’가 바로 ‘카이 ’라는 단어입니다. 물의 의미를 모든 학자들이 성령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물 즉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해야 바릅니다. ‘카이’는 앞 단어의 설명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알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전한다’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은데 구지 ‘안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이 복음이면 반드시 전한다는 말을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안다’라는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안다’의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알다’라는 단어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 그분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을 동의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3.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는 성경의 증거 2 -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15)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가 아닙니다. 1차적 수신자는 로마에 있는 교회입니다. 이미 복음을 접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놀라운 일을 동의하고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복음이라면, 바울은 무언가 잘못된 말들을 한 것입니다. 성경은 복음을 단순히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이 경험하고 알게 된 놀라운 복음 즉, 인격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이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나누고자 한 것입니다.
4.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는 성경의 증거 3 - 요일 1:1-3
요한은 복음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1-3)
복음이 인격체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이 구절은, 그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보았고, 또 손으로 만져본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들이었다면, 그는 단순히 그것을 들었다고 써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은 모두 똑같은 것으로서, 그가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복음의 핵심이며 가장 기초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기자들은 복음서를 저술할 때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 그분의 모든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이론이 아니라, 바로 인격체 되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것입니다.
5.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는 성경의 증거 4 -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헬라적 의미의 ‘안다’는 뜻은 지식적인 안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적인 ‘안다’의 의미는 항상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몇 가지 지식을 아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만남으로 통하여 경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14:8-11)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적극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을 알 모든 것이 있습니다.
4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이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하나님의 길로 사신 그 모든 삶,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 부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기신 그분이 가지고 계신 비전. 모두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 전부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정한 뜻인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더 이상 나의 죄 때문에 제사가 필요 없어 졌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길로 하나님의 뜻과 의중이 이 땅에 이룰 수 있는지 모든 모범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 있습니다.
6. 복음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이라는 성경의 증거 5 - 빌 3:10-11
바울은 자신의 평생 동안 복음을 알기 원했습니다. 또한 그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동참하고 본받기 원했습니다. 단순히 이론이라면 그는 이론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그러한 복음의 모든 핵심 기초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그 핵심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자신의 평생 동안 알기 원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0-11)
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위해 자신의 최고의 초점으로 두었습니다. 복음은 한평생 우리가 추구하고 알아가야 할 신앙의 본질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 그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는 것이었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는 것이 바로 기쁜소식인 복음입니다.
7. 주님을 알기 힘써야 합니다.
사람은 인격체 되신 예수님을 만날 때 놀라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듣는 것은 사람들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사실을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알기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는 만큼 그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그분에 대한 몇 가지 이론적인 사실만을 전한다면, 아무런 생명이 없는 말밖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삶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이론일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인생을 통해 경험하고 알게 된 복음을 고린도전서 1장3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이 본문은 추측하건대, A. D 54년경 봄에서 여름사이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린도 전서를 쓸 때 까지, 자신이 깨닫고 경험하였던 복음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복음)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예수님을 경험을 통해 만난 복음을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입니다.
복음은 한평생 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삼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는 항상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가 구원 얻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삶에서 날마다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로 인하여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1.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고, 자신이 생명의 떡인 것을 말씀하신 직후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5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다. 이것은, 너희의 조상이 먹고서도 죽은, 그런 것과는 같지 않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3-58)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한국 성경에는 시제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헬라어는 시제가 한국말보다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54절)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단순과거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십자가에서의 구원을 염두에 두신 것 같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그의 대속과 부활을 시인하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칭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한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53절), 세 번째(56절)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라 한 주님의 말씀의 시제는 현제형입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십자가를 경험하였고, 현제도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고, 미래에도 역시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늘 십자가를 경험하고 있는 현제형의 의미입니다. 매일매일마다, 시간시간마다, 순간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 일상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그리스도의 임재가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 있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해결책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뜻하는 것인데, 이러한 십자가의 삶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2. 자신의 처지를 보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신이 얼마나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인지 보지 못하면, 이러한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교리적으로 알고 있고 동의한다고 해도, 매일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자기 속에 어떠한 선함이 없다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이 말씀이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철저하게 보기 전까지는 이 말씀이 자신의 삶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뭐하나 내 놓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없이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신앙은 실제입니다. 이론만으로는 신앙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타락정도를 실감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우리의 전적인 타락을 선명하게 볼 때는, 믿음으로 성경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자신의 처지가 바로 지옥인 것을 하나님의 기준을 통하여 보여주시면, 그 어떤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세우기-12. 회개”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신 하나님 때문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 자신을 어떤 것도 만족 시킬 수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궁극적인 무능함을 인식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나오게 하기 원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저는 18개월(1년6개월)동안 이 상태에 있었습니다. 죽어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존 번연이 경험하였던 기간과 똑같았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였기 때문에 가능해졌습니다.
이 기간에 붙잡을 것은 성경말씀을 진리로 동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성경말씀을 진리로 동의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죄 사함에 관한 진리를 먼저 동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경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지는 경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우리가 정죄당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2) 나의 모든 죄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3)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시키셨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0-22)
4)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4-7)
5)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송사하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았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진리에 동의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지옥에 떨어지고 있을 찌라도 이 진리를 믿음으로 동의해야 합니다.
4. 성령의 조명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서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믿음으로 동의하였다면, 이제는 이것을 성령의 조명으로 믿음으로 서야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론으로 동의하는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십자가 대속의 사건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의 죄가 너무나 커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의 대속의 사건을 경험을 통해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저는 히브리서의 이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몇 번이고 성경말씀에 동의하며 큰 소리로 성경말씀을 외치며 나아갔지만, 계속 나의 마음은 죄로 가득하였습니다. 나의 전적인 무능함과 타락 때문에 하나님께 영원히 가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저에게 용기가 되었고,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갔을 때, 18개월 동안의 죽어지는 경험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이 나의 삶 가운데 크게 실제가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죄 지은 것 생각날 때마다 그렇게 회개하면 되는데, 왜 그런 과정이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런 과정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또 기독교 2000년 부흥 때마다 기록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이와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십자가 이외에 이 전적인 타락한 자신의 모습에 몸서리치는 기간을 종식할 길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삶이 주는 유익
복음을 처음 듣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경험하고 끝나는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의 평생에 경험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험하고 발견하느냐하면,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 되는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보고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 때문에 그 무엇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죽어지는 경험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때, 십자가의 사랑의 크고 넓음을 비로소 경험을 통해 알게 됩니다. 복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내가 죽고 사는 삶이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 열리는, 그리스도와의 임재가 더욱 크게 열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을 경험합니다(모두 같은 말입니다.).
에필로그
저는 요한복음 6장 53-58절까지의 말씀의 의미를 신학대학원 시절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의 가장 큰 고민은 실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으로는 되지 않았고, 아무리 기도해도 실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사랑에 감격하고 저의 처지를 볼 때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십자가를 붙잡았던 과거의 첫 사랑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지나간 것이 오래되었고, 이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참 많은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십 수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기준 앞에 저의 모습을 비춰보게 되면서, 처음 인격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보다도 더 많은 저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무엇 하나 내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철저하게 타락한 나 자신 때문에 18개월 동안 죄의 몸서리를 치며 살았습니다. 그 기간을 통해 저는 복음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크고 무서운 죄의 경험을 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저의 인생의 유일한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기준세우기를 통하여 신앙의 본질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가장 먼저 다루시는 것이, 자신의 선함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고뇌의 기간이 시작되면, 고뇌의 기간의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저의 이 글이 힘이 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정리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저를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
카페 회원들이 하나님의 기준위에 영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유익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 혼자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기준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좋은 충고와 가르침이 이 글을 더욱 알차게 할 것 같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 등을 통해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위 내용을 정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조금씩 내용이 발전하고 다듬어 질 것을 소망합니다.
김바울 선교사 // 다음카페 //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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