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주의 길 닦기(2)-산 낮추기(눅3:3-6)

하나님아들 2013. 1. 10. 16:39

주의 길 닦기(2)-산 낮추기

눅3:3-6

▶ 경부고속도로 건설 - 난공사 당제터널에 관한 일화 - 정주영 회장의 회고에서 :

“1968년 2월 1일, 우여곡절 끝에 경부고속도로 첫 번째 톨게이트 근처에서 발파 음을 터뜨려 기공식을 가졌다. 박대통령도 나도 가슴에 벅차오르는 흥분과 감동을 감출 수 없었다. 4백30억 원의 최저 공사비로 4백28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건설한다는 것은 국가로도 하나의 모험이었지만, 건설회사로서도 까닥하다가는 결손을 보고 세상 웃음거리가 될 위험 부담이 큰일이었다. ---

방법은 공사비를 최대한 줄이는 길은 공기를 앞당기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차에 실려 가면서 잠깐씩 눈을 붙였는데, 차 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 울산조선소 건설에까지 계속되어 결국은 목 디스크가 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지프차에 타고 잠을 자면서 지프차는 계속 공사장 부근을 빙빙 돌게 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기능공들이 내 지프차만 보면 게으름을 못 피우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옥천 공구 당제터널 공사가 나를 가장 당혹시켰다. 옥천군 이원면 우산리와 영동군 용산면 묘금리 사이의 4킬로미터에 소백산맥이 가로놓여 우리는 터널을 뚫고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 지층이 경석이 아닌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었다. ---

당제 계곡 쪽에서 20미터쯤 파들어 갔을 때, '와르르'순식간에 벽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피할 틈도 없이 낙반 사고로 인부 셋이 죽고 하나가 부상당했다. 그 후로도 낙반사고는 빈번했고 용수 때문에 바위를 들어내던 인부들이 십여 미터씩 나가떨어지기도 했다. 공사 진도는 하루에 많아야 2미터 정도, 나쁜 날은 30센티미터가 고작이었다. 잦은 낙반 사고에 위험을 느낀 인부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고,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던 느티나무를 벤 군대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떠나는 인부는 더 늘어나고, 따라서 임금 은 갑절이나 올랐다. 그러나 갑절의 임금에도 필요한 노동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았다. 공사 진행은 2개월 가량이나 차질이 생기고 있었고 준공을 반년도 채 남겨놓지 못한 때였다.

6백여 대의 중기와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트럭을 동원했으나 공사 진척은 눈에 띄지 않았다. 터널 공사는 차치하고 험준한 협곡에 진입로를 만드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금강을 건너는 가교도 놓아야 했는데 비가 조금만 와도 설치해놓았던 가교가 떠내려갔다. 무려 열세 번의 낙반 사고를 겪고 공기는 두 달밖에 안 남았는데 하행선은 5백30미터, 상행선은 겨우 3백50미터에 머물러 있었다.

기한 내에 경부고소도로 전 구간 개통이 가능하냐가 이 당제 터널에 달려 있었다.

박대통령의 독촉과 성화는 호되었다. 나는 흑자를 포기하고 현대건설의 명예를 선택하기로 했다. 우선 단양시멘트에 보통 시멘트보다 스무 배나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 생산에 전력투구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단양시멘트밖에 조강 시멘트생산 능력이 없었다. 단양에서 당제터널 현장까지 2백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시멘트 수송을 하자면 운임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었으나 적자를 각오한 끝이었다. 작업 조는 2개조에서 6개조로 늘어나 5백여 명의 인부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굴을 파들어 갔다.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돌관 작업'이었다.

이렇게 하여 3개월이 소요될 공사가 25일 만에 끝나서 1970년 6월 27일 밤 11시, 당제터널 남쪽에서 '만세'가 터졌다. 이로써 경부고속도로의 마지막 공사이자 난제의 공사였던 당제터널 상행선이 개통을 보게 되었다. 1969년 9월 11일에 착공한 지, 2백90일만이었고, 마침내 경부고속도로 전장 4백28킬로미터의 완전 개통이었다.”

이 일화는 길 닦기에서 산 문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어렵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주님의 길을 우리 마음에 닦는데도 마음에 높이 솟은 산들을 뚫는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에서 깎아 내야 할 산들은 무엇일까요?

 

1. 교만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여기의 '산' 은 교만을 가리킵니다. 산이 낮아진다는 것은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열등감이 자신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면, 교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요소입니다.

성경에는 죄에 대한 단어가 1,100 가지가 나오는데 두 번째로 많은 단어가 '교만' 입니다.

교만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왕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가 조심하라”(고전10;12)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느니라”(잠 29;23)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 사울은 다른 사람보다 머리만큼 크다고 말했습니다. 죽을 때 머리가 잘려서 죽었습니다. 교만한 것만큼 깍여집니다. 올라간 산만큼 깍아야 길이 됩니다.

▶ 남의 이야기를 하기 좋아하는 여 집사가 있었습니다. 이간질시키기는 데는 천재요, 말을 만드는 데는 수재요, 말을 보태는 데는 귀재였습니다. 뻥쟁이로 자기 자랑하는 데는 타에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 교회는 항상 그 집사 입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본인도 자신을 잘 알기에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기도도 많이 하고 울기도 엄청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다가 하나님 앞에 심판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근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가 혀를 잘라서 제단에 바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혀는 제물로 바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집사님은 집으로 돌아와서 혀를 잘라 자기 집 개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자기 개가 자기 혀를 씹어 먹는 모습을 본 후 평생 벙어리로 살았습니다. 습관화된 자기 죄를 이겨보려는 처절한 결단으로 자기 습관을 고쳤습니다. 산을 송두리째 깍아 버리는 결단입니다.

 

교만은 신앙의 적입니다. 마귀로 만드는 것이 교만이라면,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만의 높은 산을 깎아 겸손의 평지로 만들 때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십니다. 그러므로 높은 산과 같은 마음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산들은 낮아져야 합니다. 마음의 높은 산이 무너져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티끌만도 못한 추한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십자가 앞에서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약4: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눅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김제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님(1867-1919)(조세형 국회의원 조부)이야기입니다. 1905년에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금산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과거에는“두정교회”라고 했는데 그 교회가 세워진 동기가 아주 은혜롭습니다. 당시 김제 용화마을에는“조덕삼”이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분은 전주지방에서도 큰 소리를 칠 정도로 큰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가 테이트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듣고 1905년 봄부터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 예배를 보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산교회의 시작입니다. 여기에 이 집의 마부요, 머슴인 이자익(1882-1959)이 주인 조덕삼과 함께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1906년 5월 30일 주인과 머슴이 함께 세례를 받았고, 또한 한 주후에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덕삼은 조금의 불만도 없이 이자익과 함께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면서 금산교회에서도 한 명의 장로를 뽑게 되었습니다. 장로 후보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인 조덕삼과 이자익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조덕삼은 이자익의 상전이고 나이도 15살이 많았으며 금산교회의 터를 마련해준 인물인데 투표결과 머슴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자익이 장로가 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상전인 조덕삼이 이자익의 설교를 들어야 하고, 함부로 반말도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머슴을 도와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교회가 웅성웅성했고 갈라지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조덕삼 집사가 테이트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서 교인들에게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 하인이었던 네가 장로라고? 따로 나가서 교회를 세워야 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자익이 자신의 하인이며 마부지만 많은 교인들에 의해 장로로 선택이 된 날부터 조덕삼은 장로 이자익을 겸손히 받들어 섬겼습니다. 이는 장로다운 장로였기 때문입니다.

조덕삼은 이처럼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뿐만 아니라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 신학공부를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1915년에 자신의 머슴이었던 이자익을 금산교회로 모셔 당회장 목사로 깍듯이 대접을 했습니다. 그런 장로님이 있었기에 겸손하게 교회를 섬겼던 이자익 목사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로교 총회장을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그 훌륭한 인품과 겸손의 모습을 통해서 자자손손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 품고 겸손하면 주님이 복을 내려 주십니다.

▶ 빌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이 낮아지셔서 우리를 섬기신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주의 사랑으로 섬기며 살기 원합니다. 겸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 이 교만을 깎아 내는 데는 말씀이라는 도구로만 가능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불순물을 불태워버리는 불이요, 교만이란 바위를 쳐부수는 방망이라.”(23:29)하였고,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양날 선 검보다도 더 날카로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것을 드러내게 한다.”(4:12)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만이란 마음의 수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교만이란 언덕과 요지부동의 바위 같은 교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콤프레샤로 뚫고 폭발시켜 교만의 언덕이 낮아지게 해야 비로소 겸손의 주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찾을 수가 있고 그 사람의 마음에서 탄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마음의 교만을 잘 깨트려 쓸어 내어 주님을 모시기를 축복합니다.

 

2. 탐욕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엔 우리가 쌓아 온 탐욕, 정욕, 욕심의 산이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마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벧후2: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4: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 옛날 바닷가에 어떤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그가 바닷가에 나가기만 하면 날아와서 어깨나 손위에 앉곤 했습니다. 그는 그 해오라기 얘기를 아내에게 했습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잡아올 마음을 먹고 이튿날 바닷가에 나갔더니 해오라기는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심이란 이렇게 겉으로는 아닌 체하면서 속으로 품고 있는 사심(邪心), 탐심입니다. 예로부터 조류(鳥類)는 인간의 기심에 예민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한말, 헌종(憲宗)-철종(哲宗)-고종(高宗) 3대를 거쳐 어전에서 판소리를 읊었던 이날치(李捺致)라는 명창(名唱)이 있었습니다. 이 명창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다는 시인(詩人) 임규(林圭)는 이렇게 적어 남기고 있습니다. `어릴 적 고향인 익산(益山) 근처 심곡사(深谷寺)에서 이날치의 새 타령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가 새 소리를 낼 때마다 뻐꾹새인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은 산새들이 날아들어 그를 에워싼 것을 보고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신앙이나 예술이나 수양에서 기심을 없애면 신묘한 경지에 이르러 새와 사람 사이에 격의가 없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사람을 보고 피하는 것은 사람이 권욕(權慾)이며 이욕(利慾), 명욕(名慾), 음욕(淫慾), 위선, 시기, 모략, 음모...등 온갖 잡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 마음에 탐욕, 정욕, 욕심의 산이 있으면 오시지 않는 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 탐욕, 욕심을 깎아 내는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갈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3. 염려의 산을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들이 마음속에 쌓는 또 하나의 산은 염려, 근심, 걱정입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12: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눅12: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눅12: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빌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티벳의 격언 “해결될 문제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이 안 될 문제라면 걱정해도 소용없다."

 

▶ 옛날 중국의 기 나라에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늘이 무너질까봐 두려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신경 쇠약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뜻의 기우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걱정은 하면 할수록 끝이 없습니다. 혹시 지진이 나면 어쩌나. 전쟁이 나면 어쩌나, 지구의 온난화로 홍수가 나면 어쩌나.... 걱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업이 불안해서, 자녀의 진로 때문에 가정 문제 등 우리의 의심과 걱정은 끝이 없습니다.

▶ 사소한 일에도 늘 걱정을 하며 사는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세상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듯이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의 절친한 친구가 적잖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 “오늘은 불안해 보이지 않는군.”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 “요즘 한 달 내내 걱정을 하지 않았다네.”

“정말인가? 어쩐 일인가?” - “간단하지. 나를 위해서 대신 걱정해줄 사람을 고용했다네.”

“자네 지금 뭐라고 했는가? 그런 사람을 어디서 찾았는가?”

“신문에 광고를 냈지.” - “그랬나? 뭐라고 광고를 냈는가?”

“‘와서 내 대신 걱정을 해주면 하루에 백만 원씩 주겠음’이라고 냈다네.”

그러니까. 그건 그 사람이 걱정할 문제니까, 난 이제 걱정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하나님이 대신 걱정해 주니까요,

▶ 행복의 척도는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심을 이기는 힘이 얼마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근심은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발전을 위한 약이 될 수도 있고 인생을 파괴하는 독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심을 극복하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근심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 좋은 처방이며, 부지런히 자기 생활에 충실 하는 태도가 근심을 치유하는 가장 훌륭한 의사입니다. 흐르는 물속에 이끼가 낄 틈이 없듯이, 땀 흘려 일하는 자에게 근심이 찾아올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 이제 그만 걱정 근심, 염려 모두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주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 여러분 마음에 교만의 산, 탐욕의 산, 염려의 산을 이 자리에서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출처 : 목회자의 요람 한서노회
글쓴이 : 다비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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