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죄에 대한 연구(속)
하나님 때문에 뉘우치지 않는 죄인들이 죄 때문에 야기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정욕의 구덩이로 던져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단호한 사역으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버림을 당한다. ‘더러움’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는 음탕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써 이방인의 본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죄인은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죄인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며 구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을 말해 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다.
골로새서 3장 5-6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온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이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포기하시어 그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적 부정으로 탐닉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대 문명이 성적개방으로 인한 자유분방한 생활의 현상이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하게 하는 구절이다.
(8) 로마서 1:25
① οἳτινες μετἠλλαξαν τὴν ἀλἠθειαν τού θεού ἐν τῷ ψεὐδει, καὶ ἐσεβἀσθησαν καὶ ἐλἀ-
τρευσαν τῇ κτὶσει παρὰ τὸν κτἰσαντα, ὅς ἐστιν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ἀμἠν.
②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created things rather than the Creator--who is forever praised. Amen.
③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④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고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더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5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추가된 자세한 설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려두심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재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렇다. 그들은 조물주보다 오히려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다. 그러므로 24절의 징계를 받을 만하였다. 25절 하반절의 “카이”(καὶ)는 설명적이다. 다시금 “진리”(ἀλἠθεια)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혹은 그의 참된 본성이 아니라, 열려진 하나님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거짓’은 인간의 기만행위 혹은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거짓 신’이 아니라, 특별히 이방인의 종교에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가리우는 사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하나님의 진리의 본질을 사기를 쳐서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물주와 피조물을 나란히 두고서 그들은 피조물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παρὰ” 는 원래 비교급의 문장에서 ‘...보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대신’을 의미한다. 이교도들의 피조물을 신격화한다는 사실에 바울은 놀라 유다의 관습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기릴 뿐 아니라 꺼림직 하여 그러한 가증스러운 사실을 멀리하고, 아멘으로 그의 진술을 맺는다.
25절 하반부에서 바울 사도가 진술한 바와 같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으며(사 43:21), 찬송을 결코 우상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다. 조물주 하나님은 선부 하나님만을 일컫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단일한 분은 아니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다.
3. 본문의 논증적 검토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롬 1:8-17)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 즉 바울이 로마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그처럼 방문하려고 애쓰는 이유와 로마서의 주제에 대한 대 선언의 말씀이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롬1:1-15). 이어서 바울의 복음의 주제인 복음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롬 1:16-17)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 후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한다(1:16-1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義)의 선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이 바로 그 주제였다. 로마서의 서두와 서론에 이미 바울이 로마 교회에 증거 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이 잘 반영되어 있었음을 상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감추어졌다가 이제 드디어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즉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벌써부터 로마서 서두와 서론에서 언급되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롬 1:16)이다. 로마서 서두의 이 구절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소식을 오직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소식으로 해석하고 전개했다는데 있다. 이 가르침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통의 유산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독특한 창작물이다. 바울이 모든 원시 그리스도교와 결부시킨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 가르침의 방향에서 앞세우고 반성하면 개작하고 그 의미에서 다진 곳은 이 외에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이 가르침은 바울 사도를 유대교 측의 원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그리스도교 역시 그를 비난하는, 그리고 이방인으로 만든 원인 되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것을 통하여 만민의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성에 처음으로 본연의 신학적 근거를 주었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는 신의 ‘의’의 계시가 복음에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우선 그리고 동시에 신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 상실을 거론하고 전개하는 방식으로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이 계시는 생명에로의 진의 부름, 즉 신의 율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핑계’하지 못하고 그의 분노가 그들 위에 임한다는 데서 분명해진다(롬 1:18:21). 복음의 휘황한 빛에서 율법 아래의 인간의 존재는 신 앞에서의 자기 상실로 드러난다.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언제나 복음의 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지금껏 어떤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에 의해서도 그렇게 심오하게 철저히 거론된 적이 없던 인식, 바로 이 성스럽고 선한 율법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부각된 것이다. 이미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작용임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1) 보편적 죄성에 대한 반론
모든 인간은 범죄자라고 하는 죄의 보편적 인식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롬 5:12-14이다. 본 문단에서 모든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범죄한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개개의 인간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모두 특별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개개의 인간에게 각자의 삶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만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담이라고 하는 하나의 인간 안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라도 아담을 봇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롬 5:12 이하에서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범죄를 모방하여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첫 인간 아담이 범죄할 때,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같이 동참하였다는 뜻에서 이를 원죄라고 하는데 아담이 범죄할 때, 온 인류가 그 죄를 유전받아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음을 말하며 이것을 ‘죄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서 1:18-3:20에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울의 사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 하고 있다. 특히 엘리오트(Neil Elliott)는 로마서 1:18-3:20은 단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첫째,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는데, 동일한 문맥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8 이하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1:18-32에 있는 이방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오직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들만 언급하고 있다(1:18). 그들은 "핑게를 댈 수 없다"(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1:21). 참 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린 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1:23).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예배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끝났다(1:25). 로마서 1:18-2:29에서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죄인이며 또한 핑게치 못할 것임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으며, 또한 문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죄인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게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기준으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판단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결점은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로마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같은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cf. 롬 2:1). 바울 역시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다(롬 3:21-26).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또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기 위해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며 그리고 그러한 순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구약의 희생제사로서는 더 이상 속죄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죄 사함을 가져다준다. 로마서의 초점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본문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인간의 파멸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 1장18 이하에서 이 물음에 대하여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 1:18) 데 있다. ”이는 신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나타나 있음이라. 이는 신이 이를 그들에게 나타냈음이라. 불가시한 본질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창조이래 그 만든 것들에서 이성의 눈에 보인다”(롬 1:19-20). 이것은 그리스적 유대적 지혜의 언어이다. 그러나 바울은 반성들로 비로소 그 길을 열어야 한다는 가능성에 관례 호교적으로 교육적으로 말하지 않고 즉석에서 고발하면서 인간들을 향하는 현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신을 알되 신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그들의 무식한 마음이 어두워져 있다”(롬 1:21). 그러므로 신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은 인간은 신에 의해 밝혀진 피조물 한 가운데 서있는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하는데 그의 실존은 지금 무서운 역용(逆用)에 “내맡겨져 있다”(롬 1:24f).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할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역용은 인간이 종교라고 부르는 것 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거칠어지고 반자연적인 생활은 지금 죄악과 숙명이 합쳐져서 신의 진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서 제1장에서 이방인과의 관련 하에 포괄적으로 진술되었는데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적중되는 만큼 경건한 유대인들도 함께 포함된 것이다. 그 화살은 역시 유대인들에게 향해졌고 유대인 자신을 적중시킨다. 즉 유대인에 대한 고발은 그들에게 위임된 구약성서 및 모세 율법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가된다(롬 2-3장).
이렇게 하여 바울 사도 유대인의 바리새적 특권을 압살하여 버린다. 왜냐하면 신의 율법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방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롬 2:14; 빌 3:6). 그러나 열심 있는 실천도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언제나 신에 대해 자신을 막고 자기 자신에 매여 있다. 바로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야말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율법에 매여 있는 자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의해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열 수 있다고 오해한다.
루터가 오랜 추구 끝에 얻어진 결론은 엄격하신 하나님이 심판 때에 믿는 자에게 요구하는 ‘의’가 아니라
(3)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에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선언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런데 바울은 바로 뒤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듯이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 나타난다. 바울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로마서 1:19 이하와 32절의 빛 아래서 마땅히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의 산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에 의하여 죄의 보편성의 무서운 성격이 확정되고 드러났을 때 이 죄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죄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거스려 참여하는 일종의 본성적 힘이니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인간이 희생되는 일종의 운명이나 혹은 인간이 포함되는 자연적인 파멸의 과정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정하신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죄의 결과가 뜻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 그 자신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단순한 심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느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철두철미 하나님 자신의 의와 거룩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심판하는 분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한, 우리 위에 내려진 심판이다. 우리가 “불신(不信)의 비신(非神)” (롬 1:18)에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꺼려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미 분별력을 갖고 있다는 조짐이다. 그러나 신적 진노의 마지막 결과는 부활의 믿음 없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과 모순되게 이 세계의 현존과 상존을 긍정하는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다. 자신의 진노 가운데서의 하나님, 우리를 참담하게 여기시는 분, 우리를 외면만 하시는 분, 우리에게 ‘아니다’ 만을 말씀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 모두에 의해서 다만 유보 아래서만 불러질 수 있는 그러한 분- 곧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마지막 말일 수 없다. 그 진노가 그 분의 참된 계시일 수 없다. 비신은 결코 하나님이라고 불리어질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마주치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비신이다. 불신앙 역시 하나님과 부딪힌다. 우리가 믿음 대신에 화근만을 택하는 한, 그 세계는 자체의 절대적 불가의성 가운데서 하나님 진노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앙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망령되게 일컬음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밖에, 그리고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선언은 그것이 믿음에 대한 의의 계시와 함께 이미 지금 종말론적 실재로 말해지고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의 중요한 첫 단락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 즉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 대한 주제의 정의를 내린 다음, 다음과 같이 강한 논조로 둘 가운데 하나를 택일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나니.”
로마서의 한 단원의 출발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 선언은 마땅히 17절에서 결정적으로 선포된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의 계시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비로소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함께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 안에서 죄에 대하여 내려지게 되어 있던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고 실행되어지고 있다. 바울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진노의 실제작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구원시간에 묶여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의 대조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계시를 서로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의 특색을 보다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적인 시위(示威)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의와 죄의 사면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노와 심판의 실행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후자는 또한 구속과 영생은 복음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그 의의 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의 증명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에(γἀρ; 18절) 하나님은 의를 주신다”라는 식으로 로마서 1:17과 1:18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도출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는(롬 1:18) 믿음에 의한 의를 주시려는데 대한 동기가 아니고 오히려 이 주어진 의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의 증명이다.
(4) 맺음
죄가 가져다준 인간의 모든 부패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망이다. 이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삯이다(롬 6:23). 둘째는 죄에 대한 속박과 도덕적 무능력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적인 혼돈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이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라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사망은 완전히 만개 된 죄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선고이며(롬 5:12ff, 18)동시에 죄의 자연적인 그리고 내적인 귀결이다. 말하자면 죄는 사망을 지향하며, 그 사망 안에서 죄는 왕 노릇 한다(롬 5:21). 사망은 곧 자기의 육체(죄)를 위하여 심는 자가 거두는 열매이다(갈 6:8; cf. 롬 7:5). 그러므로 사망은 죄의 마지막이다(롬 6:21). 따라서 사망은 단순히 생의 종지부를 찍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부터 전도(顚倒)되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죄의 부패에 대한 두 번째 일반적인 서술은 인간이 되에 의해, 그리고 죄 아래서 자신을 발견하는 노예감, 무능력, 죄의 포로감이다. 죄 아래 있게 되는 것, 죄 아래 포로 되는 것 혹은 죄 아래 예속되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 가져오는 운명이다(롬 3:9; 갈 3:22). 죄는 거듭하여 일종의 인격적 세력으로, 곧 인간이 노예로 팔려서 그리하여 그의 요구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의 주관자로 나타나고 있다(롬 7:14).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바울의 죄의 교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Ⅳ. 결론
로마서 1:18-2:29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1:18-32에 있는 이방 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세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아 버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은 핑계를 삼을 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곧 철저히 나타나게 된 저 이탈은 즉시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혼동, 그리고 얼마간은 유희적인 혼동일 수 있을 것이며 한층 더 피상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진리의 그득함 속으로 해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가능성이 주어지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게 되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리워진 안개는 먹장구름이 되어 양극 자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우리가 신이라고 칭하는 저편에서 종종 불리어지는 마지막 비밀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고의 구체적인 그 비밀은 승리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밤의 지혜”(롬 1:22)이다. 밤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의하여 계속 잇달아 부정되는 관찰, 곧 인간 제반사의 평면적 관찰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밤의 지혜는 인간의 가로막혀진 길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보고 있으며, 그러한 길의 방향과 목표의 의미에 대해서 불분명한 상태에 있지 않다. 밤의 지혜는 그 원인을 알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보고 있다. 그러나 밤의 지혜는 ‘정지’라고 하는 명령을 자기에게 떨어지도록 감행하지 않는다. 곧 인간적 죄성에 대한 고발은 자신의 창조자를 망각하는 인간의 행로를 항상 동반한다. 이러한 망각의 결과와 우리의 밤의 유랑의 마지막,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토록 분명히 주지되는 곳에 어찌하여 그 망각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죽음은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정이요,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의 극복과 갱신을 지시하는 것, 아니 지시하는 그 모든 것은 다름이 아닌 다만 하나의 죽음으로서 밖에는 나타날 수 없다. 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인간은 죄의 인간이다. 죄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인간에 대한 원칙적인 규정성이요 입장이다. 죄는 권력(롬 5:21)이니 곧 다름 아닌 그에 의하여 세상의 인간이 지배받고 있는 그러한 권력이다. 개개인 인간의 죄는 이러한 정황의 분명한 명시화로서 바로 인간이 처해 있는 정황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그 무게에 대하여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칙적인 규정성과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죽음이 죄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근원적인 죄, 비명시적인 죄로서 이것을 통하여 죽음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생명으로서 특징지어진 하나님에 대한 인간관계의 훼손이다. 이것은 하나의 죄과로서의 죄요, 운명으로서 죽음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진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죄라고 말하는 바울 사도는 이어서 참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에게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질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고 교인들의 신앙이 대상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인간 내면의 죄성 때문에 스스로 죄악과 타협하는 것이다.
※ 참고문헌
1. 국내서적
김명수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 서울: 한국성서유니온,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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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때문에 뉘우치지 않는 죄인들이 죄 때문에 야기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 악한 정욕의 구덩이로 던져버림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단호한 사역으로 인해 그들은 마침내 버림을 당한다. ‘더러움’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이 말은 유대인에게는 음탕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말로써 이방인의 본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죄인은 이방인으로 취급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것은 죄인을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며 구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모습을 말해 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라고 하겠다.
골로새서 3장 5-6절은 하나님의 진노가 나온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이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들을 포기하시어 그들이 자신의 악함으로 멸망당하는 것을 내버려두신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제적인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적 부정으로 탐닉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현대 문명이 성적개방으로 인한 자유분방한 생활의 현상이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는지 성찰하게 하는 구절이다.
(8) 로마서 1:25
① οἳτινες μετἠλλαξαν τὴν ἀλἠθειαν τού θεού ἐν τῷ ψεὐδει, καὶ ἐσεβἀσθησαν καὶ ἐλἀ-
τρευσαν τῇ κτὶσει παρὰ τὸν κτἰσαντα, ὅς ἐστιν εὐλογητὸς εἰς τοὺς αἰώνας΄ ἀμἠν.
②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created things rather than the Creator--who is forever praised. Amen.
③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④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고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더 섬겼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5절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추가된 자세한 설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버려두심에 대한 이유가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재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렇다. 그들은 조물주보다 오히려 피조물을 경배하고 섬겼다. 그러므로 24절의 징계를 받을 만하였다. 25절 하반절의 “카이”(καὶ)는 설명적이다. 다시금 “진리”(ἀλἠθεια)는 하나님의 속성이나 혹은 그의 참된 본성이 아니라, 열려진 하나님의 현실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거짓’은 인간의 기만행위 혹은 추상적으로 표현해서 ‘거짓 신’이 아니라, 특별히 이방인의 종교에서 진리를 객관적으로 가리우는 사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의미는 하나님의 진리의 본질을 사기를 쳐서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조물주와 피조물을 나란히 두고서 그들은 피조물을 더 좋아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παρὰ” 는 원래 비교급의 문장에서 ‘...보다’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다만 ...대신’을 의미한다. 이교도들의 피조물을 신격화한다는 사실에 바울은 놀라 유다의 관습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기릴 뿐 아니라 꺼림직 하여 그러한 가증스러운 사실을 멀리하고, 아멘으로 그의 진술을 맺는다.
25절 하반부에서 바울 사도가 진술한 바와 같이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리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으며(사 43:21), 찬송을 결코 우상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하셨다. 조물주 하나님은 선부 하나님만을 일컫지 않는다. 하나님은 유일하시지만 단일한 분은 아니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우리의 찬송의 대상이다.
3. 본문의 논증적 검토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의 서론(롬 1:8-17)이라 말할 수 있는 부분 즉 바울이 로마 교회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와 바울이 로마 교회를 그처럼 방문하려고 애쓰는 이유와 로마서의 주제에 대한 대 선언의 말씀이다. 바울은 독자들에게 문안한 후 로마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자신의 계획을 피력한다(롬1:1-15). 이어서 바울의 복음의 주제인 복음은 믿음에 의해서 얻는 의로움(롬 1:16-17)이라고 요약한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방법에 대한 것이다. 그 후 다음과 같은 주제를 제시한다(1:16-17)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義)의 선물로서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셨다는 복된 소식이 바로 그 주제였다. 로마서의 서두와 서론에 이미 바울이 로마 교회에 증거 하고자 하는 주제, 즉 이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이 잘 반영되어 있었음을 상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감추어졌다가 이제 드디어 아들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 즉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벌써부터 로마서 서두와 서론에서 언급되었다.
복음 자체가 “믿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키는 신의 능력”(롬 1:16)이다. 로마서 서두의 이 구절들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소식을 오직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소식으로 해석하고 전개했다는데 있다. 이 가르침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통의 유산이 아니라 바울 사도의 독특한 창작물이다. 바울이 모든 원시 그리스도교와 결부시킨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 가르침의 방향에서 앞세우고 반성하면 개작하고 그 의미에서 다진 곳은 이 외에 다른 아무 곳에도 없다. 이 가르침은 바울 사도를 유대교 측의 원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그리스도교 역시 그를 비난하는, 그리고 이방인으로 만든 원인 되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것을 통하여 만민의 사도가 되었고 그리스도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의 통일성에 처음으로 본연의 신학적 근거를 주었다.
신앙에서 신앙에 이르는 신의 ‘의’의 계시가 복음에서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우선 그리고 동시에 신 앞에서의 인간의 자기 상실을 거론하고 전개하는 방식으로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로마서의 말씀대로 이 계시는 생명에로의 진의 부름, 즉 신의 율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핑계’하지 못하고 그의 분노가 그들 위에 임한다는 데서 분명해진다(롬 1:18:21). 복음의 휘황한 빛에서 율법 아래의 인간의 존재는 신 앞에서의 자기 상실로 드러난다. 바울이 율법의 문제를 거론할 때는 언제나 복음의 이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지금껏 어떤 유대인 혹은 그리스인에 의해서도 그렇게 심오하게 철저히 거론된 적이 없던 인식, 바로 이 성스럽고 선한 율법이 실제로는 이미 구원과 생명에 인도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부각된 것이다. 이미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작용임을 뜻하였다. 그리하여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그들이 신 앞에서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1) 보편적 죄성에 대한 반론
모든 인간은 범죄자라고 하는 죄의 보편적 인식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롬 5:12-14이다. 본 문단에서 모든 인간들이 개별적으로 죄를 지음으로써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태어나기도 전에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범죄한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개개의 인간은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모두 특별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개개의 인간에게 각자의 삶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만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는 아담이라고 하는 하나의 인간 안에 속하여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라도 아담을 봇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롬 5:12 이하에서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말은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범죄를 모방하여 죄를 짓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첫 인간 아담이 범죄할 때,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같이 동참하였다는 뜻에서 이를 원죄라고 하는데 아담이 범죄할 때, 온 인류가 그 죄를 유전받아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음을 말하며 이것을 ‘죄의 보편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서 1:18-3:20에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죄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울의 사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 하고 있다. 특히 엘리오트(Neil Elliott)는 로마서 1:18-3:20은 단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첫째,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모든 사람들은 죄인으로 정죄하지 않는데, 동일한 문맥에서 그는 어떤 사람들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8 이하에서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의 주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1:18-32에 있는 이방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계시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은 오직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사람들만 언급하고 있다(1:18). 그들은 "핑게를 댈 수 없다"(1:20).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1:21). 참 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린 후,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1:23).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을 예배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끝났다(1:25). 로마서 1:18-2:29에서 바울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죄인이며 또한 핑게치 못할 것임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으며, 또한 문맥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죄인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게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고 한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기준으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판단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결점은 그들이 남을 판단하는 것과 “같은 일을 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도덕적 가치 기준으로 로마서 1:18-32에 묘사되어 있는 행동을 비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 판단하지 않고자 하는 이유는 그가 “같은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cf. 롬 2:1). 바울 역시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여김을 받았다(롬 3:21-26).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의해 또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기 위해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며 그리고 그러한 순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구약의 희생제사로서는 더 이상 속죄하지 못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만이 죄 사함을 가져다준다. 로마서의 초점은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본문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 인간의 파멸
인간의 파멸은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 1장18 이하에서 이 물음에 대하여 “신의 진노의 계시”라는 주도어로 대답하고 있다. 즉 파멸은 인간이 신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불법 중에 가두어 두는“(롬 1:18) 데 있다. ”이는 신이 알 수 있을 만큼 그들에게 나타나 있음이라. 이는 신이 이를 그들에게 나타냈음이라. 불가시한 본질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그의 창조이래 그 만든 것들에서 이성의 눈에 보인다”(롬 1:19-20). 이것은 그리스적 유대적 지혜의 언어이다. 그러나 바울은 반성들로 비로소 그 길을 열어야 한다는 가능성에 관례 호교적으로 교육적으로 말하지 않고 즉석에서 고발하면서 인간들을 향하는 현실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핑계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신을 알되 신을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그들의 무식한 마음이 어두워져 있다”(롬 1:21). 그러므로 신에 의해 창조되고 생명을 얻은 인간은 신에 의해 밝혀진 피조물 한 가운데 서있는 자신에 대해 책임져야하는데 그의 실존은 지금 무서운 역용(逆用)에 “내맡겨져 있다”(롬 1:24f). 창조자와 피조물의 역할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 역용은 인간이 종교라고 부르는 것 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거칠어지고 반자연적인 생활은 지금 죄악과 숙명이 합쳐져서 신의 진노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서 제1장에서 이방인과의 관련 하에 포괄적으로 진술되었는데 이것이 이방인들에게 적중되는 만큼 경건한 유대인들도 함께 포함된 것이다. 그 화살은 역시 유대인들에게 향해졌고 유대인 자신을 적중시킨다. 즉 유대인에 대한 고발은 그들에게 위임된 구약성서 및 모세 율법에서 더욱 분명하게 부가된다(롬 2-3장).
이렇게 하여 바울 사도 유대인의 바리새적 특권을 압살하여 버린다. 왜냐하면 신의 율법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방인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이 어느 정도 율법이 명하는 것을 실천한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롬 2:14; 빌 3:6). 그러나 열심 있는 실천도 유혹적으로 지배하는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은 언제나 신에 대해 자신을 막고 자기 자신에 매여 있다. 바로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이야말로 바울에게는 죄에 갇혀 있는 자의 좋은 표본이었다. 율법에 매여 있는 자는 자신의 경건에 대한 환상에 의해, 의에 대한 추구에 의해 절망적으로 막힌 신을 향한 길을 열 수 있다고 오해한다.
루터가 오랜 추구 끝에 얻어진 결론은 엄격하신 하나님이 심판 때에 믿는 자에게 요구하는 ‘의’가 아니라
(3) 하나님의 진노
바울은 로마서의 서론에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선언한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6-17). 그런데 바울은 바로 뒤이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한다.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듯이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 나타난다. 바울이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로마서 1:19 이하와 32절의 빛 아래서 마땅히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의 산물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율법에 의하여 죄의 보편성의 무서운 성격이 확정되고 드러났을 때 이 죄는 반드시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죄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거스려 참여하는 일종의 본성적 힘이니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인간이 희생되는 일종의 운명이나 혹은 인간이 포함되는 자연적인 파멸의 과정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반대로 우리는 죄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작정하신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죄의 결과가 뜻하는 가장 포괄적이고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 그 자신의 인격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단순한 심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시느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철두철미 하나님 자신의 의와 거룩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심판하는 분을 우리가 사랑하지 않는 한, 우리 위에 내려진 심판이다. 우리가 “불신(不信)의 비신(非神)” (롬 1:18)에게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꺼려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미 분별력을 갖고 있다는 조짐이다. 그러나 신적 진노의 마지막 결과는 부활의 믿음 없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기의 이름과 모순되게 이 세계의 현존과 상존을 긍정하는 하나님 역시 하나님이다. 자신의 진노 가운데서의 하나님, 우리를 참담하게 여기시는 분, 우리를 외면만 하시는 분, 우리에게 ‘아니다’ 만을 말씀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 모두에 의해서 다만 유보 아래서만 불러질 수 있는 그러한 분- 곧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마지막 말일 수 없다. 그 진노가 그 분의 참된 계시일 수 없다. 비신은 결코 하나님이라고 불리어질 수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가 항상 마주치는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비신이다. 불신앙 역시 하나님과 부딪힌다. 우리가 믿음 대신에 화근만을 택하는 한, 그 세계는 자체의 절대적 불가의성 가운데서 하나님 진노의 유일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불신앙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미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망령되게 일컬음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 밖에, 그리고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가장 결정적인 선언은 그것이 믿음에 대한 의의 계시와 함께 이미 지금 종말론적 실재로 말해지고 있다. 이 사실은 로마서의 중요한 첫 단락에 이미 드러나고 있다. 즉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7에서 복음에 대한 주제의 정의를 내린 다음, 다음과 같이 강한 논조로 둘 가운데 하나를 택일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났나니.”
로마서의 한 단원의 출발점을 형성하고 있는 이 선언은 마땅히 17절에서 결정적으로 선포된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의 계시와 밀접한 관련 하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의 진노가 비로소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함께 보여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 안에서 죄에 대하여 내려지게 되어 있던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고 실행되어지고 있다. 바울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진노의 실제작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한 구원시간에 묶여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계시와의 대조에서만 이해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는 “하늘로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 계시를 서로 밀접하게 연결시킴으로써 복음의 특색을 보다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의도적인 시위(示威)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의와 죄의 사면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진노와 심판의 실행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후자는 또한 구속과 영생은 복음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그 의의 길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의 증명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에(γἀρ; 18절) 하나님은 의를 주신다”라는 식으로 로마서 1:17과 1:18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도출하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는(롬 1:18) 믿음에 의한 의를 주시려는데 대한 동기가 아니고 오히려 이 주어진 의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의 증명이다.
(4) 맺음
죄가 가져다준 인간의 모든 부패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사망이다. 이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삯이다(롬 6:23). 둘째는 죄에 대한 속박과 도덕적 무능력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적인 혼돈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이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라는 것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사망은 완전히 만개 된 죄의 열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선고이며(롬 5:12ff, 18)동시에 죄의 자연적인 그리고 내적인 귀결이다. 말하자면 죄는 사망을 지향하며, 그 사망 안에서 죄는 왕 노릇 한다(롬 5:21). 사망은 곧 자기의 육체(죄)를 위하여 심는 자가 거두는 열매이다(갈 6:8; cf. 롬 7:5). 그러므로 사망은 죄의 마지막이다(롬 6:21). 따라서 사망은 단순히 생의 종지부를 찍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생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목적으로부터 전도(顚倒)되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죄의 부패에 대한 두 번째 일반적인 서술은 인간이 되에 의해, 그리고 죄 아래서 자신을 발견하는 노예감, 무능력, 죄의 포로감이다. 죄 아래 있게 되는 것, 죄 아래 포로 되는 것 혹은 죄 아래 예속되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 가져오는 운명이다(롬 3:9; 갈 3:22). 죄는 거듭하여 일종의 인격적 세력으로, 곧 인간이 노예로 팔려서 그리하여 그의 요구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인간의 주관자로 나타나고 있다(롬 7:14). 이러한 일반적인 사실에 대한 설명이 바울의 죄의 교리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Ⅳ. 결론
로마서 1:18-2:29은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1:18-32에 있는 이방 세계에 대한 고발에서 바울은 자연을 통하여 주어진 세계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방인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바울이 인간의 죄성의 근본적인 문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아 버리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는 데 있다. 도대체 그들은 핑계를 삼을 데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 곧 철저히 나타나게 된 저 이탈은 즉시 더욱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피조물 가운데서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혼동, 그리고 얼마간은 유희적인 혼동일 수 있을 것이며 한층 더 피상적일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 진리의 그득함 속으로 해소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그 가능성이 주어지면 진리를 거짓과 맞바꾸게 되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가 곧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드리워진 안개는 먹장구름이 되어 양극 자체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든다. 즉 우리가 신이라고 칭하는 저편에서 종종 불리어지는 마지막 비밀이 남아있다고 해도 지고의 구체적인 그 비밀은 승리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드는 밤의 지혜”(롬 1:22)이다. 밤의 지혜가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사실에 의하여 계속 잇달아 부정되는 관찰, 곧 인간 제반사의 평면적 관찰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밤의 지혜는 인간의 가로막혀진 길이 어디로 끌려가는지를 보고 있으며, 그러한 길의 방향과 목표의 의미에 대해서 불분명한 상태에 있지 않다. 밤의 지혜는 그 원인을 알고 있으며 그 결과 또한 보고 있다. 그러나 밤의 지혜는 ‘정지’라고 하는 명령을 자기에게 떨어지도록 감행하지 않는다. 곧 인간적 죄성에 대한 고발은 자신의 창조자를 망각하는 인간의 행로를 항상 동반한다. 이러한 망각의 결과와 우리의 밤의 유랑의 마지막, 즉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그토록 분명히 주지되는 곳에 어찌하여 그 망각된 것을 기억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죽음은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부정이요,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의 최고의 법이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의 극복과 갱신을 지시하는 것, 아니 지시하는 그 모든 것은 다름이 아닌 다만 하나의 죽음으로서 밖에는 나타날 수 없다. 이 죄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죽음을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인간은 죄의 인간이다. 죄는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인간에 대한 원칙적인 규정성이요 입장이다. 죄는 권력(롬 5:21)이니 곧 다름 아닌 그에 의하여 세상의 인간이 지배받고 있는 그러한 권력이다. 개개인 인간의 죄는 이러한 정황의 분명한 명시화로서 바로 인간이 처해 있는 정황에 의해 억압되어 있는 그 무게에 대하여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칙적인 규정성과 입장을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의미는 갖고 있지 않다.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다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죽음이 죄의 이면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근원적인 죄, 비명시적인 죄로서 이것을 통하여 죽음이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생명으로서 특징지어진 하나님에 대한 인간관계의 훼손이다. 이것은 하나의 죄과로서의 죄요, 운명으로서 죽음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진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이 인간의 죄라고 말하는 바울 사도는 이어서 참된 하나님 한 분을 버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사색에 빠져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고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에게 예배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복을 주시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것으로 질타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고 교인들의 신앙이 대상을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인간 내면의 죄성 때문에 스스로 죄악과 타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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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축복의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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