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3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 가운데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쓴 개인적 성격의 편지로서 원문 신약성경 중 가장 짧은 책이다. 본서신은 주후 85-9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도 요한이서와 같이 '진리 안에서 행함'이다. 또 본서신은 사도 요한에게 반항적인 말을 하고 복음전도자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들을 핍박하기까지 했던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을 언급하면서 그런 행위를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였다.
1장: 진리 안에서 행함
1-4절, 사도의 간구와 기쁨
본문은 가이오에 대한 사도 요한의 간구와 기쁨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그의 나이가 많음을 보이는 것 같다. 또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는 가이오' 또는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참으로'라는 말은 '진리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2절과 5절에서도 그는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이며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자들이다. 모범적 교회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참 사랑의 성격은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잘 증거되어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 근거하여 그를 위해 간구한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성도에게 가장 귀한 부분이다. 영혼이 잘된다는 말은 믿음으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성도에게는 믿음이 견고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죄와 불결함을 버리고 천국을 소망하며 기쁨과 평안 가운데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다.
그것이 에녹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며(창 5:22) 노아같이 의롭고 완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창 6:9).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시는 대로 다 준행하였다(창 6:22). 그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요 특히 범죄치 않으려고 애쓴 삶이다(창 39:9-12). 그것이 신명기 28장에 말씀한 대로 순종의 삶이요, 시편 1편에 말씀한 대로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삶이다. 그것이 잠언 3장에 말씀한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삶이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요 6:27), 바울이 말한 대로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는 자의 삶이다(갈 6: 8).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그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다. '범사'는 그의 생활의 모든 부분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가정과 자녀들의 문제, 직장과 사업의 문제, 젊은이들의 학업, 취업, 결혼 등의 문제 등을 다 포함한다. 성도가 영적 생활을 잘하면 우리는 그의 범사가 복되고 형통하게 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범죄치 않으려고 애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범사에 형통한 삶을 주셨다(창 39:23).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가 얻을 자녀의 복, 물질의 복, 건강의 복 등에 대해 말하였다. 또 시편 1편도 우리가 악을 버리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우리의 모든 일들에 형통함을 누리게 될 것을 말하였다. 범사에 잘됨은 확실히 영혼의 잘됨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잘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가이오가 강건하기를 간구한다. 건강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여러 가지의 질병들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다. 잠언 3:7, 8,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물론 모든 질병이 다 죄의 징벌은 아닌 것 같다.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인격 훈련을 위해 주시는 질병도 있는 것 같다(고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얼만큼 건강이 필요한지 잘 알고 계신다. 그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3, 4]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도 요한에게 온 형제들은 가이오에게 있는 진리에 대해 증거하였다. 즉 그가 진리를 받아들였고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인 진리를 주셨다.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인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진리 안에서 살므로 다른 이들이 우리의 삶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진리 안에서의 삶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일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자라면, 우리는 교만을 다 버리고 음란과 불결함을 다 버리고 미움과 다툼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것을 형제들로부터 듣고 심히 기뻐하였다. 그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고 말한다. 성도들이 성경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사실은 확실히 목사에게 큰 기쁨이요 성도들 상호간에도 큰 기쁨이 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하나님의 진리를 읽고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보다 더 귀하고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모습대로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의 냉랭한 마음에 참된 사랑이 불붙어 오르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잘되는 일에 힘쓰자. 즉 영적 생활에 힘쓰자. 그것은 경건의 생활, 믿음의 생활, 순종 생활, 성결 생활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돈만 벌고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우리에게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알고 믿는 것 같지만, 그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 모순된 삶을 살지 말고 진리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며 사는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5-8절, 가이오의 선행
본문은 사도 요한이 성도들과 주의 종들에 대한 가이오의 신실하고 선한 행위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하는 내용이다.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는 형제들과 나그네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이라는 원어는 '형제들에게와 나그네들에게'라고 되어 있다. '형제들'은 주의 종들을 포함하여 성도들을 가리키는 일반적 명칭이며, '나그네들'은 아마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가이오는 다른 성도들에게나 주의 종들에게나 순회전도자들에게나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하게, 참되게, 믿을 만하게 행동하였다. 우리는 가이오의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믿지 않는 자들에게까지도 참되고 신실한 일, 믿을 만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가이오의 영접을 받고 사랑을 입은 성도들과 종들은 교회 앞에서 그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가이오의 행위는 참으로 믿음 안에서의 행위이었고 사랑의 행위이었다. 그것은 교회 앞에서 엄숙히 증거된 행위이었다. 그것은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었다. 저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었다. 거기에는 진실만이 있고 거짓이 있을 수 없는 곳이다.
이제 사도는 가이오가 현재 잘하고 있지만 저희를 전송할 때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합당하게'라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성도를 대할 때나 주의 종들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외모를 따라 인간에게 대하듯 하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듯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종들에게 교훈하기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하였다(골 3:23).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가이오가 저 순회전도자들을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로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옳은 까닭은 저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댓가 없이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은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혹은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참된 전도자들은 물질적 댓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삯군이 아니다. 전도 사역, 말씀 사역은 장사가 아니다. 주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셨다(마 10:8). 물론 그는 또한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부언하기도 하셨다(마 10:10).
[8]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성도들이 참된 전도자들과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것은 마땅하다. 주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0:40).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지 못할지라도 기도와 헌금으로써 그리고 기회 있을 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와 예절로써 그들을 전송함으로써 진리를 위한 수고에 동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5절부터 8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신실하게, 즉 참되고 진실하고 믿음직하게, 그리고 사랑으로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 있는 믿음은 진실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둘째로, 우리는 주의 종들이나 다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하듯이 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존중함과 예절과 서로 복종함을 의미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셋째로, 우리는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리가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진리로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비록 자신들이 전임 사역자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렇게 헌신한 참된 전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존경과 예절과 복종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쁘심을 돌리는 일이 될 것이다.
9-12절,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본문은 디오드레베의 교만과 악함에 대해 지적하고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면서 우리가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9, 10] 내가 두어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악함에 대해 몇 가지로 지적하고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사람 속에는 교만과 명예심이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간의 죄악성의 본질적 요소이다. 마귀는 교만함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교만과 명예심을 여지 없이 정죄하신다. 교만한 자는 멸망의 문 앞에 서 있는 자이다. 회개치 않으면 그는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고 물리치신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히 자기를 낮추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높이신다(마 23:11, 12).
둘째로, 사도 요한은 디오드레베가 악한 말로 자기와 동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였다고 증거한다. '망령되이 폄론하다'는 말은 '부당하게 비난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른 성도에 대해 정당한 비난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7:1). 하물며 부당한 비난이야 더더욱 합당치 않다. 그것도, 진실한 복음 사역자들에 대한 부당한 비난은 매우 악한 일이다. 주께서는 선한 자는 그 쌓은 선에서 선한 말을 하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한 말을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5). 또 잠언 12:18은 말하기를,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고 하였다. 야고보서에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가 온전한 자라고 말씀했다(약 3:2).
셋째로, 사도 요한은 그가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 즉 주의 종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심지어 영접하려 하는 자들을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한 참으로 악한 행동이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10:40). 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교회 안에 다른 양들을 밀뜨리는 염소들에 대해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다(겔 34:21). '유위부족하여'라는 말은 '오히려 부족하여'라는 뜻이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람에게는 모방하는 심리가 있다. 선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하지만, 악한 일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기도 한다. 성도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주는 악한 것들은 무엇이든지 끊어버려야 한다. 내가 세상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한 행실을 보인다면 세상 친구를 끊어버릴 것이 없지만, 반대로 세상 친구가 나에게 악한 본과 영향을 준다면 그 친구를 끊어버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3,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내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나 컴퓨터 인터넷을 유익한 문화적 도구로서 절제 있게 사용한다면 그것을 끊어버릴 필요가 없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것들로 나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을 더럽히고 자극한다면 성도는 그것을 끊어버려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관계하지도 말아야 한다.
악과 선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듯이, 악을 행하는 자와 선을 행하는 자의 근원과 소속이 다르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며 하나님께 속한다. 성도의 선행은 그가 중생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사람이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며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요한일서 3:9, 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사도 요한은, 다른 한편,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믿음과 선함에 대해 말한다. 그는 데메드리오가 모든 사람에게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데메드리오의 믿음과 선함에 대해 증거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또 데메드리오가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다고 말한다. 진리에게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진실한 믿음과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덧붙여 그는 우리도 그에 대해 진심으로 증거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데메드리오는 진실한 믿음과 선행을 가진 성도임이 여러 모로 증거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기쁘고 복된 증거이다. 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복된 증거를 가지게 되기를!
13-15절, 마치는 인사
[13-15]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사도 요한은 성도들과 속히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말하기를 원하였다. 참된 성도의 교제는 얼마나 사모할 만한 것인지! 그는 또 평강을 기원한다. 근심과 불안정의 요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평강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큰 복이다. 그는 또 여러 친구들의 문안을 언급하며 가이오도 그곳의 친구들에게 일일이 문안해 줄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낮추고 참된 사랑을 가지고 서로 교제하고 서로에게 평강을 기원하고 문안하자.
결론적으로, 9절부터 15절까지에서 우리는 전혀 대조되는 두 인물에 대해 들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는 악한 말로 복음 사역자들을 부당하게 비난하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려는 자를 금하고 교회에서 내어쫓기까지 한 자이었다. 그러나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또 사도 요한 일행에게도 증거를 받은 진실한 믿음과 선함을 구비한 자이었다. 우리도 그 둘 중의 어느 하나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악한 것은 끊어버려야 한다.
마태복음 5:28-30,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그러므로 악한 친구는 멀리하고 악한 물건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 속에는 악한 성질과 성향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를 실수와 연약과 범죄의 자리로 이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자극하고 충동하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멀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범죄한 일들과 본성의 죄악성을 진실히 회개하고 그것들을 다 버리고 성령을 따라 삶으로써 의와 선의 열매를 맺기를 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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