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신앙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믿음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믿음에는 분량이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크고 작음에는 차이는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념에는 보장이 없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자동차를 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차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태워다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차를 탑니다. 남자들도 믿음이 없이는 이발소에 갈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발사의 날카로운 면도날 앞에 자신의 얼굴과 목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목을 내어놓고 잠을 잡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라 합니다.
신념은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고 하는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의 생각으로,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신념은 “내가 이렇게 하면 될 것이다.”하여 기적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념을 가지고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적적으로 성공도 합니다. 그러나 신념에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것이 신념의 단점입니다. 신념은 꾸준한 노력과 인내를 주고 있으나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을 포기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지만 예수를 믿는 그 시간부터는 신념을 초월한 새로운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새로운 믿음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마가복음 11장 22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원문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고 이를 지속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확신이고, 생각이며,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를 소유하여지속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이란 “계시에 순종하고 그 순종을 계속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을 소유하고 이에 순종하기를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은 신념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자기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자기 확신을 신앙인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한 가지 문제를 놓고서도 “믿습니다”를 수십 번씩이나 강조하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생각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같이 고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신앙 좋고 능력 있었던 종들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이루어지길 바랐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같은 이들은 자기 확신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믿습니다”를 너무 남발합니다. 부흥회를 하여도 “여러분, 믿습니까?” “아멘, 믿습니다.”라고 외쳐야 부흥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집에 가서 “이 집이 내 집인 줄 믿습니다.” 하고, 밥 먹을 때에 밥상을 앞에 놓고서 “내가 밥 먹을 것을 믿습니다.” 한다면 온 집안 식구들이 온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믿습니다.”를 힘을 주어 강조하는 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믿어 보려고 믿음을 주장하려는 자세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영웅들,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믿습니다.”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굉장한 능력을 역사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고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면서도 실패하고 낙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신념을 신앙으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모두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신념을 가지고 공부하고 자녀들을 교육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신념은 불신자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신념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신념에는 절대적인 약속과보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념이란 어디까지나 자기의 믿음, 의지, 확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신념을 포기하고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소유하고 지속하는것이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이요, 지혜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는 약속과 보장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결단코 실망하지 않습니다.
신념과 신앙의 차이
예레미야 1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또 민수기 23장 19절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내신 말씀은 하나님이 반드시 실천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89편 34절에서도 “내 언약을 파하지 아니하며 내 입술에서 낸 것도 변치 아니하리로다” 했으며 말라기 3장 6절에서도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로 가는 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왜 실망합니까? 이는 신앙을 갖지 아니하고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신념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강원도에 사는 전도사 한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보름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금식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마음속에서 어찌나 믿음이 역사하는지 강가에 섰을 때는 베드로처럼 물위로 걸어갈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속에서 굉장한 확신이 우러나오기에 ‘믿습니다.’ 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다리를 뻗어 힘있게 강물로 내딛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강물속으로 거꾸로 처박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저를 건지고 인공호흡을 시켜서 겨우 살렸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는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목사님, 저는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만일 제가 의심이 있었다면 어떻게 강물을 디뎠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젊은 전도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물에 빠져 죽기에 합당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난 것만도 기적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로걸어갈 때와 이 사람이 물위로 걸어가려고 한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를 향하여 “주여 당신이 주시어든 나를 물위로 오라 명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도 걸어갈 것을 믿습니다.” 하고 걸어간 것이 아니라, “나를 오라 하시옵소서!”라고한것입니다. 베드로가 “나를 오라 하소서.” 할 때 주님은 “오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자기 확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주님의 말씀을 기초하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강원도에 사는 그 전도사는 말씀이 없이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기 확신에 기초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념에는 약속과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믿음, 곧 신앙을 가지라
지배자의 권위는 모든 명령을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불합리한 명령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불합리하고 모순된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그 명령에 따라 모순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말씀대로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합리하고 모순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지적하거나 불합리를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분의 생각을 따라 행동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수 십 년간의 어부의 경험을 가지고 “여기에 고기가 있을 것이다.” 하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고기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여기에 고기가 있을 것이다”하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믿어지는 곳에 수 십 번 아니 그 이상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고기는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는데 오늘도 그와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고 그물을 씻어 가지고 나오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고기가 있느냐?” “주여, 없나이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선생님, 당신은 목수일에 전문가이시고 나는 어업에 전문가입니다. 고기를 잡다 보면 때로 재수 없는 날도 있으니 괜히 더 수고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확신은 실패이기 때문에 포기하고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던집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믿음은 신념이 아니고 신앙입니다. 우리는 과거 신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앞에 와서는 신념을 포기하고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신념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음 곧 신앙을 가지고 살면이적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념보다 더 큰 신앙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신념은 죄를 없이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죄를 없이 해 줍니다. 신념은 사람을 거듭나게 못하나 신앙은 거듭나게 합니다. 신념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못하나 신앙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을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안에 가득 가진 자 그리고 그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권능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철저한 신앙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거의 신념에 사로잡혀 다시금 실패와 좌절과 고통의 쓴 나물을 씹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념과 믿음
믿음은 참으로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유사한 개념으로 신념이 있습니다. 신념이 강한 사람도 세상에서 많은 성공을 이루어냅니다. 특히 신앙 생활에 있어서 신념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보이고 자신도 그렇게 믿습니다. 과연 믿음과 신념은 같은 것일까요? 이 둘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념과 믿음의 차이에 대해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 친구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제 친구는 자기는 운전면허를 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동차의 배기가스가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하신 이 세상을 파괴한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으로 한참을 논쟁을 벌였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생각은 귀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기의 믿음을 신념으로 강등시킨 데에 대하여 더욱 화를 내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전임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섬기는 교회의 요구에 의해 결국 1종 보통 면허를 땄습니다. 당시 전도사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 데, 하나는 1종 면허, 둘은 컴퓨터 그리고 찬양인도의 기능입니다. 교회에서 교회 승합차를 운전하는 것은 아주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바뀔 수 있는 것을 과연 믿음이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까?
믿음과 혼동이 된다고 신념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믿음과 혼동될 만큼 신앙의 깊은 의지들을 세워 주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념은 자기 의지라고 규정하여 자기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무조건 나쁘다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념은 믿음을 강화하는 데 충분히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만 신념이 믿음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첫째, 믿음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단지 인간의 의지로 대치되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이란 책이 유행을 하였습니다. 믿는 대로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또 말의 긍정성을 과학적으로 실험하여 긍정적인 삶의 가치를 주장하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것 보다야 긍정적인 것이 물론 좋습니다. 하지만 이 긍정적인 것이 믿음을 대치할 수는 없습니다. 긍정의 힘 같은 책의 주장은 주로 그 삶의 신념을 북돋아 주는 것이지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이 신념이 믿음의 자리를 차지해 버릴 때입니다. 은연 중 하나님과 관계없이 그저 자기 마음의 긍정하는 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갈등과 분열이 발생합니다.
각기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믿으면서 서로 자기의 신앙만이 옳다고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충돌이 잘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각자 믿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신념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개신교 안에만도 다양한 교파가 있습니다. 교단과 달리 교파는 그 신학적 무게중심이 많이 다릅니다. 기본교리 자체가 상당부분 다르지요. 하지만 그것이 다르다고 해서 서로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완고함은 주로 신념의 영역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참다운 믿음은 완고하기 보다는 관용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믿음의 내용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길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인간의 삶의 올바른 길을 회복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우리 삶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보이신 그 길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믿음의 길입니다.
이에 반해 어떠한 구체적인 이런 지침을 강하게 신봉하는 것은 신념의 영역에 포함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인 대상이나 방법에 대한 것을 규정하는 것은 신념의 영역에 해당됩니다. ‘무엇을’이 믿음의 영역이라면 신념의 영역은 ‘어떻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념의 대상은 보다 포괄적인 것이어서 서로 다른 접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가진 교파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요, 비본질적인 요소에 해당하기에 보다 관용하고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각자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반면 믿음은 타협할 수 없고 양보할 수 없는 속성이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 관용해야 할 것을 타협하지 않게 하는 것이 신념을 믿음으로 대치할 때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거기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신념을 인정하고 관용할 수 있지만, 신념을 믿음으로 상승시킨 사람은 그것을 믿음의 영역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믿음(신념)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롬 14:22에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14장 전체에서 서로의 믿는 바로 서로를 판단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각자가 자기의 믿는 바-믿음이 아니라 신념-를 스스로 지킬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지 남에게 적용할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관용보다는 배타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이 정녕 이렇게 배타적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것을 지킨다는 명분아래 관용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 즉 자신의 신념을 믿음처럼 가지므로 모든 영역에서 배타적이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따라서 너무 쉽게 너무 많은 이단정죄가 이루어지고 분열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은 기독교에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또한 본질적인 것 즉 믿음의 영역에서 이단을 구분해 내야 하는데, 각자의 신념의 영역에서 이단을 정죄하다보니 그 신뢰성을 상실하였고 그 틈을 타서 진짜 이단들이 더욱 활개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지킬 것과 관용할 것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믿는 대상은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할 분명한 영역입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좋은 믿음이냐하는 믿는 방법의 문제는 배타적이지 않을 수 있는 상대적인 부분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독특한 영역입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과연 믿음의 대상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신념의 대상에 해당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 성실히 지키되, 그것으로 남의 믿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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