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경치!!

‘여행하는 인간’은 본질적 특성

하나님아들 2024. 9. 8. 22:44

‘여행하는 인간’은 본질적 특성

입력2024.09.07. 오 
[성지연의 21세기 문화 뉴노멀 지도] 고대 로마시대부터 즐겼다...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 지구적 모험에 자극 준 ‘동방견문록’
● 향료와 사치품 찾아 떠난 근대 여행
● 여행사업가 토머스 쿡, 현대 여행 시초
● 지역성 발견·취미·힐링 세 가지 특징
● 2024 트렌드 ‘나만의 경험 찾는 여정’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네팔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Gettyimage]
문화는 시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21세기 들어 가장 크게 변화한 문화의 한 맥락은 여행이지 싶다. 어릴 때 여행은 내게 일상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체험’이었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이 그랬다. 또 뜨거운 여름에 친구나 가족과 함께 설악산, 지리산, 동해안, 서해안을 찾았던 여행도 소중한 추억이 됐다.

우리 사회에서 여행이 크게 주목받은 것은 내가 대학원을 다니던 1990년대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정책이 도입된 직후였고, 빠른 경제성장으로 살림살이가 나아진 시기였다. 당시 어른들은 단체 패키지여행으로 태국과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국가를, 친구와 후배들은 배낭여행으로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 서유럽을 찾았다.

이렇던 여행 트렌드가 다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와서다. 무엇보다 패키지여행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졌다. 대신 여행지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취미 활동이 여행과 결합하고, 관광 못지않게 힐링이 중요해졌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자 억눌렸던 여행 욕구가 폭발했다. 해외 유명 여행지에서는 ‘오버투어리즘(과잉 관광)’이 사회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제 여행은 일상에서 탈출하는 특별한 체험이라기보다 ‘일상적 경험’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여행과 일상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21세기 문화 뉴노멀의 하나로 새로운 여행 문화,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을 살펴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즐긴 여행
서양에서 여행의 역사는 오래됐다. 역사학자 빈프리트 뢰쉬부르크가 1997년 내놓은 저서 ‘여행의 역사’에 따르면, 고대 로마시대부터 사람들은 여행을 즐겼다. 로마인들은 북해에서 사하라 사막까지, 대서양에서 메소포타미아까지 광범위한 도로 체계를 구축했다. 이 도로를 따라 로마인들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 그리스 도시국가로 여행했고, 이집트의 파라오 신전에 낙서를 남기기도 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위키피디아]
‌중세에도 여행은 계속됐다. 13세기 말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터키와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 베이징까지 여행하고 24년 만에 베네치아로 돌아와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동방견문록’은 이후 지구적 모험에 결정적 자극을 안겨줬다.

대항해시대(15~17세기 유럽인들의 신항로 개척 시대)는 근대 여행의 시작을 알렸다.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향료와 사치품이 넘치는 인도를 찾아가려고 여행하다가 1492년 신세계에 도착했다. 이후 콜럼버스 후예들은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까지 여행했고,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해수욕장인 잉글랜드 브라이턴 해변. [Gettyimage]
‌영국은 산업혁명을 주도했듯 근대 여행 문화를 이끌었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중세 문화를 재발견하려는 낭만주의적 여행, 가족 동반 여행, 세계 최초 해수욕장인 잉글랜드 브라이턴 해변 여행 등이 그 사례다. 이러한 영국의 여행 트렌드는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다른 나라로 퍼져갔다.

현대에 이르러 여행은 산업이자 문화로 거듭났다. 산업으로서의 여행을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은 이는 여행사업가 토머스 쿡이다. 사회학자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가 1994년 내놓은 저서 ‘기호와 공간의 경제’에 따르면, 쿡은 1841년 기차 여행을 앞세워 현대 여행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여행으로 여러 사회계급을 망라했고, 단독 여행이 어렵던 여성을 여행의 세계로 초대했다. 그러면서 단체 해외여행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서는 자동차 여행과 비행기 여행 시대가 열렸다. 자동차 여행은 개인과 가족의 자유로운 여행을 가능하게 했고, 비행기 여행은 해외 단체 패키지여행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었다. 독일과 스웨덴의 북유럽인들은 햇살이 따사로운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있는 남유럽을, 미국인들은 미국 문화의 고향인 고풍스러운 유럽을 찾았다.

패키지여행의 영향력
이러한 패키지여행은 비용의 저렴화를 가능하게 했고, 이를 통해 여행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문화 측면에서 패키지여행은 ‘모던 투어리즘’이라 할 수 있었다. 모던 투어리즘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조직적 단체 관광이요, 다른 하나는 지중해·카리브해·하와이 등을 찾아가는 명소 관광이다. 이는 중산층은 물론 노동자계급에 새로운 여가 방식으로 뿌리내렸다.

스코트 래쉬와 존 어리는 패키지여행의 판매량이 1980년대 후반 이후 점차 감소한 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여행의 패턴도 차츰 조직화된 관광에서 벗어나 ‘투어리즘의 종말’로 묘사될 정도로 한층 더 차별화되고 분화된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서 말하는 ‘투어리즘의 종말’에서 ‘투어리즘’이란 패키지여행으로 대표되는 모던 투어리즘을 뜻한다.

앞서 말했듯 현대사회에서 여행은 산업이자 문화다. 대량 판매가 가능한 패키지여행 상품은 ‘소품종 대량생산’으로 특징지어지던 전후(戰後) 자본주의 경제모델에 잘 맞아떨어졌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가 ‘다품종 소량생산’을 추구하자 소비자 지향성이 강화되고 시장 분화가 가속화하며 유행의 사이클이 단축됐다. 이에 맞게 여행 산업 역시 진화했다.

여행 문화는 여행 산업과 동전의 양면을 이뤘다. 문화 측면에서 1980년대 이후 모던 투어리즘은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으로 변모해 왔다.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은 세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해당 지역의 자연과 역사 등 ‘로컬리티(locality·지역성)’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래서 많은 유럽인과 미국인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를 찾아 히말라야를 트레킹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를 품은 잉카와 마야 유적지를 찾았고, 이국적 풍경과 음식을 선사하는 일본과 동남아 문화를 체험했다.

둘째, 개인적 취향을 점점 더 중시한다. 여행지에 머물며 관광을 하기보다는 사이클, 서핑, 스키, 캠핑, 골프 등 자신의 취미 활동을 즐기는 것이 트렌드가 됐다. 이렇게 여행은 일상과 단절이 아닌 일상의 연속으로 발전하고 있다.

셋째, 여행을 힐링의 수단으로 활용한다. 모던 투어리즘의 핵심이 명소 관광에 있었다면, 지금의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 힐링을 추구한다. 스페인 산타아고 순례길을 찾은 이들은 지나치게 빠른 속도의 삶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인도로 떠난 이들은 요가를 통해 명상을 체험한다.

요컨대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은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여행을 예외적 삶의 시간이라기보다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한 일과 여가를 누리기 위한 여행이 어느새 삶의 두 기둥을 이루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국내 여행 트렌드의 진화
우리에게도 여행에 대한 기록은 많다. 신라시대 화랑은 명산대천을 찾아 심신을 수련했다. 조선시대 양반 계층에서는 백두산과 금강산 등을 유람하는 게 유행했다. 흥미로운 여행기도 적지 않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청나라 건륭제 생일을 축하하려는 사절단에 합류해 압록강을 넘어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여행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양반은 금강산 유람을 즐겼다. 사진은 금강산 옥류동 계곡. [Gettyimage]
여행의 근대화가 시작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여기에는 교통수단의 발달이 크게 기여했다. 1899년 경인선,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1914년 경원선이 개통됐다. 일제강점기에 학생들은 경의선을 타고 개성과 평양으로 수학여행을, 여유로운 이들은 경원선을 타고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1945년 광복 이후 여행은 잠시 침체됐다. 먹고살기 위해 경제개발에 주력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여행이라 하면 수학여행, 신혼여행, 근교 여행이 고작이었다. 학생들은 경주와 부여를, 신혼부부들은 설악산과 제주도를, 가족들은 창경원과 민속촌을 찾았다.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지며 여름철 해수욕장에서 휴가를 즐기려는 바캉스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1970년대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고, 1980년대 ‘마이카(My Car) 시대’가 뒤를 이었다. 1974년 국산 자동차 모델 1호인 ‘포니’가 개발됐고, 잇따라 다른 자동차 모델이 등장했다. 자동차 등록 대수는 1980년 53만 대에서 1990년 339만 대에 이르렀다. 자동차가 여행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서해와 동해, 남도 등 어디로든 떠날 수 있게 됐다.

1989년 실시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정책은 해외여행객을 급증시켰다. 단체 여행객은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통해 동남아와 서유럽으로 나갔고, 20대 대학생들은 서유럽과 미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후 일본·미국 서부·중국은 패키지여행지, 일본 도쿄·미국 뉴욕·동유럽은 배낭여행지 추천 리스트에 더해졌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기 전인 2019년 해외 출국자 수는 2890만 명에 달한다.

 
새로운 여행지로 부상한 전남 보성군 녹차밭. [Gettyimage]
‌이쯤에서 서구 여행과 다른 점을 생각해 보자. 서구에서는 모던 투어리즘에서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으로 변화가 서서히 이뤄졌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모던 투어리즘에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이 이내 더해졌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의 영향으로 보성 녹차밭, 정동진 일출, 제주도 올레길 같은 국내 여행지가 새롭게 부상했다. 해외에서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베트남 다낭 리조트, 미국 조지아 트레킹 코스 등 취미와 힐링이 모두 가능한 장소가 주목받고 있다. 또 나이 든 이들은 패키지여행을 위시한 모던 투어리즘을, 젊은이들은 로컬리티·취미·힐링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을 선호하는 경향도 관찰할 수 있다. 아직은 두 사조가 공존하는 ‘압축 투어리즘’ 상태지만 무게중심이 포스트모던 투어리즘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어렵다.

여행 속 일상, 일상 속 여행
지난해 12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관광 관련 데이터를 분석해 내놓은 ‘2024년 관광 트렌드’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여행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자료는 최근 여행의 흐름을 ‘나만의 경험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명명한다. 이 여정은 ‘쉼이 있는 여행’ ‘원 포인트 여행’ ‘나만의 명소 여행’ ‘스마트 기술 기반 여행’ ‘모두에게 열린 여행’의 다섯 가지 테마로 이뤄져 있다.

구체적으로 쉼이 있는 여행이 여행지에서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고 온전히 쉬는 것에 집중하는 여행이라면, 원 포인트 여행은 단일 여행 콘텐츠, 예를 들면 ‘빵지순례’ 같은 특정 장소 방문이나 ‘양양 서핑’ 같은 취미 활동 체험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을 말한다. 나만의 명소 여행은 이색적이고 숨겨진 관광지를 찾아가 인증하는 등 낯선 여행지에서 고유한 경험을 추구하는 여행이고, 스마트 기술 기반 여행은 여행 앱으로 숙소·교통·식당을 예약하거나 SNS에 여행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여행을 뜻한다. 모두에게 열린 여행은 시니어 여행, 나 홀로 여행, 반려동물 동반 여행 등 그 방식이 다양해지는 여행을 지칭한다.

이러한 흐름에 담긴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모던 투어리즘 경향이 날로 뚜렷해지고 있고, 해외 단체 패키지여행은 눈에 띄게 줄고 있으며, 그 자리를 개인의 자유여행이 대신하고 있다. 둘째, 여행자 자신의 능동적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다. 여행자는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가 제공하는 정보를 참고해 스스로 여행지를 선택하고, 그곳에서 할 일을 미리 계획해 둔다. ‘빠니보틀’ ‘곽튜브’ ‘원지의하루’ 등은 대중에게 친숙한 여행 유튜버다. 셋째, 일상과 여행이 결합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달 살기’ 체험은 여행 속 일상과 일상 속 여행이 공존하는 대표 사례라 할 만하다. 오늘날 여행에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경향이 분명해지면서 일과 여가, 일상과 여행의 경계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여행을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구절이 있다. 미국 작가 폴 오스터가 1987년 내놓은 소설집 ‘뉴욕 3부작’ 중 하나인 ‘유리의 도시’에 나오는 말이다. 오스터는 보들레르의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의 48편인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아닌 곳에서라면 언제나 행복할 것 같다”는 구절이다.

오스터는 보들레르의 시 구절을 “좀 더 의미에 맞게 해석한다면: 어디든 지금 내가 있지 않은 곳이 내가 나 자신인 곳이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적어놓는다. 내가 지금 있지 않은 곳에서 행복을 구할 수 있는, 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21세기 여행의 새로운 양상이지 않을까.

현실주의자들은 오스터의 고백이 낭만주의적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살아가고 있는 ‘이곳’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곳의 지겨움을 벗어나 ‘저곳’의 즐거움을 계속해 찾아가는 과정이 21세기적 삶의 새로운 방식이 아닐까. 그 과정이 여행이고, 이 여행이 삶의 외부가 아니라 삶의 내부에 놓여 있음을 인류는 발견해 가고 있다.

‘여행하는 인간’은 우리가 지닌 예외적 특성이 아니라 본질적 속성이라 할 만한다. 우리는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여행객을 맞이하는 존재다. 여행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면, 여행객을 맞이하는 이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우리를 찾아온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여행 문화에 이러한 존중과 환대의 태도를 어떻게 더할 수 있을지 우리는 좀 더 숙고해야 한다.

 
성지연
● 에세이스트. 전 연세대 국문학과 강사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동 대학원 국문학 박사

● 여성동아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 연재

● 저서 : ‘어른의 인생 수업’

성지연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