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예화 74편 모음
1. 교만과 겸손
하나님은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오십니다. 사탄은 교만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 참 겸손은 '나는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겸손은 '나는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교만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구제불능의 교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진저 ⓒ최용우
2. 호랑이와 개구리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와 백두산 계곡에 사는 호랑이 중 누가 더 교만할까? 당연히 우물안 개구리입니다. 호랑이는 넓은 세상을 바람처럼 다니면서 이 세상에는 자기보다 더 크고 무서운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우물안 개구리는 천하에 자기가 제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교만의 극치를 달립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보았다는 황소와 자기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배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다가 풍선 터지듯 배가 터져 죽었지요. 저는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만 큰소리 치지 말고 교회 밖에서도 큰소리를 쳐야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장로 권사 선거를 할 때도 교회 밖에 동네사람들의 여론도 50%를 반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 진짜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용우
3. 교만은 '패망의 선봉'
해질 무렵, 길을 거닐던 이리가 자기의 긴 그림자를 보고 탄복하면서 "아니,내가 이처럼 덩치가 크다니. 그런데도 난 사자를 두려워했잖아. 이것 보라구. 내 몸의 길이가 3m도 넘겠어"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리는 "왕이 되어야지. 그리하여 모든 동물을 다스릴테야.물론 사자도 내 밑으로 오게 해야지." 라고 으스대며 만나는 동물들에게 횡포를 부렸다. 얼마 후 사자를 만난 이리는 거만하게 굴다 단번에 물려 죽고 말았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언 16:18)
4. 교만하면 부딛친다
영국에 있는 한 교회는 출입문이 유난히 낮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 문을 출입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딪칠 게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만하면 반드시 부딪칩니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 !” “저 사람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 “저 작자, 언제 사람되지 ?”라고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은 바로 당신자신에게 하는 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겸손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교만함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테니까 말입니다. “주님, 저희는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교만해 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희가 교만해지려 할 때 저희 자신의 모습을 살피게 하시옵소서.”
5. 부자 교만과 거지 교만
헬라의 거지 철인 디오게네스는 어느 날 귀족부자요 철학자인 플라톤의 궁전 같은 집을 방문했다. 그 집의 응접실에 깐 호화스런 양탄자 위를 걸어가면서 디오게네스는 마치 생물을 밟아 죽이는 제스처로 짓이기며 플라톤의 교만을 짓밟았다. 다음에는 플라톤이 디오게네스의 가난을 과시하며 사는 비가 새는 집을 방문했을 때 누더기 양탄자 위를 뱀의 머리를 밟아 죽이는 모션으로 그 방을 거닐면서 디오게네스의 성탐 과잉의식의 교만을 짓밟아 주었다. 성자는 자신이 성자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성자가 아니다. 성자마다 참회록을 쓰고 천국 주님 앞에 설 때 잘한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해주신 은총을 만입이 있어도 못다 찬송하는 상하고 깨어진 마음과 감사 속에 대한다. 우리는 모두 설익은 플라톤 바리새든가 디오게네스 바리새가 되는 경향이 있다.
6. 교만과 겸손
미국의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사관학교 2학년이었을 때 일이다. 사관학교에서는 신입생들을 상급생들이 붙잡고 기합을 넣고 호통치며 군기를 잡곤 했다. 하루는 신입생 한 명이 뛰어가다가 아이젠하워를 들이받았다. 아이젠하워 역시 잘됐다 생각하고 그를 세워놓고 소리지르기 시작했다. "너는 명예로운 사관생도라기보다는, 겨우 시시한 이발장이 같은 녀석이로구나! 어떻게 그렇게 부주의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자 그 신입생은 어깨를 탁 펴더니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네, 선배님! 저는 이발사였습니다. 저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발사로서 가족들을 부양해 왔습니다!"
아이젠하워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설마 이발사였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자신은 지금 남의 생계를 모욕하고 무시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자기 방에서 홀로 앉아 다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모욕하는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의 그 행동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무나 가볍게 생각했던 자신을 깨닫게 하는 큰 교훈이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으로서 큰 일을 담당할 때나,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직분을 수행할 때나 늘 다른 사람을 격려하는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교만에는 후회가 찾아오고 겸손에는 지도력이 따라온다.
7.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한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시 103:14). 교만한 자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하고 항상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겸손한 자는 상대방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권력이 얼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만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8. 영적으로 교만해 지지 않으려면
타락하여 넘어진 자들은 자기 자신이 회심하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자기들의 체험과 은혜와 특권에 대해 가진 높은 견해 때문에 점차 자기 의(義) 가운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러한 행실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외식의 표증입니다. 거짓된 깨달음이나 정서는 사람의 활동과 실천의 샘에까지 미쳐 지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깊이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땅의 깊은 곳 까지 이르지 못하고, 열매를 맺기에 충분할 정도로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정서는 마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생명과 활동의 가장 내면적인 샘을 붙잡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 속에서 행사되고, 그 영혼 속에서 은혜로운 정서의 예민하고 살아있는 작용을 통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의 능력의 가장 주요한 증거는 실천적인 거룩한 정서의 행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의지와 탐욕과 부패를 정복하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며, 모든 시험과 난관과 대적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실천적인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0)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창조자의 자리를 넘보려했을 때 비극은 시작되었습 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여 선악과를 따먹으로써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려는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힐문하는 패역한 시대가 아닌가? 선과 악을 빙자하여 인류의 온갖 비극과 폐해를 만들어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하는 지금의 시대는 분명 에덴이 아닌 에덴 이후의 세상입니다
9. 교만한 당나귀
어떤 마부가 당나귀 등에 돌부처를 실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많은 사람들이 돌부처를 보고 합장 배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는 자기를 우러러보고 경배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쭐대며 교만한 마음으로 마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이에 화가 난 마부는 채찍으로 내려칩니다. 갑자기 내려치는 채찍에 깜짝 놀라 뛰는 바람에 당나귀의 등에 있던 돌부처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당나귀는 다리를 다쳐 그만 쓸모없는 나귀가 되었고 결국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 자신도, 부모 처자와 물과 대지와 공기와 햇볕도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머리털 하나, 세포 하나도 내가 만들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시간도, 삶의 기간도, 죽는 시간도 내가 정하지 못합니다. 절대 자기 소유라고 주장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시한부로 빌려쓰고 있는 것뿐입니다. 사실 하나님만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른 사람이 교만한 것은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교만은 실로 큰 죄이며, 하나님 나라의 거침돌입니다.
* 기도 : 선하신 주님, 주님은 완전하신 계획으로 날 인도하십니다. 오늘 나의 삶 가운데 주님보다 높아진 부분을 회개하기 원합니다. 내게 허락하신 것들을 자랑하며 드러낸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이 드려지게 하소서.
10. 교만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잔인함, 죄악, 불의는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이 일어날 때도 거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불경건한 나라들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징계하거나 자기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실지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대로 헤아림을 받을 것입니다. 악인은 징벌을 받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은 교만함이 가득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정직함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팔 아래서 자신을 낮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에게는 생명이요, 교만한 자들에게는 화와 죽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교회의 중요한 한 부분이요 예수님의 몸을 이루는 구성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목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라도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때는 그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때는 그분이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리십시오. 두려움과 의심을 믿음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 자신만큼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침묵 / 케이 아더
11. 교만과 편견을 떨치고
태아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와 요람처럼 떠있기 좋은 알맞은 습도와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가장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 달이 채워지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태아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렸습니다. 태아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일일까요.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가 구축한 그 세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서 갇혀서... 내가 진정 의를 위하여 나를 깨치고 죽을 때 영원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12. 봉변 부른 부자의 교만
주전 4세기 그리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하루는 어떤 부자가 디오게네스를 집으로 초청했다. 그에게 자신의 집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부자의 집은 으리으리했다. 정원은 온갖 기화요초로 가득했고, 집안은 각종 보석으로 사치스럽게 꾸며졌다. 그는 자기 집을 자랑하는데 여념이 없어 디오게네스에게는 단 1분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때 별안간 디오게네스가 부자의 얼굴에 가래침을 ‘퉤!’하고 뱉어버렸다. 디오게네스는 어리둥절해 있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집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군요. 그래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가래침을 뱉을 만한 곳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한 당신의 얼굴이 내게는 쓰레기통처럼 보이는군요” 혹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디오게네스의 침을 받을 만한 모습이지는 않는가? 누구를 만나든지 겸손함을 잊지 말자. 나의 말은 가급적 삼가고,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수 있는 아량을 갖자.
13. 영적으로 교만해 지지 않으려면
타락하여 넘어진 자들은 자기 자신이 회심하였으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의 실패의 원인이 됩니다. 자기들의 체험과 은혜와 특권에 대해 가진 높은 견해 때문에 점차 자기 의(義) 가운데로 빠져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그러한 행실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외식의 표증입니다. 거짓된 깨달음이나 정서는 사람의 활동과 실천의 샘에까지 미쳐 지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깊이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땅의 깊은 곳 까지 이르지 못하고, 열매를 맺기에 충분할 정도로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정서는 마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생명과 활동의 가장 내면적인 샘을 붙잡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무엇보다도 먼저 영혼 속에서 행사되고, 그 영혼 속에서 은혜로운 정서의 예민하고 살아있는 작용을 통해 발휘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건의 능력의 가장 주요한 증거는 실천적인 거룩한 정서의 행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의지와 탐욕과 부패를 정복하고 거룩한 길로 나아가게 하며, 모든 시험과 난관과 대적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실천적인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20)
14. 교만한 개구리
개구리들에게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다. 가장 호기심 많은 개구리가 독수리를 찾아가 사정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다. 너의 다리를 붙잡고 한번만 날게 해다오” 독수리는 개구리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드디어 개구리는 독수리의 다리를 붙잡고 꿈에도 그리던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다. “누가 이런 기막힌 생각을 해냈니?”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져서 독수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했지” 그 순간 개구리는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교만은 패망을 낳는다.
15. 들쥐의 교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수도사 한 사람이 수풀 속을 지나가다가 까마귀가 쥐를 잡아먹으려는 것을 발견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까마귀를 쫓아 버리고 쥐를 살려 주었다. 그런데 그 쥐는 자세히 보니 고양이란 놈에게 날마다 쫓기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수도사는 이번에는 개가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개가 되면 쫓기는 신세를 면하게 될 줄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범에게 꼼짝 못하고 도망만 다니는 모습이 하도 불쌍해서 이번에는 그 개를 범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범이란 놈이 이전의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꾸 개를 보면 괴롭히고 고양이를 보면 고양이를, 들쥐를 보면 들쥐를 괴롭히고 심지어 수도사가 범에게 충고하면 수도사의 말까지 무시를 하고 덤벼드는 것이었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기가 산중의 왕이라고 하며 수도사도 아니꼽게 굴면 없애버리려는 생각까지 품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도사는 어느 날 다시 그 범을 원래의 모습인 들쥐로 돌아가게 하여 죽을 때까지 수풀과 들판을 헤매며 쫓기는 신세가 되게 하였다.
적용: 사람은 조금씩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가운데 어느 날에는 자신의 격에 맞지 않는 높은 자리에 오르게도 된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도달했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과 배은망덕이다. 그 자리에 앉을 수 있기까지 도와 준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 사회는 밝아질 것이다.
16. 교만
예수의 죽음을 요청한 사람들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죄인들이 아니었고 정치가들이 아니었다. 바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원한 사람들은 자기 의에만 빠져있는 사람들이었고, 현재 영적 상태에 만족하여 영적 유산을 자랑으로 삼고 그들의 영적 필요에 대해서는 눈먼 사람들이었다. 교만은 당신을 제사장들처럼 말하도록 할 것이다. "저는 다른 사람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 오직 교만을 버리는 것만이 당신을 백부장처럼 말할 수 있게 한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 당신은 너무 교만하여 당신이 죄에 빠진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너무 교만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교만이 그럴 만큼 참 가치가 있는 것인가? 교만은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에 대항하는 사탄의 진짜 오만이다.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야 만다.
17. 교만한 개구리의 비극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 「비행」하는 방법이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약속했다. 이들이 공중을 날 때 이것을 본 농부가 『누가 저런 생각을 했을까?』라고 감탄했다. 그러자 개구리가 대꾸했다.『내가 했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잠 16:18)
18. 교만한 마음
일본 동경 중심부에다가 한국 유학생과 재일동포 학생들을 위해서 기숙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돈 많은 실업 인들을 초청해서 그 계획을 설명했더니 “아. 그것 좋은 생각입니다. 내 조국을 위해 일할 인재는 키워야 합니다”하고 모두 동의했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인 20여 명의 실업 인들에게 “20분의 일씩 자금을 헌납하지요” 했더니 모두들 “아니요. 내가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내가 혼자 몽땅 지어드리지요”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기숙사는 십 년이 넘도록 짓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혼자 하겠다는 겁니다. 이 영웅심, 이 썩은 영웅심, 누구의 이름이 나면 무엇합니까? 교회에서까지 이런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미국에서 한국 교포들이 멸시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구제할 줄 몰라서 입니다. 각 부인회에서 전부 돕는데 한국 사람만 유독 땡전 한 푼 안 내려고 듭니다. 흑인들에게도 미움 받는 것, 그들의 지역에서 실컷 돈 벌어서 전혀 그들을 위해 한 푼도 쓰지 않고 백인 지역에서 호화롭게 산다고 흑인들이 제일 미워하는 민족이 한국 사람들입니다. 자업자득입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그런데 이 구제는 어느 누구 혼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힘들이 많이 모아져서 거대한 세력이 되어서 구조적인 불행을 우리가 구조적으로 도와야 하고 구조적으로 구제해야 합니다.
19. 교만한 검은 수탉
검은 수탉과 붉은 수탉이 있었는데 매우 친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이 사는 마을에 예쁜 암탉이 이사를 왔습니다. 검은 수탉은 예쁜 암탉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붉은 수탉도 암탉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둘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검은 수탉과 붉은 수탉은 구경꾼 닭들을 이끌고 넓은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드디어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검은 수탉이 이겼고 붉은 수탉이 졌습니다. 붉은 수탉은 원통했지만 솔직히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붉은 수탉을 이긴 검은 수탉은 얼마나 신이 났던지 지붕으로 올라가 목을 곧추세우고 한바탕 노래를 불렀습니다. 검은 수탉의 노랫소리가 잠자고 있는 숲속의 독수리를 깨웠습니다. 독수리는 닭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검은 수탉을 채 날아가 버렸습니다.
20. 절망은 교만이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 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낫지 못 하니이다 하고"(왕상 19:4.)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때로는 절망에 빠져 형편없는 모습으로 허우적거릴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은 열왕기상 19장 4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당신도 지독한 절망의 심연에 빠져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절망에 빠지게 되는 걸 까요 ? 그것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출발점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감격스러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절망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둘째는 도착 지점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도착 지점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당하는 현실의 고난 때문에 절망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셋째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늘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인정한다면 당신은 절망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은 교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때때로 저희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망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잊고 있던 세 가지 사실을 저희로 기억토록 하시옵소서."
21. 제라쉬성
요르단에 가면 제라쉬(Jerash)성이라고 하는 옛 성터가 있다. 주후 125년경에 로마제국이 전 유럽을 다스릴 때 요르단까지 로마제국이 다스렸다. 그때 제라쉬라고 하는 곳에 로마의 도시를 세웠다. 참으로 잘 지은 도시였다. 아직도 원형극장이 남아 있는데, 4,000명 이상이 들어갈 수 있는 석조극장이다. 지붕이 없는 야외극장이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얼마나 과학적으로 음향관리가 잘 되게 건축되었는지 무대에서 동전 하나를 떨어뜨려보니 떨어지는 동전소리가 무대에서 제일 먼 뒷좌석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신전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저기에 다섯 개나 있었다. 돌기둥 하나의 직경이 보통 2m가 넘는 것이 죽 늘어서 있고 도로는 육중한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돌로 포장된 도로 밑에는 하수가 흘러가게 설계해놓았다. 그저 생각만 해도 대단하고 엄청났다. 아마 그 당시 집짓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오늘날의 집짓는 것을 보면, 집을 짓는 것이냐 소꿉장난을 하는 것이냐면서 비웃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지으면 천년 만년가도 끄떡없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영화를 영원히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망해 버리고 말았다. 인사들의 잘못으로 불이 나서 타버린 것이 아니다. 외세의 침략을 받고 적군에게 파괴된 것도 아니다.
지진이 나서 이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쌓아 올려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한번 흔드시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물질문명을 세우려고 해도 소용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찾으시면 물질문명은 지나가고 마는 것이다.
22. 교만과 겸손
한 선비가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데 갑자기 폭풍이 불어 닥쳤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겁에 질린 선비의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사공이 무서우냐고 묻자 선비는 그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선비는 사공을 향해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사공 총각! 당신 혹시 논어를 읽었소?" "아니오. 들어보지도 못했는데요." "참, 한심하군! 남자로 태어나 논어를 모른다면 1/4은 죽은 생명이요. 그렇다면 맹자는 읽었소?" "아니오 그것도 처음 듣는 소린걸요." "허허 큰일이군! 그렇다면 당신은 반(半)은 죽은 목숨이요. 어떻소? 혹시 시경은 알고 있소?" "미안합니다. 그것도 처음 들었습니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그렇다면 당신은 3/4이나 죽은 생명이요." 폭풍은 계속 불었고 배는 더욱 흔들렸다. 잠시 후 이번에는 사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선비님, 혹시 헤엄칠 줄 아십니까?" "아니오, 난 공부하느라 헤엄 같은 것은 배우지도 않았소?" "그렇다면 당신 목숨은 완전히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사공은 강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 배에는 물이 새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아는 것이 많다 할지라도 생명의 진리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하겠다. 이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와 사회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가 으뜸이라고 생각하거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교만이 생활 속에 나타나면 아주 유치한 인간이 된다. 교만이 지식적인 면에 드러나면 퇴보하기 시작한다. 교만이 물질로 나타나면 고립되기 시작한다. 교만은 친구와 헤어지게하고 가족을 멀리하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를 떼어놓는다. 교만은 하나님께 대한 피조물의 반역이다.
옛날 지구에는 메가케로스란 학명이 붙은 거대한 사슴이 살았는데, 이 사슴이 멸종된 이유는 뿔이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 뿔의 무게에 눌려 번식하지 못하고 자연 도태된 것이다. 감투에 눌려 자멸한 메카케로스의 비극이었다. 교만은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만든다. 교만은 '내가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므로 하나님을 외곽으로 밀어내게 된다. 교만은 '내가 첫째다' 하는 생각이므로 하나님을 자기 뒤에 두게 된다. 교만한 사람은 한 마디로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가 가슴에 달고 있는 손수건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
저는 얼마 전에 들은 아주 소중한 얘기 한 구절을 지금도 비망록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은 반지름이다.'하는 말이다. 지식이 원의 반지름이라면 그 반지름 만한 원둘레가 우리의 지식이 닿지 않는 무지의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1cm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지식의 분량만큼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지식이 1m 정도라면 그는 자신의 지식이 1cm 때보다 더욱더 큰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결국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무지하다는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지식이나 교육은 자랑의 도구가 아니다. 지식이나 교육은 도리어 자신의 앎보다도 무지를 더욱 깨닫는 겸손의 도구가 되어야만 한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한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것, 곧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우유를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는 빵을 먹을 때마다 더 고급스러운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는 위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자는 빵을 대할 때마다 배고픈 자의 눈동자를 떠올리고 그러므로 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주어진 권력이 얼마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만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은 있다. 그러나 그 날이 숨겨져 있으므로 삶에 대해 만용하게도 하고 여유있게도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인생의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삶의 여정을 뒤돌아 볼 때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세상을 꼭 한 번 지나간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베풀어야 할 친절이 있다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겠다. 그것을 게을리하거나 연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을 두 번 다시 지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길목에 잠시 머물러서 음미해 볼 만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꼭 한 번 지나가는 인생길이라면 삶 앞에 좀더 겸허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3:10)
23. 영적 교만
영적 교만은 자기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다른 것들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기쁨을 체험하면 자신의 죄에 대해 큰 슬픔을 느낀다. 테레사는 이러한 현상을 빛에 비추어진 물이 든 잔에 비교한다. 해가 비치게 되면 해가 비치지 않을 때 보이지 않던 불순물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잔에 담겨 있는 물이 해가 비치지 않을 때는 깨끗하게 보이지만, 해가 비치게 되면 먼지가 가득함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단계에 이르게 되면 정의의 태양이 그것을 비추어 무수히 많은 불순물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믿음에 대해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잠 3:7, 사 5:21, 롬 12:3).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가 그가 이제까지 깨달은 가장 위대한 신학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질문 받았을 때 그는 간단히 대답하였다.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바르트는 그가 깨달았던 많은 위대한 지식에 대한 자랑을 거부하며 어린아이 같은 지식에 만족했던 것이다.
* 기도: 나를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주님,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의 손길을 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 자랑이나 낙심으로 끝내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진리와 겸손함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게 하소서.
24.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장점을 먼저 생각한다. 십계명을 대할 때에도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 명하신 것을 지켰으므로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하라고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부모를 공경하라를 충실히 지켰는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다. 겸손한 사람은 나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은 언제나 자기 뒤로 밀어내고 자기 위주다.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도 있고 이웃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우선 당장 코앞의 것, 보이는 것만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돌아보아 체질이 진토임을 시인하는 사람이다(시 103:14). 교만한 자는 나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다니! 하고 항상 불만 속에서 사는 사람이다. 겸손한 자는 상대방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권력이 얼만큼 휘둘러지나 얼마나 강한가를 꼭 시험하고 만다. 겸손한 자가 지도자가 되면 자신을 녹여서 한 시대의 어두운 길을 밝히는 촛불과 같은 인도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25. 교만의 문제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고 했습니다. 교만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만은 고집이 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거만한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D.L. 무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에 가득 찬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매일 매일 나 자신을 죽이고 내 생활에 아무런 방해 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나의 방법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분노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교만’을 죽여야 한다고 마음으로 되뇌이곤 합니다.” 겸손의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필립 브룩스는 “겸손한 자가 되는 방법은 자기 자신보다 더 작아질 때까지 낮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어떤 다른 더 큰 본성에 대항하여 서 있다면 큰 본성을 통해 진실로 작은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나 자신이 겸손해질 때, 그리고 나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할 때 놀랍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모든 과정이 힘들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부부가 함께하는 순간 / 데니스 & 바바라 레이니
26. 교만과 자존심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는 "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던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옆집의 친구에게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가 계란을 낳았으니 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아이가 들어가서 보더니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쪽 집 아이가 거짓말 하지 말고 순순히 내 놓으라고 합니다. 정말 없었다고 말하니 그 말을 못 믿겠다고 하면서 분명히 알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알이 있다 없다 하면서 서로 터지도록 서로 붙어 싸웠습니다. 이것을 보고 엄마들이 싸웠습니다.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들이 가세하여 싸우니 아버지들끼리 또 싸웠습니다. 너무 화가난 나머지 한쪽 편의 아버지가 저쪽 집에 그만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삽시간에 불이 번지더니 한번 바람이 획 돌아 불어서 이 쪽 집도 다 타버렸습니다. 그래서 잿더미 위에 앉아서 별을 쳐다보면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이제 반성을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계란 하나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계란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속 깊히 들어있던 자존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 같은 끔찍한 참사의 원인이 계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원인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존심과 교만이라는 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도 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7. 볼테르의 교만
프랑스의 문학가이자, 강한 교회 비판과 무신론주의자로 유명했던 볼테르가 어떤 서점에서 얼마간 돈을 꾸어 쓴 일이 있었습니다. 그후 주인으로부터 심한 독촉을 받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볼테르는 만일 그런 식으로 또다시 재촉을 하게 되면, 단단히 혼내 주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 주인이 또다시 빚 독촉을 하러 찾아왔습니다. 단단히 벼르고 있던 볼테르는 서점 주인이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의 뺨에 불꽃이 튀도록 따귀를 때리고는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뭐야, 당신은 황송하게도 세계 최대 위인에게 뺨을 맞았다는 역사에 남을 명예가 생겼는데, 또 무슨 돈을 달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볼테르는 비서를 시켜서 서점 주인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28. 교만은 패망의 선봉
기러기 한 쌍이 남쪽으로 이동하려고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개구리가 찾아와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기러기는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그러겠노라고 했다. 개구리는 갈대를 길게 엮어 가지고 왔다. 기러기가 양쪽 끝을 부리로 물고 그 중앙을 개구리가 입으로 물고 날았다. 이 광경을 본 농부들이 여행기구가 참으로 훌륭하다면서 누가 만들었는지 그 지혜가 뛰어나다고 감탄했다. 개구리는 우쭐대며 입을 열어 말했다. "이 기구는 내가 만들었지요." 그 순간 개구리를 물고 있던 갈대를 놓쳐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교만하며 자기 자랑을 일삼아 이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29. 교만에 대한 성경구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시 119:69)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 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9)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3-14)
30. 교만의 결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격화시킬 때 혹은 국가를 신격화시키거나 민족을 신격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킬 때 엄하게 벌을 내린 것을 구약 성경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벨사살이라고 하는 바벨론 왕은 자기가 천하의 왕이 된 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인 양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많은 성전 기명들이 있었는데 그 금은보화를 가지고 자기의 신하들과 처첩을 모아 놓고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망언을 했습니다. '내가 신이지 어디 신이 따로 있나 내가 신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이 나한테 이기지 못하고 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 잡아와 나를 섬기게 하지 않았느냐'하며 하나님에'게 제사를 파냈던 제사 기명들을 술잔으로 쓰며 잔치를 벌였을 때 벽에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손가락이 나타나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썼습니다. '너는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란다. 너의 날이 다 되었다. 너는 한도가 찼다. 그러므로 너의 나라를 메대와 바사에게 나눠주겠다'는 파멸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의 채찍이 임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대군이 몰아 닥쳐서 대바벨론 제국은 하루아침에 망하고 그는 전쟁에서 불에 타서 전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히 4:5,6)
31. 교만하지 말라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매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대하 26:16)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교만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교만은 가장 경계해야 하고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교만한 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한번 교만의 병에 걸리면 패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교만은 치유책이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교만한 마음을 다루는 것이 가장 힘든 일입니다.
본문에서 웃시야 왕의 마음이 교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 왕 중 가장 교만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26장 5절을 보면 웃시야 왕이 스가랴의 사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구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스가랴가 있을 때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스가랴가 없을 때 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주위에 예배드리는 사람도, 장소도 없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혼자서도 예배드리는 신앙, 그러한 능동적 신앙이 참 신앙임을 잊지 마십시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홀로 서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스가랴 때문이었지만 하나님을 찾는 웃시야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이한 도움으로 그를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강성케 해주시자 오히려 그는 마음이 교만해져 버렸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강성해지자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인 된 본성입니다. 웃시야는 마음 관리를 잘못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우리에게도 다분합니다. 온 세계 방방곡곡에 이름이 퍼져 나가고 상황이 잘 되면 나도 모르게 교만해질 연약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명성이 온 세계에 드높아진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웃시야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사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한번 교만해지면 걷잡을 수 없게 교만해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분노하고 화를 잘 냅니다. 웃시야 왕이 그랬습니다. 선지자의 권고에 화를 내고 분을 품었던 것입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향단에 분향하려 했습니다. 분향하는 것은 기도와 같은 것으로 구약시대에서는 제사장의 책임이요, 특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제사장에게만 분향의 권리와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죄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우선시 합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교만해진 웃시야를 하나님은 치십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 성전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하게 별궁에서 인생을 마쳐야 했던 웃시야는 교만한 자의 마지막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들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보십시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라고 스스로 외쳐 보십시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생각할 때, 하늘의 안식을 접어두고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주님의 십자가가 깊이 새겨질 때 교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만이 교만을 다스리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무조건 겸손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낮추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 가장 겸손한 사람임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외에는 교만을 다스려 나갈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허영과 분노, 투기, 시기,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는 그날까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열매를 맺읍시다. 겸손한 자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32.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 회사가 이들 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 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 난 제자들이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우리의 겸손과 부족함을 들어 사용하신다.
33. 교만 격언모음
자만심은 운명을 박차고 죽음을 비웃고 야망에 사로잡혀 지혜도 은혜도 두려움도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죄다.(섹스피어)
자존심은 어리석은 자의 소유물이다.(헤로드토스)
교만은 모든 죄악의 왕이다. 교만이 올라오면 모든 덕은 물러간다. 너는 지난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현재 생활은 통곡할 만하고 죽은 뒤를 생각하면 두려운 것뿐이니 사람이 3가지를 늘 생각하면 능히 교만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성 베르나르드)
교만은 덕 속에 나와서 덕의 모습을 가장하고 덕을 해하는 것이다. 마치 나무 벌레가 나무에서 나서 나무를 해하는 것과 같다. 다른 악은 외부를 치는 것이나 교만은 영을 치는 것이다. 악은 한쪽만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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