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 보혜사 하나님!!

토레이의 "성령세례받는 법"

하나님아들 2024. 5. 9. 16:50
토레이의 "성령세례받는 법"
 
 
中 Chapter 1.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D.L. 무디의 신학 멘토이며 그와 함께 동역하였던
R.A. 토레와이 D.M. 로이드 존스의 성령세례관은 같습니다.
 
<R.A. 토레이의 소개>
 
  Reuben Archer Torry(1856~1928)는 '성령의 사람' 이었다.  토레이의 성령에 대한 가르침은 20세기 초 전세계에 걸친 부흥운동에 불을 지피는'하늘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구원받은 은혜에 만족하여 안일하게 지낼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 를 받아 능력 있게 복음을 증거하며 믿음의 사역에 힘써야 할 것을 역설 했다.  믿는 자라면 성령세례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인 의무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자유주의 신앙의 차가운 이성주의와 죽은 정통의 무기력하고 나른한 신앙에 빠진 20세기 초의 신자들에게 거룩한 불덩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성령세례에 대한 그의 강력한 권고는 웨일스와 인도, 뉴질랜드, 호주에서 일어난 부흥 운동의 발화점이 되었다.


  특히 토레이의 성령론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 하디와 무디성경학교 출신의 한국 선교사들에게 전수되어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과 1907년의 평양부흥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저명한 신학자인 동시에 뜨거운 성령의 전파자였다.  영혼구원의 현장에 복음의 사자후를 터뜨리는 그의 메시지를 통해 미국, 영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일본, 중국의 10만 영혼들이 회심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그는 예일대학교와 예일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했고, 무디성경학교의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장로교 목사였던 그의 아들 토레이 2세(R.A. Torrey, Jr, 1887~1980)은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다가 한국동란 후에는 한국의 대전에서 장애인과 고아를 위해 사였했다.  토레이 3세는 한국에서 예수원 원장으로 오랫동안 사역한 대천덕(1918~2002) 신부(성공회 신부)이다.  또한 토레이의 증손자이자 대천덕 신부의 아들인 벤 토레이 신부가 현재 예수원에서 사역 중이다.
 
 
1부 성령세례의 엄청난 은혜를 아는가?
 
      1.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 14
      2. 성령세례 받는 법 ... 30
      3. 성령세례를 받으면 어떤 증거들이 나타나는가? ... 74
      4. 왜 꼭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 96
      5. 성령의 능력이 소멸될 수도 있는가? ... 118
 
2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는가?
 
     6.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 132
     7.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 146
 
3부 성령의 특별한 사역
 
     8. 예수님에게 나타난 성령의 사역 ... 158
     9.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사역 ... 165
 
4부 나는 위한 성령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
 
    10.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 ... 180
    11. 아름다운 성품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 ... 189
    12. 바른 길로 이끄시는 성령 ... 194
    13. 가르쳐주시는 성령 ... 201
    14.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인도하시는 성령 ... 216
    15. 사명의 자리로 부르시는 성령 ... 223
 
위의 목차에서  1부 中 1. 성령세례란 무엇인가? 
부분을 시간이 좀 걸리지만 다 타이핑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으신 분들은 밑줄 친 부분만으로도 참고가 될듯 합니다.
 
  다양한 표현들
 
  성경에서 성령과 관련하여 사용된 가장 뜻 깊은 표현들 중 하나는 바로 '성령세례'라는 말이다.
이 표현을 제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세례요한이었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장차 오실 분(예수님)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마 3:11)
 
  여기에서 요한은 두 가지의 세례, 즉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의 세례,
즉, '성령과 불세례'를 말하고 있다.  후에 예수님도 '성령세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후에 세례요한의 예언과 우리 주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이 성취에 대해 사도행전 2장 3,4절에서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라고 기록한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충만'
이라는 표현이 '성령세례'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10장 44-4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후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이 체험에 대해 보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데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행 11: 15~17)
 
  여기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집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이 '성령세례'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임하셨다" (행 11:15) 라는 표현과 "(성령의) 선물" (행 11:17)이라는 표현이 "성령세례를 받는다"(행 11:16) 라는 표현과 사실상 동의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세례'라는 복된 사건을 표현하기 위한 말들을 성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성령을 받다" (행 19:2),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행 19:6), "성령의 선물" (행 2:38; 히 2:4),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눅 24:49),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다" (눅 24:49)를 들 수 있다.
 
 
성령세례에 대한 올바른 이해
 
-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수 없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첫째, 우리 주님은 누가복은 24장 49절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라고, 사도행정 1장 4절에서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사도행전 8장 15,16절에서는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라고 말한다.


  셋째, 사도행전 19장 2절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몇몇 신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었다.


  성령 받는 것은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예"나 "아니요"로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체험이었다.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 19:2) 라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들은 성령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성령세례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성령세례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성령세례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말해주었으며, 그들에게 안수하여 그들의 모임이 끝나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게 하였다.
 
  성령을 받는 것이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딱 부러지게 "예"나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체험이라는 사실은 갈라디아서 3장 2절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갈라디이서 3장 2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받은 사실을 그의 주장의 논거로 삼고 있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체험은 그가 그의 주장의 논거로 삼을 만큼 '분명한 의식적 체험' 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령세례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기도도 많이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이나 기도는 아주 애매하고 모호하다.  각종 집회 때 사람들은 일어나서 성령세례를 달라고 기도한다.  만일 당신이 집회가 끝난 후, 이런 기도를 드린 사람에게 가서 "당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습니까? 당신은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십중팔구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러면 좋겠습니다" 라고 우물우물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성령세례의 체험에 대해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점들에게서처럼 이 점에서도 성경은 명확하다.  성령세례와 관련된 성경의 기록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는지 아닌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에 분명히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었다.
 
 
- 성령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과 구별된다.  성령세례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1:5)
 
  얘기를 정리해보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던 시점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아직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몇 날이 못되어 성령세례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분게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이미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전에 이미 주님은 그들이 새 사람들이라고 선언하셨다.  다시 말해서 이미 그분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다" (요 15:3) 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해졌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 발견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1:23)
 
  예수님이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엿으니" 라고 말씀하신 날 밤, 이 말씀을 하시기 조금 전에 그분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요 13:10) 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사도의 무리가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즉, 주님은 그들이 '거듭난 사람들' 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물론 이 때 주님은 하나의 예외를 두셨는데, 바로 거듭나지 못한 가룟 유다였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반할 사람이었다 (요 13:11).  주님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거듭난 사람들' 이라고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이 열한 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이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으며, 앞으로 몇 날이 못되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중생)과 성령세례는 다르며,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8장 12절과 사도행전 8장 15,16절을 비교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사도행전 8장 12절에 따르면, 제자들의 큰 무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빌립의 전도를 들은 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행 8:16).  세례를 받은 이 제자들의 무리 중 적어도 일부는 '거듭난 사람들' 이었음에 틀림 없다.  물세례의 참된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틀림 없이 그들은 물세례를 받았다.  왜냐하면 성령께 사명을 받은 사람이 그들에게 물세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물세례를 받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자.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행 8:15:16)
 
  그들은 '세례 받은 신자들' 이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틀림없이 '거듭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중 성령을 받은 사람들, 즉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우리는 중생과 성령세례는 다르며 성령세례는 중생 다음에 추가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에 의해 거듭났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중생을 통해 우리는 생명을 받는데, 이 생명을 받은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한편 성령세례를 통해 우리는 능력을 받는데, 능력을 받은 사람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힘을 받는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성령세례와 중생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고넬료의 집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도행전 10장 43절에 따르면, 베드로가 그들에게 설교하는 중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라고 말할 때에 고넬료와 그의 집 사람들이 믿게 되었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 10:44,45)
 
  고낼료와 그의 집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믿는 순간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물세례를 받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중생과 성령세례가 그들에게 동시에 일어난 것인데, 이런 일은 현재에도 일어난다.
 
  그러나 교회가 정상적 상태에 있다면 이런 일이 매우 많이 일어나겠지만, 현재 교회는 정상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현재 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기 전의 사마리아 신자들과 같으며, 바울을 만나 자기들의 더 큰 특권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의 에베소 신자들과 같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은 신자들이지만, 아직 성령세례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성령세례는 모든 신자들의 생득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 권리를 예비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아서 교회에 보내셨다. 
오늘날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신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생득권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 된 모든 지체들은 '잠재적으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3)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이미 '잠재적으로'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체험으로 만들이 못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다.  즉, '칭의'가 그들에게 제공되고 그들에게 속한다 (롬 5:18).  그러나 그들은 '잠재적으로' 그들에게 속한 것을, 실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칭의는 실제적으로, 그리고 체험적으로 그들의 것이 된다.


  성령세례가 '잠재적으로는' 모든 신자들의 것이지만 각각의 신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세례를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가 완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은 오직 성령세례를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성령세례를 통해서 주어지 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모든 참 신자들에게는 성령이 계신다(롬 8:9).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대로 모든 참 신자들이 '잠재적으로는'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실제에 있어서 모두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성령의 내주(內住)와 성령세례는 다르다.
성령의 내주는 성령이 우리 존재의 은밀한 성소의 후미진 곳에, 즉 우리의 분명한 의식의 뒤편에서 단순히 거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명 성령세례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완전히 통제하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든 신자들이 '잠재적으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대 해석한 나머지 "모든 신자들이 성령세례를 체험한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령세례가 초대교회의 성령세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면, 게다가 오늘날의 성령세례가 가짜가 아니라면, 오늘날의 신자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우리가 흔히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사실 신자가 아니다.
  둘째, 거듭난 참 신자라 할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상태였다.  오순절 이전의 사도들이 바로 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에베소교회와 사마리아교회도 역시 후자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그후(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성령세례를 체험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실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신자들은 성령세례의 특권을 누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누리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했지만 자기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믿으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렇게 애쓰는 이유는 성경의 전체적 교리를 등한시하고, 단지 몇 개의 특정 성경구절들을 확대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충만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힘쓴다면 그들은 성령세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 성령세례는 언제나 복음증거 및 봉사와 연관되며 무엇보다도 이 둘을 위한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눅 24:49) 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제자들이 머지않아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주님이 이 약속을 이루신 것에 대해 사도행전 2장 4절에서는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시니라" 라고 기록한다.  이 기록 다음에는 베드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그리고 그의 설명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이어진다.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강한 능력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그 결과 3천 명의 사람들이 죄를 깨달아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면서 세례를 받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며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데 힘썼다. (행 2:41,42)


  사도행전 4장 31-33절은 이와는 다른 경우에 사도들이 또 성령 충만을 받은 일을 기록한다.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행 4:31),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다." (행 4:33)


  그렇다면 이제 바울이 성령세례를 받은 사건과 그후 그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자.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행 9:17-20)
 
  그리고 사도행전 9장 22절은 "사울은 ...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라고 기록한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은 성경에 나오는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들 중 가장 완벽하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세례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은 봉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주어지는 은사들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한다.  성령세례의 일차적 목적은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유용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단지 신자들이 황홀경을 느끼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들이 효율적으로 봉사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물론 나는 성령세례가 신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 중 하나는 바로 희락이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쁨을 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이 조만간 새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경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 기쁨은 그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알았던 어떤 기쁨보다도 더욱 고상하고 순수하고 충만한 기쁨이다.


  그러나 기쁨이 성령세례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며, 성령세례의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진 결과도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받기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이들 중에는 성령세례를 통해서 개인적 황홀경과 환희를 맛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흥회를 비롯한 각종 집회에 참석한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나는 집회 중에 새로운 황홀경을 맛보았습니다.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후 그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라.  그들이 그런 체험을 하기 전보다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더욱 유용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집회에서 무엇을 받았든지 간에 그것이 결코 성령세례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황홀경과 환희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괜찮다.  황홀경과 환희를 맛본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라.  나도 이것들을 어느 정도 맛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죄와 자기의(自己義)와 불신앙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수많은 남녀노소가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이 세상에서 나는 평생에 걸쳐 황홀경을 조금도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대신 복음증거의 능력을 갖고 일하겠다. 나는 죄악의 물결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남녀노소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채 365일 환희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단 하루도 환희를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능력을 갖고 싶다.


  신자 개인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 또한 성령세례의 일차적 목적은 아니다.  물론 나는 신자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거룩한 영' 아시며,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성령세례가 영적 변화와 향상과 정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성령의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사용된 불은 감찰하고 순화하고 정화하고 태워버린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오순절 사건 때 제자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 후 성령세례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역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성령세례의 일차적 목적은 전도와 봉사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성품의 고양(高揚)보다는 봉사를 위한 은사와 관계가 있다.  성령세례는 봉사를 위한 영적 능력이나 은사를 신자에게 주는 것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탁월한 은사들을 소유한 사람이 성령에 의해 변화된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전 13:1-3;마 7:22,23).
성령세례를 언급한 성경의 모든 구절들에서 성령세례는 복음증거나 봉사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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