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요나가 겪은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

하나님아들 2024. 5. 1. 17:10

요나가 겪은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

요나 1:1-17(김경중 목사; 2014년 8월 31일 설교)

 

<서론>

20년 전 쯤에 DJ DOC이라는 아이돌 그룹 가수가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를 불러서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은 나에게 있어 세상 모든 만사가 비틀어지고 꼬이기만 한다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노래는 “돈 싫어. 명예 싫어. 따분한 음악 우린 정말 싫어. 펑키 비트의 신나는 댄스 노래하는 창열이 페퍼스타 듀오. 우리들은 DOC DJ DOC.”으로 시작되는 노래입니다. 이어서 들리는 노랫말은 이 노래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 즉 “머피의 법칙”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 미팅을 갔었지.

뚱(뚱뚱)하고 못생긴 애(아이) 있길래

와 재(저 아이) 만 빼고

다른 애(아이)는 다 괜찮아!

그래도 꼭 개(그 아이)랑 나랑 짝이 되지.

내가 맘에 들어 하는 여자들은

꼭 내 친구 여자 친구이거나

우리 형 애인 아니면 꼭 동성동본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나는 도대체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지,

언제쯤 내게도 기가 막힌 그런 눈부신 여자 친구 하나 생길까?

세상 모든 게 다 내 뜻과 어긋나

힘들게 말하여도 내가 꿈꿔온 내 사랑은

널 위해 내 뜻대로 이루고 말테야!

아! 아! 아”

이런 가사의 “머피의 법칙”은 한 마디로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뒤틀리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샐리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말은 92-3년경에 개봉되었던 “해리가 샐리를 만날 때”라는 영화에서 기인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인기 여배우 맥 라이언이 샐리의 역을 맡았는데, 엎어지고 자빠지는 힘들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마지막에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끝나는 모습에서 나온 말입니다.

“입시 당일 아침 우연히 봤던 참고서에서 무더기로 시험 문제가 출제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쟁율이 10대 1인데, 응시율이 1대 1이 되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열차 표를 사고 막 나오자마자 매진 팻말이 나 붙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를 몰고 시내에 갔다가 주차 공간을 찾는데, 내 앞에 주차했던 차가 빠져 나가 내 차가 주차하게 됐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일들, 즉 내가 시도하려고 하거나 시도하기만 하면 모든 만사가 순조롭게 풀리는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샐리의 법칙”이라고 이야기하고, 이 법칙대로라면 모든 일이 내게 유리하게 펼쳐지고, 유리하게 풀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인들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 모든 만사가 술술 풀리는 것처럼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만사가 뒤틀리는 그런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도 하는 일과 되는 일마다 모두 불통이고, 힘들고 어렵기만 한 그런 경험들로 인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는 그런 답답한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고 고통스럽게 다가오는 문제들을 어떻게 신앙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서 신앙인은 삶 속에서 겪는 모든 만사, 그것이 순탄하게 잘 되든지 아니면 꼬일 대로 꼬이는 답답한 상황이든지 그 모든 것을 신앙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갖게 됩니다. 저는 그 방법으로 “영적 전쟁”과 관련해서 이해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영적 전쟁”이라고 이해한다면, 그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도록 해 주신다는 것을 성경은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전쟁에 믿음으로 참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따라 살아가면 그 전쟁은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샐리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신앙적 사람들에게도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을 경험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도 없이 어떤 이에게는 머피의 법칙이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샐리의 법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 안에서 머피의 법칙과 샐리의 법칙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읽은 성경에 나오는 요나였고, 그래서 오늘 설교는 “요나의 머피의 법칙에서 샐리의 법칙으로의 전환”이라고 정해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요나와 머피의 법칙

 

요나의 머피의 법칙에서 먼저 저는 요나의 모든 만사가 뒤틀린 것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만사가 뒤틀리는 일이 발생하면 “그 사람이 율법적인 삶을 살기 때문”이라는 성급한 판단을 하기가 쉽습니다. 특별히 구약 시대의 사람들의 경우에 종종 그런 판단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복음적 신앙과 율법적 신앙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은 구약 시대를 산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적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음을 소개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 요나는 바로 복음적 영성을 소유한 자였음을 보여 줍니다. 요나 4장 2절은 요나의 복음적 영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즉 요나는 하나님을 “은혜로우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복음적 신관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신관이 요나처럼 복음적으로 갖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복음적 신관을 가진 요나지만 모든 만사가 불통되는 “머피의 법칙”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복음적 신앙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지난 시간에 “영적 전투”로 이해했지만, 그 전투를 승리한 후의 실패와 같은 일들이 복음적 신앙인들에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를 오늘 요나서 전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1) 주어진 사명을 회피하면 머피의 법칙에 휘말립니다(1-3)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의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의 시작은 주님은 내게 말씀하시고, 나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요나도 그의 사명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였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요나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함이 있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그의 삶 자체가 매우 신령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우리는 복음적 영성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그리고 듣게 되었을 때 그 의미는 매우 남다르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신령한 경지에 있는 선지자였지만 그 음성을 따라 100 퍼센트 순종하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의 자아, 즉 에고이즘(Egoism)과 순응하기 보다는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여도 인간의 잘못된 자아는 하나님의 순수한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요나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담당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지만 요나의 잘못된 자아는 그 사명을 회피하게 한 것입니다.

요나의 머피의 법칙은 바로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한 결과였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가시고자 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해 가고 있는데, 요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즉 요나는 손을 잡고 가던 하나님을 놓아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는 사명이 있습니다. 목사에게는 목사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성도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각각 주어진 사명이 제대로 수행되지 아니하면 그 곳에는 항상 문제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함으로 문제가 생긴 이야기가 사도행전 6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성령 충만하여 날마다 복음이 확대되어 성장하던 초대교회가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분쟁의 원인에 대해 사도들이 내린 결론을 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이 말씀은 사도의 직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아니했을 때 초대교회는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쟁의 소용돌이를 잠재운 것은 사도들이 사명을 재인식하고 그 사명을 회복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6장 4절과 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4)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라고 했습니다. 결국 교회가 분열의 직전까지 갔다가 사명을 다시 찾고 난 후 교회가 다시 왕성하고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7)

교회에서 목회자의 사명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이라면 성도의 사명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성도도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휘말린 머피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일까요? 개인적으로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시 찾고 그 사명을 회복해야 머피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2) 주님과의 관계의 중단은 머피의 법칙에 휘말리게 합니다(3)

평소 요나는 하나님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하는 자였습니다. 요나서에서는 요나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눈 자임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1장 1절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라고 했고, 3장 1절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장 4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리고 9절에도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평소 하나님과 요나의 영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평소 요나에게 항상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선지자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요나가 어떤 사명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수행하기 앞서 그러한 영적 교제가 선행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요나는 주님과 관계를 끊어 버린 것입니다. 본문 1장 3절에는 “요나가 여호와 낯을 피하려고”라고 하였습니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말 중에 “네크로피디아”(necrophid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죽음 지향적 인간을 말합니다. 범죄한 인간의 자아 속에 잘못된 독소들 중의 하나가 바로 “네크로피디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 지향적 성향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외면하려고 할 때, 문제는 항상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자는 고통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아니하고 침묵을 지킨다는 사실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요. 실제로 2장의 처절한 요나의 고통 속에서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음성을 요나에게 들려주지 아니하고 침묵을 지킨 것을 보게 됩니다. 3장에 이르러서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 가장 힘이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요나처럼 아무리 복음적 영성을 가지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을 저버리는 자에게는 머피의 법칙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주님이 침묵을 지키신다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이 오늘도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른지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신자, 그리고 들려온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분명히 말씀하시고 샐리의 법칙으로 전환시켜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스로 향하는 배는 요나가 주님을 피해 다른 선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때로 신앙인들 중에는 이러한 요나의 선택과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의 영적인 원인은 자아가 죽지 아니했기 때문이고, 이렇게 자아가 살아있는 자들은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2. 요나가 당한 머피의 법칙의 내용

 

왜 하필이면 내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나는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영적 전쟁에 관한 설교에서처럼 모든 것을 “혈과 육”으로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혈과 육”으로 해석하는 신자들은 그 풍랑을 “아마도 계절풍이 불어서”라고 해석을 합니다. “혈과 육”으로 해석하는 신자들은 그 풍랑을 만났을 때 “내가 항해의 시간을 잘못 잡아서”라고 해석 합니다. 그리고 “혈과 육”으로 해석하는 신자들은 그러한 풍랑을 만났을 때 “아무리 풍랑이 불어도 배가 견고하고, 선장이 항해술이 뛰어났다면”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모두 나의 문제들을 영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혈과 육”으로 생각하거나 해석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전투 내지는 영적 의미로 이해하는 자는 다릅니다. 내가 겪은 이 풍랑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슨 막힌 문제가 없는지를 살핍니다. 그러면 먼저 내가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대단히 영성이 깨어있는 자입니다.

 

1) 요나의 탄 배가 머피의 법칙에 휘말렸습니다(4)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내 멋대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돌이키지 못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쯤 풍랑은 여지없이 불게 되는데, 바로 그 이유는 마귀가 성도를 멸망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사도행전 27장 13절부터 14절에 나옵니다. 선주가 하나님의 사람 바울의 이야기를 듣지 아니하고 선장의 말만 듣고 항해를 고집하다가 배와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나도 처음에는 순순히 일이 풀렸습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라고 했습니다. 욥바에 도착하자마자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는 순간 아마도 요나는 모든 일이 순순히 풀리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배에 돈을 주고 승선을 했습니다. 그리고 짐 간에 누워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요나가 탄 그 배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처음에 모든 일이 잘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도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지 아니하고 순순히 잘되는 일이 오히려 마귀의 책동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언제나 살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요나와 배에 탄 사람들이 경제적 큰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5)

하나님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돈과 관련이 있습니다. 돈이 잘 풀리게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은 마치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잘못 믿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에 절대적 가치를 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경제적 손실을 통해 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관심은 돈보다 그 사람의 영혼에 가치를 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신자들의 경제적 회복을 하시겠지만 하나님은 신자들이 만약 경제적인 문제에 절대적 가치를 두게 되면 그 경제를 어지럽게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요나의 머피의 법칙에 휘말린 사람들은 요나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3) 요나가 제비 뽑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7-15)

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제비에 뽑혔는가? 로또에 당첨되는 그런 좋은 일에 내가 뽑혔다면 몰라도 그것도 나쁜 일에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수행하도록 뽑히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 일을 피하고 싶은데 꼭 내가 나서지 아니하면 아니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복음적 신앙인의 삶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속 터지는 일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머피의 법칙과 같은 일들이 요나에게 주어진 것처럼 복음적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심히 당황하게 이해하기가 어렵게 되지요.

 

3. 요나의 샐리의 법칙으로의 전환

 

인간은 때로 이런 극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에게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의 영적 전쟁의 한 구석에 신앙인들이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전환점은 무엇일까?

 

1) 자기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풀렸습니다(9)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사람들 속에서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나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습니다.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존귀하게 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존귀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더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정체성을 깨달은 요나는 잘못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면서 바로 하나님과의 외로운 기도는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요나의 삶의 새로운 전환이 되도록 했습니다.

 

2)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풀렸습니다(2:1-10)

요나서 2장은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한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이는 요나의 자아가 철저히 부서지는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요나에게 물고기의 뱃속은 음부와 같았는데, 그 음부와 같은 곳에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나는 주님의 뜻을 거역하여 머피의 법칙에 말려들었고, 그 참담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요나서 2장 4절에서 요나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라고 했고, 6절에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에는 “구원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으나 요나는 자기의 기도를 주님이 들으심을 고백했습니다. 응답이 있었다는 묘사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든 기도를 듣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우리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성가 953장의 가사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주님이 게시므로 나도 있고, 주님의 노래가 머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은 아니어도

나는 예수가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주님이여”

요나도 그리고 복음성가 953장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음성이 들려서 그 음성에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음성이 직접 들리지 아니했어도 이미 지난 날 주님이 요나에게 말씀 하신 것을 알고 있었고, 지금은 자기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에 머피의 법칙에 휘말린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들리지 아니하지만 듣는 것처럼 고백을 한 것입니다.

자아가 부서지고 자기를 철저히 내려놓은 후 요나는 주님의 음성을 분명히 듣게 됩니다. 요나서 3장 1절에는 바로 요나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첫 번째 임한 “니느웨로 가라”는 음성은 거부했으나, 두 번째 임한 “니느웨로 가라”는 음성은 순종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니느웨 성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성의 왕과 모든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재에 올라가 회개하였고, 심지어 짐승들조차 베옷을 입혔다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이 니느웨 성에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나의 자아가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지만 그 후에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요나를 다루셨습니다. 요나서 4장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직도 살아있는 요나의 자아를 다루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요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 것입니다.

 

<결론>

 

우리들 중에는 한 대중 가수의 노랫말에 나오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만사가 뒤틀려 한숨과 탄식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위 복음적 신앙을 가진 성도는 복음적 삶이 신앙의 연속선 상에 있어야 하는데, 그 연속선 상에 있지 아니기 때문에 먼저 모든 만사는 뒤틀리고 한숨과 탄식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 삶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머피의 법칙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앙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 이야기 한 것을 기록한 것 보다는 신앙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복음적 신앙을 소유한 자였지만 그들의 신앙적 삶의 연속선 상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지 아니했을 때 바로 요나와 같은 머피의 법칙에 빠지게 되고, 다시 돌이키고 바꾸고 전환을 했을 때 요나의 샐리의 법칙으로 해피 엔딩(Happy Ending) 되는 삶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 값진 신앙을 갖는 것은 물론 우리의 삶에는 더 깊은 은혜가 넘치고, 더 넓은 은혜가 넘치고, 더 높은 은혜가 넘치고, 더 풍성한 은혜가 넘치고, 더 은혜 위에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아가 철저히 부서지면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머피의 법칙들이 샐리의 법칙으로 바꿔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이 오신 목적  (0) 2024.05.01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0) 2024.05.01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  (0) 2024.05.01
솔로몬의 성전 건축  (0) 2024.04.30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  (0) 202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