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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 가신 예수님-밀양> (김영봉 목사)

하나님아들 2024. 4. 30. 16:46

<영화관에 가신 예수님-밀양> (김영봉 목사)

(1)  "연극을 끝내라"

1.

신애라는 30대 중반의 여성이 유치원생 아들 준을 데리고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갑니다. 밀양에 거의 다달아 차에 고장이 납니다. 신애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정비사를 부릅니다. 연락을 받고 찾아온 노총각 정비사 사장 종찬은 신애에게 한

눈에 반해 버립니다. 종찬의 도움으로 신애는 밀양에서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살림을 시작합니다. 신애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아노 학원을 홍보하면서, 죽은 남편의 뜻을 받들어 남편의 고향으로 살러 왔다는 사실을 은근히 흘리고 다닙니다. 밀양 사람들은 필시 무슨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면서도, 신애의 말을 믿어주는 척 합니다.

밀양에 정착하자 신애는 투자를 위한 좋은 땅을 찾아 달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하고 다닙니다. 은행에 가지고 있는 돈은 470만원이 전부였지만,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행세합니다. 이렇게, 밀양 사람들로부터 동정도 사고, 부러움도 사면서 자리 잡아 갈 즈음에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들 준이 다니던 웅변 학원 원장이 신애의 돈을 탐하여 아들을 유괴하고 돈을 요구합니다. 수천만원의 몸값을 요구하는 범인에게 가진 돈 470만원을 모두 주고 사정을 했지만, 아들 준이는 이미 범인의 손에 살해된 후였습니다. 신애는 유일한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듯,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듭니다.

아들의 사망 신고를 마치고 휘청거리며 동사무소를 나오던 신애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하여"라는 부흥회 현수막을 보게 됩니다.

이미 약국 주인 김집사로부터 부흥회 참석 권고를 들은 신애는 조심스럽게 그 집회로 향합니다. 집회가 끝나고 다함께 기도하는

중, 신애는 끓어 오르는 슬픔을 내어 놓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부흥강사는 신애에게 다가와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해 줍니다. 신기하게도, 통곡은 가라않고 신애의 마음은 잠시 평화를 찾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 간증하기 시작합니다.

 

2.

교회 안에서 믿음 좋은 사람으로 점차 인정을 받던 즈음, 신애는 모두를 놀라게 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범인, 자신의 유일한 희망 줄을 끊어 버린 박도섭을 찾아가 용서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교인들도 말리고, 목사도 말리고, 그림자처럼 그를 지키고 있던 종찬도 말리지만, 신애는 고집을 부리고 감옥으로 향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신애의 믿음과 용기에 감탄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뜻하지 않은 반전이 일어납니다. 아들을 죽인 범인을 마주한 신애가 긴장되고 굳은 표정을 가까스로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하러 왔다"고 말하자, 범인 박도섭은, 자신도 이미 하나님을 만나 그동안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대답합니다. 신애는 갑작스러운 반전에 어쩔 줄을 몰라합니다. 신애는 면회를 끝내고 교도소 마당으로 나오다가 그만 기절해 버립니다. 그 이후로, 신애는 하나님과의 투쟁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애의 분노는 자신의 용서의 권리를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서 나왔습니다. 자신은 초인적인 용기를 내어 용서하러 갔는데, 하나님이 그 기회를 박탁했다는 것입니다. 신애는 이 사실에 대해 미칠듯이 저항합니다. 영화의 후반으로 가면, 증오의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야외 부흥회를 방해하고 나오면서 신애는 고소하다는듯 하늘을 응시합니다. 약국주인 강장로를 유혹할 때도 하늘을 응시합니다. 차 안에서 유혹하던 신애는 강장로를 밖으로 인도해냅니다. 하늘에서 훤히 내려다 보이는 들판에서 강장로가 유혹에 이끌려 신애를 안고 눕자, 신애는 하늘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보여? 잘 보이냐구?" 보란듯이, 뻘건 대낮에 하나님의 사람 강장로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하나님께 복수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장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 같다"면서 끝내 신애의 유혹을 거부합니다.

마침내, 신애는 하나님께 대한 최후의 복수로서 자살을 시도합니다. 팔목의 혈관을 자른 후, 터질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애는 하늘을 응시하면서 "봐? 보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합니다. 병원에 실려간 신애는 상처와 함께 정신 치료를 받습니다.

치료를 다 끝내고 퇴원하여 머리를 손질하러 간 미용실에서 신애는 범인 박도섭의 딸과 마주칩니다. 원수의 딸에게 머리카락 손질을 맡기게 된 운명의 장난을, 신애는 참지 못하고 박차고 나옵니다. 이 때, 그는 또 다시 하늘을 응시합니다.

영화는, 집으로 돌아간 신애가 거울을 세워 놓고 가위를 들어 스스로 머리카락을 다듬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때 종찬이 들어와 거울을 들어줍니다. 신애는 종찬이 들어준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다듬고, 머리카락은 밀양의 따뜻한 햇볕이 내리 쪼이는 구석으로 날아갑니다. 이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3.

저는 영화 <밀양>에 대한 4회 연속 설교를 시작하는 첫 시간, 신애라는 인물을 주목하려 합니다. 신애는 자신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만든 각본에 따라, 자신이 감독이 되고, 자신이 주인공이 된 연극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현실의 생을 살고 있었다기보다 자신이 스스로 만든 연극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고로 죽은 남편이 죽기 전에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음이 나중에 드러났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남편과 관련된 모든 것이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신애는 그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남편이 자신만을 사랑하다가 갔다고 스스로를 속입니다. 친정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 온 것도 그런 까닭이었고, 동네 사람들에게 은근히 열녀 혹은 현모양처인 것처럼 흘리고 다니는 것도 연극의 일부였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돈 많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다닙니다. 은행 470만원밖에 없으면서, 실제로 땅을 살 것처럼 찾아다니고, 계약 직전까지 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면 "있어 보여야" 했고, 있어 보이려면 철저해야 했습니다.

엄밀하게 보면, 신애의 연극이 아들 준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그의 연극이 도에 지나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애는 아들의 죽음의 이유를 두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자기 아들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느냐고 질문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처럼 억울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움에 닥치면 하나님께 원인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실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올무에 자신이 걸려들은 것인데도 말입니다. 신애가 "있어 보이기 위해" 연극하지 않았더라면, 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즈음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신애는 연극을 끝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신애의 연극은 한 층 더 심각해집니다. 그는 그 연극에 신앙을 끌어 들입니다. 신애는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적인 변화를 하나님의 치유로 미화하고, 홀로 있을 때는 암흑에서 헤매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빛을 찾은 사람처럼 연극을 합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간증하며 전도하기도 합니다. 역전에서 찬양하며 전도하는 모임에도 참여합니다. 교회 사람들은 그의 연극에 매료되어갑니다.

신애는 마침내 그 연극을 절정으로 끌어올릴 계책을 세웁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신문에 날 일이고, 다큐멘터리로 다룰만한 일입니다. 신애는 그 '믿음의 이적'에 도전합니다. 듣는 사람들마다 놀라며 말립니다만, 신애는 굳이 감옥까지 찾아가 용서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신애에게 종찬이 아주 중요한 대사를 던집니다.

장면 chap. 15 from 1:28:17 to 1:29:10

"마음으로 용서하면 됐지, 굳이 교도소까지 면회가서 용서한다는 말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신애씨가 성자도 아니고……"라는 종찬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애의 숨겨진 의도가 이 말에 드러나 있습니다. 신애는 열부에서, 현모양처에서, 믿음 좋은 여인으로 그리고 이제는 성녀로서의 연극에 도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에게는 박도섭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박도섭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신애가 기대한 것은, 박도섭이 참혹한 모습으로 자신 앞에 나타나, 용서한다는 자신의 말에 눈물 콧물로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신애는 그렇게 하여 통쾌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은 은밀한 복수극이었지만, 사람들로부터는 성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가막힌 연극이었습니다.

 

4.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입니다. 깐느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받은 여주인공의 탁월한 내면 연기도 이 장면에서 가장 빛이 납니다. 그 장면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장면: chap 15, from 1:30:41 to 1:34:29

범인에게 용서한다고 말할 때, 신애의 눈빛에서 번득인 증오를 보셨습니까? 범인 박도섭이 자신도 하나님께 이미 용서 받았다고 말할 때, 신애의 표정을 보셨습니까? 자신 앞에서 비참하게 깨어져 용서를 빌어야 했을 박도섭은 너무나도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고백했습니다. 눈물로 빌었어야 했을 그는 미소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해 신애는

분노했습니다. 그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교도소 마당에서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의 분노가 이렇게 컸습니까?

그가 이제까지 연기해 온 연극이 무참히 짓밟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은밀한 복수극이 좌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공들여 연기해 온 연극이 그만 절정의 순간 직전에 파장난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난 신애는 자신의 연극을 망가뜨린 하나님께 대한 복수를 시작합니다. 신애가 예배당에 가서 행패를 부리고 난 후, 목사와 교인들이 신애의 집에 심방하러 간 장면에서 신애의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면: chap 16, from 1:40:40 to 1:42:50

신애는 야외 부흥회를 방해하는 것으로, 강장로를 유혹하는 것으로, 철야기도회를 방해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복수를 시도합니다. 하지만 그 복수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강장로를 유혹하는 일에 실패합니다. 자살함으로 보기 좋게 복수하려 했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딜 용기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 원수의 딸과 마주치게 만들며, 끊임 없이 자신의 삶에 참견하고 개입하고 방해합니다. 처음에는 "좋아, 보기 좋게 당신에게 복수하겠어!"라는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던 신애는, 점점 지쳐가면서 "왜 이렇게 나를 졸졸 좇아다니며 못살게 구는 겁니까?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라는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합니다.

이렇게, 한 편으로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점점 지쳐가면서, 신애는 점차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꾸며진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있는 그대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신애가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장면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머리를 자르다 말고 미장원을 뛰쳐나온 후에 옷가게 주인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옷가게 주인은, 정신 병원에서 치료받고 퇴원한 신애를 반갑게 맞으며 안부를 묻다가, "아니, 머리가 이게 뭐야?"라고 묻습니다. 신애가 "머리 자르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중간에 나와 버렸어요"라고 대답하자, 가게 주인이 "미쳤는가 봅다!"라고 응수합니다. 이 말 끝에 그 여주인은 깜짝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 막습니다. 신애가 진짜로 미쳤었기 때문입니다. 말 실수를 깨닫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가게 주인에게 신애는 멋적은 웃음으로 응수하다가, 나중에는 함께 박장대소를 합니다. 자신이 미쳤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5.

이 영화에서 하나님은 신애의 연극을 방해하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신애의 아들 준의 살해를 계획하신 것은 아닙니다만, 그 비극 안에 담겨진 어떤 신비로운 뜻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연극을 멈추고 현실을 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신애는 불행하게도 남편의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도, 현실을 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는 언제까지나 자신이 연출한 연극 속에서 여주인공으로서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내 신애의 연극을 망쳐 놓고 현실로 끌어 내셨습니다.

연극이 깨졌다는 사실이 신애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불행이었습니다만, 이 영화의 마지막은, 그것이 바로 신애에게 비밀스러운 축복이라는 암시를 던져 줍니다. 자신이 꾸민 아름답고 환상적인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때론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귀찮고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현실로 나오는 것이 축복이요 구원이라는 암시입니다.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치유와 기적을 통해서 신애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정 반대로, 고통스럽지만, 신애가 영원히 머물러 있고 싶어하는 연극을 깨뜨려버림으로써 그를 구원하십니다. 초라하고 힘겨운 현실에 눈을 뜨고 그 현실에 맞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구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해도 연극은 가짜이며, 아무리 초라하고 힘겨워도 현실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현실을 떠나서 연극 속으로 도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만든 각본 속에 들어가 자신이 스스로 만든 역할 속에 빠져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가지고 있는 듯이 가장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아닌 뭔가가 된 것처럼 가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받아들이기에 어려워도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내 처지에 진실하고, 내 신앙에 진실하고, 내 입장에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원의 '밀양' 즉 '은밀한 햇볕'(secret sunshine)이 깃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6.

오늘의 주제를 묵상하는 동안, 제게는 예수님을 만났던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마 19:16). 예수께서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켜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계명이라고 했나요? 어떤 계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 것쯤이라면 자신 있다는 투였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의 일부를 언급하십니다. 그 청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거라면 문제 없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계명들을 다 지켰습니다. 그러면 되었습니까? 제게 필요한 것이 또 없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근심을 하면서 떠나갔다"(2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냉엄한 면을 봅니다. 잘 구슬러서 말씀하셔도 되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은 그의 숨겨진 약점을 아프게 찌르십니다. 그 부자 청년은 스스로를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는 계명을 지켜 가면서 하나씩 하나씩 의를 쌓아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었다면, 재산에 대해 그렇게 집착할 수 없었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묻는 그의 의도는 참된 믿음에 이르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저 세상에서도 잘 살고 싶은 거대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이 욕망이 정화되고 비워지는 것인데, 그는 그 욕심을 그대로 안고 믿음의 힘으로 내세의 축복까지 확보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성녀가 되고 싶어서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러 간 신애를 뒤집어 엎듯, 그 부자 청년을 뒤집어 엎습니다. 그는 "모든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라"는 말씀 앞에서, 신애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네 자신을 똑바로 보라.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신앙적인 자만을 내려 놓아라. 너는 많은 종교적인 허울로 너를 위장하고 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너는 가짜다! 네 가면을 벗어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려 하지 말라. 네 허위를 벗어라. 네 안에 있는 탐욕을 인정하라. 네 자신에게 정직해라. 돌아가, 깨어져 울어라. 그렇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이 말씀을 듣고, 그 부자 청년은 신애와는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슬퍼했다고 합니다. 연극을 끝내는 것이, 가면을 벗는 것이,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도 어렵고 힘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지만, 어쩐지 그 부자 청년이 위선과 가식과 허위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 돌아왔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진정한 하나님 체험은 항상 자신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김없이 일어나는 최초의 사건은, 자신의 현실에 대해 깨닫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통곡하는 사건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 안에서 일어난 회심 이야기들이 한 목소리로 증언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난 사람은 현실에 눈을 뜨고, 현실을 대면하고, 현실에 좌절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현실을 외면하고 자신이 연출한 연극 속에서 살 가능성이 더 많아 진다는 말이 됩니다. 믿음을 가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허위와 가식과 위선과 위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셈이 됩니다. 불신앙이란 자신에 대해 속고 사는 것을 뜻하며, 거짓된 신앙은 종교적인 허울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을 말하며, 참된 신앙은 자신에 대해 눈을 뜨고 연극을 멈추는 것을 뜻합니다. 참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충격이 되고 비통한 아픔이 되더라도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참된 현실을 직면하게 해 주십니다. 그 때 인생은 제 길을 찾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텅 빈 무대에서 아직도 홀로 연극을 지속하고 계신 분은 없으십니까? 홀로 만든 세계 속에서 홀로 주인공이 되어 공주처럼 혹은 왕비처럼, 왕자처럼 혹은 왕처럼, 우스꽝스러운 삶을 살고 계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조차 거짓과 허위로 삶을 꾸려가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혹시, 자기 자신에게까지도 끝없는 거짓말로 속이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힘입어 그 연극을 끝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집스럽게 홀로의 연극을 지속하게 되면, 신애와 같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어야 할지 걱정스럽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연극이 파장나기 전, 먼저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현실을 대면하여, 연극이 아니라 참된 인생을 살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혹시, 믿는다고 하지만, 잘 믿는다는 허울은 있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면의 어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신애처럼,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연극을 더 멋지게 꾸며 보려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를 자신의 연극 무대로 만들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혹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조차 진실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과 가식으로 속속들이 오염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명심 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게 하는 참된 힘이 신앙인데, 이 신앙이 잘못되면 자신을 속이는

가장 교묘한 수단이 된다는 것을!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본 부자 청년이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혹시나, 예수님의 눈에 우리도 부자 청년과 같은 모습은 아닐지요?

아, 두렵습니다. 이 모든 질문이 바로 저 자신에게 물어오는 성령의 음성처럼 들리기에, 두렵습니다. 자꾸만 제 마음 속에서 "나는 아닐거야!"라는 유혹의 음성이 들리기에, 더욱 두렵습니다. 제게도 벗어버려야 할 가면이 아직도 있고, 외면하지 말아야 할 현실이 있고, 인정해야 할 허물이 있으며, 거짓과 가식의 유혹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기에, 두렵습니다. 오직, 두 손 모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릿광대짓으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저를 참되게 하소서. 저를 진실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따름입니다. 저뿐 아니라,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에게 이같은 열망이 나누어지기를 그리고 그 열망이 조금씩 이루어져 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어릿광대짓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참되게 하소서. 진실되게 하소서. 연극이 아니라 인생을 살도록

저희를 구하여 주소서. 아멘.

 

(2)  "값을 지불하라"

 

1.

영화 <밀양>의 이야기는 한국의 몇 안되는 구도적 소설가 이청준 씨의 단편 <벌레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소설을, 소설가 출신의 영화 감독 이창동 씨가 그 나름의 새로운 이야기로 각색한 것입니다. 원래, 이청준 씨는 <벌레 이야기>에서, 기독교가 말하는 '값싼 용서'에 대해 비판하려 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맑은 하늘을 즐기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창동 감독은 그 소설의 이야기의 틀을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이 주제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마주하는 교도소 면회 장면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난 주에는 '신애의 연극'이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참된 용서가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박도섭의 고백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장면 chap 15 1:30:55 to 1:34:28

맨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이 장면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치심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마치, 숨기고 싶었던 기독교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 것처럼, 제 얼굴이 화끈 거렸습니다. 박도섭과 신애,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고 있고, 두 사람 모두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말하는 그 모든 말들이 가식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단지 그들만의 문제라면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애와 박도섭이 연출한 장면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너무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화끈 거렸던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기독교를 비판할 의도를 전혀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기독교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 안에 반영된 우리의 자화상이 우리 자신을 더 더욱 낯 뜨겁게 만듭니다.

 

2.

박도섭이 신애에게 하는 고백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그가 고백한 것으로 보아, 그리고 그의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아, 그가 뭔가 초월적인 영적 사건을 경험한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박도섭이 신애에게, 자신이 지은 죄를 하나님께로부터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은 죄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해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십시다. 자식들이 서로 싸워 한 아이가 상처를 입었다 합시다. 그럴 경우, 상처 입은 자식보다 부모의 마음이 더 아픈 법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형제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은 상처 입은 그 형제에게도 사과해야 하지만, 부모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자식처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었으면,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그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51편은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지은 회개 시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전성기 시절에 생애 가장 수치스럽고 악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자신의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뒷탈을 없애기 위해 우리야를 불리한 전쟁에 내보내어 죽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완전범죄를 꾸미려 했지만, 예언자 나단이 찾아와 그 죄를 고발합니다. 대이스라엘 왕국의 황제 다윗은 무력한 한 예언자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오늘 읽은 회개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주님의 판결은 옳으시며 주님의 심판은 정당합니다"(3-4절).

우리야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음을 깨달은 다윗은 맨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야와 밧세바 그리고 그들을 사랑한 모든 사람들을 지극히 아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를 준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권력을 오용한 것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두셨던 신뢰를 배반한 것에 대해,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3.

이런 빛에서 보면, 박도섭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 받았다고 고백한 대목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는 모든 잘못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행하는 잘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받을 때도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알기 어렵고, 자신의 죄를 진실하게 인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통회 자복하고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이 상처를 준 그 사람 앞에 가서 잘못을 시인하고 처분을 기다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당사자를 대면하고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필요한 모든 희생과 손실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생깁니다.

어느 무신론자 철학자가 죽으면서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당신들 기독교인들에게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신들에게는 용서하실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용서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를 용서해 주실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을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때, 찾아가 기댈 언덕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기댈 언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품어주시고 씻어주시며 새롭게 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 은혜 밖에는, 죄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다른 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값싼 용서'라고 비판합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해도, 회개의 기도만 드리면 조건 없이 용서를 받는다니, 이것처럼 값싸고 형편 없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저도 한 때, 이 용서의 교리에 대해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의 이해가 짧을 때, 제게는 십자가가 마치 '용서 자판기'(Forgiveness Vending Machine)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에 '회개'라는 동전을 넣으면, '털컥'하고 '용서'가 나오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서 수긍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그냥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믿고, '회개'라는 동전을 넣고 '용서'라는 물건을 손에 쥐곤 했습니다. 그렇게 받아 든 용서는, 마치 질 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값싼 위로를 제공하고는 잠시 후 잊혀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제 자신의 죄에 대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며칠 동안 금식하며 십자가 밑에서 기도로 지내며 눈물의 나날을 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회개와 용서의 진리에 대해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1달러 지폐처럼 값싼, '입술만의 회개'가 아니라,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참된 회개임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는 질나쁜 자판기 커피처럼 잠시 잠깐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시켜 주며,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숨겨진 상처까지도 치유하는 엄청난 능력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가 치뤄야 할 값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치루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온 몸으로 떨고 마음의 찢김을 경험해 보신 분이라면 누구든지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실로 통곡하고 마음을 찢는 것이 얼마나 큰 값을 치루는 것인지를 말입니다. 거짓된 회개, 습관적인 회개, 교리적인 회개는 값싸고 쉬운 일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값비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서 치루신 그 값비싼 대가에 의지하여 치루는, 아주 값비싼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진실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는 일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은총입니다.

 

4.

박도섭은 진실로 회개했을까요? 그가 받았다는 용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참된 용서일까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신애에게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고백하는 박도섭의 태도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신애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뻔뻔해 보이지 않습니까? 박도섭은 신애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어야 하고, 눈물 콧물로 울며 잘못을 빌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진짜였다면 더욱 더 그렇게 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그가 신애를 만나기 전에 감옥 안에서 얼마나 통회하며 회개했는지 모르지만, 그토록 큰 아픔을 준 당사자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심하게 무너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앞에서 저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나면,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을 대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당사자 앞에서 뻔뻔하게 행동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형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어떤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저의 죄로 인한 상처가 치유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는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는 한 편, 그들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해 더욱 여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로 인해 사람들이 받았을 상처에 대해 더욱 예민해지고 더욱 가슴 아프게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 51편 4절에서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마치 "나는 주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일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회개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아픔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할 수 있는대로 그들의 상처를 회복시키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신애가 교도소를 찾아가기 얼마 전, 운전하다가 한눈을 파는 바람에 지나가는 행인을 칠뻔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지나가는 행인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집니다. 이 말은 박도섭의 고백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잠시 보시겠습니다.

장면 chap.15. 1:23:34 to 1:24:09

이 장면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박도섭이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는 말로 때우는 것 같은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신애를 대신하여 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장되어 있는 그 무책임한 사과로 인해 분노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용서를 시도하는 신애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를 말하는 박도섭은 가증스럽게 느껴집니다. 파렴치해 보일 정도입니다.

기독교 복음이 잘못 표현되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심각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기독교 복음의 대변자인양 자처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소위 믿음 있다는 사람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들, 직분 높다는 사람들, 열심이 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은 더욱 자중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독교가 얼마나 오해받고 지탄받고 있는지요! 차라리 '하나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내세우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5.

기독교가 성서에 바탕하여 가르쳐 온 용서는 그렇게 값싼 것도 아니고,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는 온전한 용서가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가르칩니다. 회개의 3 R(Three R's of Repentance)이라고 부르는데, 첫째가 Repentance(회개), 둘째가 Restitution(보상), 그리고 셋째가 Reformation(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repentance이며, 자신이 끼친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보상하는 것이 restitution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것이 reformation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져야 온전한 회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박도섭이 신애를 만나기 전 진정한 회개를 했다면, 그는 restitution에 대해 고민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박도섭으로서는 하고 싶어도 restitution을 할 방도가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이를 살려낼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도로라도 그는 신애의 상처의 치유를 위해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면회를 끝내고 나오면서, 종찬은, 박도섭의 얼굴이 죄인 치고는 너무 좋아 보였다고 감탄을 합니다. 그걸 보니,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박도섭이 받았다는 하나님의 용서가 가짜였음을 증명합니다. 그가 받은 은혜가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의 얼굴이 그렇게 좋아서는 안 됩니다.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아서 마음에 평화를 얻었다 하더라도, 자신이 행한 죄로 인해 그 가족이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고 함께 아파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신애에게 할 수 있는 restitution이었습니다. 신애가 찾아왔을 때, 그는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비통하게 무너졌어야 했습니다. 울어서 되는 거라면 백번, 천번이라도 울었어야 마땅했습니다. 박도섭은 죽을 때까지 신애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고백을 했지만, 그것은 마치 신애에게 자비를 베풀겠다는 말처럼 들리지, 회개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핑게로 삼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참되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 더 예민하고 적극적이야 하는 법인데, 실제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손실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용서를 들먹이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요!

이 대목에 다다르니, 제가 한국에서 알고 지낸 어느 장로님 생각이 납니다. 그분이 어느 날 교통 사고를 내어 초등학교 어린 아이를 다치게 했습니다. 그분으로서는 보험 처리를 하고, 한 가족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하나님께 진실하게 회개하고,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될 수 있는대로 손해를 덜 보기 위해서, 법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만 최소한으로 하려고 힘씁니다. 그분도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그 아이가 퇴원할 때까지, 거의 매일, 퇴원하는 길에 병원에 들러 위로하고, 매일 새벽기도회에 나와 그 아이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restitution입니다. 저는 그 장로님이 모든 면에서 완전한 분이라고 추켜 세우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한 가지 사건에서 그 장로님은 참되게 회개 했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답게 행동했습니다. 그 장로님과 사고를 당한 가족은 그 과정에서 깊은 정이 들었고, 그 가족은 그 장로님의 정성에 감동하여, 한 마디 전도하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스스로 교회를 찾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6.

회개의 세 번째 요소 즉 reformation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진실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고 그 능력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할 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천벌을 받을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다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입고 나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고 찬양하기에 바쁩니다. 그러한 잘못이 자신에게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아니, 그런 차원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참된 회개는 마땅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새로움을 얻는 일로 결론지어져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읽은 다윗의 회개 시편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는 회개의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의 죄를 씻어 달라고 기도할뿐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0절부터 12절에 나오는 기도에서 다윗의 간절한 바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님의 성령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내가 지탱할 수 있도록 내게 자발적인 마음을 주십시오."

다윗은, 자신을 고치는 일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서 될 일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고 그의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해 주시지 않는 한, 그에게는 희망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자신이 다시는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새롭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십자가는 '용서 자판기'가 아닙니다. 자신을 고치는 일 없이, 동일한 잘못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그 때마다 회개라는 동전을 넣어 용서라는 제품을 꺼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본성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동일한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지만, 우리로서는 하나님 앞에서 거듭 거듭 새로와지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용서라는 물건을 내어 주는 자판기가 아니라, 죄로 물든 우리의 존재를 씻어 주시며 우리를 새롭게 해 주는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힘 입고 살아가면, 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한 번 되돌아 보십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지난 날을 살아오면서, 알게 그리고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작게 혹은 크게, 많은 상처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얄궂게도 내가 입은 상처만 기억하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입힌 상처는 별로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진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입은 상처보다더 더 많은 상처, 더 깊은 상처를 주고 살아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딱딱하게 만들어, 웬만한 잘못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행동하며, 내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일로매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내 이웃만이 아니라 마침내 나 자신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혹,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와 용서의 교리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여, 죄책감이 들 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림으로 양심에 위로를 삼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에게는 위로와 평안이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환각 상태에 빠진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같은 회개의 기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용서의 은혜를 얻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회개를 보고 역겨움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유일한, 참된 방안은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마음에 새기고, 성령의 은총을 힘 입어, 첫째, 참된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진정한 용서를 선물로 받고, 둘째, 그 은혜와 사랑을 힘 입어, 자신의 죄로 인해 이웃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며, 셋째, 성령의 은총으로 변화를 받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과 평안을 누릴 것이고, 그 은총과 축복은 우리를 환각 상태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현실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치뤄야 할 값을 치루게 만들어줄 것이며, 이로써 우리는 날로 새로와져 갈 것입니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은 우리의 회개와 용서를 보고 '사랑의 기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 회개, 그런 용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꿈 꾸고 함께 갈망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오 주님,

저희가 그 동안 갈구하고 또한 간증했던 회개와 용서가

박도섭의 것만큼이나

무책임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환각적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희로 인해 주님께서 얼마나 욕을 당하셨습니까?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진실한 회개와 진실한 용서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회개와 용서로 인해

주님께서 살아계심이 증거되게 하소서.

오, 주님,

참된 회개와 용서에 있어

저희를 능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