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삶의 방식
본문 요 : 11:45-57절
서론)
한 농부가 소에게 풀을 뜯기러 뒷동산에 갔습니다. 소에게 풀을 먹도록 풀어놓고 한 숨 늘어지게 자고 났습니다. 그런데 일어나 보니 아연질색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이쿠 이것 야단났네, 이일을 어쩌면 좋아” 소가 콩 밭에 들어가 마구 짓밟았습니다. 그 밭은 그 동네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최 영감네 콩밭이었습니다.
농부는 궁리하다가 최 영감네 집에 갔습니다.
<영감님 계십니까?>
최 영감이 고개를 내 밀자 농부는 태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영감님 이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무슨 일 인데 그러나 말해보게>
<영감님 네 소가 저의 콩밭에 들어와서 콩 밭을 망쳤습니다.>
농부는 사정을 뒤집어서 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대답이 나왔습니다.
<망치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얼마나 잘 된 일이가?
우리 소가 자네 콩 밭에 들어갔다면 거기에다 똥, 오줌도 쌌을 것이 아닌가? 올해 콩 농사가 아주 잘 되겠군 그래
그러자 농부는 빙 그래 웃음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감님 하지만 사실은 저희 집 소가 영감님 네 콩 밭에 들어갔답니다.>
그러자 최 영감의 안색이 달라졌습니다.
<뭐라고 했나? 자네 소가 우리 콩 밭에 들어갔다구? 이런 고약한 놈의 소를 봤나? 자네 즉시 병상하게 변상하지 않으면 그 놈의 소를 가만 두지 않겠네>
이번에는 농부가 말했습니다.
<영감님 조금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소가 콩 밭에 들어갔으니 소의 분비물을 통해서 밭농사가 더 잘 될 거라고! 되려! 영감님이 제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들에 대화 속에는 진실이나 사실이나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다거나 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 탐욕만이 가득한 대화의 내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부분에서는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장이 불리 할 때도 원칙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 따라 태도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우주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고 모든 것은 자시의 이익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서 무덤에 뭍힌지 사흘이 되여 시체가 부식 되고 악취가 나는 나사로를 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았고 들었습니다.
소수는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보고도 듣고도 믿지 아나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로 믿지 않는 이유는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서 안 믿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실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참이냐 거짓이냐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따지는 것이 대 다수의
사람들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불의 한 것이라도 믿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참되고 진리라 할지라도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이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태도였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금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도 존재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의 사건을 두고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믿어서 생명의 향기가 나는 무리와 불신으로 사망의 향기가 나는 무리들로 나누입니다.
1)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자들입니다.
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저를 믿었으나
46절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하여 부활의 비전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영광스러운 사실을 목격하고도 그것을 바리새인들에게
고자질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 사람이 좋은 의도로 예수의 표적사건을 보고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악의 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수를 없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에게 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생명의 주를 문으로 보고 그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영광스러운 사건을 보고도 부활의 신앙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하는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가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사건은 믿는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요, 장차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을 보는 것이지만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 명예, 재물들을 송두리 채 잃어버릴 수 있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요, 그를 믿지 않는 자 들에게는 충격적인 불행한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47절 봉독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기사와 이적의 표적사건이 그들에게는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실을 원하고 진리를 원했다면 그가 정말로 하나님께로 오신 메시야인가를 진실로 알기를 원했다면 예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죄악 된 마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고민합니다. 하님이 너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세상적인 것을 놓으라면 어떻게 하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하면 어떻게 하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물질, 권력, 명예를 잃어버릴까봐 근심하는 우리들의 얄팍한 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빼앗아가려는 약탈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온전히 그분께 맡기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자랑하는 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부분이 자신들의 육신적인 삶의 안위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권력과 재물들입니다.
이 땅과 이 민족은 그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진정으로 고민하는 것은 자신들의 위지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 뭡니까?
“국민”, “ 서민경제” 이것은 그들의 진실이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을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으느냐에 있습니다.
서민들의 것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아첨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양의 모양을 하고 있으나 그들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49-50절 봉독
이들의 회의내용, 회의의 결정 모든 것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자아의 욕망이 있습니다.
대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정치적인 결단을 하는 데 무서운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1)이 사람은 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만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킨 엄청난 사건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정치적으로 머리만 굴리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와 같은 실수를 많이 합니다. 직분은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고 합니다. 자신은 모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우리의 삶 속에서는 정치적으로 머리만 굴리는 일들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이 사람의 말 속에는 신앙적인 것이 전혀 없습니다.
혼자 믿음이 고고한 척은 다 하면서 실제로는 신앙이 전혀 없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대제사장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고 상상인들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 속에는 신앙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출세와 권력,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3)과정은 생각지 않고 결과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 무고한 사람일 지라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죽여도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어떻게 이렇게 불의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4)가야바는 공리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겠다는 수학적인 계산입니다.
작은 희생으로 많은 이익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중대한 무제를 결정할 때 수학적인 경제 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이나 신앙 따위는 관심 밖에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론조사의 문제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다수의 의견이 진리다. 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조건 다수가 찬성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게 된 정치적인 이유가 뭡니까?
여론입니다. 민중들 다수가 찬성했기 때문에 가능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주님을 놓아주려 하였습니다. 그때 민중들은 여론의 힘을 빌려 예수를 석방시키려고 민중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 네가 예수를 놓아 주거냐 흉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줄 것인가, ” 물었을 때 민중들의 여론은 생각지도 않는 곳으로 흘러갔습니다.
다수의 의견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것이 진리고 예수는 불의 합니까?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교황청에 붙들려 갔습니다. 지둥설을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취소하고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지동설을 취소한다고 지구가 돌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사람의 말일지라도 그 사람의 말이 진리이고 다른 다수의 사람이 얼마든지 틀릴 수가 있습니다.
5)무엇이 우리에게 유익 하냐 만 생각 했습니다.
사람은 본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하나님과 영적으로 분리되면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였습니다.
종교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라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세상의 논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가 되여 서로 이용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속이는 일들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삶의 방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 합니다. 하나님께만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과 풍요로우심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 받습니다.
하나님의 부요와 풍요는 무한하기 때문에 사람에게서 무엇인가 유익을 구하려 하거나 사람에게서 무엇 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그 사람을 이용한다든지 그 사람을 속인다든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심에 참여하였으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익을 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항구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주고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마음껏 축복하실 것입니다.
결론)
자신의 육신적인 삶의 안위와, 권력과, 명예, 재물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영적이고 인격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적 생명이 내 안에 충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 될 수 없으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축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우리에게 가작 큰 적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자아”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앙으로 살아 갈 때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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