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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를 입는 방법 (엡6:10~17)

하나님아들 2024. 4. 25. 19:54

 

 전신갑주를 입는 방법 (엡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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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상본문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2. 기도

 

주님을 향한 제 마음이, 오늘이 어제보다 나은 것 같지 않아도

주님을 향한 제 여정이, 오히려 어제만도 못한 것 같이 보여도

주님을 향한 제 고백이, 삶으로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듯 해도

주님만이 저의 힘과 방패, 능력이십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3. 본문묵상

 

전신갑주 취하라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기도의 부탁과 그 이유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인편으로 사정을 전함, 두기고의 소개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끝인사, 축복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요약) 빛의 자녀로써 : 선한 싸움을 싸우라 / 마침말

 

 

4. 본문의 내용과 의미 살피기

 

바울이 비유한 전신갑주 즉 영적인 완전무장의 권면은 여러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첫째로, 적(enemy)이라 불리는 대상이 전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무 썰다가 팔 걷어붙이고 나와서 뎅겅 목을 벨 수 있는 쉬운 상대가 아닌 듯 하다.

둘째로, 다른 것들은 이 싸움의 승리를 위한 방법과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을 찌르고 물리칠 검이라면, 다른 것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칼이 되지 못한다.

셋째로, 이러한 갑주만이 전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방편이라는 것이다.

 

전신갑주 - 완전무장

 

1) 힘

군인의 기본은 체력과 전쟁수행능력이다. 포병은 포를 쏠 능력이 있어야 하고, 전투병은 백병전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대상과 싸워야 하기 때문에, 군인에게 신체적 능력은 필수요건이다.

군인들이 쉼없이 체력검정을 하고 개인적으로 체력단련을 위하여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하나님의 군사된 입장에서 성도들도 힘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 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이야기 한다.

"강해져라! 주님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위대한 능력 안에서"(엡6:10,niv)

 

주님 안에 있는 방법, 주님의 위대한 능력 안에 거하는 방법은 말씀을 펴고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 뿐이다(요17).

주님께 능력을 "받아오는" 방법은 없다. 위대하신 주님 안에 들어가 있을 때에야 신자는 그분의 능력을 경험한다.

우리는 친정집에 들어가(in) 좋은 것들을 자기 집으로 가져오는(take out) 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본향집에 들어가(in) 좋은 것들을 누리는(joy) 자들이다.

 

2) 싸움의 대상

땅 위의 전쟁은 대상이 인간 vs 인간이다.

범죄나 자연재해등을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범죄와의 전쟁은 결국 범죄자(인간)들과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고

자연과의 싸움은 자연의 거대한 힘으로부터 공생과 생존의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하여 복종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의 전쟁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혈과 육을 가진 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이

우리 전쟁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통치자들"이라는 단어는 대개 rulers로 번역하였고, KJV에서 principalities 라는 단어로 번역해 놓았다.

principalities라는 말에는 통치자, 군주(왕이 다스리는)의 의미와 함께 제 7계급의 천사를 뜻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천사들은 우리의 아군일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의 천사들과 싸운다는 것은 해석에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동급으로 나열된 자들을 문맥에 맞게 살펴보면,

어둠의 세상을 주관하는 자들에게 속한 권세와 통치자들이지 않을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즉,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나라에 반하는 모든 세력들과 그 추종세력들이라고 볼 수 있다.

 

3) 싸움의 이유

싸움의 목적은 당연히 승리이고, 정복이고, 통일이다.

무력으로가 아닌, 온건한 방법으로의 통일을 화합이라고 부르기는 한다.

그러나 두 세력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대편을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 간의 전쟁이 진행된다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이 두 나라 - 세상어둠의 권세와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 - 가 싸우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 세력이 추구하는 "가치"가 상반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기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상반되는 사상이 아니다.

세상이 워낙 오랜동안 두 사상을 대립관계로 놓았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라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사회주의도 만민의 복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자본주의도 만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선명하게 다른 노선을 개진해 나갔을 뿐, "인간을 위하여"라는 명제는 공통되다.

추구하는 가치(value)가 상반되거나 갈등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공중권세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추구하는 가치부터가 다르다.

공중권세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을 제일 큰 가치로 여긴다.

죄악을 먹고 마실 때 느끼는 쾌락과, 세상에서 여러가지 소유물들을 쟁취해 가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모든 것보다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추구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오는 평안과 기쁨, 희락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긴다.

 

목적은 같은데 방법이 다른 세상의 경우와 달리, 이 두 세력은 목적하는 바 부터가 다르며,

그 다름은 필연적으로 다른 한편의 멸망을 기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

전쟁 외에는 답이 없는 상태. 바로 그렇다.

 

4) 그러므로 전신갑주를 취하라

전쟁이 불가피한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 필수불가결인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서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완전무장을 하여야 한다.

전쟁의 승리와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

 

바울은 전쟁의 승리를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로,

개인의 생존을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표현했다.

 

악한 날은 어둠의 나라와 전쟁을 벌이는 날들이다.

전투가 지속되는 동안 군인으로서 계속 싸울 수 있기 위하여 전신갑주가 필요하다고 한다.

상대의 공격을 능히 방어하고, 상대를 능히 공격하기 위하여 - 대적하기 위하여 -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병사 개인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전투가 지속될수록, 수없이 날아드는 화살을 방패와 흉갑없이 막아내기란 불가능하다.

몸이 남보다 날래면 몇 번은 피할 수 있겠으나, 타잔같은 복장으로 장기전을 치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연적으로 언젠가는 고꾸라지고 만다. 화살을 피하다가 적장의 칼에 목이 잘릴 수도 있다.

 

전신갑주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성도 개개인은 하나님도 아니고 슈퍼히어로도 아니라는 점이다.

군사된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군대에 편입되었을 뿐이지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분이 제공하는 힘을 부여받았고, 그분이 제공하는 온갖 무기와 갑옷과 방어책과 공격도구들을 받았기에

비로소 싸울 수 있는 강력한 군사로 여김을 받는 것이다.

 

신자인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던 신앙의 힘과,

말씀과 복음과 칭의와 구속의 장구들을 벗겨버리면 우리는 한낱 커터칼에도 피를 흘리며 중상을 입을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힘과 의지와 희망만으로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5) 생명의 장비 - 투구와 흉갑 : 구속과 칭의

팔 하나 잘리거나 다리 하나 없어도 그것이 즉사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찔리는 것은 즉사를 의미한다.

바울이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모르나, 생명에 관계된 가장 중요한 두 장비인 투구와 흉갑(가슴막이)을 구원과 하나님의 의에 비유하였다.

즉,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구속과 칭의를 성도의 가장 중요한 생존요소, 생명의 요소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군사, 성도, 신자, 백성이 그 이름에 걸맞게 된 것은 모두 이 구속과 칭의의 은혜가 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군사가 장비를 지급받는 것처럼 사람이 죄사함과 의롭게 여김을 받은 이 사건은

사람의 안에서는 이러한 것이 나오지 않으며, 또한 신자에게는 이것이 필수적인 부분임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우리 죄사함과 속량 즉 구원과,

그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에 연합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처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이 칭의의 은혜없이는 신자도 없고 군사도 없고 성도도 없고 백성도 없다.

 

6) 진리의 허리띠

군사가 허리에 두르는 벨트는 허리를 보호할 뿐 아니라, 허리를 지지하는 역할도 한다.

군사가 휘두르는 창과 칼의 힘을 지지해 주고 좀 더 강력하게 해 주는 것은 이 허리힘에 있다.

같은 사람이라해도, 몸을 힘껏 뒤로 젖혔다가 날리는 주먹과 부동의 자세에서 뻗는 주먹은 힘에 큰 차이가 있다.

몸을 뒤로 젖힐 때 오는 반동은 힘을 배가시키지만, 그 힘을 힘답게 폭발시켜 주는 것은 힘의 중심을 잡고 있는 허리에 있다.

허리가 약하면 몸을 젖히지도 못한다.

 

진리는 하나님의 군사의 허리띠와 같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반격의 힘 - 창을 막아내는 방패의 든든함과 힘껏 창을 내미는 힘이 바로 이 허리에서 나온다.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와 주 되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마다,

(그곳이 설교단이든 가정집이든 친구이든 부모이든 아니면 회중이든)

진리가 아닌 것들 - 복음의 정수가 아닌 것들 - 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

 

예수 믿는 것은 윤리적인 인간 그 이상을 이야기하는데

예수 믿는 목적이 선하게 사는 것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거나,

예수 믿는 것은 이 땅에서 형통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데

예수 믿고 교회 잘 다니면 이 땅에서 기필코 부와 명예와 장수를 얻으리라고 설교한다던가,

예수 믿는 것은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인데

예수 믿는 것이 죽어서야 하나님 만나 거기서 호텔급 집에 고급 차를 타는 정도로 설명한다던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되는 것들이 아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유추하는 것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이심으로 또한 진리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여러가지 비유를 통하여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포도원의 주인과도 같고, 겨자씨 한알과도 같고, 누룩과도 같고...

그러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은 그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상상하고 유추한다.

예수님의 말씀보다 환상과 신비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들은 허리힘이 없다.

그들의 찌르는 검은 화려하고 강해 보이지만, 순간적이고 일시적일 뿐이다.

마치 디스크환자가 내지른 주먹처럼, 그걸 맞는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다.

어둠의 권세를 찌르고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구출해 내기에는 힘이 없다.

온라임게임의 마법칼처럼 그래픽효과는 화려하지만, 실제로 그 상태로는 애먼 몹 하나 잡지 못한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실들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진의를 알아간다는 것이 곧 병사된 우리의 허리힘이 된다는 것이다.

 

진리의 허리띠를 두르는 방법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가는 것이다.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군사된 우리의 허리는 더욱 단단히 동여져 간다.

"아버지여, 이들을 진리로써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17:17)"

 

7)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로 신을 신으라

어릴 때 이 말씀을 배우거나 이해하기로, 복음은 신발에 비유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늘 이 말씀을 아무 사심없이, 그리고 선행지식 없이 다시 읽어본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썼다.

 

"그리스도의 군사여, 신발을 신으라.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를 갖춰라"

 

복음 = 군화가 아니라, 복음은 우리가 군화를 신는 목적이어야 한다.

즉 우리가 가는 전쟁터, 접전지역은 복음을 선포하는 곳이어야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전쟁터의 접전지역에 도달하여 우리가 할 일이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니.

 

평화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휴전이나 정전협정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들이 전하는 평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의하여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화목케 되는 일이 가능해 졌음을 전하는 것이다.

 

묵상을 하며 점점 전쟁의 목적이 명확해 지는데,

그것은 전쟁이 단순한 상대세력의 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사들이 해야 할 일은 어쩌면 구출작전인지도 모른다.

접전지역에서 전해지는 평화의 복음은 그것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상대세력의 압박에서 자유케 하고 평안케 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오도록 이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이 전쟁을 이기셨고,

그의 군사된 우리가 하는 일은 이 전쟁이 시간적인 최후의 종지부를 찍기 전까지

저 나라에 속한 자들에게 평안의 복음을 전하여 이 나라로 최대한 많은 이들을 데려오는 것이다.

최후의 종지부가 찍히는 그날이 되면 그 나라의 임금과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이

실제로 괴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속한 그 나라의 임금은 이미 패하였고, 내가 전하는 것을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은 나의 나라의 임금과 화해하고 이 나라의 백성으로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서 이리로, 나와 함께 가십시다!"

 

8) 믿음의 방패로 불화살을 소멸한다

이미 전쟁에 패하였기 때문에, 어둠의 군사들은 우리의 앞에 없다. 이미 패하여 저멀리 가 있다.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세상임금에게 억눌린자와 갇힌 자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곳이 우리의 작전지역이다.

돈의 노예가 되고, 쾌락의 종이 되고, 혈육의 족쇄에 묶여 세상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가득한 곳이다.

그런데 여전히 이 지역이 전쟁지역인 것은, 패전하여 후퇴한 저 군사들이 여전히 무엇인가 쏘아대기 때문이다.

그림이 명확해 진다.

 

가만 생각하니, 바울은 악한 영이나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밀거나 창으로 찌르는 묘사를 단 한번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악한 영의 공격"에 대한 과장되어 보이는 묘사를 들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이 바울의 비유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것은 좀 위험하지 않은가.

 

막론하고, 지금 어둠의 군대가 쏘아대는 불화살이 날아온다.

그것을 막아낼 방패를 바울은 "믿음"이라고 한다.

 

믿음에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믿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상없이 믿는다는 것은 말 자체가 불가능하고, 이유없이 믿는 것은 맹신으로 정의된다.

다시 말하여, 진실한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증자인지 노자인지 가물가물한데, 중국에 이런 고사가 있다.

어느날 그의 어머니에게 한 사람이 와서 "당신 아들이 사람을 죽였소!"라고 말하였다.

모친은 "우리 아들같은 현인이 그럴 리가 없다"며 돌리던 물레를 계속 돌렸다.

이러한 일이 여러 사람에 걸쳐 몇 번 반복되자, 그 어머니는 끝내 물레를 버리고 담을 넘었다 한다.

반복되는 불화살에 방패가 무너진 격이다.

 

불화살을 막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소멸시켜 버리는 이 믿음의 방패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모르는데 무조건 따르는 맹신이 아니고,

실제로 그 대상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에 비롯되는 견고한 신뢰이다.

 

주위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러고 있고, 예전의 나도 그러했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어둠의 권세들이 쏘는 여러가지 불화살들이 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유형무형의 많은 괴로움들이 불화살처럼 우리의 삶을 파고든다.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그리고 많이, 혹은 더 깊이 알고 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러한 상황들을 겪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의 방패가 되지 못한다면,

어둠의 백성들에게 열심히 화평의 복음을 전하다가도 어느날 날아온

한 방의 불화살 - 우리의 인생에 다가온 하나의 비극 때문에 무너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것이 우리의 허리띠가 될 뿐 아니라 평안의 복음이 되며 또한 믿음의 방패가 된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이. 하나님의 말씀만이.

 

9)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군사의 유일한 공격무기인 칼이 된다.

이전까지 나는 이 말씀을 가지고 어둠의 세력 및 악한 영을 대적하는 방편으로서 성경을 인식하여 왔다.

그래서 성경구절들을 되뇌이며, 혹은 마음으로 의지하며 "악한 영들이 물러가기를" 외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 묵상을 해 나가며 깨닫는 것은,

우리가 가진 말씀의 검은 멀리서 불화살을 쏘아대는 적들의 심장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접전지역에 족쇄에 묶인 채 버려진 이 암흑의 백성들의 그 사슬을 끊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내게 이것은 전혀 새로운 그림,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생각이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보는 것 이외의 관점도 있을 수 있겠다"는 말은 할 수 있을지언정

"네가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미 승리한 전쟁. 공식적인 적국의 패전선언. 실제 소탕이 완료되기까지의 국지전.

적국의 궤멸이 실제가 되는 D-day가 오기전에 그 땅의 포로된 백성들을 찾아가는 군사들.

그들을 찾아가 그들의 발에 묶인 사슬을 복음과 말씀의 검으로 끊어주는 것이 군사들의 일이다.

행군하며 혹은 사슬을 끊어주는 동안에도 수시로 날아드는 불화살은 믿음의 방패로 막아내고.

그렇게 자신을 지키고 상대를 구출하며 승리의 왕이 적국을 멸망시키시기 전까지 싸우고 구출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5. 나에게 이 말씀은

 

그동안 영적인 전투라고 불리는 영역에서 왜 무력했는지 알 것 같다.

"승리한 전쟁"과 "여전한 싸움"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승리했다면, 왜 굳이 패전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탄의 세력에게 또 한번의 칼을 휘둘러야 하는가?

이미 머리가 짓이겨져 죽어가는 패장에게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저마다 한번씩 칼로 푹푹 찔러대는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군사란 말인가?

그래서 살점이라도 하나씩 베어가지고 나와야 그 수급을 가지고 크고 작은 상이라도 탄단 말인가?

 

그런 무의미한 싸움이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복음은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며, 눈먼자를 보게 하며,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한다.

복음은 그들을 그들의 억압과 고통에서 "풀어"준다. 그리고 생명의 나라로 옮겨준다.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은 강력한 검이 되어 그들의 사슬과 억압을 끊어주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들이 말씀으로 된 성령의 검을 지닌 이유다.

마귀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대적기도의 주문이 아니었던 셈이다.

적어도 주된(main) 목적은 아닌 셈이다.

 

우리의 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만큼 강력해 진다.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열심히 행군한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작전지역을 만나면,

날아오는 불화살을 믿음의 방패로 쳐내면서 복음과 말씀으로 적국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사슬을 끊어낸다.

끊기 싫다고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여전히 거기 있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사슬을 억지로 끊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목적은 그들의 사슬을 끊는 것에 있다.

 

불화살은 강력하다. 나를 태울 법도 하다. 구원의 투구와 의의 흉배는 내가 불타버려도 멀쩡히 남아있겠지만,

나는 재가 되어 없어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방패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구원과 칭의는 폐하여지지 않으나, 내 스스로 실족하여 무너지지 않기 위해 방패가 필요하다.

맹신이 아닌 믿음이 필요하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우리의 방패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만큼,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만큼 강력해 진다.

 

 

있는 힘껏 칼을 내리치고, 또한 있는 힘껏 날아드는 불화살을 막을 방패를 치켜들기 위하여,

우리의 허리에 힘껏 동여맨 허리띠 그리고 허리갑주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더 무슨 말을 할까.

 

우리의 허리띠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에겐 두 가지가 주어졌다. 은혜의 사건과 하나님의 말씀.

은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인한 하나님의 칭의를 뜻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든 호신 및 무장를 말한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가는 만큼 전쟁에서 많은 공로를 얻게 될 것이다.

말씀의 의미를 모르고, 말씀이 뜻하는 하나님의 뜻을 얕게 알수록 그의 검은 얇고 갸녀리며 힘이 없다.

검도 얇고, 방패도 부실하며, 신발도 허름하고, 허리띠도 가늘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누군가의 사슬을 내려친들, 금이나 가겠는가.

그런 사람이 아무리 방패를 높이 든들, 불화살을 막을 수 있겠는가.

아마 방패를 버리고 뒤로 뒤로 후퇴하기를 반복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아무리 멀리 가고자 한들, 거기가서 무엇을 전하겠는가.

 

투구와 흉갑이 있으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즉사야 면하겠지만, 어디 공을 세워볼 기회가 있겠는가.

살얼음판 걷듯이 전쟁터를 도망다니다가 결국엔 불화살을 맞고 타 버릴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으니, 선포하는 복음에 힘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으니, 조그만 시련에도 신앙을 잃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으니, 선교사로 나간들 열매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많은 것을 해내련만.

 

 

6. 기도

 

하나님, 저도 군사입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이 여전히 진군하시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는 당신의 뜻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받들어 저희도 진군합니다.

말씀이 곧 무기요 방패이며 우리의 힘이며 나아갈 원동력이 됩니다.

 

그동안 헛되이 허공을 대적한 적이 많았습니다.

방 구석에 대고 어둠의 영아 물러가라 외친 적도 있었습니다.

티브이를 노려보며 티브이의 영아 떠나라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감기만 들어도 무조건 악한 영의 역사라 여겼던 시절이 있습니다.

제자가 아니라, 무당처럼 살았던 시절이 제게도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당신이 누구신지 잘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촌극들이 제 인생에 너무나 즐비합니다.

 

그러니 제가, 아직 헤매이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제가 걸어온 길을 답습하는 이들이 있다면, 안타깝게 여기고 마음으로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소리치며 가르치지 말고, 그들과 진리가 무엇인지를 놓고 대화하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믿어보려 하지만 잘 안되는 사람들, 매일 죄악으로 실패하는 사람들,

그럼에도 신앙에의 갈망이 있는 세리와 창녀와 범죄자들과 빈촌의 사람들과 같이 앉아

예수님은 언제나 즐겁게 대화하셨습니다.

다만 스스로 의롭다하는 이들, 스스로 높다하는 이들을 꾸짖으셨을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저를 꾸짖기만 하셨다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결코 있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과 인내를 가지고 가르치시며 아버지의 말씀으로 계속 먹이시는 까닭에,

저는 점점 더 강건하여지고, 허리띠는 굵어지며, 검은 좀더 날카로워갑니다.

마침내 이 검이 강력한 힘이 되어 묶인 자들의 사슬을 힘있게 끊을 수 있는 그날까지

저를 날마다 지금처럼 더욱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I pray in Jesus name. Amen.

 

 

2013.4.8~13. Timothy Choe.